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3화
언젠가는
유선우는 병실에서 나와 복도를 걸었다. 캐리어를 끄는 소리가 요란하다. 그 안에서, 왕복이라는 걸 잊고 있던 아이릴이 훌쩍거렸다.
그러든 말든 유선우는 여유롭게 걸었다. 그는 경비를 서는 헌터의 앞에서도 당황하지 않았다.
“수고하십니다.”
“어, 벌써 가십니까?”
“일이 바빠서요. 물건만 전했어요.”
“물건이라 하심은….”
유선우는 캐리어를 발로 툭툭 건드렸다. 뚫어둔 숨구멍 사이로 아이릴이 눈을 부라렸다. 쏘아지는 시선을 무시한 유선우가 넉살 좋게 웃었다.
“환자여도 여자잖아요. 이해하시죠?”
“아, 그렇군요. 고생하십시오.”
“경비 잘 부탁드릴게요.”
그대로 방해받지 않고 통과할 수 있었다.
대체 뭘 이해한다는 건지는 자신도 몰랐지만, 무엇이든 뉘앙스가 중요하기 마련이다.
무사히 차에 오르자 아이릴이 툴툴거렸다.
“좋았어요?”
“뭐, 인마.”
“아무것도요.”
그리 말한 아이릴이 무릎을 감싼 자세로 앉았다.
“내가 다 했는데 생색은 왜 자기가 부린대.”
과자 봉지를 뜯으면서 중얼거린다. 일부러 들으라는 건지 목소리가 나직하다.
유선우는 가볍게 무시하고 박아연을 쳐다봤다.
“박아연 씨, 내기 기억나죠?”
“네, 네?”
느닷없는 말에 박아연이 흠칫거렸다. 그녀도 아까 전 장면이 싱숭생숭하긴 매한가지였다. 묘한 반응에 유선우가 피식거렸다.
“던전에서 했던 내기 있잖아요. 뭐든지 하나 들어준다던.”
“그야 기억은 나는데.”
“입조심 해주세요. 얘는 물론이고 제 얘기도. 그걸로 퉁 치죠.”
“…그 정도로 괜찮다면 뭐. 알았어요.”
“부탁할게요. 진짜로.”
그 말을 끝으로, 유선우가 눈을 감았다.
어제부터 이어진 일이 드디어 일단락되었다.
아직 문제는 남아 있으나 슬슬 쉬고 싶었다.
차가 용인에 도착했을 땐 이미 아침을 알리는 해가 떠올라 있었다. 유선우는 박아연과 헤어진 후엔, 혹시 모를 파파라치를 경계하며 조심스레 집으로 돌아갔다.
거실의 모습을 눈에 담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하, 언제까지 이래야 하나.”
“저도 더는 싫어요….”
두 차례나 캐리어에서 고생한 아이릴은 녹초가 되어 있었다. 유선우가 그녀의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이 닦고 자.”
“내, 냄새 안 나거든요.”
투덜대면서도 아이릴은 제 손에 호호 입김을 불어댔다. 혹시 냄새가 나나 확인하는 모양이었다.
그런다고 알 리가 있나. 키득거린 유선우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소파에 누웠다. 잠에 빠지는 데는 5분도 걸리지 않았다.
***
유선우는 오랜만에 하얀 공간에서 눈을 떴다. 예상하고는 있었기에 당황하지는 않았다.
물건이라곤 탁자와 의자뿐.
삭막함은 여전했으나 변화가 없지는 않았다.
관리자의 자세가 달랐다. 그녀는 여느 때처럼 다리를 꼰 채로 앉아 있지 않았다.
탁자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야, 뭐해?”
쿵!
얼떨떨하게 묻자 관리자가 머리를 박았다. 어찌나 세게 박았는지 소리가 묵직하다.
“미, 미안해!”
“뭐가?”
“걔 있잖아. 머리 긴 애.”
유선우는 떫은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릴 얘기다. 미안해하는 이유도 알겠고. 그런데 이 정도로 사죄할 일이냐 묻는다면 글쎄.
‘좀 애매한데.’
물론 게이트를 봤을 때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뱉곤 했었다. 하지만 그건 흡혈여왕 같은 정신병자가 튀어나오지 않을까 걱정한 탓이었다.
결과적으로 나온 건 쓸모 넘치는 힐러.
그야 처음에는 치고받고 싸웠지만.
자칫하다간 빌런으로 몰려서 사회적으로 묻혀버릴 뻔했지만…….
‘응?’
찬찬히 생각해 보니 이렇게 사죄할 일이 맞다.
믿음직스러운 동료가 생겼고, 소피아의 저주도 풀렸으나 전부 유선우가 스스로 만들어낸 성과였다. 관리자는 뒤통수만 쳤을 뿐이지 않은가.
그럼 화를 내는 게 옳다.
“용서해줬으면 좋겠다, 이거지.”
