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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자님 뭐하세요-72화 (72/179)

제 72화

성녀님 일하신다

“마력을 얻고 싶다고요?”

“네. 선우 씨가 저번에 말했었잖아요.”

서울로 향하는 길. 박아연이 용건을 꺼냈다.

신호 탓에 정차해있음에도 그녀는 차창 밖만 바라봤다. 눈을 마주치기가 창피했다.

“마력, 음.”

유선우는 턱을 매만지며 사색에 잠겼다. 딱히 특이한 고민은 아니었다.

자기가 너무 약하다.

그러니 강해지고 싶다.

맥이 빠질 정도로 단순한 귀결이다.

강해지기 위한 수단으로 박아연이 점찍은 것은 마력의 습득이었다. 유선우의 강함이 마력에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에 대해서는 이전, 각성자 심사 때 들은 바가 있었다.

하지만 본인이 생각하기엔 멍청한 소리였다. 유선우의 입에서 시큰둥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뭐 하러요?”

“그야….”

“아니, 좀 세졌으면 좋겠다. 그건 알았어요. 근데 굳이 돌아갈 필요가 있나?”

“갈수록 정체되고 있는 것 같아요. 마나 수치도 그렇고, 제 한계가 보이는 느낌이에요.”

박아연은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자부심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B급 중에서도 약한 편은 아니었다. 경력이 짧지는 않았기에 실적도 나름 많았고.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무력감만이 가득했다. 자신감은 갈가리 찢어졌고, 자존감도 떨어진 상태. 그러니 창피함을 무릅쓰고 유선우에게 매달리는 것이었다.

“제가 너무 조급하게 구는 걸지도 모르겠네요.”

박아연이 실없이 웃었다. 자조 섞인 웃음이었다.

반면 유선우는 심드렁할 따름이었다.

“무슨 소리래. 약하면 당연히 급해야죠.”

“네?”

“자기가 약한 걸 알아야 정신을 차려요. 그런 의미에서 박아연 씨는 이제야 정신 차린 거고요.”

유선우가 고개를 까딱이곤 말을 이었다.

“여태까지 안 물어보고 뭐 했어요?”

“염치없는 거잖아요. 선우 씨가 고생해서 얻은 걸 날로 먹겠다는 건데.”

“약해빠진 걸 부끄러워해야죠. 늑장 부리다가 죽으면 어쩌려고.”

따끔한 일침이었다.

유선우가 보기에 헌터들의 태반은 독기가 모자랐다. 매번 몬스터와 드잡이질하니 배짱이나 책임감이야 있겠지. 하지만 향상심은 부족했다.

그나마 예외는 강창민과 이성결 정도일까. 다만 둘은 싸움 자체를 좋아하는 별종이었다.

“하여튼 얼굴에 철판 까는 건 기본이에요. 창민이처럼요.”

“선우 씨도 그랬나요?”

“네. 이곳저곳 배우러 다녔었죠.”

개뿔도 도움이 안 돼서 혼자 했지만.

진실은 가슴 속에 묻어두었다.

“하여튼 본론으로 돌아가서, 마력은 포기해요.”

“그렇게 까다로워요?”

“그것도 맞는데, 별 도움도 안 될걸요. 사실 신성력이고 마력이고 다 필요 없고, 마나가 훨씬 좋아요.”

아이릴이 들었으면 화형을 부르짖을 소리였다. 다행히도 그녀는 유선우의 무릎에 누워 고롱고롱 잠들어 있었다.

“그럼 저는… 그냥 재능이 없는 건가요?”

“네?”

“훈련 빼먹은 적, 단 하루도 없어요. 던전 돌아다닐 때 빼고는요. 근데 성과는 없고, 뭐가 문젠지도 모르겠어요, 이젠.”

“음.”

유선우로선 공감이 가질 않았다. 그는 만족할 수준에 이르기까지 막혀본 기억이 없었다.

벽을 마주한 경험이야 있었으나 아주 잠시뿐. 밥 먹으면 깨달음을 얻었고, 변을 보다가 벽을 넘어서곤 했다.

그래도 아는 바가 없지는 않았다.

그에게는 대성한 제자가 있었으니까.

힘없는 고아가 성장해 작위마저 얻어낸 일대기.

