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4화
피습
저주가 마나와 생명력을 침식하고 있다고 한다. 매일 같이 생명력을 불어넣어 연장해서 한 달. 이보다 깊이 파고들면 저주가 분열되어 전염될 수도 있다나.
유선우로선 짐작하고 있던 결과였다.
하지만 당사자와 그 가족에겐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다.
불편한 적막에 유선우는 병실에서 나왔다. 자신이 있을 자리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말없이 돌아갈 수도 없어, 의자에 주저앉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던전을 쥐 잡듯 돌아다녀 엘릭서라도 구해봐야 할까. 아마 손에 넣을 확률은 희박할 터다.
그밖에 떠오르는 방법은 단 한 가지.
성공하면 확실하게 살릴 수 있는 수단이 있다.
수단이란, 431-9 차원으로 향하는 것이다.
‘관리자한테 부탁하면 가능하긴 해.’
엘릭서와 함께 무구도 가져오면 금상첨화다. 오랜만에 제자 얼굴도 보고. 황족에게 손찌검한 건 별일도 아니다. 시비 걸면 다 뒤집고 말지.
‘내가 나라 구해준 게 몇 번인데. 그걸로 욕하면 서운하다 이거야.’
다 좋긴 한데, 결정적인 문제는.
‘색욕의 지배자. 그년이 얌전히 굴 리가 없어.’
431-9 차원의 관리자. 그녀가 필시 수작을 부려올 것이다. 이쪽 관리자가 도와주긴 하겠지만, 안심하기엔…… 솔직히 미덥지 못하다.
전과는 물론이고 한창 바쁜 와중이지 않은가.
각성자 양성하랴, 게이트 막아내랴.
던전 정보 던져주랴, 다른 차원에서의 지원 요청을 처리하랴.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터다.
반면에 지구를 넘보는 관리자들은 한가하다. 간섭력을 쓸 일이라곤 게이트를 열거나 대리자를 키우는 게 전부. 일 처리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색욕의 지배자도 요즘은 여유가 넘칠 테니 그쪽으론 들어가고 싶지도 않다. 냉정한 말이지만, 인생을 걸고 도박할 만큼 소피아와 가까운 관계도 아니고.
‘그나마 시간은 있으니 다행이지.’
천천히 생각해볼 사안이다. 한 달이면 길지는 않아도 아주 짧은 시간도 아니다.
끼익.
병실의 문이 열렸다. 소피아의 부친, 딜런이 유선우의 옆으로 다가왔다.
“앉아도 되겠나?”
“아, 예.”
유선우는 일체형 의자의 중앙에서 몸을 옆으로 비켰다. 서로 소개는 간략하게 마친 상태. 자리에 앉은 딜런이 긴 한숨을 토해냈다.
“여태까지 제대로 말도 못 했군. 일단 고맙네.”
“아닙니다.”
“얘긴 많이 들었네.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지. 딸이 전화만 하면 자네 말만 하더군. 막상 자기 얘기는 안 하면서 말일세.”
“저도 딜런 씨 얘기는 들었습니다. 과묵한데 상냥하시다고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 한마디밖에 못 들었을 뿐.
딜런은 흐뭇한 듯 잔잔하게 웃었다. 그대로 말이 끊기자 유선우는 아무 말이나 뇌까렸다. 낯선 사람이니만큼 침묵이 불편했다.
“한국말 되게 잘하시네요. 부녀 똑같이.”
“언어는 배워둬서 나쁠 게 없지. 다섯 개 국어 정도는 기본 소양으로 가르치고 있네. 나도 그렇게 배웠고.”
“…그러시군요.”
반응이 곤란한 대답이다. 역시 명문가라고 할지.
“그, 음.”
딜런은 말하기 힘들다는 양 입을 달싹거렸다. 한참이 지나서야 입이 떨어졌다.
“딸이 굉장히 자넬 의지하더군. 그래서 자네에게 맡길까 싶어. 물론 괜찮다면 말일세.”
“예? 그럼 딜런 씨는 어쩌실 겁니까.”
유선우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말동무쯤은 되어줄 수 있으니 맡기는 건 상관없었다. 그런데 가족을 남한테 떠넘기겠다는 뜻인가.
걱정과는 달리 딜런의 심지는 올곧았다.
“구석구석 다 뒤져볼 생각이네. 특수 능력자든 약품이든.”
“…….”
“난 질질 짜면서 기도만 하는 머저리가 아니야. 결과는 손이나 입이 아니라 발이 내는 걸세.”
유선우는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능력자는 치유 말고, 최대한 눈이 좋은 쪽으로 찾아보세요.”
