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4화
신호탄
섬뜩한 말에 유선우가 질린 기색으로 말했다. 그는 문득 흥미가 동해 물었다.
“무슨 강신 같은 건가. 혹시 나도 할 수 있어?”
“아니. 아무리 너라도 그 여자는 감당 못 해.”
아브나바가 칼같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유선우와 연결된 관리자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지구를 맡은 엔라는 멍청하다. 그러나 그녀가 지닌 힘만큼은 특별하다. 어지간한 관리자는 명함도 내밀지 못할 정도로.
그토록 똥을 싸질렀음에도 엔라를 외면하지 않은 관리자가 많은 이유. 그건 엔라의 인품이 좋아서가 아니다. 그녀의 노여움을 살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일 뿐.
그러한 존재가 인간의 몸에 담긴다?
유선우의 그릇이 뛰어나니 불가능하진 않겠지.
하지만 힘을 끌어냈다간 죽음은 면치 못할 게 틀림없다.
“그럼 됐고.”
아브나바의 진지한 태도에 유선우는 곧바로 관심을 거뒀다. 그도 그냥 궁금했을 뿐이지, 할 생각은 없었다.
“이제 돌아가. 다신 오지 말고.”
“다음엔 저쪽에서 만나.”
“머리나 잘 감아둬. 확 잡아 뜯어버리게.”
“난 그런 것도 좋아해.”
쿡쿡거린 아브나바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녀의 몸이 축 늘어지더니 그대로 소파에 쓰러졌다.
유선우는 눈을 감은 아이릴을 보면서 앞날을 걱정했다.
‘한 소리 들을 것 같은데.’
아이릴이 방금 행위에 대해 인지하고 있을지 어떨지가 문제였다. 아브나바에게 물어봤으면 될 일이었지만, 그러기는 싫었다. 알고 있다면 질문 자체도 기억에 남을 테니까.
‘아, 몰라. 내 잘못도 아닌데.’
자신이 눈치를 볼 이유는 쥐뿔도 없었다.
유선우는 화장실로 향해 샤워기를 틀었다. 그는 쏘아지는 물줄기를 맞으며 생각에 잠겼다.
‘일은 대부분 해결됐고. 이젠 협회를 치울 때야.’
협회는 연이은 삽질로 인해 위상이 꺾여 있다. 거의 휘청거리고 있다 봐도 무방한 수준. 한두 번 후려쳐주면 바닥에 주저앉으리라.
‘어떻게 조져줄까.’
협회에서 여태 쌓아온 것이 있으니 마냥 쉽지만은 않을 터. 하지만 골치 아픈 마무리는 유선우가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그에 대해선 이미 판을 짜두었으니까.
유선우가 타 클랜 대표들에게 심어둔 가능성.
그들이 불가능하다고만 여겼던 협회장의 몰락이 이제는 현실성을 띠고 있었다.
그가 할 일은 신호탄을 쏘아 올리는 것뿐이었다.
다행히도 재료는 차고 넘쳤다.
어느덧 넓어진 인맥과 이번에 얻게 된 실적.
무엇보다 하늘까지 치솟은 명성.
이 모든 요소가 영향력으로 작용해 발언을 무겁게 만들어주리라.
묵직한 한 방.
그를 위한 조건은 이미 충족되어 있었다.
***
샤워를 마친 유선우는 스마트폰을 찾았다. 연락할 상대는 여느 때처럼 김정수였다. 다섯 번의 신호음이 울린 뒤, 전화가 연결되었다.
- 예, 유선우 씨. 좀 쉬셨습니까?
“아뇨, 별로. 여러모로 일이 많아서.”
- 저랑 마찬가지군요.
피로 가득한 음성. 유선우에겐 이젠 익숙해진 것이었다. 여태 자신의 일로 김정수가 고생하는 모습을 몇 번 봐왔으니까. 그래도 전부 활약상이었으니 미안하진 않았다.
“그럼 조금만 더 고생해주세요.”
- 조금 정돈 괜찮습니다. 무슨 일이신지.
“네. 저번에 그거 있잖아요. 보석 판매 건. 그거 서둘러주세요.”
- 혹시 급전이라도 필요해지셨습니까?
“그건 아니고요. 보석 외에도 거래할 게 있어서,”
김정수가 묻기도 전에 유선우가 말을 이었다.
“돈보다는 구매자 개개인 영향력 쪽으로 정리 부탁드릴게요.”
- …이번엔 또 뭘 하시려고.
“여태 하던 거요. 슬슬 끝낼 때가 됐죠. 아, 정치가는 빼주세요. 엮이면 귀찮아져서 싫어요.”
