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2화
변화
훈련이 끝난 후, 박아연은 줄곧 멍하니 있었다. 혹독한 훈련으로 인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몸이 힘들기도 했지만, 정신적으로 복잡했다.
‘난 여태 뭘 했던 걸까.’
박아연은 유선우에게 징징댔던 게 창피하기까지 했다. 오늘 한 훈련은 그녀가 여태 해왔던 것과는 천양지차였다. 그로 인해 드는 감정은 자괴감뿐만은 아니었다.
‘무서워.’
두려움에 등골이 오싹했다. 자신이 발을 디딘 세상이 어떤 곳인지. 그게 이제야 뼈저리게 느껴졌다.
3년간 헌터 일을 하면서 사선을 몇 번이나 넘어왔다고 생각했거늘. 지금 보면 그건 역경의 축에도 끼지 못하는 것이었다.
“뭐해요. 퇴근 안 하세요?”
“네, 네?”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박아연은 흠칫 놀랐다. 그녀가 고개를 돌린 곳에는 유선우가 서 있었다.
“힘들었나 봐요? 궁상떨고 있는 거 보니까.”
“…궁상이요. 그렇긴 하네. 선우 씨는 퇴근 안 해요?”
“전 원래 제 맘대로 출퇴근하고요.”
박아연이 힘없이 웃었다. 길쭉한 의자에 앉아 있던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세정 씨랑 같이 안 가요?”
“환영식 한다더라고요.”
“걱정은 안 돼요? 요즘 바깥 흉흉하잖아요.”
“물어보니까 회사에서 한다던데요. 다행이죠.”
유선우는 차세정과의 전화를 떠올리며 말했다. 오늘 차세정은 아예 회사에서 묵는다고 했었다.
‘우리 회사긴 해도 참 신기해.’
하기야 사무실 환경이 워낙 좋으니 나쁘지는 않을 터다. 야밤에 위험한 동네를 돌아다니는 것보단 훨씬 낫지.
“어쨌든 그렇게 됐으니까 퇴근합시다.”
“다른 사람들은….”
“소고기 먹으러 간다던데, 전 빠졌어요. 집 가서 아이릴 밥 챙겨줘야 하거든요. 어지간해선 같이 먹기로 해서.”
아이릴이 징징댄 건 아니었다. 다만 유선우는 자기가 먹지도 않을 음식을 딱 1인분만 차린다는 게 귀찮았다. 차라리 한꺼번에 만들어 같이 먹는 편이 생산적이었다.
“둘이 사이 되게 좋나 보네.”
“최근에 좀 좋아졌죠.”
“저기, 선우 씨.”
“네?”
박아연은 잠시간 말을 주저했다. 이내 그녀가 유선우를 똑바로 응시했다.
“저 오늘 좀 꼴사나웠죠?”
“아뇨. 그건 아니고.”
유선우가 심드렁하게 부정했다. 박아연은 내심 놀랐다. 이러한 격려를 해줄 성격은 아니라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실제로 유선우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많이 꼴사나웠죠. 요즘 편하게 살았나 싶더라고요. 그러면서 재능 타령했던 게 어이없기도 했고.”
“…그, 그렇죠.”
박아연은 어색하게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그러니까 앞으로 정신 차리세요. 약해서 손해 보는 건 본인이니까. 전에 박아연 씨가 그랬었죠? 헌터는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그러니 안 죽을 노력을 해야죠.”
“안 죽을 노력….”
“좀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어요. 몇 번 죽을 뻔하고 해야 절박해지는 거라서.”
“아니요, 저도 알 것 같아요.”
크게 와닿지는 않았지만 박아연도 어느 정도는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녀도 떠올려보면 몇몇 위기를 겪어왔었다.
유선우와 처음에 던전에 갔을 때도 죽게 되리라 생각했었고. 또 아이릴을 봤을 때도 그러했다.
전부 오해와 착각이긴 했으나 그때의 절망감은 아직 남아 있었다. 그게 절박함의 바탕이 되어줄 터였다.
박아연이 고개를 끄덕이고 화사하게 웃었다.
“고마워요. 선우 씨. 내일도 잘 부탁할게요.”
“그럼 슬슬 퇴근합시다. 저 기사님 안 불렀으니까 차 태워줘요.”
“어라. 걸어서 10분도 안 걸리지 않아요?”
“5분 정도요.”
“근데 차는 왜 타겠대.”
“걷기 귀찮아서요.”
***
협회장의 잠적설은 하루하루 뜨거워졌다.
김한성은 협회에 나타나기는커녕 자택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연락도 닿지 않았기에, 정부에서는 결국 칼을 빼 들었다.
공식적으로 김한성의 협회장 지위 박탈을 발표한 것. 12월 21일의 금요일에 벌어진 일이었다.
