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8화
몰락
폭탄은 연쇄적으로 터졌다.
청일과 헥터뿐만 아니라 여섯의 대형 클랜이 모두 의견을 표명했다.
- 실책은 실적으로 덮는 것이 아닙니다. 유선우 헌터의 활약이 아니었다면 저는 더욱 많은 가족을 잃고 말았겠죠. 우리가 외면하고 있던 구조적인 개혁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 한국은 지금 격변의 한 중앙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현 협회는 발 빠른 대응과 적재적소의 인력 배치, 클랜들에 대한 공정한 지원. 그중 어느 것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어요. 이 책임을 누구에게 물어야 하겠습니까?
각각 헥터의 김홍철, 녹랑의 정은서의 말이었다. 그들은 평소 협회에 눌려 있던 만큼 마음껏 활개를 쳤다.
CHC 역시도 은근슬쩍 발을 내밀었다. 직접 일침을 가하지는 않았고, 소속 헌터들의 입을 빌렸다.
- CHC 최민 “유선우 헌터의 용기에 울컥… 소신 있는 의견이었다”
- CHC 서은하, 유선우에게 관심 표출 “개인적으로 가장 존경하는 헌터. 꼭 만나보고 싶다”
명백한 의사의 표현이었다. 비슷한 기사가 하루에도 수백 건씩 올라와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다.
시시각각 더해가는 열기와는 반대로 김한성은 눈에 띄게 수척해졌다. 그는 힘없는 눈으로 비서를 쳐다봤다.
“연락이 되질 않습니다.”
협회의 재정을 지원해주던 세한 그룹.
회장의 메신저인 신주호가 잠적했다는 소식이었다. 회장의 직통 연락처도 가지고 있으나 마찬가지로 연락은 이어지지 않으리라.
“…그래.”
김한성은 눈가를 떨며 대답했다. 일일이 화를 내기에는 이런 일이 너무도 잦았다. 하루에도 수십씩 연줄이 끊어지고 있었다.
“이제 어쩌시겠습니까?”
“내가 묻고 싶군.”
김한성이 흐리멍덩한 눈으로 천장을 올려봤다. 아직도 실감이 들지 않았다. 쌓아온 모든 게 이토록 간단하게 무너지다니. 그저 악몽처럼만 느껴졌다.
“위쪽에선 뭐라고 하나?”
“의논 중이라고 합니다.”
“프흐흐.”
김한성이 낮게 웃었다. 의논. 자신이 자주 하던 변명이다. 클랜에 가는 지원을 줄일 때 재고를 요청받으면 항상 그리 말했었다.
하지만 새삼스레 후회하진 않았다. 그럼으로써 얻어낸 게 있었고, 결과적으론 국가에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 그렇지.’
이루어낸 것이 있다.
5년 전부터 한국의 안정화를 위해 애써왔다.
도처에 가득하던 비명을 지워낸 것이 누구인가. 바로 나다. 나의 공이 가장 컸다. 김한성은 그리 자부했다.
그의 눈에 질척한 감정이 일렁거렸다.
“담합이다. 대형 클랜끼리 헌터 업계를 독식하려는 속셈이지. 아귀 같은 놈들.”
“……담합이군요.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래. 그리고 그 새끼 움직임 파악해뒀던 것도 다 퍼뜨려.”
“예?”
쾅!
비서의 물음에 김한성이 탁자를 내리쳤다. 짐승처럼 사나운 눈빛이 비서를 향했다.
“딜런 테일러, 오창훈, 정재희, 제이크. 다 유선우 그 새끼랑 만났던 놈들 아니야! 어떻게든 발목 붙잡으라고!”
“아, 알겠습니다.”
비서가 침을 꼴깍 삼켰다. 잔뜩 겁먹은 모습에 김한성이 못마땅하게 혀를 찼다.
“나가봐.”
김한성이 축객령을 내렸다. 혼자 남은 그가 양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물러났어야 했나.’
새까매진 시야 속에서 자문했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물러나야 할까.
국민 앞에 고개 숙이고 현장으로 복귀하면 될까.