- 일단 알겠습니다. 언론이나 사업가 쪽으로 연결해드리죠.
유선우는 만족스럽게 히죽 웃었다. 이래서 매번 김정수를 의지하는 것이었다.
“네. 그리고 저한테 연락 온 건 없나요?”
유선우가 한층 가벼워진 목소리로 물었다. 자신의 인기에 편승하고자 청일에 접근한 이도 있을 터. 이름을 듣는 정도야 별 수고도 아니었다.
혹시나 해서 던진 질문. 그런데 김정수의 대답은 예상을 한참이나 뛰어넘었다.
-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더군요.
“뭐 어디요?”
- 청와대입니다.
그 말에는 유선우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계에서는 귀족에 국왕, 황제도 만나봤다. 그러나 고향의 대통령은 무게가 달랐다.
“허. 대통령이 저 보자고 그래요?”
- 딱히 놀라실 건 없습니다. 이번 일이 아니었어도 소피아 씨 일로 불렀을 테니까요.
저주나 습격 건이 아니라 대련 얘기다. 그전부터도 A급 던전 공략으로 주목은 하고 있었을 터. 초청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이해했어요. 내가 출세하긴 했나 보네.”
- 예정 잡아두겠습니다. 혹시 괜찮은 시간….
“아, 됐어요.”
- 예?
잘못 들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유선우가 실소를 흘렸다.
“그냥 놀란 거지, 별 관심 없어요.”
- 거절하시겠다고요?
“귀찮잖아요. 하여튼 구매자만 빨리 잡아주세요. 지금이 딱 좋은 시기라서.”
물론 청와대로 향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정부와 양호한 관계를 쌓으면 자신의 입지도 더욱 탄탄해질 테니까.
하지만 더 이상의 명성은 필요치 않다. 이미 전 세계에 자신의 이름이 알려진 상태. 지금은 영향력을 얻는 게 아니라, 행사할 때다.
화제가 식기 전에, 또 발목이 붙잡히기 전에.
“그러니까 그쪽만 신경 써주세요.”
- …알겠습니다.
“다른 건 없죠?”
- 아니요. 하나 특이한 건이 있긴 합니다.
“또 뭔데요?”
- JH에서 만나자 하더군요.
유선우는 JH, JH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몇 번을 되풀이해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건 또 무슨 듣보잡이래.”
- 세력은 약소한데, 정보 면에선 나름 대형 클랜과 견줄 만한 곳입니다.
“뭐가 특이한 거예요?”
- 그쪽 간부가 거래를 하고 싶다고 합니다. 아마 후계 구도 때문이겠죠. 대표가 병상에 누운 지 좀 됐습니다.
유선우가 혀를 찼다. 그는 허접한 클랜의 내부 경쟁 따위엔 관심이 없었다. 그런 귀찮은 일에 쏟게 될 시간이 아까웠다.
“됐어요. 이제 끝이죠?”
- 예. 오늘은 이쪽으로 오십니까?
“내일이나 모레쯤요. 소피아 씨 잘 부탁드려요.”
- 물론입니다. 그럼 구매자 리스트는 일주일 내로 정리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네. 아, 그리고.”
유선우는 대화를 끝내려다 말고 말을 던졌다.
“청와대 사람한테 말해주세요. 협회장 조질 거니까 건드리지 말라고.”
- 설마 물리적으로 치우시겠다는 건…….
“참나. 그런 거 아니에요. 제가 무슨 야만인도 아니고.”
심각한 어조에도 유선우는 키득거릴 따름이었다.
“하여튼 막으면 제가 많이 섭섭할 거라고도 전해주세요. 그럼.”
용건을 마친 유선우는 멋대로 전화를 끊었다. 여태까지 나눈 대화를 통해 충분한 정보를 던져줬다. 김정수는 눈치가 빠른 인물이니, 알아서 이해할 터였다.
스마트폰을 집어넣은 유선우는 곧바로 다른 일에 착수했다. 일이란 다름 아닌 TV를 사는 것.
그는 직접 마트까지 발걸음을 옮겼다. 인터넷으로 주문해도 됐겠지만, 그래서는 시간이 걸리기 마련. 아이릴을 달래기 위해 재빨리 구해둘 필요가 있었다.
자세히 보지도 않고 고가의 벽걸이 TV를 샀다. 이제는 배송 시각에 맞춰 설치 업체를 부르기만 하면 끝. 돈이 많으면 만사가 편하다.
돌아오니 아이릴은 잠에서 깨어나 있었다. 달라진 옷과 물기 젖은 머리카락을 보니 샤워를 한 모양이었다.
“어, 어. 음.”
