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9화
고백
사실 유선우는 볼에 감촉이 느껴졌을 때부터 잠에서 깨어 있었다. 후다닥 달아나는 소리까지 들렸으니. 감각이 예민한 그가 깨지 않을 리가 없었다.
‘어색해질까 봐 가만히 있었더니. 이거 범죄잖아.’
두말할 것도 없이 강제추행이다. 지금 눈을 뜬다면 그만두기는 하겠지만, 문제는 앞으로의 관계. 자칫해서 아이릴이 가출이라도 하면 심히 곤란해진다.
‘아니, 가만히 있어도 문젠데.’
강렬한 예감이 들었다. 한 번 용납하면 이후로도 몇 번이고 같은 상황이 이어지리라는 예감.
점점 도를 넘어서 엄한 행위를 하게 될 가능성도 농후하다. 그렇게 되면 아이릴뿐만 아니라 자신도 멈출 수 없어진다.
‘어쩔 수 없네.’
가정의 기강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결심한 유선우가 눈꺼풀을 열었을 때,
폭.
“흑, 흐윽….”
입술이 아닌 가슴팍에 무게가 앉았다. 아이릴이 추행을 포기하고 유선우의 흉부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녀는 방금의 텐션을 잃은 채 서럽게 훌쩍거렸다.
“야, 야? 왜 이래?”
“미안해요. 진짜. 내가 미친년이에요. 흑!”
“아니, 갑자기 웬.”
자는 척을 그만둔 유선우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로서는 도저히 아이릴의 심경변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변태 짓이나 하고. 콱 죽어버리고 싶어….”
“너무 극단적으로 생각하지 말자. 뚝 해. 뚝!”
“나쁜 년. 발랑 까진 년! 흐어어엉…….”
꺼이꺼이 울고 자빠졌다. 유선우는 머리를 토닥여주면서 멀거니 천장만 올려다봤다. 황당함 가득한 눈빛이었다.
‘지랄 났네.’
***
아이릴은 십여 분을 내내 울었다. 그제야 진정한 그녀는 자신이 벌인 악행과 속마음을 토로했다.
“그러니까… 아브나바 때문에 변태 짓을 해버렸는데. 자괴감 들어서 도중에 그만뒀다?”
“제, 제가 언제 그렇게 말했어요. 아브나바 님 때문이 아니고 그냥… 그, 처음이다 보니 인상적이었을 뿐이에요.”
“그게 걔 때문이지 뭐야.”
유선우가 심드렁하게 턱을 괴었다. 이해하기 힘든 설명도 아니었다.
‘하기야 자괴감도 들겠지.’
아이릴이 누구인가. 대륙 유일 종교의 성녀다. 무력적으로는 대륙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강자이며, 젊기까지 하니 팬층도 어마어마하다.
그런 대단한 사람이 음심을 못 이겨서 잠든 남자를 추행하다니.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면 서럽고 후회될 수밖에 없었을 거다.
“미안해요. 진짜.”
“나한테 직접적으로 한 건 별거 없잖아.”
“볼에 뽀, 뽀뽀했는데요?”
“그게 인사인 나라도 있어.”
“…그런 문란한 문화가 있다고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다. 유선우로선 아이릴의 정신 상태를 믿을 수 없었다. 아브나바는 신도 간의 이성 관계를 제한하기는커녕 장려하는 편인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유선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아이릴이 시무룩하게 말했다.
“어쨌든 우리… 떨어져 지내야 할 것 같아요.”
“넌 TV랑 좀 떨어져 지내야겠다. 드라마 찍니?”
“농담 아니에요. 내가 날 못 믿겠다고요. 안 된다고 생각은 하는데 자꾸 이렇게 돼버려.”
“중증이구만. 하여간 아브나바 이 새끼….”
“아브나바 님 때문이 아니에요. 그냥 제가….”
아이릴이 말을 흐렸다. 그녀는 뒷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였다.
그러기를 한참이 지나,
“제가 못 참겠어서. 제가 당신을 좋아하니까.”
