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1화
담담하게
“어, 어떻게 된 거예요?”
“콧물부터 닦읍시다. 저 슬슬 화나려 하는데.”
박아연을 상황을 이해하고자 머리를 굴렸다.
얼핏 보니 둘 사이의 주도권은 유선우에게 있었다. 세뇌 같은 얼토당토않은 일은 아니라는 뜻.
그녀는 어쩐지 못 볼 꼴을 보인 듯해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유선우랑 있을 때면 매번 이상한 착각만 하는 것 같았다.
“저 안 울었어요.”
“그러시겠죠. 사진이라도 찍었어야 했는데.”
“우는 걸 왜 찍어요. 변태도 아니고.”
“왜요? 안 울었다면서.”
“…지금 놀리는 거죠?”
“그럼 아니겠어요?”
유선우가 실실거렸다. 덕분에 박아연도 남은 걱정마저 덜어낼 수 있었다. 개뿔도 의도한 것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10분 정도가 지난 뒤.
거실에는 적막한 공기가 감돌았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아이릴이 유선우를 콕콕 찔렀다.
“저건 뭐죠?”
아이릴이 박아연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녀는 아까 들었던 말을 아직도 담아두고 있었다.
“직장 선배.”
“대, 대단한 분이셨네요.”
기운은 대단치도 않아 보이는데 유선우의 선배라니. 그녀로선 쉬이 믿을 수가 없었다.
뚫어지라 보는 시선에 박아연이 헛기침을 했다.
“저, 저기. 어떻게 된 거예요? 둘이 싸우다 친구라도 먹었나.”
“만화 너무 보셨는데. 앞으로 조심하세요. 싸우다 말고 친한 척하는 놈들은 언젠간 꼭 뒤통수치거든요.”
“그런 치들이 많기는 했죠.”
아이릴이 한마디 덧붙였다. 내버려 뒀다간 계속해서 맞장구를 칠 기세다.
“과자 줄게. 닥치고 있어.”
“제가 고작 먹을 거에 낚일 것 같나요?”
유선우가 칙촉을 한 아름 꺼내왔다. 봉지를 까서 입에 넣어주니 아이릴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괘, 괜찮네요.”
“먹고 이 닦아.”
“전 이 안 썩거든요. 성녀 특권이에요.”
“냄새는 나.”
티격태격하는 장면에 박아연의 낯이 벙쪘다.
보면 볼수록 의문만 드는 관계다.
“…저, 선우 씨. 하나 물어봐도 되나요?”
“하나 아니어도 돼요.”
“그럼 우선….”
질의응답은 제법 오랫동안 이어졌다.
아이릴이 괴물인지 사람인지. 둘은 어떤 사이인지. 왜 죽였다고 거짓 선언을 내뱉은 것인지.
모든 질문이 유선우가 살아온 삶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러니 그는 자신이 이계에서 보낸 5년을 요약해서 읊었다.
그중에서 관리자의 정보는 생략하고 각색했다.
지구가 이 꼴이 난 이유와 직결되는 화제였으니.
관리자가 아니라, 박아연을 배려한 것이었다. 들어봤자 좋을 건 하나도 없었다. 단순히 열만 받을 뿐이지.
간략하게 보면 5분도 채 걸리지 않을 대화였다.
소환되었다, 몬스터를 죽였다, 끝내 돌아왔다.
세세한 것까지 떠들면 몰라도, 대략적인 틀을 설명하는 데는 5분만으로도 충분했다.
오래 걸린 이유는 순전히 박아연에게 있었다. 그녀가 혼란스러워하는 탓에 몇 번이나 말을 멈춰야 했다.
정리된 후에는 복잡한 시선만이 오갔다.
마지막 질문이 박아연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당신은 대체 누구죠?”
“어, 음. 뭐라고 해야 하나.”
유선우는 머쓱하게 볼을 긁었다. 그는 여태 자신을 이름 외의 단어로 정의해본 적이 없었다.
