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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자님 뭐하세요-69화 (69/179)

제 69화

아이릴

어떤 면에서 보면 날로 먹은 것 같기도 했다.

저번에도 소피아가 제 발로 찾아왔었고, 이번 또한 마찬가지.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행운이라기보단 결과였다.

전자는 던전 방송에서 이어진 연쇄작용이라고 할까. 후자는 아직 전후 사정이 불명확하지만 말이다.

‘기분 이상하네.’

유선우는 도통 순수하게 기뻐할 수가 없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떠안은 감각이었다.

아이릴과 다짜고짜 싸웠던 게 실수였던 걸까. 아니, 그건 아니다. 대화를 택했다면 이보다 성가신 일이 벌어졌을 터다. 애초에 본인이 먼저 설쳤다.

유선우가 복잡한 눈빛으로 화장실을 쳐다봤다.

‘그래도 쟤가 와서 다행이긴 해.’

요즘 가장 골머리를 앓던 문제인 소피아의 저주. 그것만큼은 해결되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아이릴이 순순히 도와줄지는 반신반의하지만, 여차하면 때려서라도 말을 듣게 하면 될 뿐이다.

화장실을 한참을 보고 있자니 문이 살짝 열렸다. 그 사이로 새하얀 팔이 쏙 내밀어졌다. 문턱에 놓아둔 옷가지를 본 모양이었다.

셔츠를 잽싸게 챙기고는 문을 확 닫는다. 얼마나 급한 건지, 소매가 문틈에 끼었다.

지켜보던 유선우가 피식거렸다.

‘쟤도 입만 안 열면 좋은데.’

평생 마임만 하고 살았으면 좋겠다.

이내 셔츠를 걸친 아이릴이 거실로 나왔다.

그녀는 우물쭈물하며 배부른 소리를 했다.

“저어… 다른 옷은 없나요?”

아이릴이 셔츠를 꽉 잡아당겨 살결을 가렸다.

남성용인 데다가 루즈한 옷이어서 가릴 건 다 가려진 상태. 그런데도 과도한 노출인지 귀는 새빨갛고 발가락은 오므려져 있다.

“여자 옷? 당연히 없지. 남자 집인데.”

“그, 그렇죠?”

아이릴이 어색한 목소리를 냈다. 그녀는 헛기침하면서 거실을 살펴봤다.

“여기가 당신이 살던 곳이군요. 나쁘지 않네요.”

“응, 아니야. 이 집 산 지 한 달도 안 됐어.”

“어, 어쨌든요. 깔끔해서 맘에 들어요.”

사실 깔끔하다기보다는 허전하다는 말이 옳았다. 하지만 아이릴은 화려함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호화로운 곳에선 안심이 되지 않는다고 할지.

작게 웃은 유선우가 화장실을 가리켰다. 아직도 샤워기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물부터 잠그고 와.”

“아, 네.”

아이릴이 헐레벌떡 뛰어갔다. 그녀는 3분이 다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너무 길어지는 탓에 유선우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

“꺄악!”

“뭐야.”

유선우는 화장실로 가 상태를 살폈다. 샤워기가 박살이 나 있었다. 그가 한숨을 내쉬자 아이릴이 흠칫거렸다.

“이, 이게 말을 안 듣네. 누가 인챈트한 거죠?”

“그냥 가서 앉아 있어.”

“미안해요…….”

침울해진 아이릴이 털레털레 거실로 갔다. 성녀 체면이 말이 아니다.

유선우도 대충 정리하고는 뒤를 따랐다. 그는 다시 소파에 앉고,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뭐해? 앉아.”

아이릴이 쪼르르 다가와서 앉았다. 바로 옆자리는 아닌 한 칸쯤 떨어진 위치. 그게 둘 사이의 적당한 거리감이었다.

“그래서 왜 왔어?”

“당신 때문에 왔죠.”

“아까는 아니라며.”

“다, 당신 보러 온 건 아니라 했거든요. 이게 중요한 거예요.”

“뭐라는 거야. 혹시 머리 아파? 난 머리는 안 때렸는데.”

아이릴이 유선우를 째려봤다. 하도 호되게 당한지라 아직도 온몸이 아팠다. 그런데 괜찮으냐는 말도 없으니 서럽기 그지없었다.

이를 바득바득 갈던 아이릴이 돌연 가슴을 쫙 폈다. 그녀가 의기양양하게 콧소리를 흘렸다.

“아브나바 님께서 계시를 내려주셨죠.”