그리한다면 다시 지위를 되찾을 수 있을까.
지금까지는 협회장이라는 직함 탓에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A급 게이트도, S급 게이트도 김한성은 경험해보지도 못한 일이었다.
‘내가 너무 겁이 많았나?’
전자는 그나마 위험은 적으리라 생각했었지만, 토벌대장을 맡는 게 부담이었다. 무엇보다 미국에선 이미 S급 헌터가 A급 던전을 공략한 전례가 있었다. 그러니 결과가 신통찮으면 비교를 당하리라고 판단했었다.
S급 게이트 때는 자신의 무사를 장담하기가 힘들었기에 끼어들지 않았다. 자신에게 문제가 생기면 전국에 영향이 미칠 터라 생각했었다.
협회장이란 이름은 언제나 족쇄였다. 그걸 벗어던진다면 예전처럼 활약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김한성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인생을 부정한 유선우에게 굴복하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유선우를 무릎 꿇리기를 원했다.
‘난 이런 푸대접을 받을 사람이 아니다.’
자존심과 아집.
그것이 물러난다는 선택을 지워냈다.
남은 수단은 진흙탕에서 뒹구는 것뿐이었다.
***
“담합이요?”
- 어떻게든 버틸 생각인가 봅니다. 저도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군요.
“허.”
들려온 말에 유선우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음모론에 환장하는 중2병들이나 좋아할 얘기였다.
“이젠 눈에 뵈는 것도 없나. 추하네요.”
- 여태 지켜봐 온 입장에선 씁쓸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걱정은 안 하셔도 될 겁니다. 문제는 보석 거래 건인데….
“그렇겠죠. 발목 잡힐 건 알고 있었어요.”
유선우의 의견에 동조해 이목을 끈 각계의 유명인들. 그들과의 사적인 만남이 밝혀졌으니 부자연스럽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작 유선우는 웃어넘길 따름이었다.
“신경 안 쓰셔도 돼요. 그분들이랑도 다 얘기해뒀으니까.”
- 아, 그러셨습니까?
“네. 어차피 큰 타격은 아니잖아요. 광고 좀 해주기로 했죠.”
큰 대가를 약속하지도 않았다. 방송할 때 광고를 몇 개 띄워주기로 했을 뿐. 방송국 측에는 인터뷰에 응해주기로 했다.
남은 문제는 유선우 본인의 이미지였다.
다만 그는 이제 이미지 관리에 심혈을 기울일 생각이 없었다.
“할 일 다 했으니 슬슬 이미지 정도는 깎여도 돼요. 아니, 좀 깎였으면 좋겠는데. 다들 왜 이렇게 날 좋아해요?”
- 하하. 이해는 갑니다. 워낙 파격적이시니까요.
“버릇없게 굴어도 이 모양이네요.”
최근 여론을 떠올린 유선우가 혀를 찼다. 대형 클랜들의 지원 덕분에 그는 아예 혁명가가 되어 있었다. 일각에서는 무례한 태도가 연기였다는 의견까지 돌 정도였다.
“국뽕 빨고 싶은 건 알겠는데 적당히 해야지. 제가 한 일이 뭐가 있어요? 사람 패고 몬스터 죽이고 협회장 욕한 것밖에 없구만.”
- 이제 시작인데 벌써 그러십니까. 내후년쯤이면 싫증 난다고 잠적이라도 하시겠습니다.
웃음기 섞인 목소리에 유선우는 한숨으로 대답했다.
“하긴 그러네요. 이제 3달 지났구나.”
그간 바쁘게 돌아다니진 않았다. 그런데도 지난 3개월은 제법 밀도가 높았다.
쫀드기 사 먹을 돈도 없던 중졸 미필 백수가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지. 당시를 떠올리니 절로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그나저나 대표님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 예?
“협회장이요. 아무리 늦어도 이번 달 안에 내려올 텐데, 자신 있으시죠?”
- 자신이라니요. 무슨 말씀이신지.
시치미 떼는 것치곤 어조가 능청스럽다. 유선우가 콧방귀를 뀌었다.
