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0화
아이릴
실랑이 끝에 유선우는 자유를 쟁취해냈다. 그의 눈앞에는 하나의 메시지가 떠올라 있었다.
[만년설의 수호자가 이제 갔다고 말합니다.]
“짜고 치는 거 아니지?”
유선우는 확인 차 물었다. 아무래도 직접 알아볼 수가 없으니 확신하기가 힘들었다.
[만년설의 수호자가 별로 친하지도 않다며 웃습니다.]
본인이 들으면 퍽 서운할 말이다.
그렇다고 거짓말 같지는 않고.
애초에 관리자는 친구가 없지 않은가.
유선우가 눈알을 굴려 아이릴을 쳐다봤다.
그녀는 거실 구석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굉장히 의기소침한 기색이었다.
유선우가 머뭇머뭇 다가갔다. 아이릴이 실금한 뒤로 다시 씻었다지만 영 거북했다.
“아이릴?”
“…왜요.”
고개도 안 돌리고 훌쩍인다. 서러울 법도 하다. 관리자에게 이상한 짓을 당해 실금한 와중, 목에 창까지 들이댔으니. 유선우는 실제로 찌를 생각은 없었지만 이건 감정의 문제였다.
‘사실 자업자득이긴 한데.’
위로는 해줄 필요가 있다. 이 여자와는 양호한 관계를 유지하는 편이 좋으니까.
실력 좋은 힐러는 귀중한 법. 대체재가 있다면 모르겠으나 지구의 힐러들은 죄다 허접하다.
‘내가 굽혀야지. 부탁할 것도 있으니까.’
다행히도 방법은 알고 있었다. 이성과의 피부 접촉을 극단적으로 꺼리는 여자. 하지만 허용하는 게 아예 없지는 않다.
“머리카락 만져도 돼?”
“잘도 그런 말 나오네요.”
“안 돼?”
아이릴이 잠시간 침묵했다. 숙이고 있던 고개가 더 내려가더니, 이내 허락이 떨어졌다.
“…잠깐만이에요.”
“고마워.”
유선우는 상냥하게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더럽게 긴 머리인데도 머릿결은 비단과도 같았다. 평소에 신성력까지 쏟아부어서 관리하기 때문이다.
아이릴은 자신의 머리카락에 괴상할 정도의 자부심을 품고 있다. 그러니 자부심을 만족시켜주면 될 뿐이다.
“더 예뻐졌네. 혹시 그거 아직도 써? 내가 준 빗 있잖아.”
“그, 그럼 안 되나요? 버리기는 아깝잖아요.”
“아니, 고맙다고.”
잔잔한 웃음에 아이릴의 귀가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유선우의 상냥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유선우는 창술을 단련할 때나 싸울 때는 미친 사람이나 다름없었고, 휴식할 때도 항상 날카로운 태도를 유지했었다.
‘사람이 2달 만에 이렇게 바뀌는구나.’
어색하지만 괜찮다. 좋은 변화다. 그에게도, 자신에게도. 아이릴의 입가가 춤추듯 들썩거렸다.
반응을 전부 지켜본 유선우가 속으로 폭소했다.
‘쉽다, 쉬워.’
기름칠 좀 해주면 그냥 넘어온다.
창피하고 꼴값 같긴 해도 재밌긴 했다.
한참을 쓰다듬던 유선우가 물었다.
“아까는 왜 그랬어?”
“……지옥을 체험하고 왔어요.”
“뭐, 어디?”
“지옥이요. 그분께서 그러셨어요. 이곳에 사는 인간들의 상상력이 만들어냈다고….”
그분이란 아마 지구의 관리자일 터. 극존칭까지 쓰고 있는 모습이 퍽 우습다.
‘그런 곳도 있었구나.’
생각해 보면 몬스터도 상상의 산물이었다. 심지어는 천사나 악마도 있었으니 지옥이라고 없을까. 아까 들었던 불가마가 드디어 이해가 갔다.
‘불쌍해.’
말 한마디 실수했다고 지옥까지 다녀오나. 그는 아이릴의 정수리를 쓰다듬으며 화제를 돌렸다.
“하나 부탁이 있는데.”
“뭔가요?”
“별 건 아니고. 치료해줬으면 하는 사람이 있어서.”
아이릴이 몸을 돌려 시선을 맞춰왔다. 그녀의 눈에서는 별다른 의욕이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이 왜 그래야 하냐는 무언의 질문.
유선우로선 예상대로의 반응이었다.
아이릴은 성녀일지언정 호구는 아니다.
정확히는 같은 교인에 한정해서만 호구다.
열정적으로 흑마법사들을 불태웠던, 또 격정적으로 악마들의 심장을 찔렀던 여자. 그게 성녀 아이릴이고, 그녀에게 있어 지구의 사람은 길가의 자갈과도 같은 존재였다.
