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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자님 뭐하세요-75화 (75/179)

제 75화

신호탄

“나름 분위기가 괜찮지 않나?”

“네, 맘에 드네요.”

주변을 둘러본 유선우가 적당히 맞장구쳤다.

주홍빛의 은은한 조명. 세련된 인테리어.

확실히 나쁘지는 않으나 식당의 메인은 음식. 우선 음식을 맛보고 판단할 일이었다.

“소피아도 함께 왔으면 좋았을 텐데.”

“곧 퇴원하잖아요. 앞으로도 시간은 많겠죠.”

“그래, 그렇지. 둘 다 젊으니 말이네.”

“……아, 네.”

뉘앙스가 묘해 절로 떫은 목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딜런은 아랑곳하지도 않는 기색이었다.

“요즘 자네 얘기로 세상이 다 떠들썩하더군.”

“솔직히 실감은 안 나네요. 달라진 게 없어서.”

“배부른 소리라고 생각하지 않나?”

“실제로 배가 부른 걸 어쩝니까.”

능청스러운 대답에 딜런이 피식 웃었다.

“그래, 화제성이라는 게 대개 그런 법이네. 어느 선을 넘어가면 일상에선 그다지 변화가 없어 보이기 마련이지.”

“그렇죠. TV 보면서 연예인들 부러워하는 것도 똑같고요.”

“가끔 콘서트를 보러 가기도 하고.”

딜런은 서민적인 발언으로 맞장구를 쳤다. 이내 그가 무거운 목소리로 화제를 진행했다.

“하지만 힘 있는 사람과의 만남에선 딱히 그렇지도 않아. 비교해봐야 자기 위치를 아는 걸세.”

“그럼 딜런 씨가 보시기에 제 위치는 어느 정돈가요?”

유선우의 말에 딜런이 재차 웃음을 터뜨렸다.

“더할 나위가 없지. 그래서 만나자고 했고.”

“다행이네요.”

“뭐, 그게 아니더라도 딸아이 일이 있으니 보긴 했겠다만.”

“업무적으로는 안 만나셨겠죠.”

“애초에 자네가 무능했다면 그 아이와 엮이지도 않았겠지.”

옳은 소리다. 유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김정수를 통해 간략하게나마 접한 정보를 떠올렸다.

딜런 테일러.

금융 재벌, 테일러 집안을 책임지는 인물. 그 영향력은 미국의 한두 지역에서 그치는 수준이 아니며, 비각성자임에도 불구하고 능력자 관리부에서 높은 위상을 자랑한다.

그런 인물이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상황. 현재 국내의 온갖 사업가, 정치가들이 딜런의 시간을 얻어내고자 애쓰고 있다.

‘그 누나가 그냥 금수저가 아니었어.’

유선우는 새삼 세상이 불공평함을 깨달았다. 하지만 허무함이나 질투는 없었다. 자신은 딜런과 대등한 위치에 마주 앉아 있으니까.

힘 있는 이와 비교해봐야 자신을 아는 법이라 했던가. 지당한 말이다.

“우선 딜런 씨 용건부터 듣고 싶네요. 보석만 달랑 사러 오신 건 아니시겠죠?”

“그저께 보니 아내가 좋아할 것 같더군. 오랜만에 칭찬 좀 듣겠어.”

“뭣하면 더 챙겨드릴 수도 있고요. 아직 하나도 안 팔았거든요.”

유선우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딜런도 그에 맞추듯 웃음기 섞인 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그 값으론 자리를 만들어주지.”

“자리요?”

묻자 딜런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자네가 소피아와 같이 미국으로 와서….”

“그건 소피아 씨한테도 들었던 얘기라서. 그럴 생각 없어요. 죄송합니다.”

“그냥 해본 말이네. 아쉽긴 해도 어쩔 수 없지.”

딜런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는 이미 소피아에게 전해 들어 유선우의 의중을 알고 있었다. 구태여 말을 꺼낸 건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심산이었다.

“솔직히 자네가 원하는 게 뭔지 잘 모르겠군. 이쪽은 여러모로 많다만.”