“내가 미쳤었나 봐. 네가 싫어할 거 알았는데.”
“알면서 보냈다 이거네?”
“한 번만 봐줘! 앞으로는 진짜로 잘할게. 응?”
“그래, 뭐. 별 감정 없어.”
긍정적인 대답에 관리자의 표정이 햇살처럼 밝아졌다. 유선우는 마주 웃어주며 말을 이었다.
“대신 깔끔하게 딱 한 대, 아니. 세 대만 맞자.”
이런 기회는 잘 오지 않는다. 지금 때려둬야 다음에 후회하지 않을 터.
“지, 진짜?”
“엉덩이 대, 인마.”
유선우는 그나마 덜 아픈 부위를 골랐다. 얼굴이나 배를 때리기엔 너무 쓰레기 같았다.
“…응.”
침울해진 관리자가 탁자에서 내려왔다. 그녀가 등을 돌려 엉덩이를 쭉 내밀었다.
그녀가 시무룩해질수록 유선우는 들뜨기 시작했다. 그는 한껏 목소리를 깔고 분노를 표출했다.
“아, 갑자기 확 짜증 나네. 난 허구한 날 통수 맞는데 말이야. 넌 왜 이렇게 쓸모가 없는지 모르겠다.”
관리자는 변명할 말이 없어 부르르 떨기만 했다. 그녀는 언제든지 유선우의 머리통을 터뜨릴 수 있었지만, 그래서는 앞날이 빤했다.
색욕의 지배자마저도 등을 돌리고.
지구는 폭삭 망해버리겠지.
관리자로선 찍소리도 못할 수밖에 없었다. 유선우가 자신의 머리채를 잡더라도. 엉덩이를… 엉덩이를 맞는다고 하더라도.
찰싹!
“흐윽!”
“복창해. 쓸모없어서 죄송합니다.”
“쓰, 흐윽. 쓸모….”
찰싹!
“흐으윽!”
“말하면 싹 잊을게.”
“쓰, 쓸모없어서 죄, 죄, 죄송합니다…!”
말을 끝맺었음에도 유선우는 손을 휘둘렀다. 관리자의 눈가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흘렀다. 참기 힘든 수치심이 그녀를 괴롭혔다.
이런 모욕은 기나긴 관리자 생에서도 처음이었다. 인간에게 얻어맞은 관리자는 자신이 최초일 것이 분명했다.
“흑, 흐윽. 크흥!”
체벌 당한 관리자는 한참이나 훌쩍거렸다. 유선우는 괜스레 미안해져 볼만 긁적였다.
거북한 분위기 속에서 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불편하더라도 할 말은 해야만 했다.
“들어나 보자. 어쩌다가 이렇게 됐어?”
“그, 그게.”
“편하게 말해. 대충 알고는 있으니까.”
“간단히 말하자면…….”
설명은 3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들어본 결과, 색욕의 지배자가 간섭력을 대출해주는 조건으로 내민 게 인원의 파견이었다고.
지구에서 인원을 파견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로 파견해주는 것이니 관리자도 좋다고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그녀에겐 득이 되는 일이었으니까.
이야기가 끝난 뒤, 유선우가 한마디로 정리했다.
“아이릴은 그냥 팔려왔다는 거네.”
“그런 셈이지.”
“불쌍하네.”
“인질이랍시고 목에 창 들이댔던 건 좀 심했어.”“너도 괴롭혔으면서 뭘. 그리고 자기 팔자지.”
넘어온 건 아이릴이 스스로 결정한 일이다.
성녀 입장에서 계시를 무시할 수도 없었겠다만.
어쨌든 자신의 행동엔 직접 책임을 져야만 했다.
‘그래도 잘해주긴 해야겠어.’
아이릴의 이용가치라면 이미 증명된바. 앞으로 어떤 사건이 터질지 모르니 그녀와는 양호한 관계를 구축하는 편이 낫다.
결론 내린 유선우가 관리자에게 말했다.
“그럼 이제 볼일은 끝났지?”
“일단은 말이다.”
“일단이라니. 말투는 그새 또 돌아왔네.”
“입에 달라붙어서 어쩔 수 없느니라.”
“어련하시겠어.”
유선우가 피식거리며 웃었다. 이내 그가 불안한 눈초리로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확실히 간 거 맞아?”
“음?”
“걔 있잖아.”
색욕의 지배자를 뜻하는 말이었다.
관리자도 알아챘는지 금세 반응을 보였다.
“아, 아아. 으흐음.”
“……내가 그 지랄까지 했는데 아직도 정신 못 차렸다고?”
“어, 어떻게 된 거냐면 말이다.”
“관심 없어. 꺼지라 해.”
“계약서까지 써서 그건 좀….”
“계약? 당사자를 빼먹고 무슨 계약을!”
유선우가 발광하려는 때였다. 그는 돌연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하복부가 녹아내릴 듯 뜨거웠다.
“이게 무슨….”