“막상 이렇게 되니까 신기하네. 탄핵 투표 같은 건 안 해요?”
“알아보니 법률이 확실하게 제정되어 있진 않다더군요. 애초에 임기도 불확실했으니 이렇게 되어도 놀랄 건 없죠. 협회장 없이 몇 달이나 날려 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유선우는 김정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탄핵 투표까지 기다렸다간 몇 개월이 소모될지 알 수가 없다.
협회가 제대로 돌아가지 못하는 기간이 길어지면 여론만 나빠질 따름이다. 재빠르게 협회장의 공석을 채우는 게 관건.
그리고 선거는 내년 1월 13일로 예정되었다.
“무엇보다 이미 청원에 참여한 수만 300만이 넘었습니다.”
“300만이요? 그거 시작한 지 1주일도 안 되지 않았나.”
“그 정도로 대중의 관심이 쏠려 있다는 거죠.”
김정수가 커피를 홀짝였다. 그는 씁쓸한 맛을 느끼며 김한성을 떠올렸다.
‘이렇게 될 줄은 누구도 몰랐을 테지.’
김한성은 이전까지만 해도 온갖 던전을 드나들며 애쓰던 위인이었다. 그런데 온갖 삽질을 거듭한 끝에 제 업적에 먹칠해버릴 줄은.
이대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역사에는 썩 좋지 못한 방향으로 기록될 터였다.
‘어차피 자업자득이다만.’
딱한 건 아주 잠시뿐이었다. 연민이 사라진 자리에는 한심하다는 감상만이 남았다.
“저희에겐 앞으로가 관건이겠군요.”
“어디서 은근슬쩍 저희예요? 알아서 하셔야죠. 못 도와드릴 것도 없긴 한데, 좋은 소리는 안 나올걸요.”
“하하. 알고 있습니다.”
김정수가 농담조로 말했다. 그는 이번 선거에 확실한 자신이 있었다.
애초에 청일은 대형 클랜 중에서도 이미지로는 독보적인 위치를 자랑한다. 게다가 유선우의 활약까지 더해졌으니. 어지간한 등신짓을 하지 않는 이상은 당선이 확실시되는 상황이다.
“때아닌 선거철이네요. 조용할 날이 없네.”
“거의 다 유선우 씨가 엮여 있다는 게 신기하기까지 합니다.”
“저도 그래요.”
유선우는 5년 전의 자신을 회상했다.
집이 조금 잘살고, 이런저런 일에 재능이 넘칠 뿐이던 고등학생 BJ. 그랬던 자신이 이렇게까지 사회적으로 성공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돈도 썩어 넘치고.’
잔고는 이미 200억을 훌쩍 넘겼다.
명성 덕분에 보석 판매에 프리미엄이 잔뜩 붙었고, 뮤튜브 수익도 적지 않았다. 후원금에 광고료까지 다 치면 절로 꺼억, 하는 소리가 나왔다.
성공을 거머쥔 유선우에게 남은 목표는 둘뿐.
지구의 안정화와 본인의 무를 갈고닦는 것.
유선우가 집중하기로 마음먹은 건 후자였다. 아이릴도 있으니 이전과 같은 혹독한 훈련을 할 수 있을 터였다.
그를 위해서라도 김정수가 하루빨리 협회장의 자리를 차지해야만 했다. 그래야 감시당하고 있다는 변이 능력자를 빼돌려서, 아이릴을 바깥까지 데리고 나올 수 있게 될 테니까.
‘기대되네.’
앞으로 얻게 될 성취에 가슴이 설레었다. 그가 향상심에 불타오르고 있을 때였다.
“그러고 보니 요즘은 또 조용해졌다 하더군요.”
“뭐가요?”
“전에 말씀드렸던 살인사건 말입니다. 그때 이후로 얼마 지나진 않았습니다만, 소식이 뚝 끊겼습니다.”
“…그래요?”
“아예 범행 지역을 옮겼는지도 모를 일이죠.”
유선우는 턱을 매만지며 사색에 잠겼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불길함이 목덜미를 간질였다. 하지만 아무리 고민을 거듭해도 짚이는 바는 없었다.
“그럼 저희 부모님 경호 좀 부탁드려도 되나요?”
“경호요, 음.”
김정수는 답지도 않게 머쓱한 소리를 냈다. 그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미 전부터 경호 인원을 붙여뒀습니다. 물론 사생활을 침해하고 있진 않고요.”
“어, 처음 듣는데.”
“죄송합니다. 혹시 불쾌해하실까 싶었는데, 어쨌든 필요한 일이었으니까요.”
“불쾌하긴요. 오히려 말 안 해주신 게 더 섭섭한데.”
유선우가 하여튼, 하고 말을 이었다.
“확실하게 부탁드릴게요.”
“지금도 A급만 7명 붙어 있습니다. 걱정은 안 하셔도 될 겁니다.”
