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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자님 뭐하세요-83화 (83/179)

제 83화

쓰레기 유선우

유선우는 소피아를 배웅한 뒤엔 곧장 집으로 향했다. 저녁이 되기 전까지 아이릴과 시간을 보내기 위함이었다.

헌터들에게도 오늘 훈련은 없다고 말해뒀다.

쉴 때는 확실히 쉬고, 팔팔해지면 더 굴러라.

그게 유선우의 지론이었다.

“선우, 크리스마스가 뭐죠?”

“아브나바 귀빠진 날이랑 비슷한 거.”

“아, 탄생절이군요.”

대수롭지 않게 말한 아이릴이 포테이토칩을 하나 집었다. 그리곤 자신의 허벅지에 누워 있는 유선우의 입에 넣어줬다.

고백 이후로 둘의 거리는 가까워졌다.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소파의 끝과 끝에 앉던 둘은 이젠 연인처럼 달라붙어 있게 되었다.

“근데 갑자기 생각난 건데.”

과자를 씹던 유선우가 넌지시 운을 뗐다.

“너 요즘 그거 안 하더라.”

“그거요?”

“무슨 의식 있잖아. 맨날 3시간씩은 꼭 하더니.”

유선우는 말하면서 한 자세를 떠올렸다. 양반다리를 한 채, 손으론 삼각형을 그리는 묘한 자세. 기독교로 치자면 기도와도 같은 의식이었다.

“무슨 소리예요? 제가 의식을 빼먹을 리가….”

아이릴은 부인하다 말고 숨을 삼켰다. 떠올려보니 유선우의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매일 아침 의식은 올리고 있으나 그게 전부였다. 요즘은 TV와 꽁냥꽁냥에 푹 빠져 신앙을 소홀히 하고 있었다.

“어, 어쩌다가 제가 이렇게 타락한 거죠?”

아이릴은 자신의 불경함에 절망했다. 성녀라는 자가 유희에 탐닉해 일과마저 저버릴 줄이야. 그녀의 인생에서 이만한 충격은 몇 없었다.

몸을 부들부들 떨기까지 해 유선우는 입맛을 다셨다. 아무래도 건드릴 화제가 아닌 모양이었다. 그는 수습하고자 입을 털었다.

“타락은 무슨. 좀 쉴 수도 있는 거지.”

“신앙에 쉼은 없습니다. 있어서는 안 된다고요. 저는 쓰레기예요. 아아…….”

자책한 아이릴은 공허한 눈동자로 위를 올려다봤다. 천장이 있을 뿐이었지만, 그녀는 본인의 죄악과 마주하고 있었다.

“아브나바가 뭐 꾸짖기라도 했어?”

“그분께선 꾸짖지 않으십니다. 신심이란 가슴 속에서 자발적으로 나오는 것이며, 절대로 강제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제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슬퍼하셨을지, 아아앗…!”

“슬퍼하진 않았을 거 같은데…….”

유선우가 떨떠름하게 부정했다. 하지만 아이릴은 혼이 빠져 고개를 설레설레 가로저었다.

“아니요. 전 알 수 있습니다. 밤잠도 못 이루며 안타까워하셨겠죠. 눈물을 흘리셨을 거라고요!”

“진짜 사이비 같네.”

아이릴이 유선우를 노려봤다. 그녀는 TV를 통해 현대의 지식을 상당히 습득한 상태였다. 사이비라는 말이 뜻하는바 정도는 알고 있었다.

“뭐, 뭐라고요? 지금 말 다 했… 읍!”

“오이구. 설치지 말고 가만히 있어.”

유선우가 자세를 확 바꿔 아이릴을 끌어안았다. 애정을 쏟아주면 화는 누그러지기 마련. 아이릴은 특히 더했다.

“이럴 때가 아닌데….”

“싫으면 말던가.”

“싫은 건 아니고요.”

“그래, 그래.”

여느 때와 다름없는 시간이었다.