남들이 신창이니 개새끼니 부르긴 했지만… 본인으로선 와닿지 않았다고 할지.
잠시간 고민해보니 의의로 금세 답이 나왔다.
“귀환자. 이거 좋네요.”
박아연은 귀환자라는 말을 반복해 중얼거렸다. 말뜻을 곱씹는 듯했다. 한참이 지나 그녀가 크게 한숨을 토해냈다.
“그래요. 이제야 좀 이해가 됐어. 여태 거짓말한 적 없다더니, 진짜였네요.”
“어, 믿네요?”
뜻밖이라는 어조에 박아연이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더한 생각도 많이 했었거든요.”
“예를 들자면요?”
“어디 무협고수인가 싶기도 했고, 심지어는 한 100살쯤 더 먹고 왔나 싶기도 했죠. 무슨 맥 뚫리고 젊어지는, 뭐 그런 거 있잖아요.”
엉뚱한 발언에도 유선우는 웃어넘기진 못했다. 어조가 마냥 장난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빠삭하시네.”
“조사해봤거든요.”
“허, 저 때문에요?”
대단한 정성이다. 박아연이 어색하게 머리카락을 꼬았다.
“도, 도움도 될까 싶었죠. 실제로 만화 쪽 참고하는 헌터도 몇몇 있고.”
“그중에 제가 아는 놈 하나 있을 것 같은데. 어쩐지 허공섭물이고 뭐고 하더만.”
가벼운 웃음이 흘렀다.
뒤이어 박아연이 눈짓으로 아이릴을 가리켰다. 그마저도 조심스러운 게, 두려움은 여전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저분이랑은 무슨 관계예요?”
“말했잖아요.”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
“아. 사적으로요?”
알아들은 유선우는 골똘히 고민했다. 의외로 대답하기가 힘들었다. 연인은 절대 아니고, 솔직히 친구도 아니라 생각했다.
결론은 쉬이 내려지지 않았다. 아이릴은 아닌 척하면서도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녀가 눈을 반짝거리고 있기를 잠시, 대답이 나왔다.
“주치의요.”
“그게 뭐예요!”
“왜? 맞잖아.”
거리감 느껴지는 답이다. 아이릴이 입술을 샐쭉 내밀었다. 과민반응인 감은 있어도 어쩔 수 없는 일. 지구에서 그녀가 의지할 사람은 유선우뿐이었다.
토라진 모습에 유선우가 혀에 기름을 발랐다.
“내가 아플 때마다 봐줬으면 좋겠다는 거지.”
“그, 그게 무슨….”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능글맞은 목소리다. 박아연이 듣기엔 헛웃음만 나왔으나 당사자는 아닌 모양이었다. 어느새 아이릴의 귀가 홍시만큼 빨개져 있었다.
박아연은 어이가 없어 유선우를 곁눈질했다. 그는 마치 우습다는 것처럼 히죽거리고 있었다.
‘참나.’
묘한 관계다. 나빠 보이지는 않지만.
피식거린 박아연은 문득 의문을 떠올렸다. 유선우의 의도가 궁금해졌다.
“근데 왜 저한테 털어놓은 거죠?”
“혹시 듣기 싫었어요?”
“그건 아닌데, 여태까지 숨겨왔었잖아요.”
“숨긴 적 없는데요. 가족 빼고요.”
“매번 딱딱 선 그을 때는 언제고.”
“제가 캐묻지 말라고 뭐 경고라도 했었나요? 기억 안 나는데.”
“아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인상을 쓴 박아연이 예시를 들려고 했다. 하지만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맥 빠지는 소리뿐. 아무리 떠올려 봐도 짚이는 구석이 없었다.
유선우에게서 이따금 선이 보이기는 했지만, 박아연은 여태 넘어보려 하지를 않았다. 그러니 딱 잘라서 묻지 말라는 소릴 들은 적도 없었다.
“어, 어라?”