모든 과정을 지켜본 경험이 있으니 조언은 해줄 수 있었다.

“재능 없었으면 B급도 못 됐겠죠. 다음에 봐줄게요. 이러면 너무 겉치레 같나?”

“……선우 씨는 이런 일로 두말 안 하는 거 알아요. 고마워요.”

“고맙긴 무슨. 저도 아까 징징댔잖아요.”

장난스러운 대답에 박아연이 쿡쿡거렸다.

“신선하긴 했어요. 귀엽기도 했고. 오랜만에 연하처럼 보이던데.”

“참나. 그럼 누나라고 불러줄까요?”

“생각해 보고요.”

고작 한 시간가량의 만남.

짧은 시간이었고, 예정에도 없던 일이었다.

그런데도 박아연의 눈길에 담긴 감정은 달라져 있었다.

***

청일 본부에 도착한 시각은 5시 경이었다.

아침이 다가오고 있었기에 오래 끌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대놓고 통행을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문제는 곳곳에 달린 CCTV. 게다가 야간 경비를 서는 헌터들의 눈을 피해야만 했다.

평소에는 해봤자 한두 명이 전부였지만, 지금은 총 다섯의 헌터가 배정되어 있었다. 소피아의 경호를 위함이었다.

유선우는 최근 회사에서 생활했기에 이러한 정보에 빠삭했다. 설명을 들은 박아연이 물었다.

“어쩔 거예요?”

“생각해둔 건 있어요.”

“혹시 다 때려 부수고 그런 건 아니죠?”

“제가 그렇게 막 나가지는 않는데.”

유선우는 차 문을 열고 오른팔을 뻗었다. 그는 손목의 패션 염주에 신경을 기울였다.

원하는 이미지를 머릿속으로 그린다. 그에 반응한 흑철이 형태를 순식간에 바꾸었다.

변형된 결과는 대형 캐리어.

캐리어의 한 중앙에는 숨구멍이 뚫려 있었다. 어제 운반용으로 써먹었던 그 모양 그대로였다.

“이야. 내가 페이밍보단 잘 쓰는 것 같다.”

유선우는 자기 실력에 새삼 감탄했다.

흑철을 사용하는 데 익숙해지긴 한 모양이었다.

“야. 들어가.”

“…저 안으로요?”

지목당한 아이릴의 낯이 찌푸려졌다.

유선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재촉했다.

“시간 없어. 빨리 들어가.”

“저 성녀인데….”

“여기선 아무도 안 알아줘.”

아이릴이 한참을 머뭇거리자 유선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만 고생해줘. 연극 실컷 보여줄게.”

“그건 아까 말했잖아요.”

“그럼 사달라는 거 다 사줄게. 나 돈 많아.”

떵떵거리는 말에 아이릴은 머리를 굴렸다.

‘같이 외출한다는 소리지?’

데이트와 다름없다. 그건 연애에 환상을 가지고 있는 아이릴에겐 설레는 일이었다.

지구에 대해 잘 모르기는 하나 또 색다른 재미가 있을 터. 상상만 해도 입가가 씰룩거렸다.

“이것도 약속한 거예요. 저, 안 까먹으니까요.”

아이릴은 웃음기를 억누르며 캐리어로 들어갔다. 그녀는 인터넷 쇼핑에 대해 무지했다.

“됐다. 갑시다.”

주차장을 나서서 본 건물로 향했다.

병실에는 금세 도착할 수 있었다. 먼 거리도 아니었고, 헌터들이 길을 가로막지도 않았다. 캐리어에 대해선 옷가지들을 죄다 가져왔다고 둘러댔다.

수상쩍어하긴 했으나 통과는 간단했다.

신뢰가 바탕이 된 동시에, 애초에 그들의 힘으론 유선우를 막을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병실로 들어선 뒤. 박아연이 탄성을 흘렸다.

“선우 씨. 진짜 아무 데나 프리패스네요. 회사 한정이긴 해도.”

“저도 여자 화장실은 못 가요. 탈의실이랑 샤워실도요.”

소곤거린 유선우가 캐리어를 열었다.

웅크려 있던 아이릴이 끙끙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잠시간 비틀거리다가 캐리어에 발길질을 했다.

“두 번 다신 들어가고 싶지 않아요.”