“예를 들자면요?”

“친분을 알리는 것만 해도 능관부 입장에선 큰 이익일세. 가끔 미국으로 놀러 와줘도 괜찮고.”

비상시에는 손을 보태주겠다는 간접적인 표현을 해달라는 의미다. 실제로 움직일지 어떨지는 둘째 치고서라도. 별 의미는 없어 보여도 그쪽의 국민에겐 안심이 될 터였다.

“고작 제 몸뚱이 하나로 기대하시는 만큼 효과가 나올지 모르겠네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나?”

“아니요, 별로. 그냥 말해봤어요. 최근 들어 안 건데, 너무 잘난 척하면 재수 없더라고요.”

그렇다고 고쳐질지는 모르겠지만. 한마디 덧붙인 유선우가 어깨를 으쓱였다. 곧 그가 자신이 가져온 용건을 꺼냈다.

“딜런 씨. 혹시 이런 경험 있으세요?”

“음?”

“누가 자기를 죽도록 싫어하는 거예요. 말 한 번 안 들었다고 협박하고, 성과를 내도 무시로 일관하고. 이젠 상황이 역전됐는데도 꼴에 자존심은 있어서 굽히질 않는 거죠.”

“자네가 실수라도 했나?”

실수. 유선우는 그 말을 곱씹다가 키득거렸다.

“말실수를 좀 하긴 했어요.”

협회장과 대면했을 때 무례한 태도를 보이긴 했다. 물론 후회는 개뿔도 하지 않고 있지만. 애초에 먼저 협박을 해댄 것도 그쪽이었다.

“밉보였다는 얘기군. 흔하다면 흔한 유형이지만… 크게는 못 될 사람이지.”

“근데 크게 됐네요. 어쩌다가.”

“꽤 귀찮겠어. 무슨 얘기인지 알 법도 하군.”

딜런은 유선우의 행보에 대해서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 개인적인 관심도 있었고, 영입을 위해 조사를 해야만 했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유선우와 협회장과의 대립을 알아낼 수 있었다. 공공연한 화제였기에 알아내기는 간단했다.

생각에 잠긴 딜런은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아무리 호감이 있다 한들 무작정 끼어드는 것은 사업가로서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다.

‘아무래도 리스크가 맘에 걸리는데.’

타국의 일에 끼어드는 것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일수록 더더욱. 개인의 행동이 한 단체의 의지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는 능관부가 한국의 일에 간섭한다고 비난을 받을 수 있다. 과연 부담을 감안하고서도 유선우를 거들 이유가 있을까. 아직은 확고한 판단이 서질 않았다.

“정확히 어찌할 셈이지? 협회장을 끌어내린다고 치면 그 자리가 비게 될 텐데. 자네가 꿰차긴 힘들지 않을까 싶네만.”

“그걸 제가 왜 해요. 시켜준대도 안 해요.”

협회장에게도 건넸던 대답. 유선우는 그런 자리를 상상만 해도 진저리가 났다.

“그런 욕심은 없어요.”

“다행이군. 귀찮게 말리지 않아도 되겠어. 그럼 달리 점찍어둔 사람은 있나?”

“없지는 않죠. 근데 지인 꽂아서 이득 보려는 건 아니고요. 그냥 지금 협회장이 무능해 보여서.”

“그게 무슨 소린가?”

딜런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물었다. 유선우가 의아함을 표하기 전에 말이 이어졌다.

“이득은 당연히 봐야지. 그만한 일을 하는데.”

“…음. 이익이 아예 없진 않죠. 잘만 되면 얻을 건 넘쳐날 테고.”

그제야 딜런이 흡족한 웃음을 흘렸다.

“내가 뭘 해줬으면 하나?”

결론이 났다. 유선우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

유선우는 2주간 총 15명의 거물을 만났다.

다양한 국적의 사업가와 언론인. 심지어는 연예인까지. 절반 정도는 일부러 한국인으로 골랐다.

전원의 도움을 받아내긴 힘들었다. 협회장과 커넥션이 있는 이도 있었고, 단순히 부담스러워한 이도 있었다. 확답을 얻어낸 건 반쯤이었다.