“거봐요. 숨긴 적 없죠?”
유선우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물론 그는 기존의 지인 앞에선 입을 다물고는 했다. 그들의 머릿속엔 5년 전의 유선우가 남아 있으니까. 서서히 인상을 바꿔 가는 것이 낫다고 여겼다.
한편 귀환한 후로 만난 이들이 판단하는 것은 지금의 자신이었다. 그들은 옛적의 유선우를 모르니 딱히 숨길 이유도 없었다.
그래서 때때로 이런저런 얘기를 흘리곤 했었다. 박아연에겐 마력에 관해서, 이성결에겐 제자에 관해서.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특별히 조심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 속을 모르는 박아연은 당혹스러울 따름이었다. 여태 궁금해도 꾸역꾸역 참아왔건만. 이렇게 듣게 되니 허무할 지경이었다.
“하아. 각성자 심사 때라도 말해주지 그랬어요.”
“귀찮잖아요.”
“아, 네.”
박아연이 떠름하게 대꾸했다.
“사실 숨기진 않더라도 이렇게 구구절절 말하는 걸 좋아하지도 않아요. 뭐 재밌는 얘기라고.”
“……이해해요. 안주 삼기는 좀 무겁네.”
“듣고 나니 어때요?”
그리 묻는 유선우의 눈빛은 식어 있었다. 그로서도 털어놓는 것은 처음이었다. 대수롭지 않게 말하긴 했으나 마냥 담담할 수는 없었다.
예상외로 박아연의 반응은 미묘했다.
“그냥 신기하네요.”
“그게 다예요?”
“네, 뭐.”
쉽사리 긍정한 박아연이 생글거리기 시작했다.
“아니다. 오히려 위로도 받은 것 같아요.”
“위로라니, 갑자기 웬.”
“선우 씨도 날 때부터 강하지는 않았다는 거잖아요. 사실 저, 상담받으러 왔거든요. 완전 반대가 되긴 했지만.”
상담. 유선우는 아까 전 전화를 기억해냈다. 용건이 있는 것은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무슨 일인데요?”
“이따가 얘기할게요. 하여튼 별로 신경 안 써요.”
“진짜 아무 생각도 안 들어요?”
“말했잖아요. 신기한 게 전부라고.”
“이런 말 하긴 뭐한데. 고문도 숱하게 해봤고, 사람도 많이 죽였어요, 저.”
살벌한 소리를 뱉는 유선우의 모습은 어딘가 이상했다. 눈에 띄게 흐트러지진 않았지만,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박아연은 그게 어째선지 아이 같이 느껴졌다. 큰 잘못을 저지른 아이가 우물쭈물하는 것처럼. 그녀로서는 처음 보는 여린 모습이었다. 그녀의 기억 속에서, 유선우는 항상 당당했으니까.
“당연히 그랬겠죠. 근데 전 세상에 죽어도 싼 놈은 있다고 믿는 편이라서. 오히려 차고 넘치지.”
“상대적인 거잖아요. 바깥에선 쓰레기여도 안에선 좋은 가족일 수도 있는 거고.”
“그런 복잡한 건 저도 몰라요.”
박아연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어쨌든 제가 그런 일로 선우 씨를 꺼림칙하게 보지는 않을 거예요. 만약 그렇게 된다 쳐도 앞으로가 문제인 거지, 예전이 계기가 되진 않겠죠. 약속할게요.”
“…….”
“그리고 오지랖 좀 부려도 될까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침묵을 수긍으로 받아들인 박아연이 말했다.
“고생 많았어요. 선우 씨.”
정적이 내리깔렸다.
유선우는 크게 감격하진 않았다.
꼴사납게 울고불고 난리 치지도 않았고.
그래도 술렁이던 마음은 잠잠해졌다.
고생 많았다. 별것도 아닌 말이다.
지금처럼 털어놓았다면 가족이나 최현석, 차세정도 해줬을 말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듣고 싶지는 않았다. 그들은 예전의 유선우를 알기에, 슬퍼하면서 위로해줬을 테니까.