“재미없게 왜 그러신대. 설마 관심 없으세요?”
- 하하. 그야 욕심은 나죠. 이렇게까지 해주셨으니. 생각지도 못하긴 했습니다만… 저라고 못할 게 뭔가 싶습니다.
“상부상조죠. 여러모로 많이 도와주셨는데. 앞으로도 그러실 거고요.”
- 물론입니다.
익숙해지니 서로 손뼉이 잘 맞았다. 김정수가 온화한 목소리로 물었다.
- 이제부턴 어쩌실 겁니까?
“딱히 할 게 있나 싶네요. 쉬었다가 회사나 나갈 것 같은데. 혹시 별다른 일 있나요?”
- 좀 흉흉한 일이 있긴 합니다.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대답이 돌아왔다. 애초에 꺼내려던 말인 듯했다.
“뭔데요?”
- 요즘 용인 일대에서 살인사건이 자주 발생하고 있다더군요.
“엥. 갑자기 웬 살인.”
- 불법 각성자가 범인인 모양인데, 자세한 건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밖에도 때때로 토벌대가 연락 두절이 되기도 한다고 합니다. 다행히도 저희 클랜이야 별일 없습니다만.
유선우가 눈을 얇게 떴다. 말마따나 흉흉한 사건이었다.
“되게 심각한 일 아니에요? 근데 왜 몰랐지.”
- 협회장 건으로 떠들썩해 일의 경중에 비해 화제가 시들시들한 편입니다. 그리고 이건 경찰 쪽 소관이니까요.
“아, 그렇구나. 새 정보 들어오면 연락 주세요.”
- 알겠습니다.
“네. 고생하세요.”
전화가 끊어졌다. 유선우는 방금 접한 소식에 대해 고심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이 동네는 조용할 날이 없네.’
우선 토벌대의 실종 건은 제쳐뒀다. 던전 자체가 원인일 가능성이 있으니 속단하기에는 이르다.
문제는 불법 각성자에 의한 살인.
범인에 관해서 짚이는 바가 있었다.
‘어차피 또 대리자겠지. 망할 놈들.’
과한 비약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선우는 이런 경우에 직감이 틀린 적이 몇 없었다.
아마 김광수이거나 다른 대리자가 나타났으리라. 맘 같아선 족치고 싶지만 당장은 불가능한 일. 정보도 없는 마당에 범인을 색출할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가능하다 쳐도 경찰과 엮이면 성가셔진다. 다만 그냥 넘어가긴 찝찝하니 대비는 해두어야 할 터.
‘꼭 이럴 때면 아는 사람이 납치되더란 말이지.’
주변인이 피해자가 되는 클리셰. 유선우로선 그러한 불상사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연락만 돌려두자.’
요즘 동네가 이러이러하니 알아서들 조심해라. 이쯤이면 경각심을 심어주기엔 충분하다.
단체 연락을 돌린 후 유선우는 하품을 뱉었다. 한동안 공들여 온 일을 끝마쳤기 때문일까. 평소보다 마음이 가볍다. 정확히는 아직 끝나진 않았지만, 이제 자신이 할 일은 없었다.
‘은근히 보람 없네. 너무 허접이라 그런가.’
머지않아 정말로 김한성의 이름을 까먹게 될지도. 피식거린 유선우는 소파에 누워 잠을 청했다.
머지않아 거실은 고요함으로 물들었다.
“…….”
소파의 끝과 끝. 유선우와 멀찍이 떨어져 앉은 아이릴이 힐긋 눈을 돌렸다. 그녀의 시선은 한곳에 머물지 못하고 바쁘게 돌아다녔다.
유선우를 봤다가, 다시 TV를 봤다가.
정신 사납게 오가던 눈알이 끝끝내 유선우의 얼굴에서 멈췄다.
‘자나?’
눈꺼풀은 닫혀 있지만 확신할 수는 없다. 유선우는 항상 조용하게 잠들고 소리 없이 깨어난다.
심지어 숨소리마저 바뀌지 않는다. 훈련의 성과라나 뭐라나.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으, 으흠!”
