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6화
신호탄
등골에 소름이 달렸다. 오밤중에 남의 드레스룸에 숨어들어 냄새를 맡는다니. 정상인의 소행이 아니다.
유선우가 황급히 뒷걸음쳤다. 가슴으론 질겁하는 한편 머릿속에선 의문이 피어올랐다.
‘아이릴이 이럴 애가 아니야.’
아이릴은 그렇고 그런 부분에서는 종교인다운 여자다. 그녀의 정조 관념은 확실하다. 도를 닦는 스님이나 수녀보다도.
그런데 갑자기 이런 변태 짓을 한다?
앞뒤가 맞지 않는다. 눈치 빠른 유선우는 하나의 결론에 이르렀다.
‘또 왔냐….’
아브나바가 다시 찾아온 모양이다. 저번이 끝인 줄 알았건만. 하기야 그녀의 집착은 도를 넘어선 수준이니 이상하진 않다.
벌컥!
“야, 이 미친…!”
짜증이 난 유선우가 거칠게 문을 열어젖혔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릴이 그의 옷가지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셔츠뿐만 아니라… 이런저런 옷들.
예상대로다. 아무리 봐도 저건 아이릴이 아니다.
그런 줄 알았는데,
“히끅!”
아이릴이 번쩍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녀의 눈이 어둠 속에서 파랗게 빛났다.
아브나바가 강신했을 때의 붉은 눈이 아닌, 아이릴 본연의 새파란 눈이.
툭.
그녀가 놓친 옷가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흰색 티셔츠가 타액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다. 평소에 유선우가 안에 받쳐 입는 옷이다.
“…….”
“…….”
정적이 흐른다. 유선우는 자신의 옷과 아이릴을 번갈아 봤다. 그가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거렸다.
“어, 음. 미안하다.”
“자, 잠깐만요. 이거는…!”
아이릴의 눈가에 물기가 차올랐다. 동공이 파들파들 떨리고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다. 유선우는 애써 못 본 체하며 문을 닫았다.
- 아니에요, 아니라고요!
울먹이는 음성이 나직하다. 필사적으로 소리치는 와중에도 문을 여는 기색은 없었다. 아마 변명할 말이 없거나, 얼굴을 보기가 창피한 게 아닐까.
‘하.’
유선우는 그로선 드물게도 이해심을 발휘했다. 그도 비슷한 경험이라면 숱하게 있었다. 물론 남의 옷에 대고 킁카킁카하진 않았지마는.
그래, 개인차도 있겠지. 최근에 여러모로 힘겨운 일을 겪어서 마음이 싱숭생숭할 거다. 새벽에 홀로 있으니 외롭기도 했겠고.
“그 뭐냐.”
그는 잠시간 말을 고르고 재차 입을 열었다.
“앞으로는 문 잠그고 해.”
적막이 어둠과 함께 내리깔린다. 고즈넉한 새벽이다.
***
며칠이 더 흘러 겨울이 깊어갔다.
그렇게 찾아온 12월 10일의 월요일.
유선우는 대낮부터 한가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그의 몸은 편했지만, 거실에 흐르는 분위기는 편치만은 않았다.
“…채널 돌려주세요.”
“어, 어. 그래.”
유선우는 리모컨을 조작하며 눈을 힐긋거렸다. 아이릴과 눈이 마주쳤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시선을 확 피했다.
어색함을 참기가 힘들다.
유선우는 괜스레 헛기침만 할 뿐이었다.
‘뒈지게 불편해.’
‘그 사건’ 이후로 둘의 관계는 서먹해졌다.
지금처럼 TV를 볼 때는 물론, 밥을 먹을 때도 말이 오가지 않았다. 동거하면서 가까워졌던 거리가 멀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왜 그랬는지는 알겠는데.’
어려운 추측은 아니었다. 아브나바와의 일이 아이릴의 욕구를 자극했겠지. 오히려 아무런 영향이 없는 것이 부자연스러웠다. 숫처녀에겐 충격적인 장면이었을 테니까.
호기심을 비롯한 이런저런 감정들이 뒤섞였겠고. 참고 참다가 끝끝내 터져버렸으리라.
‘지구로 와서 별 고생을 다 하네.’
불쌍한 아이다. 그때야 좀 기분 나빴지만.
어쨌건 동거를 이어가려면 어색함을 풀어야 할 텐데, 방법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다른 일부터 할까.’
유선우는 작게 한숨을 쉬고 정신을 다잡았다. 그는 벌떡 일어나 깔끔하게 단장했다.
평소 입는 후줄근한 후드티와 롱패딩 대신에 정장과 코트. 불편하긴 했으나 거울을 보니 태가 썩 나쁘진 않았다.
‘이거면 됐다.’
오늘은 준비해둔 화약을 터뜨릴 날이다.
여느 때처럼, 방송을 통해서.
***
유선우는 샵에 들려 헤어스타일까지 바꿨다. 평소에는 눈썹 밑까지 앞머리를 내렸었다면, 지금은 가르마를 제대로 탄 상태였다.
다음으로는 한 호텔로 향했다.
약 30분이 지나 유선우가 탄 차가 멈췄다.