그게 싫었다.
위로를 받는다면 담담하게 받고 싶었다.
박아연이 해주었듯이, 아무렇지 않게.
이내 유선우가 실소를 흘렸다.
“오지랖 맞네요.”
“그, 그래서 물어봤잖아요.”
박아연이 쑥스러운 듯 시선을 피했다. 그녀를 보는 유선우의 눈빛에 온기가 감돌았다.
두 남녀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흘렀다.
옛적에 뒷전으로 밀린 아이릴이 툴툴거렸다.
“둘이 뭐야. 선우, 아까는 저 때문에 고생하는 거라면서요.”
“그, 그랬지.”
유선우는 답지도 않게 당황했다. 헛기침해 분위기를 환기한 그가 본론을 꺼냈다.
“하여튼 얘 때문에 부른 거예요. 박아연 씨도 짐작했겠지만.”
“그렇긴 한데… 정확히 뭘 해야 하나요?”
“그냥 편의만 봐줬으면 해요. 가끔 차 태워준다거나 이것저것.”
박아연이 턱을 매만지며 아이릴을 살펴봤다.
“혹시 머리카락 자르면.”
“절대 싫어요.”
“…뭐, 여자니까요.”
이해하는 척 말했으나 이해되진 않았다. 머리카락이 소중하긴 해도 정도가 있지.
종아리까지 닿는 장발이면 매일매일 귀찮아서 애착도 갖지 못하리라.
그녀는 침음성을 흘리다가 문득 떠올렸다.
“그, 좀 특이한 능력자가 있다던데.”
“어떤 능력이요?”
“변이인지 뭔지 그러더라고요. 들어봤어요?”
“아뇨. 저만큼 귀 어두운 사람도 몇 없을걸요.”
유선우가 부정하자 박아연이 설명을 덧붙였다.
“간단히 말해서 변장이에요.”
“별 능력자가 다 있네요.”
“빛의 굴절을 이용한 뭐시기라던데. 원리는 잘 모르겠고, 관심 있어요?”
“네. 찾아줄 수 있어요?”
“그 정도는 뭐. 저도 나름 발 넓거든요.”
박아연이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막힘 없이 잘 풀리는 상황. 유선우는 안심은커녕 불안감을 느꼈다.
‘이렇게 쉽게 갈 리가 없는데.’
5년 전부터 이어져 온 징크스.
흐름을 타면 꼭 한 번씩 끊어진다.
그런데 지금은 퍼즐처럼 딱딱 맞아떨어지고 있으니. 마냥 좋게 여기기엔 유선우는 여태 물 먹은 기억이 많았다.
‘일단 준비만 해두자.’
어떤 일이 생길지 예측할 수는 없다. 최선책은 대비하는 것뿐.
유선우는 걱정을 지워내곤 베란다를 확인했다. 밤이 긴 계절이 오고 있기 때문인지, 새벽의 끝자락은 여전히 어두컴컴했다.
“박아연 씨, 상담 있다고 그랬죠?”
“네? 네. 말하기 창피하지만.”
“그럼 운전하면서 해요.”
유선우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뜬금없는 발언에 박아연이 머리를 갸웃거렸다.
“운전이요?”
“네. 저희 좀 태워주세요.”
“상관은 없는데, 어디 가는데요?”
“서울이요. 저희 본사로.”
“이 시간에 거기를 왜….”
유선우는 대답에 앞서 아이릴을 쳐다봤다. 제대로 꽂혔는지 또 과자 봉지를 까고 있었다.
“야. 그만 먹고 일어나. 살쪄.”
“전 살 안 찌거든요. 체질이에요.”
“그럼 챙겨가든가.”
유선우의 말에 아이릴이 반색했다. 그녀는 사양도 없이 한 손에 대여섯 개를 쥐었다.
“가요!”
아이릴의 유일한 쓸모를 다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