아이릴은 불평하면서 결린 어깨를 풀었다. 그녀가 되찾은 자유를 만끽하고 있을 때였다.

“누, 누구죠?”

소피아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소리에 힘이 없어 상태가 좋지 않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저예요. 깨어있을 줄은 몰랐네.”

“선우?”

경계하던 기색이 단번에 누그러졌다.

유선우는 아이릴에게 시선을 줬다. 불빛 하나 없이 캄캄했으나 둘의 시야에는 막힘이 없었다.

눈길을 알아챈 아이릴이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녀는 병상에 누운 소피아를 요모조모 살펴봤다.

“흐음.”

“어때?”

“또 여자네요.”

“어쩌라고.”

“그냥 그렇다고요. 누가 뭐래요?”

아이릴이 투덜거리다가 인상을 팍 찌푸렸다. 그녀가 질색하며 코를 틀어막았다.

“아으, 냄새.”

“…선우. 이 사람 누구죠?”

소피아의 눈빛에 언짢음이 어렸다. 금수저인 그녀는 이런 무례에 대한 내성이 없었다.

“힐러요. 슬슬 퇴원할 때도 됐죠.”

“어, 농담하는 거예요?”

“아닌데요. 야, 어떠냐고.”

“저주인가요? 여기도 흑마법사가 있나 보네요.”

아이릴이 코맹맹이 소리로 말했다. 제 딴에는 심각한지 손짓으로 바람까지 불어댄다.

“아우, 똥내.”

“또, 똥내?”

“죄송한데 입 열지 말아 주시겠어요? 토쏠려서.”

폭언에 소피아가 입을 꾹 다물었다. 요구에 응한 게 아니라, 단순히 어이가 없었다.

좀 만족했는지 아이릴의 낯이 풀어졌다. 그녀는 그대로 코를 막은 채 유선우를 쳐다봤다.

“이대로 정화하면 되나요?”

“어제 십자가 들고 하던 정화는 아니겠지?”

“그, 그건 물리적 정화고요. 어쨌든!”

“얼마나 걸리는데?”

피식거린 유선우가 물었다. 아침이 오기 전에 빠르게 처리하고 돌아갈 필요가 있었다.

아이릴은 대답 대신에 하품을 내뱉었다. 어제 무리를 한 탓인지, 어째 피곤함이 가시질 않았다. 그녀는 졸린 눈을 비비며 소피아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푸석푸석하네요. 여자는 머릿결이 생명인데.”

“이봐요, 당신…!”

“루 비아 세실라 포르티오….”

영창이 시작되면서 황금의 광채가 뿜어졌다.

유선우는 헐레벌떡 움직여 커튼을 쳤다. 바깥에서 누군가 본다면 잡음이 생길 우려가 있었다.

하지만 수고는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그가 커튼을 전부 쳤을 때, 빛이 사그라졌다.

“끝났어요.”

“벌써?”

“네. 덤으로 생명력도 불어넣었어요. 그래도 갑자기 막 움직이면 안 돼요. 몸무게 같은 건 그대로니까.”

해주를 마친 아이릴이 담담하게 읊었다. 농담하는 기색은 없었다. 워낙 창졸간에 벌어진 일이었기에 유선우마저도 당황했다.

“누가 그러던데. 되게 정교한 저주라고.”

“굳이 따지자면 고위급에 가깝긴 했죠.”

“근데 이렇게 쉽게 풀 수 있어?”

얼떨떨하게 묻자 아이릴이 콧방귀를 뀌었다.

“그냥 되는 걸 어쩌라구요.”

“……재수 없네.”

“당신 입버릇이잖아요.”

“내가 그랬다고?”

“기억 안 나면 됐고요. 어쨌든 이쯤이야 쉽죠.”

유선우도 두 번은 캐묻지 않았다.

성녀가 괜히 성녀인가. 만병을 치료하고, 떨어진 사지도 붙여낼 수 있는 게 아이릴이다.

유선우는 그녀가 살려내지 못한 이를 본 적이 없었다. 이미 죽은 사람을 제외하고서는.

‘얘만 한 재능충도 몇 없긴 하지.’

아이릴이 없었더라면 자신 역시 진작 죽었을 터. 만약 죽지 않았더라도 귀환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으리라.