아브나바는 431-9 차원의 유일신의 이름이다.

마족을 제외한 모든 지성체가 떠받치는 신.

그로 인해 그녀는 차원을 나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었다.

유선우는 아브나바가 그곳의 관리자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게 색욕의 지배자라는 것은 귀환한 뒤에야 알게 됐지만.

“계시?”

“그래요. 당신을 살펴보라 하셨어요.”

“뭐야. 강제로 보냈다고?”

“그럴 리가 있나요. 아브나바 님이 어떤 분이신데. 뭐, 제가 그분 부탁을 거절할 리 없으니 찾아온 거예요.”

태연한 대답에 유선우의 낯이 찌푸려졌다.

‘얘한테는 물어보면서 왜 내 허락은 안 받아?’

이쯤 되면 차별이다. 약한 것들 대신해서 악마들의 씨를 말려줬건만. 돌아온 건 결국 푸대접뿐.

유선우는 짜증이 솟구치는 한편, 의문이 들었다.

“그럼 나 보러 온 거 맞잖아.”

그리 말하자 아이릴이 손가락을 꼬물거렸다.

“맞긴 하지만 혹시 오해할까 봐 그랬죠.”

“무슨 오해?”

“보, 보고 싶어서 왔다는 거 같잖아요. 그런 거 아니거든요?”

“아. 응.”

유선우는 건성으로 받아넘겼다. 그는 이런 신호를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멍청하진 않았다.

‘근데 얘는 좀 그래.’

뭐만 하면 화형이니 뭐니 시끄럽지. 정조 관념도 까다롭지. 결혼할 게 아니라면 관심도 안 가지는 게 좋았다.

‘어째 미안하기도 하네.’

아이릴은 보내준다는 말만 믿고 맨몸으로 넘어왔다. 그 과정을 대충 넘어가긴 했지만, 고뇌는 있었을 터였다.

전부 내팽개치고 알지도 못하는 타지로 온 것. 아무런 걱정이 없었을 리가 만무했다. 그런데 결과적으론, 오자마자 기절할 때까지 맞았다.

유선우는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감정은 어쨌든 일단 사태파악이 중요했다.

“너한테만 내려왔다고?”

“아니요. 요정여왕에 용왕, 흡혈여왕도 받았다고 들었어요.”

오랜만에 듣는 이름에 덜컥 겁이 났다. 다른 둘은 어쨌든 흡혈여왕 같은 싸이코는 만나고 싶지도 않았다.

그 여자의 궁전에 갇혀 살았던 1개월.

그때의 기억은 아직도 선명했다.

“…그래서?”

“둘은 바빠서 거절했고, 흡혈여왕은 제가 말렸어요. 당신, 그 사람 싫어하잖아요.”

유선우는 감동에 차 눈가를 파들파들 떨었다. 생일을 축하해준 이들에겐 미안하지만, 오늘 들은 것 중 가장 기쁜 말이었다.

그가 안도의 한숨을 쉬자 아이릴이 깜빡했다는 듯 덧붙였다.

“아, 다른 사람도 한 명 있었어요. 당신이 데리고 놀던 여자아이.”

“말 좀 가려서 하자. 내 제자?”

“네. 저더러 그러더라고요. 자기는 절대 싫으니까 제발 가달라고.”

“하하. 고놈 새끼.”

유선우가 어깨를 으쓱였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만 해도 귀엽고 순종적이었거늘.

그는 확실하게 기억해두고, 여태 들은 정보를 정리했다. 하지만 아직 의문이 해소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뭐 하러 왔다는 거야?”

“살펴보러 왔다고 했잖아요.”

“아니, 그러니까 그게 전부냐고. 너 한가해?”

그리 물으니 아이릴의 시선이 차가워졌다.

“저도 처음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젠 아브나바 님의 뜻을 알겠군요.”

“응?”

“이교에 손을 뻗을 줄이야….”

스산한 음성이 흘렀다. 아이릴이 소파에서 일어나 신성력을 뿜기 시작했다. 그녀의 온몸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당신 같은 강자마저도 2달 만에 타락했으니 이곳의 꼴이 눈에 선해요.”

“또 시작했네. 이번엔 진짜 뚝배기 깬다?”

“제가 굴할 것 같나요? 정화, 오로지 정화입니다. 이 땅에 아브나바 님의 제국을 만들…!”

문득 말이 끊어졌다. 유선우가 아이릴을 아리송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그녀는 어째선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야?”