오래간 담아뒀던 말을 꺼냈다. 고백한 아이릴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가 평소에 하던 망상과는 전혀 다른 시추에이션. 어쩌다 이렇게 됐는진 모르겠으나, 결국은 말해버렸다.
대답은 어떨까. 아무래도 당황하겠지. 유선우와의 관계는 이전부터 그리 훈훈하진 않았다. 오히려 종종 쌈박질하고 서로의 뺨을 때리던 사이였다.
그뿐만 아니라 아이릴은 굉장히 연기에 능하고, 마음을 잘 숨기는 사람이었다. 본인이 생각하기에는 그랬다. 그러니까 유선우는 절대로 몰랐을…….
“알아. 모르는 게 등신이지.”
“네?”
“네는 뭔 네야. 안다니까?”
“……?”
아이릴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어졌다.
“언제부터?”
“글쎄다. 2년은 넘었겠지?”
“알면서… 자기 좋다는 사람을 그렇게 개 패듯이 팬 건가요?”
“말은 바로 하자? 누가 들으면 내가 일방적으로 때린 줄 알겠어.”
“그, 그렇네요. 어폐가 있네. 인정해요.”
아득바득 우기면서 반박하진 않았다. 당시의 일을 들춰서 좋을 게 없다. 젊음이 과했던 시기다.
큼큼. 작게 헛기침한 아이릴은 유선우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가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물었다.
“그러면… 당신은요? 날 어떻게 생각하죠?”
“글쎄다. 싫지는 않아.”
“확실하게 말해줬으면 좋겠어요. 전 가볍거나 어중간한 관계 같은 거, 딱 질색이에요.”
“…무겁긴 하지. 내 옷 들고 킁카킁카할 정도면.”
“마, 말 돌리지 말고요.”
아이릴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건 평생 지워지지 않을 흑역사가 될 터였다. 낯을 홍시처럼 붉게 물들인 그녀가 재차 입을 열었다.
“선우, 저 좋아하냐고 물었어요.”
“음.”
피식거린 유선우는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이릴에게 이성적인 매력을 느끼고 있는가. 매력이라면 틀림없이 느끼고 있다.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돌처럼 보였었는데. 이젠 좀 귀엽단 말이지.’
다만 이 감정이 아이릴의 연심과 같을지는 불확실하다. 상대가 차세정이었다면 고민 없이 긍정했겠지만.
유선우는 확실히 차세정이 좋았다. 단순한 호감과 그녀가 주는 안심감이 서로 뒤섞여 연심을 만들어냈다.
그런데도 다른 여성들에게 철벽을 치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431-9 차원은 일부다처제, 일처다부제가 횡행하는 세계였기 때문이다.
유선우는 그곳의 문화에 익숙해져 있었다. 귀족, 황족들과 밥 먹듯이 만났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육욕으로만 여럿의 부인이나 남편을 거느린 이도 있기는 했다만, 그 하나하나를 진심으로 대하는 이도 숱하게 있었다.
그들을 보아왔기에 유선우는 사랑이란 건 한 명에게만 품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여겼다. 그런다고 차세정이 다른 남자와 놀아나는 모습을 볼 생각은 없었지만. 전형적인 내로남불 쓰레기였다.
‘근데 얘는 어떨까.’
유선우는 아이릴을 보며 천천히 따져봤다. 고민을 거듭하다가, 결국 복잡한 의문을 전부 치워냈다. 그냥 간단하게 생각하면 되었다.
아이릴이 혹시 다른 남자를 연인이랍시고 데려온다면. 확실히 짜증은 날 터다.
결론을 낸 유선우가 아이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좋아해. 아마도.”
“…아마도는 필요 없는데.”
“네가 잘해보던가. 나중엔 죽고 못 살게 될 수도 있지.”
“그럼 매일 이렇게 해줄 건가요?”
“뭐?”
반문하자 아이릴이 품 안으로 폭 안겨 왔다.
“맨날 안아주고, 씻으면 머리 말려주고, 좋아한다고 말해주고. 그렇게 해줄 건가요?”