미소를 머금은 유선우가 소피아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녀는 자기 몸을 미친 듯 더듬고 있었다. 치료됐다는 말이 믿어지지 않는 듯했다.

“이게 어떻게 된….”

“누나. 제 말 잘 들어요.”

“네, 네?”

유선우가 소피아에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이거 빚이에요. 이해하죠?”

낮은 목소리에 소피아의 낯에서 혼란이 걷혔다. 아무리 갑작스럽다 한들 알아듣지 못할 그녀가 아니었다.

“제가 저 힐러 데려오려고 여러모로 고생을 좀 했어요. 귀찮은 약속까지 했고요.”

“…저한테 뭘 바라는 거죠?”

“특별한 건 없어요. 그냥 제 성의를 무시하지만 않아 줬으면 하는 거지.”

“성의…….”

소피아가 침을 꼴깍 삼켰다.

“그래요. 성의. 제가 설마 대가를 바라서 그렇고 그런 짓까지 했겠어요? 누나 생각해서 한 거예요. 제 말, 무슨 소린지 알겠죠?”

소피아는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만족한 유선우가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우선 부탁이 하나 있는데. 오늘 일은 조용하게 묻어줬으면 해요. 그게 서로한테 좋을 테니까.”

“그, 그러면 부자연스럽지 않을까요?”

당연한 결론이었다. 오늘내일하던 사람이 느닷없이 쾌차했다니. 사정을 아는 이가 몇 없다손 쳐도 잡음이 나올 게 분명했다.

유선우는 잠시간 고민하다가 답을 내어줬다.

“딜런 씨랑 말 맞추세요. 정확히는 설명하지 말고, 제가 무슨 약이라도 가져왔다던가.”

입막음에 특히나 신경을 기울이는 기색이다. 그를 통해 소피아는 나름대로 사정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해했어요. 저 사람한테 뭔가 문제가 있는 거죠?”

그녀가 눈짓으로 아이릴을 가리켰다. 자세한 건 몰랐지만, 유선우의 의도만큼은 분명하게 느껴졌다.

“혹시 제가 도울 수 있다면….”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예요. 이 경우에는.”

일축한 유선우가 소피아의 머리칼을 어루만졌다. 윤기가 없어 초라하기까지 한 금발. 금세 화사하던 모습을 되찾을 터였다.

유선우는 흐뭇한 속내를 감추고 말했다.

“이건 이 자리에 있는 넷밖에 모르는 사실이에요. 무슨 소릴까요?”

“…발설하면 바로 특정된다는 뜻이겠죠.”

“그래요. 제가 누나한테 실망할 일이 없었으면 좋겠는데. 믿을게요.”

승낙이냐, 거절이냐의 제안이 아니었다.

성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일방적인 요구.

다행인 점은 소피아에게도 해가 되진 않는다는 것이다. 이 정보를 써먹을 방법은 있겠지만, 그녀는 은혜를 저버릴 생각은 없었다.

“명심할게요. 혹시 모르니 하루나 이틀 정도는 누워 있을게요.”

“고마워요. 퇴원할 때 올 테니까 연락해요.”

그제야 유선우도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볼일을 끝마친 그가 등을 돌리려 했다.

“그럼 전….”

“잠깐만요.”

소피아가 한 손으로 유선우의 팔목을 붙잡았다.

유선우가 의아한 기색을 내비치자, 소피아가 움직였다.

그녀는 다른 손으로 유선우의 뒤통수를 잡았다. 끌어당김과 동시에 그녀도 얼굴을 들이밀었다.

“웁…!”

입술이 살짝 맞닿았다. 한순간의 접촉을 끝으로 소피아는 순순히 물러났다.

‘이럴 줄은 몰랐는데.’

흥미 반, 영입 욕심 반으로 무작정 찾아온 한국.

이 작은 나라에서 뜻밖의 패배를 겪었다.

상대의 전력을 끌어내지도 못한 채로.

게다가 패배를 안겨준 장본인에게 두 번이나 목숨을 구원받았다.

무력하게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는다는 것.

그건 모자람 없이 살아온 그녀에게 특별하게 와닿았다. 가족이나 돈으로 고용된 이들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그 모든 경험이 소피아의 머릿속에 새겨져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가슴에 불이 붙기에는 충분한 장면들이었다.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다음에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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