거절한 이들로부터 정보가 누설될 수도 있을 터. 하지만 유선우는 그에 대해 별걱정이 없었다.

‘나 없을 때는 대통령 탄핵도 했었다던데.’

무능한 협회장 갈아치우겠다는 게 뭐 어때서. 사석에서 마음 맞는 사람 찾아다닌 정도로 손가락질받을 이유는 없다.

어쨌건 오늘도 덕분에 입호강을 할 수 있었다. 제안을 받아들이든 말든 애초에 보석을 사러 온 사람들. 식사를 대접받는 것은 항상 유선우였다.

배를 쓰다듬고 있자 운전석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착했습니다. 여기 맞나요?”

“아, 네. 감사합니다.”

유선우가 고개를 꾸벅 숙이곤 차 문을 열었다. 개인적으로 산 차는 아니었다. 바쁘게 돌아다니다 보니 김정수가 운전기사와 함께 세트로 지원해준 것.

돈을 쓸 일은 줄어드는데 지갑은 갈수록 두둑해진다. 비교적 옛일이 된 A급 던전의 공략. 그건 유선우에게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차에서 내린 유선우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가로등이 몇 없는 거리는 어둡고도 한적했다.

‘오, 눈 내리네.’

하늘에선 눈이 내리고 있었다. 첫눈은 아니었지만, 이만한 굵은 알갱이는 올해 처음이다. 12월이라는 실감이 물씬 났다.

감성에 젖어 있을 때. 발소리가 울렸다.

“뭐야. 벌써 와 있었네.”

차세정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오늘따라 유독 코가 벌겋다. 두꺼운 코트를 입고도 추운 모양이다.

“30분 기다렸어.”

“네 성격에 잘도 그랬겠다. 그냥 내가 너희 집으로 간다니까.”

“아니, 집은 좀.”

“네 생일 때 이후로 못 갔는데. 뭐 숨겨놨어?”

눈을 가늘게 뜬 차세정이 유선우를 쳐다봤다. 표정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푹 눌러 쓴 모자와 코까지 가린 마스크가 방해됐다.

“숨기긴. 할 게 없으니까 그렇지.”

“난 겨울에 돌아다니는 거 별론데. 너무 추워.”

차세정이 양손에 대고 입김을 호호 불었다. 유선우가 그녀의 손을 잡아끌어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

“아으. 더 차가워.”

“참아.”

데이트는 평범하게 흘러갔다.

룸카페에서 잡담을 나눴고, 영화를 봤다.

자극은 없었으나 유선우는 지루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도 때도 없이 웃었다. 잔잔한, 일상적인 즐거움. 그에겐 이보다 좋은 휴식이 없었다.

“아, 맞다.”

골목길을 걷던 와중이었다. 차세정이 까먹고 있었다는 듯 말을 꺼냈다.

“나 너희 회사에서 일할 거 같아.”

“엥, 갑자기?”

느닷없는 소식에 유선우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새 각성이라도 했나 싶었는데, 의외로 평범한 대답이 돌아왔다.

“아연 언니가 인턴 채용 있대서 지원해봤거든. 붙었다고 연락 왔더라.”

“오. 언제부터?”

“일단 17일부터.”

“아직 좀 남았네. 무슨 비리 그런 거 아니지?”

혹시나 해서 묻자 차세정이 콧방귀를 뀌었다.

“내가 상 딴 공모전만 몇인데. 원래부터 헌터 클랜에서 일하려고 스펙 쌓고 있었거든.”

“헌터 일에 공모전도 있어?”

“당연히 있지. 몬스터 관련도 있고, 던전이나 게이트 관련도 있고.”

“신기하네.”

“하여튼 그렇게 됐는데… 혹시 싫어?”

차세정이 지나가듯 물었다. 어조는 담담한데 깍지 낀 손가락은 꼼지락거린다. 유선우가 히죽히죽 웃었다.

“내가 싫을 게 있나. 네 맘이지.”

“사내연애 싫어하는 사람도 많잖아.”