나름대로 조언을 던져줬다. 힐러를 수소문해봤자 도움도 안 될 터. 차라리 저주의 상세를 파악하는 게 낫다.
딜런은 말을 곱씹고는 침음성을 흘렸다.
“그러도록 하지.”
대화가 일단락되자 유선우가 몸을 일으켰다. 자연스럽게 자리를 벗어날 수 있는 기회. 아는 여자의 부친과 어울리는 것은 여러모로 거북했다.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 잠시만.”
남의 속도 모르고 딜런이 뒤따라 일어났다.
딜런은 유선우를 꼼꼼하게 살펴봤다. 견적을 보는 것처럼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무슨 결론을 내렸는지 고개를 주억거린다.
“자네가 지금 몇 살이지?”
“만으로는 21살입니다만.”
“어리군. 그래도 많은 것보단 낫지.”
뉘앙스가 묘한데.
신경을 쓸 겨를도 없이 딜런이 악수를 청했다.
“딸을 잘 부탁하네.”
“…알겠습니다.”
유선우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깔았다. 어쩐지 이래야 할 것 같아서. 말하고 나서야 머리가 돌아갔다.
‘알기는 뭘 알아.’
이게 다 습관이 문제다.
이계에서 동료를 영입할 때마다 비슷한 소리를 했었다.
제게 맡겨주십시오, 무사히 돌려보내겠습니다.
꼭 지키겠습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한두 번은 진심이었는데 하다 보니 지겹더라.
그래서 매크로처럼 머리에 박아놨었다.
그게 하필 지금 튀어나올 줄이야.
유선우의 낯이 바짝 굳었다. 악수하며 딜런의 얼굴을 살피니 어딘가 시원섭섭한 표정이었다.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딜런이 선수를 쳤다.
“버팀목이 되어줬으면 하네.”
“저기, 딜런 씨.”
“이렇게 허무하게 가도 될 아이가 아니야.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소피아는….”
딜런이 먹먹한 목소리로 말을 흐렸다. 끝끝내 그는 눈물까지 훔치기 시작했다.
“나이 먹고 주책이군. 미안하네. 그럼 다음에 만나지.”
유선우는 입술만 질끈 깨물었다.
하여간 생각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
***
집으로 돌아간 유선우는 담요를 깔고 누웠다. 내부는 어제와 다를 바 없이 허전했다.
차세정과 가구를 사러 갈 예정이었는데. 그녀에겐 미안한 일이었다. 쇼핑은 어쨌건 아예 혼자 내버려 뒀으니까.
‘다음에 따로 시간 좀 내야겠네.’
그럴 상황은 아니지만, 소피아의 일로는 이미 어느 정도 손을 써뒀다. 김정수는 물론이고 이곳저곳에 연락을 넣어, 해주에 특화된 능력자의 수색을 부탁했다.
‘말이 새어나가긴 하겠다만….’
진작에 엎질러진 물이다.
애초에 습격이 벌어진 시점은 이른 점심. 장소도 대학병원이었으니 화제가 될 수밖에 없다. 숨겨야 할 것은 소피아의 정확한 용태뿐이다.
물론 유선우가 범인을 죽였다는 말도 나왔다. 표면적으로는 교육생 신분이니 크게 문제가 될 일. 하지만 루머 수준으로 돌아다니는 정도여서,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협회도 지금은 못 설쳐.’
국내 불법 능력자에 의한 피습.
한국 헌터의 얼굴인 협회는 욕받이가 되어 있었다.
반면 유선우에 대한 여론은 나쁘진 않았다. 단초를 제공하긴 했으나 직접 구해내기도 했기 때문이다.
‘더 늦었으면 진짜 큰일 날 뻔했지.’
소피아가 그대로 죽었더라면 비난을 피하기 힘들었을 터. 이는 지금도 적용되는 가정이다.
“아, 짜증 나네.”
지인이 한순간에 죽으면 잠깐 슬프고 말겠지.
세상에 익숙해질 수 없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초조해지는 것은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혹시나 하는 가능성.
아예 가망이 없었다면, 손수 숨을 끊어줬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도 저도 아닌 게 제일 개 같아.’
유선우는 스마트폰을 먼 곳으로 치웠다. 오랜만에 낮잠을 자고 싶었다.
***
유선우는 청일 본부에서 생활하기 시작했다. 방송은 한동안 쉴 계획. 어수선한 시기에 대중 노출은 독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11월 17일.
유선우는 병실에서 떨어진 복도에서, 한 남자와 마주 보고 있었다.
“솔직히 저주 자체가 그리 강한 건 아닙니다.”
“그래서요.”