아이릴은 부자연스레 헛기침했다. 돌아오는 반응이 없다. 사레들린 듯 연달아 콜록거려도 마찬가지다.
‘자나 보다.’
아이릴이 소파 위를 엉금엉금 기어서 다가갔다. 극도로 집중한 그녀는 옷자락 스치는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거리를 좁혀 바로 근처까지 도착했다. 얼굴이 가까워지자 아이릴의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자, 자요?”
용기를 낸 아이릴이 소곤거리듯 물었다. 기다려봐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이릴은 입을 막고 키득키득 웃었다. 또 한편으로는 어처구니가 없기도 했다.
‘해이해졌어, 아주.’
언제는 발소리만 들어도 벌떡벌떡 깨더니. 고향이라 그런지 마음이 풀어지긴 한 모양이다.
‘하기야 풀어질 만도 해.’
아이릴이 보기에 지구는 평화로운 곳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밥 나오고, 옷도 예쁘고.
연극들은 자극적인 데다 샴푸라는 것은 어찌나 훌륭한지!
뉴스에선 별의별 무서운 일이 다 보도되지만 그런 건 죄다 과장이나 허구라 생각했다. 저주에 걸렸던 여자는 단순히 운이 나빴던 것이리라.
아이릴은 유선우의 얼굴을 지그시 쳐다봤다. 그녀의 눈빛에는 연민이 가득했다. 이런 찬란한 세상에서 혈혈단신으로 이계에 넘어갔었다니. 새삼스레 연민이 피어올랐다.
“불쌍해.”
아이릴이 집게손가락을 뻗었다. 손끝은 유선우의 뺨에 닿기 직전에 멈췄다. 너무 애들 장난 같은데. 이렇게 날려버리기엔 아까운 기회다.
‘기왕 잠들었으니까 조금만 더.’
충동이 축구공처럼 부풀었다. 아이릴의 폐도 빵빵하게 부풀었다. 숨을 한계까지 들이마신 그녀가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츕.
입술이 볼에 닿았다가 곧바로 떨어진다. 지금에 와서도 입과 입을 맞출 용기는 나지 않았다.
아이릴은 재빨리 물러나 시치미를 뗐다. 안 그래도 ‘그 사건’ 때문에 서먹서먹한데 걸렸다간 창피해 죽어버릴지도 몰랐다.
‘안 깼나?’
적막이 이어진다. 심장의 두근거림이 요란하다. 머뭇머뭇 살펴보니 유선우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생각보다도 깊이 곯아떨어진 듯했다.
아이릴은 참았던 숨을 가느다랗게 뽑아냈다. 문득 기억 속 한 장면이 그녀의 뇌리를 스쳤다.
‘그 똥내 나던 여자….’
저주의 악취를 풍기던 여자가 유선우의 입술을 빼앗았던 장면. 그게 아직 머릿속에 선명했다.
‘나라고 못 할 게 뭐야.’
아이릴은 더 과감해지기로 마음먹었다. 소파에서 내려와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그녀가 유선우의 얼굴을 응시했다.
킁킁.
체취가 난다. 같은 샴푸와 같은 비누를 쓰는데도 냄새가 다르다. 저번에 걸린 이후로 줄곧 참아왔기 때문인지 충동이 몰아친다.
‘이러면 안 되는데.’
경멸당할 행위다.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아브나바가 아이릴의 몸에 들어왔던 날. 아이릴은 자신의 몸으로 행해지는 모든 행위를 지켜보았고, 감각마저 공유했다.
20년이 넘도록 스킨십과 담쌓아온 그녀로선 충격적이기 그지없었던 일. 이른바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이후로 그녀는 때때로 지금처럼 욕망에 휩싸이고는 했다.
아이릴의 눈이 몽롱하게 풀어졌다.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이 유선우의 입으로 다가갔다.
숨결이 닿아 유선우의 인중이 달아올랐다. 물기까지 생겨날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유선우는 눈을 뜨지 않았다. 정확히는, 눈을 뜰 수 없었다.
‘선 넘네. 이 새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