“미안!”
관리자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유선우는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꼈다. 꿈속에서 벗어날 때의 감각이다.
그는 배신감에 물든 눈으로 관리자를 바라봤다. 그녀의 얼굴엔 슬픔과 사죄의 감정이 가득했다.
***
유선우는 눈을 뜨기에 앞서 무게를 감지했다. 무언가가 배 위에 올라타 있었다. 그는 두통에 신음하며 위를 올려다봤다.
“……아이릴?”
기다란 머리카락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밝은 갈색의 그것은 틀림없이 아이릴의 모발이었다.
하지만,
“일어났어?”
눈동자의 색이 달랐다. 바다처럼 파랗던 눈이 요사스러운 붉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너, 너…!”
“하아, 너무 보고 싶었어.”
아이릴이 엎어지면서 유선우의 귓가에 속삭였다. 달콤한 한숨이 그의 정신을 뒤흔들었다. 그는 부르르 떨면서도 기시감을 잡아챘다.
유선우는 이와 같은 경험을 겪은 적이 있었다.
동료였던 마법사가 건넨 묘약을 마셨을 때.
또 흡혈여왕에게 매혹을 당했던 때.
지금은 전과 비교도 안 될 만큼 강렬했으나 증상 자체는 비슷했다. 떠올리고 나서야 상황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너 설마, 미친!”
“선우야. 나 보고 싶었지?”
“꺼져, 꺼지라고오오오!”
유선우는 빽빽 외치면서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불가능했다. 손가락마저 제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그에게 가능한 일이라곤 아이릴을 노려보는 것뿐이었다.
아이릴의 탈을 쓴 색욕의 지배자를.
“그렇게 뚫어지라 보면, 나, 히히….”
그녀가 제 입술을 핥았다. 고혹적이기 그지없는 모습이었으나, 유선우는 속으로 눈물만 삼켰다.
‘내가 언젠간.’
관리자 새끼들의 머리채를 뜯어주고 말리라.
지금 느끼는 무력감을 절대로 잊지 않으리라.
하늘 위의 존재들을 발아래에 두어서, 그 누구도 감히 멋대로 휘두르지 못할 존재가 되리라.
빌어먹을 새끼들…….
***
일이 끝난 뒤.
유선우는 색욕의 지배자, 아브나바와 나란히 앉았다. 아이릴의 몸을 빌린 그녀는 아직 떠나지 않은 상태였다.
“안 꺼져?”
유선우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날 선 말투에도 아브나바는 싱글벙글 웃음만 지었다.
“뭐 궁금한 건 없니?”
“네가 언제 꺼질지가 제일 궁금해.”
“음. 지금도 갈 수는 있어.”
유선우는 성을 내려다가 한숨만 푹 내쉬었다. 이런 타입에게 화를 내봤자 쓸데없는 감정 소모다.
‘욕보단 매가 약이지.’
훗날에 죽도록 때리기로 마음먹었다.
기약 없는 무모한 다짐은 아니었다.
그는 귀환한 뒤로도 강해지고 있었으니까.
강인한 육체와 관리자에게서 얻어낸 마나.
전자는 거의 한계에 다다랐으나, 후자는 한창 발전하는 중이었다.
머지않아 큰 성취를 거두리라는 확신도 있었다. 계기가 무엇이 될지는 몰라도.
머리가 식자 의문이 몇 떠올랐다. 부자연스러운 상황인 만큼, 의문이 없을 리가 만무했다.
“지금 그러고 있는 거, 본인은 알아?”
“당연하지. 합의도 봤어. 한 번만 빌리겠다고.”
“……빌린다고.”
유선우의 낯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빌려서 그렇고 그런 짓을 할 줄은 아이릴도 모르지 않았을까. 보면 볼수록 불쌍한 여자다.
“혹시 몸에 무리 가는 건 아니야?”
“자상하네. 걱정도 다 하고.”
“그야 뭐. 걱정은 하지.”
쓸모 있는 인물은 아끼는 게 당연하다. 이런 어이없는 일로 아이릴이 망가져서는 안 되었다.
“이 아이랑은 상성이 좋아서. 권능도 대부분 제한했으니 괜찮아.”
“하긴. 잘 맞으니까 성녀까지 시켰겠지.”
“응, 응.”
고개를 끄덕이며 유선우를 빤히 바라본다. 꿀이 떨어지는 듯한 시선. 유선우는 부담스러워 눈을 피한 채로 물었다.
“근데 이런 것도 할 수 있으면서 왜 악마한테 발렸대. 네가 쓸어버렸으면 됐잖아.”
“가능했으면 그랬겠지만… 말했잖니. 권능을 제한했다고.”
아브나바가 가져온 권능은 극히 일부였다. 매료와 속박 정도가 전부. 전투력 자체는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더 끌어냈다간 콱, 하고 몸이 터질지도 몰라.”
“잘 좀 대해줘라,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