자세히 보니 눈이 자신의 얼굴이 아니라 허공을 향해 있었다. 바쁘게 돌아가는 눈알.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보는 듯했다.

“야, 야! 괜찮아?”

유선우가 걱정을 내비칠 때였다. 아이릴이 몸을 부르르 떨며 십자가를 만들어냈다. 그리곤 허공에다 붕붕 휘두르기 시작했다.

“무, 물러가라! 내가 이따위 겁박으로 믿음을 저버릴 줄 아느냐!”

“조심해, 내 집이야!”

“아브나바 님, 저를 구원해주소서. 아브나바 니이이이임!”

“내 집이라고, 미친년아!”

들리지도 않는지 아이릴은 발광을 이어나갔다. 뜬금없는 상황에 유선우가 아이릴의 팔을 붙잡았다.

그대로 소파에 앉히자 아이릴이 폭 안겨 왔다. 그녀답지 않은 행동. 하지만 정작 본인은 그에 신경을 쓸 겨를도 없어 보였다.

딱딱딱 이를 부딪치며 미친 듯 온몸을 떤다.

“사, 살려주세요. 죄송합니다. 잘못했어요. 정말 미안해요. 다신 안 그럴게요. 용서해주세요. 아, 안 돼! 아, 아아! 불가마는 싫어요오오….”

“별 미친….”

“엄마, 엄마아. 보고 싶어. 흐으윽!”

눈물 콧물에 침까지 질질 흘린다.

유선우는 순간 불안해져 아이릴을 치워냈다.

급해서 힘 조절에 실패했는지, 그녀가 바닥에 널브러졌다.

매정한 처사였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거실 바닥이 젖어가기 시작했다.

“와, 두고두고 빡칠 뻔했네.”

유선우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떠올리기만 해도 짜증이 나는 기억이 있기 마련.

그런 일을 만들지 않게 되어서 다행이었다.

그러든 말든 아이릴은 여전히 정신을 놓고 있었다. 제가 실금했다는 것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아흐흐. 푸흐하. 어흐흐흐. 흐윽, 으흐윽….”

웃는지 우는 지도 분간이 되질 않았다.

‘진짜 위험한 거 아닌가?’

유선우의 걱정이 깊어지는 찰나였다.

그의 눈앞에 메시지가 나타났다.

[만년설의 수호자가 손을 탁탁 텁니다.]

[색욕의 지배자가 만년설의 수호자에게 성을 냅니다.]

[만년설의 수호자가 콧방귀를 뀝니다.]

‘왜 자기들끼리 얘기해.’

얼척은 없었지만 상황은 파악할 수 있었다. 관리자가 무슨 짓이라도 했겠지.

“이래도 돼?”

[만년설의 수호자가 자기 자식 말고는 관심 없다고 말합니다.]

“아, 응.”

하기야 관리자가 듣기엔 짜증이 날 법도 했다. 아브나바보다 직위가 높은데도 이교 취급을 받았으니.

그걸로도 모자라 자기 땅에 깃발을 꽂겠다는 선언까지 들었다. 아니꼽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평소에도 좀 이렇게 해주지.”

[만년설의 수호자가 헛기침합니다.]

유선우는 혀를 차면서 머리를 굴렸다.

‘얘한테 뭐 잔뜩 걸어뒀나 보네.’

인간이 차원을 넘으려면 많은 족쇄를 감내해야만 한다. 아예 지구의 주민이 된다면 모르겠지만, 아이릴에게 그런 기색은 없었다.

아이릴은 넘어온 후에 구토를 하지 않았다.

영혼의 호적이 이전되는 반동을 겪지 않았다는 뜻. 여전히 431-9 차원의 사람이란 얘기다. 반면 처벌할 권한은 지구의 관리자에게 있다는 것.

유선우는 이 와중에도 다른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야. 집으로 꺼져.”

사나운 음성이 나지막이 흘렀다.

바로 색욕의 지배자를 향한 말이었다.

어물쩍 넘어가려는 속셈이었을 터.

그러나 유선우가 걸릴 리가 없었다.

물론 무시하고 강짜를 부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한낱 인간이 떠들어봤자 귀만 가려울 테니까.

하지만 지금의 유선우에겐 패가 있었다. 그가 히죽 웃고는 흑창을 손에 쥐었다.

“안 꺼지면 피 볼 줄 알아.”

창끝이 번쩍였다. 아이릴의 목을 향해서.

인질의 효과는 이미 역사가 입증해준바.

쓰레기 같기는 해도 인성을 따질 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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