“잠시만요. 나오라 할게요.”
운전사에게 말한 유선우가 스마트폰을 두드렸다. 메시지를 보내자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여성이 호텔에서 나왔다.
화사한 금발, 선글라스를 꼈음에도 돋보이는 미모. 이제는 완전히 상태를 회복한 소피아였다.
소피아가 성큼성큼 다가와 차 문을 열었다. 선글라스를 벗고는 유선우의 차림을 살핀다. 이내 그녀의 입가가 곱게 휘어졌다.
“와, 선우. 오늘 뭐예요?”
“뭐긴 뭐예요.”
“빼입으니까 빛이 나네. 진작 그러고 좀 다니지.”
“이래야 갭이 살죠. 그리고 여자친구 만날 땐 차려입어요.”
“오늘은 나 만나는데 차려입었네. 무슨 의미죠?”
“참나. 방송에선 적당히 해요.”
유선우는 짓궂은 발언에도 담담하게 반응했다. 처음엔 불편하기만 했던 성격이 이젠 익숙해졌다.
“생각해 볼게요.”
“그놈의 생각은 뭐 맨날 해.”
“그럼 생각 없는 쪽이 취향인가요?”
실실거린 소피아가 유선우의 옆에 앉았다. 유선우는 대답하지 않고 운전사에게 말했다.
“출발해주세요.”
“어디로 갑니까?”
“아, 말씀 안 드렸구나. 여의도로 가주세요.”
“여의도… 알겠습니다.”
차가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유선우는 팔짱을 낀 채 눈을 감았다. 잠이나 잘 셈이었는데, 수다스러운 소피아의 옆에서 그런 일은 불가능했다.
“선우, 선우. 나랑 부산 안 갈래요?”
“지금 여름 아닌데요.”
“겨울 여행도 좋대요. 1박 2일로 어때요?”
“귀찮아요.”
“나 이번 달 안에 미국으로 돌아갈 건데. 당일치기도 안 돼요?”
“안 돼요.”
“미국 가면 안 된다고요? 그럼 여기 붙어살까 봐.”
“아니요.”
소피아는 단답에도 굴하지 않고 재잘거렸다. 지치는 기색조차 없어 유선우만이 지쳐갔다.
그러다가 문득 소피아가 떨떠름히 말했다.
“근데 진짜로 할 거예요?”
“또 뭐요.”
“아니, 지금 하려는 거. 아무리 그래도 좀….”
내키지 않는다는 듯 말을 흐린다. 오늘의 일정이 맘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반면 뚱하기만 했던 유선우의 눈에는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싫어요? 난 재밌을 것 같은데.”
“뭐 재밌긴 하겠는데. 타국인이 끼어들기엔 조심스럽네요.”
“누나. 성의는 보여줘야죠.”
성의. 병실에서 했던 얘기다. 그때를 떠올린 소피아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됐을까.”
“저한테 져서 그럴걸요. 그러게 잘 싸웠어야지.”
“…다음에 또 싸워요.”
“자신 있나 봐요?”
그 물음에 소피아의 눈꼬리가 축 처졌다. 그녀는 자신이 유선우를 꺾는 장면을 상상할 수 없었다.
“몰라요.”
자존심 때문에라도 솔직하게 말하긴 싫었다. 그녀의 시무룩해진 모습에 유선우가 히죽거렸다.
화목한 분위기 속에서, 차는 여의도에 도착했다.
“어디서 내리시겠습니까?”
운전사가 물었다. 유선우가 가벼이 대답했다.
“헌터 협회요.”
***
헌터 협회의 협회장실.
김한성은 끝없이 쿵쿵거리며 탁자를 두드리고 있었다.
“망할.”
초조함이 발밑에서부터 기어올랐다. 한동안 느낄 일이 없었던 감정이다. 근 5년간 그는 잃기보단 얻는 사람이었다.
자부심을 품어도 괜찮을 만큼 얻고 얻었다. 그 모든 것들이, 모래성처럼 무너져가고 있었다.
고작 몇 개월 만에.
단지 한 사람 때문에.
주먹을 꽉 쥔 김한성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협회의 최상층에서 보는 경치는 각별했다. 많은 건물이 내려다보였다.
‘미치겠군.’
언제나 김한성에게 웃음을 선물해주던 경치다. 그러나 지금만큼은 불안할 따름이다. 이마저도 잃게 될까 두려웠다.
김한성은 눈가를 떨며 한숨을 쉬었다.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는 생각마저 했다. 그럴 수만 있다면 반드시 유선우를 죽였으리라.
의미도 없는 망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띠리리리!
요란한 벨소리가 정적을 깼다. 협회장실에 직통으로 연결되는 전화. 김한성은 애써 감정을 가라앉히고 수화기를 들었다.
“무슨 일이지?”
- 그, 손님이 왔습니다.
“손님?”
김한성이 시계를 바라봤다. 아직 2시가 안 된 시각이다. 그가 기억하기로 4시까진 일정이 없었다.
“지금 올 사람은 없는 줄 알았는데.”
- 따로 약속은 잡지 않았다고 합니다.