***

저녁이 되자 유선우는 기사를 불러 회사로 향했다. 차세정을 데리러 가기 위함이었다. 집과 가까웠기에 5분도 지나지 않아 주차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유선우는 차세정에게 메시지를 보내곤 좌석에 반쯤 몸을 뉘었다.

‘진짜 쓰레기 같긴 하네.’

크리스마스이브에 세 여자를 만난다니. 스스로 보기에도 개새끼였다. 저쪽에선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었는데, 아무래도 현대라 마음이 불편했다.

‘근데 뭐 어떡해.’

결국은 이게 유선우라는 인간이었다. 이로 인해 관계가 파탄이 날 수도 있을 터. 하지만 결정을 번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무슨 소리 들으려나.’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현대에서 살아온 차세정이 이를 받아들일지 어떨지.

그녀가 경멸해 떠난다면 제법 울적해질 게 분명했다. 물론 붙잡기는 하겠지만 결론을 내리는 건 차세정이었다.

이내 퇴근한 차세정이 다가와 차 문을 열었다. 그녀는 오들오들 떨면서 유선우에게 달라붙어 앉았다.

“하, 추워.”

“코 빨간 거 봐. 핫팩 줘?”

유선우는 능력 탓에 추위를 타지 않았으나 차에 서너 개쯤은 있었다. 준비성이 철저한 운전기사가 매번 챙기고 다니는 것이었다.

“됐어. 그냥 가만히 있어.”

차세정은 코를 훌쩍이며 거절했다. 그러더니 유선우가 입은 코트 안으로 양팔을 집어넣어 꼭 껴안았다. 그제야 그녀의 얼굴이 느슨하게 풀어졌다.

“하아…. 살겠다. 잠깐만 안고 있을게.”

“맘대로 해.”

“으, 머리 만지지 마. 정전기 올라.”

날씨와는 정반대로 뜨뜻한 기류가 흘렀다.

운전기사, 윤진성은 룸미러로 뒷좌석을 엿보다가 조용히 시선을 거뒀다. 옆구리가 시려 차마 보기가 힘들었다.

‘내년에는 소개팅이라도 나가야겠어.’

그는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

차가 멈춘 곳은 서울의 세련된 호텔 앞이었다. 유선우는 내리기 전에 기사에게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보너스 두둑하게 챙겨드릴게요.”

“괜찮습니다. 이게 제 일인데요.”

“보너스 주는 것도 고용주 일이죠.”

정확히는 김정수가 고용주이지만, 이브에 고생한 몫은 주고 싶었다. 게다가 체크아웃할 때도 와줘야 할 테니까.

“내일도 부탁드릴게요. 가족분께는 죄송하지만.”

“혼자 살아서 어차피 한가합니다. 하하.”

“…아, 네. 힘내세요.”

유선우는 격려의 말을 건네준 뒤 차에서 내렸다. 날이 날이라 그런지 주변은 붐비고 있었다.

본래라면 예약에 골머리를 앓아야 했을 터. 하지만 유선우는 그런 수고를 필요가 없었다.

‘인맥이 최고야.’

스스로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김정수가 편의를 봐줬다. 1박에 수천만 원이 나가는 스위트룸은 죄다 예약이 차 있었으나, 꿩 대신 닭이라. 충분히 호화로운 객실을 구할 수 있었다.

“…내가 있을 데가 아닌 거 같아.”

차세정이 출입하는 인물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아무리 봐도 주변에 명품을 두르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서민으로 살아온 그녀에게 이러한 장소는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으로 유선우는 태연할 따름이었다.

“못 있을 게 뭐야. 다 똑같은 사람인데.”

“사람이 어떻게 똑같아.”

“복잡한 얘기 하지 말고. 들어가자.”

유선우에게 있어 호화로운 건물은 별 가치가 없었다. 그는 번쩍거리는 황금의 성에서도 묵어봤고, 드워프의 궁전에서도 생활해봤다. 현대식 호텔에 기죽기엔 새삼스러웠다.

유선우는 차세정을 이끌고 객실로 향했다. 도착한 뒤에, 차세정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영화에서만 보던 건데.”