장담하는 말에 유선우는 허탈한 숨을 흘렸다. 국내에 300명도 없다는 A급 헌터가 7명이라니. 확실히 호화로운 호위이기는 했다.
“감사합니다. 좀 안심되네요.”
걱정을 덜어낸 유선우가 가볍게 미소지었다. 남은 건 유선혜인데, 딱히 염려할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방을 구하기가 귀찮다며 아예 사무실에서 살고 있었다.
‘이거면 됐어.’
다행히도 전부 잘 풀리고 있었다.
앞날이 불안해질 정도로.
***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
유선우는 먼저 소피아와의 만남을 가졌다.
본래는 평일이니 회사에 나갈 셈이었다. 하지만 뜻밖의 소식을 들은 탓에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다름 아닌 소피아의 출국 소식이었다.
“미리 말해주지 그랬어요.”
“아, 혹시 바빴어요?”
“그런 건 아닌데…. 오늘인 줄 알았으면 시간 더 냈죠.”
여러모로 엮여왔기 때문인지 아무래도 거리감이 가까웠다. 아쉽다는 어조에 소피아가 생글거렸다.
“매번 철벽만 치더니. 이러니까 또 신선하네.”
“나름 친해졌으니까요.”
유선우는 빠르게 마음을 정리하곤 마주 웃었다. 그는 이런 일에 있어 질질 끄는 타입은 아니었다.
“다음엔 선우가 미국으로 와요. 몸만 와도 괜찮아. 우리 집에서 재워줄게.”
“생각해보고요.”
“제발 생각만 하지는 말고요.”
소피아가 짐짓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가 발을 내디뎌 유선우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진짜 데려가고 싶은데. 안 되겠죠?”
“알면서 왜 묻는대.”
“그럼 나 한 번만 안아줘요.”
“참나.”
유선우는 어처구니없어하면서도 소피아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그대로 끌어당기자 샴푸 냄새와 온기가 느껴졌다.
소피아는 지척에서 유선우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한동안은 보지 못할 얼굴이었다. 헌터 일 외에도 테일러 집안 장녀로서의 책무를 다해야 하니까.
한국 체류 기간이 길어진 만큼, 일은 산더미만큼 쌓여 있었다. 아마 2개월쯤은 시간을 내기 힘들지 않을까.
생각이 미치니 순식간에 울적해졌다. 그러니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눈 감아요.”
유선우가 대꾸하기 전에, 소피아가 입술을 들이밀었다. 유선우는 잠시간 당황하다가 순순히 눈을 감았다. 지금의 그는 소피아의 마음을 받아들이는 게 어렵지 않았다.
‘아이릴 때문에 그런가.’
자신에게 솔직해지면 될 따름이었다. 소피아는 매력적인 여성이었고, 차세정이나 아이릴만큼 짙은 호감을 보내오고 있었다. 거부할 이유는 하등 없었다.
소리 없이 입술이 맞닿았다.
병실에서의 입맞춤과는 많은 면에서 달랐다.
입술의 감촉은 촉촉해 생기가 넘쳤고, 숨결은 달면서도 끈적했다.
“하아.”
길고 긴 입맞춤 끝에 소피아가 얼굴을 떼어냈다. 그녀는 아쉽다는 양 새가 쪼듯 입술을 한 번 맞댔다. 그제야 만족했는지 화사하게 눈웃음을 지었다.
“고마워요. 안 피해줘서.”
“돌아가서 천천히 생각해봐요. 다시 만날 때도 지금 같으면 저도 진지하게 생각할 테니까.”
“잠깐만요. 진짜 어색한데. 혹시 여자친구랑 잘 안 돼요?”
소피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는 자신이 누군가의 대용품이 되는 건 사양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유선우의 태도는 담담했다.
“잘만 지내고 있는데요.”
“…그럼 대놓고 양다리 걸치겠다는 건가.”
“그렇게 되겠네요. 어쩌겠어요, 제가 잘난걸.”
유선우가 농담조로 말했다. 어조는 가벼웠지만, 소피아는 그가 진심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듣고 나니까 또 복잡해지네.”
“그러니까 천천히 생각해보라고 했잖아요.”
“…알았어요.”
소피아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짜게 식은 눈초리로 유선우를 바라보다가 결국 피식 웃었다.
“근데 달라지진 않을 거예요. 선우 같은 사람, 앞으로 절대 못 만날 거 같아.”
“너무 당연한 소린데. 그런 사람 있으면 제가 더 보고 싶은데요.”
“저 같은 여자도 없겠지만요.”
둘이 마주 웃었다. 유선우는 소피아를 바라보면서도 머릿속으론 깊이 걱정하기 시작했다.
‘차세정한텐 어떻게 말한대.’
스스로 선택한 길이라지만 아무리 봐도 가시밭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