“이상한 환상 갖고 있네. 모솔이라 그런가.”
“모솔이 뭐죠?”
“아니야. 하고 싶어지면 해주겠지.”
“그게 뭐예요.”
대답이 불만족스러웠는지 입술을 비죽 내민다. 이내 그녀가 별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흘렸다.
“지금은 그걸로 됐어요.”
***
12월 15일, 청일 용인 지부.
회사의 입구엔 아침부터 기자들이 바글거렸다. 근거 없는 가십이나 써대는 속칭 기레기부터, 신뢰도 높은 일류 기자까지. 그들이 몰려든 이유는 당연히 유선우를 취재하기 위함이었다.
“대체 언제까지 쉬는 거야?”
“어쩔 수 없죠. 사실 오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니에요? A급도 급한 일 없으면 놀고먹잖아요.”
“하긴. 유선우가 근면하게 회사 나올 필요는 없지. 성실한 성격 같지도 않고.”
충신일보 기자 둘이 맞담배를 피우며 떠들었다. 둘은 며칠간 소득 없이 청일의 앞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하, 강창민이라도 오면 좋겠는데.”
“강창민이요?”
“걔가 입이 좀 싸거든. 오면 무조건 달라붙어서 근황이든 뭐든 캐내면 돼.”
“그걸 묻는다고 말해준다고요?”
“관종이잖아. 우리 같은 사람한텐 고마운 사람이지. 개인적으로 친하게 지내긴 싫어도.”
“…유선우도 피곤하겠네요.”
그 피곤한 유선우는 현재 청일의 사옥에 있었다. 기자들을 피해서 창문을 타고 출근한 것이었다. 그가 창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기자 더럽게 많네.’
인파를 본 유선우가 혀를 내둘렀다. 서넛 정도였으면 흔쾌히 대응해줬겠다만 언뜻 봐도 수십. 엮였다간 고역을 치를 게 뻔했다.
“저기, 유선우 씨 아니세요?”
뒤에서 들려온 말에 유선우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게임 패드를 든 남자가 있었다. 아침부터 회사에서 게임이라. 아직 출동 요청을 받지 않은 헌터인 모양이다.
“아, 죄송합니다. 사정이 있어서.”
“예, 예. 좀 놀라긴 했는데.”
남자는 유선우를 보고 한껏 당황한 상태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갑작스레 창가에서 유명인이 나타났으니까. 화면에 떠오른 YOU DIED 따윈 이제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혹시 사인 가능한가요? 마누라가 팬이라서…. 아, 저도 당연히 팬이고요.”
“그럼요. 창문 쓴 값은 해드려야지.”
“하하하, 감사합니다!”
남자는 결국 사인을 세 장이나 받아냈다. 함박웃음을 짓는 모습에 유선우가 피식거렸다.
‘내가 출세하긴 했다.’
유선우는 흐뭇한 마음으로 발을 움직였다. 오랜만에 지하 2층에 가볼 생각이었다. 슬슬 짬이 찼을 교육생들을 만나기 위함이었다.
‘어디 보자.’
스마트폰을 확인하니 시각은 1시가 조금 넘어있었다. 이 시간대면 모의전투실에 있을 터였다.
모의전투실로 향하니 낯익은 교육생들이 서로 페어를 이루어 겨루고 있었다.
페어는 총 셋이었다. 불을 뿜는 이도 있었고, 괴력으로 목검을 휘두르는 이도 있었다. 제법 살벌한 광경이었다.
‘저래도 되나?’
누구 하나 다치지 않을까 걱정됐으나, 자세히 보니 썩 안정적이었다. 불과 같이 위협적인 능력에는 단단한 탱커가 맞서고 있었다.
‘고생하네.’
유선우는 뒷짐을 지고 주의 깊게 둘러봤다. 그러자 눈에 띄는 인물이 하나 있었다.
‘쟤는 혼자 뭐해?’
실내의 한구석에 한강이 쪼그려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유선우는 어쩐지 마음이 짠해졌다.