객실의 창밖으로 서울의 야경이 훤히 보였다. 차세정은 아무래도 현실처럼 느껴지지를 않았다.

남자친구가 자수성가해 이런 방마저 간단하게 빌릴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니. 그녀는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이 부족하게만 여겨졌다.

‘아니, 그러니까 열심히 해야지.’

주눅만 들어 있는 건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 차세정이 출세에 대한 결심을 다지고 있을 때, 유선우가 말했다.

“일단 밥부터 먹자. 할 말도 있고.”

담담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미안함과 불안이 묻어 있었다.

호텔의 라운지에는 제법 이용자가 많았다. 다만 대다수가 조용하게 음식과 분위기를 즐겼기에 어수선하진 않았다.

그중에서도 유달리 적막이 내려앉아 있는 테이블이 하나 있었다. 다름 아닌 유선우와 차세정이 이용 중인 테이블이었다.

“…….”

차세정은 스테이크를 작게 썰어 한 조각 입에 넣었다. 입안을 적시는 육즙은 확실히 일품이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맛에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할 말이라니.’

아까 들었던 말이 차세정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고급 호텔, 크리스마스 이브, 식사 중에 할 말.

눈치가 빠른 그녀는 예삿일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었다.

‘프러포즈인가?’

그밖에는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하지만 너무 급작스러워 확신하기가 힘들었다.

차세정은 유선우의 상태를 살폈다. 답지도 않게 음식을 깨작거리고,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다. 상당히 긴장한 모양새다. 마치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불안해하는 모습을 본 차세정의 사고가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내가 유선우랑 결혼…….’

결혼. 차세정이 종종 장난처럼 내뱉던 말이었다. 장난 반, 진심 반으로. 막연한 단어이긴 했지만, 그녀는 상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상견례는 어떻게 할까.

식은 언제, 어디에서 올릴까.

아이는 몇 명이 좋을까.

상상이 꼬리에 불붙은 말처럼 달려갔다. 비약이라고는 생각했으나, 입꼬리가 들썩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차세정은 애써 웃음을 억누르고 정적을 깼다.

“유선우. 할 말이 뭔데?”

“어, 음….”

훅 들어오는 질문에 유선우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서두를 어떻게 꺼낼지 고민하고 있었다. 대놓고 양다리 선언을 하려는 상황이니, 말이 쉽게 나올 리가 만무했다.

꼭 오늘 밝혀야 하나 싶기도 했다. 이 좋은 날에 분위기를 깨는 발언을 해야만 하는가.

애초에 소피아와의 관계는 아직 확실하지도 않았다. 아이릴은 지금으로선 밖으로 나올 수도 없는 상태였고.

유선우의 생각은 갈수록 보류하자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는 가식적인 미소와 함께, 말을 꺼내려 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러나 그 말은 목구멍에 틀어박혀 나오질 않았다.

“뭐냐니까?”

그리 묻는 차세정의 시선에 담긴 감정이 너무도 선명했다. 따스하고, 깊은 애정이었다.

그걸 보니 유선우는 어영부영 넘기려던 자신이 한심해졌다. 어떻게 되든 부딪혀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 이것도 늦은 거지.’

유선우는 숨을 크게 토해내며 결심을 다잡았다. 그는 입가에서 웃음을 싹 지운 채로 차세정과 똑바로 눈을 마주쳤다.

“세정아. 진지하게 들어.”

“난 맨날 진지해.”

“나, 다른 여자 만나고 있다.”

청천벽력같은 말에 차세정이 행동을 멈췄다. 스테이크를 자르던 손과 숨을 쉬던 코. 그리고 깜빡이던 눈마저도 굳은 듯이 정지했다. 심장의 고동만이 급속도로 빨라질 따름이었다.

짧은 침묵 끝에, 차세정이 숨을 가늘게 떨었다.

“지금 뭐라고 했어?”

“다른 사람 만나고 있다고.”

귀의 착각이 아니었다. 차세정은 눈가를 파들파들 떨며 자기 허벅지를 꼬집었다.