유선우 또한 말없이 아이릴의 눈을 쳐다봤다. 끝내 그녀가 한숨을 토해냈다.
“가족인가요?”
“아니, 가족이었으면 이렇게 안 했지.”
아마 두들겨 패서 시켰으리라.
찰떡같이 알아들은 아이릴이 뺨을 움찔거렸다.
“그럼요?”
“딱히 아무 사이 아닌데. 따지자면 친구겠네.”
“친구…….”
작게 중얼거린 아이릴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어, 진짜?”
“그 정도야 못 해줄 것도 없죠. 당신 부탁인데.”
개인적인 감정에서 비롯된 말이 아니었다. 단지 받은 은혜에 약소하게나마 답례하는 것뿐.
431-9 차원의 인간들은 유선우의 노고를 알았다. 아이릴은 그것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본 인물이었다.
***
소피아를 찾아가기로 한 시간대는 새벽.
유선우는 아이릴이 입을 옷을 미리 구해뒀다.
선글라스에 모자, 마스크까지 칭칭 싸매고 여성 옷을 사는 행위. 그건 굉장히 특이하면서도 다신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노고 덕분에 아이릴은 지구의 옷을 입을 수 있었다. 그녀는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선택했다.
둘은 새벽 3시가 되어서야 현관문을 나섰다. 입동(立冬)이 열흘이 넘게 지난 지금, 공기는 제법 서늘했다.
아이릴은 팔을 쓰다듬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딱딱한 아스팔트와 희미한 가로등 불. 다음으론 뒤를 돌아 방금 나선 집의 외관을 눈에 담았다.
“신기하네요. 당신도 이런 기분이었겠죠.”
“그보단 무서웠었지. 그땐 쥐뿔도 없었으니까.”
유선우가 씁쓸하게 웃었다. 이계 생활 초기는 그다지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오락은 여기가 훨씬 많아. 너도 맘에 들걸.”
“연극도요?”
아이릴이 눈을 빛냈다. 그녀는 성직자이긴 하나 유희를 멀리해 도를 닦는 쪽은 아니었다. 오히려 삶에 좋은 것이라면 적극적으로 수용하곤 했다.
“실컷 보게 해줄게.”
“약속한 거예요. 저 기억력 되게 좋은 거 알죠?”
“그게 뭐 별거라고. 돈 많으면 여기만큼 살기 좋은 곳 찾기 힘들다.”
유선우의 잔고는 넉넉했다.
문제는 여태 돈을 너무 안 썼다는 것.
막상 집을 나서니 타고 갈 차가 없었다. 택시를 타기엔 아이릴이 너무 눈에 띄고.
“아, 이래서 차를 사야 하는데.”
“차가 뭐예요?”
“말.”
“뺏어 타면 되잖아요?”
“성녀 맞아?”
“아니, 맨날 그랬잖아요. 기사단장 그리폰도 뺏어 탔다가 잃어버리고.”
“그, 그거는 인마. 어? 하도 바빴으니까 그랬지.”
유선우가 변명했다. 하지만 아이릴의 의문은 한층 깊어갈 따름이었다.
“지금도 바쁘지 않나요?”
“맞긴 한데 안 돼. 잡혀가.”
“누가 당신을 잡아가죠?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있는 건가요?”
“…어?”
유선우는 조금씩 설득당하고 있었다. 듣고 보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아니, 아니지.’
애써 미혹을 떨쳐냈다. 아무리 그래도 범죄는 곤란하다.
“하여튼 안 돼. 아오, 서울까지 뛰긴 싫은데.”
“서울?”
“입 다물어 그냥.”
침묵시킨 유선우가 고심에 잠겼다.
차라리 오늘은 쉬고 차를 살까 싶었다.
소피아에겐 미안해도 아주 급하지는 않았으니까.
‘근데 이게 이번 일로 끝날 문제가 아니네.’
그는 아이릴을 집에 감금해두고 싶지는 않았다. 본인 역시 원하지는 않을 테고. 하지만 자유롭게 돌아다니게 둘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매일 같이 돌봐줄 수는 없는 일.
곤란을 타개할 방법은 하나뿐이다.
조력자가 필요하다.
‘조건은 뭐… 입만 무거우면 돼.’
짚이는 인물은 있다. 적합한 사람이 딱 한 명.
미리 지워둔 빚이 있으니 섣불리 입을 열진 않겠지. 이렇게 쓰게 될 줄은 몰랐다만 별수 없다.
‘일단 오늘은 공 쳤네.’
지금 부르기엔 시각이 너무 늦었다. 어떤 직장인이 새벽 3시에 대뜸 부른다고 나올까.
카톡만 보내두려 폰을 꺼냈다. 액정 위로 아이릴의 머리카락이 드리워졌다.