예의 없는 일이지만 수화기를 내려놓진 않았다. 비서 선에서 끊지 않았다는 것. 찾아온 인물이 제법 거물이라는 의미다.
“누구지?”
- 소피아 테일러입니다. 어쩌시겠습니까?
“…소피아? 그 사람이 왜?”
- 긴히 할 말이 있다고 합니다.
김한성은 사색에 잠겼다. 기존엔 그다지 관심이 없었지만, 최근에 골이 깊어진 상대. 그러나 무턱대고 거절하기는 부담스럽다.
잠시간의 고민 끝에 김한성이 대답했다.
“올려보내.”
- 동행도 있습니다만, 수행원이라고 합니다.
“수행원? 알아서 하라 그래.”
괜찮으시겠습니까?
“불미스러운 일도 있었으니. 배려는 해줘야지.”
수행원 한둘쯤이야. 소피아가 배려를 눈곱만큼이라도 고마워한다면 이득이다.
- 그럼 같이 올려보내겠습니다.
“그래.”
김한성은 짧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는 온갖 상상을 다 하며 손님을 기다렸다.
***
엘리베이터는 빠르게 위로 올라갔다. 최상층에 가까워질수록 사람이 빠져나갔다.
둘만이 남게 되어서야 유선우가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머리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뀐 머리 모양이 어색했다.
“이걸 그냥 넘어가네.”
“그러게요. 명색이 중요 기관인데 이렇게 허술할 줄은. 능관부에선 생각도 못 할 일이에요.”
“거긴 어떤데요?”
“다양하죠. 입구에서 신분증 제시하고, 금속 검사도 거치고.”
“오, 영화 같네요.”
감탄한 듯 대꾸하면서도 유선우는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소피아가 김 샌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뭐, 이해는 가지만요. 보스가 S급인데 누가 건드리겠어요.”
“그렇게 말하니까 좀 게임 같네요. 그쪽 보스는 무슨 급인데요?”
“따로 등급은 없어요. 그냥 예외 취급. 아마 능력만 보면 잘 쳐줘야 B급 정도일걸요. 영향력까지 따지면 족히 S급은 되겠지만.”
각성자로서의 힘은 약하다는 뜻. 이상한 일은 아니다. 오히려 헌터 협회보단 올바른 형태라고 할 수 있으리라.
적재적소라는 말이 괜히 존재할까. 단순히 강자라고 높은 위치에 앉혀 봤자 집 지키는 개가 될 뿐이다. 지금의 협회장이 그렇듯이.
잠시간의 대화 끝에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어떻게 할 거예요?”
“어떻게 하긴요. 말했잖아요.”
“…진짜 저보고 그러라고요?”
“네. 자, 여기요.”
단호하게 말한 유선우가 스마트폰을 건네줬다. 화면에선 채팅이 훅훅 넘어가고 있었다. 이미 방송이 시작된 것이다.
건네받은 소피아가 한껏 떫은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들은 계획은 딱히 복잡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곧이곧대로 따르기엔 상당히 망설여졌다.
“갑자기 들어가서 인터뷰를 하라고요? 쫓겨나지 않을까요?”
“절대 안 쫓겨나요. 저 사람 쫄보거든요.”
“쫄보는 또 뭐예요.”
“치킨이요, 치킨.”
대충 설명한 유선우가 공중을 휙휙 휘저었다. 빨리 가라고 재촉하는 제스처. 소피아는 끙끙거리다가 결국 발을 내디뎠다.
“화이팅이요. 저도 금방 들어갈게요.”
“부탁해요. 제발.”
그리 말한 소피아가 협회장실의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라는 대답이 들려오고, 그녀가 안으로 들어간다. 유선우는 멀어지는 등을 눈으로 배웅한 뒤에 주변을 둘러봤다.
‘사람이 없네.’
비서 한둘쯤은 대기하고 있을 줄 알았건만 인적이 없다. 협회장 본인이 물린 듯했다.
유선우는 의아해하다가도 금세 이해했다. 사람은 열 받으면 괜히 주위에 성을 부리기 마련이다. 비서 몇몇이 벌써 해고당했으리라.
‘크게 못 될 사람이지.’
딜런의 말을 떠올린 유선우가 피식거렸다. 그는 다른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평소 업무용과 개인용 두 개를 사용하기에 소피아에게 빌릴 필요는 없었다.
방송에선 딱 좋은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 인터뷰하러 여기까지 오셨다, 이겁니까?
- 그, 그게요. 음.
- ……하아. 우선 앉으시죠. 10분 정도는 내어드릴 수 있습니다.
김한성이 관대한 척하기 시작했다. 유선우는 김한성의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소피아에게 연줄이라도 대려나 보지.
‘웃긴 양반이야.’
유선우는 소리죽여 웃으며 방송을 시청했다. 화면에 비친 소피아는 시답잖은 질문으로 시간을 끌 따름이었다. 썩 유쾌한 고군분투였다.
5분가량을 기다린 뒤. 유선우가 발을 옮겼다.
‘가자.’
개꿀잼몰카 컨텐츠.
협회장의 몰락, 그 신호탄으로 나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