유선우는 어째 거북해 볼을 긁적였다. 곁눈질하니 아이릴은 의외로 무덤덤한 기색이었다.
“어디 갔다 왔어요?”
“아, 뭐 좀 사러. 연극 보고 싶다며.”
현대에서 드라마와 연극은 크나큰 차이가 있으나 상관은 없었다. 아이릴이 보기엔 다 똑같을 테니까.
“이따가 올 거야. 좀만 기다려.”
“고마워요.”
아이릴의 태도는 무덤덤했다. 그것이 오히려 유선우를 섬뜩하게 만들었다.
‘얘 왜 이래.’
평소 같았으면 별의별 질문을 다 던졌을 텐데. 그런데 그런 낌새는 보이질 않았다. 정말로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문득 유선우는 예전에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이런 급격한 태도 변화는 자살의 신호일 가능성이 있다던가. 신호를 조기에 알아차리는 게 중요하다고 들었다.
‘하기야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야.’
믿던 신이 자신의 몸을 탈취해 막 굴려댔으니. 성녀에게는 거대한 충격이었으리라. 그런 극단적인 결심을 해도 크게 이상하지는 않았다.
유선우가 깊은 걱정에 빠져 있을 때였다. 돌연 아이릴이 물끄러미 유선우를 쳐다봤다. 이내 그녀의 입이 열렸다.
“좋았나요?”
“어?”
“좋았냐고 물었어요.”
무감정한 어조였다. 유선우는 침을 꼴깍 삼키곤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하니 그제야 아이릴이 시선을 거두었다.
“…….”
그걸 끝으로, 정적이 내려앉았다.
불편한 침묵만이 이어지다가 아이릴이 말했다.
“그럼 전 2층에 올라가 있을게요.”
“어? 아직 배송 오려면 멀었는데.”
“혹시 모르니까요. 제가 남의 눈에 띄면 안 되는 거잖아요.”
대답도 듣지 않고 발걸음을 재촉한다. 계단을 밟는 그녀를 올려다보면서 유선우가 내심 한숨을 쉬었다.
‘진짜 왜 저러냐.’
***
셀럽 유선우의 일상은 단조롭다.
여가 생활을 즐기고, 먹고 싸고 자는 것이 전부.
세상은 바쁘게 떠들었으나 요 며칠간 그가 할 일은 없었다.
한가하다고 회사에 나갈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곧 바빠질 예정이니 짧은 휴식을 즐길 요량이었다.
- 박일도, 박일도오오!
75인치 벽걸이 TV에선 최근에 종영된 드라마가 재생되고 있었다. 유선우는 본래 TV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막상 보기 시작하니 시간은 잘만 갔다.
‘호러도 은근 재밌긴 하네.’
유선우는 이번에 호러를 보는 법을 깨우쳤다. 겁을 먹으면서 보는 게 아니었다.
주인공이 별것도 아닌 놈에게 발리는 모습을 보며 키득대는 것. 그리고 유령 따위를 극도로 혐오하는 아이릴이 이를 빠득빠득 가는 걸 보며 낄낄대는 것. 그게 공포물의 참된 묘미였다.
“정화, 정화예요….”
아이릴은 담요를 끌어안고 씩씩대고 있었다. 그녀는 저번 일에 대해 신경 쓰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유선우로선 묘한 일이었지만,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는 않았다. 괜히 어색해지긴 싫으니까.
우웅!
돌연 진동과 함께 메시지가 날아왔다.
- 뭐해요?
답장하기도 귀찮은 영양가 없는 메시지. 하지만 유선우는 그것마저도 감회가 새롭게 느껴졌다. 다름 아닌 소피아에게서 온 연락이기 때문.
소피아는 순조롭게 상태를 회복하고 있었다. 아직은 재활을 해야 했으나 명색이 S급 헌터. 머지않아 퇴원을 하게 될 터였다.
유선우는 답장하지 않은 채 시각을 확인했다. 스마트폰의 시계는 11시 13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슬슬 나갈 때다. 그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나갔다 온다. 집 잘 보고 있어.”
“어디 가요?”
“일하러.”
“맨날 놀기만 하더니?”
아이릴이 의아한 소리를 냈다. 그녀가 그동안 봐온 유선우는 집에서 놀고먹는 백수였다.
“돈 많으면 놀아도 돼.”
“그럼 오늘은 왜 일해요?”
“넌 돈 없는데도 일 안 하잖아. 돈 많은데 일 안 하는 거랑 똑같은 거야.”
유선우는 개소리를 뱉은 뒤 현관을 나섰다.
오늘부터는 본격적으로 거래를 할 예정이었다.
그 첫 번째 상대는 소피아의 부친, 딜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