바지의 질감도, 통증도 생생했다. 그녀는 혼란스러운 정신으로 짧은 질문을 뱉었다.

“…왜?”

“내가 좋다더라. 나도 싫진 않았고. 그냥 마음이 맞았어.”

“그럼 나는. 나는 싫어졌어? 안 맞는 거 같아? 혹시 내가 잘못한 거라도 있어?”

“그럼 여기까지 안 왔겠지. 잘못한 것도 나야.”

그 말대로 유선우의 목소리엔 자책과 더불어 애정이 묻어 있었다. 그게 차세정을 더욱 혼란케 했다.

“그럼 나한테 이런 말 하는 이유가 뭔데. 헤어지자는 거 아니야?”

“아니. 내가 봐도 뻔뻔하긴 한데, 다 놓치기가 싫어.”

“지금 이게 무슨….”

“이해하기 힘든 거 알아. 내가 개쓰레기인 것도 알고.”

차세정은 어처구니가 없어 대꾸조차 하지 못했다. 무어라 말하는 대신에 유선우의 눈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짓궂은 장난이 아닐까 싶어서.

그 시선에 유선우는 목이 탔다. 물로 목을 축여봐도 갈증이 가시지 않았다.

말 없는 진위의 파악이 한동안 이어졌다.

십여 초가 흐르고, 차세정이 확인 차 물었다.

“그러니까, 양다리 걸치는 걸 이해해달라고?”

“솔직히 양다리로 끝나진 않을 거 같아.”

“별 미친…. 진심이야?”

“진심이야. 그래도 너한테 소홀히 하진 않을 거고, 그 사람이랑 사이좋게 지내라는 말도 안 할 거야. 네가 원하면 아예 말도 안 꺼낼게. 천천히 생각해줬으면 좋겠다.”

유선우의 태도는 한결같았다. 그제야 차세정은 유선우의 결심이 확고함을 알 수 있었다.

그걸 인지하고 나니, 그녀의 눈가에 물기가 차올랐다.

“생각은 개뿔. 개소리하지 마.”

차세정의 상식으론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의 연인이 다른 여자와 사랑을 나누는 것을 용인하라니. 나사가 수십 개 빠진 미친년이 아닌 이상 그런 일은 불가능했다.

“난 이해 절대 못 해. 다른 년 침 묻은 입술 빨기도 싫고, 다른 년 냄새도 맡기 싫어.”

“나도 알아. 나 같아도 그럴 거고.”

“알면서 왜 그딴…!”

차세정은 욕지거리를 한바탕 내뱉고 싶었다. 그러나 그래 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유선우의 결정은 욕설 따위를 계기로 번복되지 않을 테니까. 그녀는 결국 입술을 질끈 깨문 채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먼저 갈게. 기껏 방 잡았는데 미안.”

울먹이는 목소리. 차세정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를 피했다. 유선우는 붙잡지 않고 그녀의 등을 바라볼 따름이었다.

‘잡아도 지금은 아니지.’

지금은 머리를 식혀야 할 때. 억지로 붙들어봤자 정나미가 떨어질 뿐이었다.

필사적으로 설득하면 마지못해 받아들일 가능성도 없지는 않을 터. 하지만 그런 관계는 얼마 지나지도 않아 파탄이 날 게 분명했다.

홀로 남은 유선우는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유선우 개쓰레기 새끼….’

***

크리스마스가 지나, 다시금 평일이 찾아왔다.

유선우는 필사적으로 차세정에게 말을 붙이려 했다. 그러나 회사에서는 접근할 기회를 잡는 게 어려웠다. 자칫했다가 이상한 소문이라도 돌면 차세정만 힘들어질 테니까.

점심시간을 틈타 겨우 다가가도 소득은 없었다. 서로 양보는 없었고, 대화는 차세정이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런 일이 사흘이나 반복되었다.

하루가 더 지나 찾아온 12월 29일의 토요일.

유선우는 오늘, 협회에 들러 마나 수치를 검사받을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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