‘학교 다닐 때도 하나씩 있었지.’
둘씩 짝을 지으라 하면 남는 이가 있기 마련. 이곳에선 한강이 그런 존재인 듯했다. 교관이 케어해줘야 할 텐데, 현재 이성결은 한창 바쁜 와중이었다.
“거기, 힘 빼십시오! 머리 터지면 전부 제 책임입니다, 제발 조심하세요!”
이성결은 눈을 부릅뜨고 대련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 짝을 맞췄지만, 주의는 기울여야 하는 법. 본래 사고는 마음을 놓는 순간 터지는 것이다.
“말 좀 들으라고요! 저 이번에 승급 못 하면 책임질 겁니까? 예?”
“참나. 그게 햇병아리한테 할 소리예요?”
“꼬우면 지가 잘하던….”
막말을 내뱉으려던 이성결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방금 자신이 사선을 넘었음을 직감했다. 요 몇 개월 사이에 단련된 감각이 그를 구원해줬다.
“유, 유선우 씨?”
“한 달만이네요. 그동안 입이 거칠어지셨어.”
“시정하겠습니다.”
“에이. 딱딱하게 왜 그래요.”
유선우가 이를 드러내고 히죽 웃었다. 이성결은 부자연스럽게 헛기침만 했다.
“강이는 왜 혼자 훈련해요?”
“아, 그게 말입니다.”
“설마 사내 왕따 같은 거 아니죠? 대표님이 아쉬워하시겠어요.”
대표라는 소리에 이성결은 침을 꼴깍 삼켰다. 하지만 기죽을 필요는 없었다. 왕따라니, 완전한 헛다리였다.
“그런 건 아닙니다. 다른 교육생들이 한강 씨와의 대련을 꺼리는 건 맞지만요.”
“무슨 소리예요?”
“하루가 다르게 일취월장하고 있습니다. 대련은 가끔 저와 하는 편이죠.”
“오, 진짜요?”
유선우가 감탄을 내뱉었다. 반응이 좋으니 이성결도 탄력을 받았다.
“예. 조기 수료도 확정되어있다시피 하고요. 팀장들이 죄다 눈독을 들이고 있습니다. 하하.”
“혹시 강이 각성자 등급이 어떻게 돼요?”
“그런 건 말씀드리기가 좀….”
“그럼 지부장님한테 묻죠, 뭐.”
태연하게 말하더니 스마트폰까지 꺼낸다. 지부장이란 말에 겁먹은 이성결이 인적사항을 누설했다.
“C, C급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포텐셜로 봐선 A급 각성자 못지않은 정도죠.”
“이야. 노오력이네요.”
“저도 처음부터 저렇게 노력했어야 했는데. 흐뭇하면서도 부럽기도 합니다.”
마나는 각성을 기점으로 약 2년간 폭발적으로 성장한다. 그러니 한강 같은 별종도 하나씩은 나타나기 마련이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재능을 노력으로 커버하는 것이다.
가파른 성장 폭을 보니 이성결은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그 또한 단련을 게을리했던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더 할 수는 있었을 테니까.
한강의 등을 한참이나 쳐다보던 이성결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교육자로서 할 말은 아니었군요.”
“아뇨. 교육자보단….”
유선우가 이성결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제삼자가 본다면 친밀해 보이는 행동일 터. 하지만 정작 이성결은 공포만 느낄 따름이었다.
“제 제자가 할 말은 아니었죠. 제가 확실히 둥글어지긴 했나 봐요.”
“예, 예?”
“다른 제자는 징징대면 거꾸로 매달아 놓고 팼었거든요.”
“…하하. 그, 그러셨군요.”
“네. 웃기죠?”
이성결은 고장이라도 난 듯 웃음만 흘려댔다. 머지않아 유선우가 팔을 떼어냈다.
“다음 주부터 다시 가르쳐 드릴게요.”
지금 노력할 생각은 않고 후배에게 질투나 하고 자빠졌으니. 멘탈 교육이라도 해줘야 할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