“뭐 어때. 나 어차피 회사 잘 안 나가.”

“자랑이야 아주. 언제부터 나가게?”

“아마 너 출근할 때쯤?”

“강이가 심심해서 죽겠다던데.”

“맨날 카톡 보내더라. 하라는 훈련은 안 하고.”

그리 말하면서도 언짢음은 없었다. 한강이 성실한 성격임은 이미 아는 바였다.

“이번 달에 무슨 시험도 있대.”

“시험? 처음 듣는데.”

“나는 잘 모르지. 평가에 반영되려나. 너는 안 봐도 돼?”

“왜 봐. 이제 교육생도 아닌데.”

시험. 생소한 말이지만 유선우가 신경 쓸 일도 아니었다. 협회 기준으로 보면 그는 아직 교육생이지만, 그게 얼마나 갈지는 두고 볼 일이었다.

“그리고 내 시험관은 무슨 죄야.”

“그래. 잘 났다.”

“잘 났지. 그래서 맘대로 하고 다니는 건데.”

“말이나 못 하면.”

차세정이 옅게 웃고는 대뜸 발을 멈췄다. 그녀가 까치발을 들면서 얼굴을 들이밀었다.

“뭐야, 갑자기.”

“빨리.”

재촉하며 유선우의 마스크를 내린다. 유선우는 팔을 차세정의 허리에 둘렀다. 마주 얼굴을 내밀자 서로의 입이 맞닿았다.

건조한 입술에서 겨울 냄새가 났다.

***

유선우는 새벽이 되어서야 현관문 앞에 섰다. 달밤은 고요했으나 그는 걱정으로 심란했다. 원인은 집안에서 퍼질러 자고 있을 아이릴이었다.

‘이대로 집에만 둘 수는 없는데.’

다행히 아직까진 누구에게도 걸리지 않았다.

문제는 슬슬 의심의 시선이 향해진다는 것. 차세정 하나뿐이라면 몰라도 유선혜도 이따금 불평을 뱉곤 했다.

‘변이 능력자라.’

박아연이 이 상황의 해결책으로 꼽은 인물. 그에 대해 소식이 없지는 않았다. 그런데 듣기로는 협회 측에서 엄중히 보호하고 있다던가.

하기야 능력이 능력인지라 그럴 법도 했다. 얼굴을 한시적이나마 멋대로 바꿀 수 있는 능력. 범죄에 악용될 우려가 크다.

‘내가 하려는 것도 범죄긴 하지.’

정확히는 지금도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 이계인을 숨기면 안 된다는 법은 없다만, 몬스터를 사적으로 생포하는 건 법에 저촉되는 행위다.

즉 인간형 몬스터 취급을 받는 아이릴을 사육하는 것도 범죄라는 뜻.

그러니 하루빨리 협회장을 끌어내려야만 했다. 떳떳하지 못한 행위에 편의를 받을 수 있도록.

‘쓰레기 같긴 한데.’

남한테 피해만 안 끼치면 되지. 입안에서 중얼거리며 현관문을 열었다.

집안에는 어둠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예상대로 아이릴은 잠든 모양이다. 아침이 되면 어제는 뭐 하다 늦었냐며 땡깡을 부리지 않을까.

피식거린 유선우가 눈알을 굴렸다. 소파를 한 번 훑어본 그가 돌연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뭐야.’

아이릴이 보이지 않았다. 아직 침대도 들여놓지 않아 거실 이외에서 밤을 보낸 적은 없었는데.

이례적인 일에 유선우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설마 나간 거 아니야?’

유선우의 낯이 점차 일그러졌다. 그가 아이릴의 이름을 석 자를 외치려 할 때였다.

- 스읍, 하아….

이상한 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바람 소리보다도 작았지만, 유선우의 청각은 날카로웠다.

구석의 방이다. 유선우는 한달음에 달려가 문 앞에 섰다. 문고리를 잡으려는 순간,

킁카킁카! 스으읍!

‘응?’

이게 무슨 소리일까. 냄새라도 맡고 있나?

이 방 안에 있는 물건이라곤 해봐야…….

‘내 옷밖에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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