“이게 뭐예요?”
“입 다물고 있으라니까.”
“치.”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고생하는 건데.”
“저 때문인가요?”
“당연하지.”
긍정하니 아이릴이 배시시 웃었다. 그녀의 밝은 모습은 유선우를 싱숭생숭하게 만들었다.
‘역시 내 때랑은 다르네.’
하기야 상황부터가 아예 딴판이었다.
자신과 달리 아이릴은 자기 의사로 넘어온 것.
무엇보다 하나뿐이지만 지인도 있었다.
그밖에도 이런저런 요소에서 차이가 났다.
유선우는 아이릴을 응시하다가 한숨을 쉬었다.
‘됐다.’
배 아플 이유도 없다. 자신도 팔팔한 나이인데.
신경을 거두고, 유선우는 조력자로 점찍어둔 인물에게 메시지를 넣었다.
아침에 확인하면 알아서 답장하겠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돌연 벨소리가 울렸다.
“뭐, 뭐죠?”
화들짝 놀란 아이릴을 무시하고 폰을 확인했다. 메시지를 보낸 지 1분도 안 됐는데 전화가 오고 있었다.
“박아연 씨, 안 자요?”
- 잠이 안 와서요. 무슨 일이에요?
“아뇨. 별 건 아니고. 근데….”
유선우가 조력자로 선택한 인물은 박아연이었다.
가장 도움이 되는 건 김정수였지만, 그와는 비즈니스 관계였다. 발목이 잡힐 구석은 만들지 않는 게 좋았다.
한편 박아연은 도움은 물론 신뢰도 가능했다. 이전에 만들어둔 빚과 뒷공작을 싫어하는 성격. 종합해보면 그녀만 한 사람을 찾기도 힘들었다.
“그쪽은 무슨 일이에요? 목소리만 들어도 우울해지네.”
- 하아.
유선우의 물음에 들려온 대답은 긴 한숨이었다.
협력을 구하려 했는데, 정작 본인이 침울한 기색이었다. 이내 어두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선우 씨. 지금 만날 수 있어요?
감성 터지는 새벽. 상담이라도 맡게 될 듯했다.
***
“서, 선우 씨. 저거….”
박아연은 유선우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녀는 집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딱딱하게 굳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온 세상에서 떠드는 인간형 몬스터가.
유선우가 단신으로 처치했다고 알려진 그것이, 거실 한복판에 있었으니까.
“저, 저, 저게 왜 여기 있죠?”
“무례하네요. 사람보고 저거라니.”
인상을 찌푸린 아이릴이 눈을 맞췄다. 그러자 박아연이 신발장으로 헐레벌떡 달아났다.
“허억, 허억!”
박아연의 머릿속이 온갖 망상으로 차올랐다.
가장 유력한 것은 유선우 세뇌 설이다.
사실 유선우는 전투에서 패배했고, 끝내 몸을 빼앗겨버린 거다.
스스로 보기에 제법 그럴싸한 가정이었다.
어쩐지 몬스터의 시체가 발견되지 않더라니.
지금 생각해 보면 여러모로 정황이 묘했다.
꿀꺽.
박아연은 침을 삼키고는 유선우를 쳐다봤다. 그의 입가는 미친 듯 씰룩거리고 있었다. 이 상황이 참을 수 없이 재밌다는 것처럼.
그것을 보자 박아연은 절망했다.
‘이미 늦었어.’
제대로 세뇌당한 모양. 박아연은 입술을 짓씹었다.
자신에게 힘이 있었더라면.
그랬더라면 적어도 혼자 보내지는 않았으리라.
그런 고민이 맴돌아 잠들지도 못 했던 것이었다.
그녀는 유선우의 등 뒤에 주저앉아 안심감만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옆까지는 욕심일지라도 뒤에서나마 서 있고 싶었건만.
이미 때는 늦어버렸다.
박아연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했다. 이쯤 되자 유선우도 당황에 빠졌다.
“아니, 왜 울어요?”
“미안해, 미안해요. 흐윽.”
“참나. 뭔 생각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유선우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러고 보니 이 여자는 나름 여린 면도 있었다.
“이거 이불킥 감인 거 알죠?”
“흐윽, 크흥!”
“아오, 더럽게.”
유선우가 아이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야, 휴지 가져와!”
“싫거든요. 그 여자 누구예요?”
“지옥 다시 한번 갔다 올까?”
“제가 그런 말에 순순히 따를 거라고…….”
아이릴이 말을 뚝 멈췄다. 그녀는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를 보곤 오들오들 떨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거실을 가로지르며 미친 듯 중얼거린다. 영창으로 단련된 혀는 사죄하는 데도 잘 굴러갔다.
아이릴의 돌발행동에 박아연이 입을 헤 벌렸다.
도대체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