“대신에 무척이나 정교해요. 대상이 강할수록 효과적이죠. 숙주의 마나를 먹으면서 크니까요.”
설명을 읊는 남자는 분석 능력자였다. 한국에서 한 손가락에 꼽히는 선구자라나. 그의 낯은 지식욕에 달아올라 있었다. 희끄무레한 머리가 무색한 모습이었다.
“몇 달만 연구해도 이쪽 분야에 큰 진전이 생길 겁니다. 한 획을 긋는다고 해도 모자람이 없을 수준이에요.”
“결국 해결책은 못 찾았다, 이거네요.”
“…크흠!”
유선우는 대놓고 혀를 찼다. 돈은 돈대로 처먹고 연구다 뭐다 개소리만 하고 있으니. 좋은 소리가 나올 수가 없었다.
“어디 가서 발설하지는 않으실 거라 믿습니다. 알 만큼 아는 분이시니.”
“너무 이기적인 생각 아닙니까? 발표하면 5년, 아니. 최소 10년 정도는 단축시킬 수 있….”
“그리고 5일도 못 걸어 다니시겠죠. 희생정신 한 번 대단하십니다. 본받고 싶을 지경이에요.”
유선우의 목소리는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유비무환. 입막음에 과하다는 말 따위는 없다.
“무, 무덤까지 가져가겠습니다.”
“혹시라도 제가 무덤 파지 않게 조심해주세요.”
남자, 장명재는 침을 꼴깍 삼켰다. 유선우의 무력은 이미 만천하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유선우는 딜런에게 소식을 전하고 병실로 들어갔다. 소피아의 몰골은 초췌했다. 리암의 분전에도 그녀의 상태는 나빠지고만 있었다.
“선우, 선우.”
“왜요?”
유선우를 본 소피아가 헤실헤실 웃었다. 윤기 없는 머리카락과 창백한 안색 탓일까. 안타까울 만큼이나 힘없는 미소였다.
“방금 아저씨 엄청 별로였어요. 맘에 안 들어.”
“무슨 소리 들었어요?”
“아니, 혼자 호오, 으음, 이러면서 구석구석 다 쳐다보잖아요.”
“저도 별로긴 했어요.”
“그치? 변태 같아.”
소피아가 눈매를 찌푸리며 불평했다. 그녀는 어째선지 점점 아이 같은 모습을 보였다. 특히나 유선우를 극도로 의지하게 됐다.
부자연스러운 변화도 아니었다. 자신을 꺾은 실력과 귀찮은 기색 없이 돌봐주는 상냥함. 더해 흉수에게서 구해주기까지 했으니 의지하지 않을 수가.
“나 땀 좀 닦아줘요. 찝찝해.”
“부끄럽지도 않나.”
“부끄러울 게 뭐예요. 그 말 있잖아요.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살아라? 그런 느낌이에요.”
괜스레 싱숭생숭해지는 발언이다. 유선우는 등을 돌린 소피아의 웃옷을 벗겼다. 눈에 띄게 앙상해진 나신. 그녀의 어깨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병실에 비치된 수건으로 땀을 닦기 시작했다. 목부터 살살 쓰다듬듯이. 소피아가 만족스러운 듯 숨을 흘렸다.
“이제 잘하네. 이거 기분 좋아.”
“맨날 하니까 늘기는 하네요.”
“그럼 나 퇴원하고도 해줄래요?”
“귀찮은데요.”
“치.”
유선우는 소피아와 긴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녀가 한국에 남은 이유가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몇 시간 정도는 내어주는 게 도리였다.
많은 대화 끝에 유선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갈게요.”
“…그냥 있으면 안 돼요?”
“밤에 또 올 건데요 뭘.”
시무룩해진 소피아가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유선우는 머리를 가지런히 정리해주곤 병실에서 나왔다. 온종일 경계하지 않아도 청일의 방비는 충분했다.
그는 곧바로 김정수가 있을 최상층으로 향했다. 거처를 옮김으로 일과가 여럿 생겼는데, 김정수와의 대화가 그중 하나였다.
김정수와 마주 앉은 유선우는 커피를 홀짝였다. 그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기억을 되짚었다.
“오늘 그, 누구였죠? 장….”
“장명재였을 겁니다. 아마도.”
“기억 안 나요. 하여튼 그 사람 주의해주세요. 딱 봐도 입 간수 못 하게 생겼어.”
짜증 가득한 말투에 김정수가 쓰게 웃었다. 어떻게 된 게, 유선우의 직감은 틀린 적이 없었다. 돗자리를 펴도 흥하지 않을까.
“그런 타입이긴 합니다.”
“뭐 해주술사 그런 사람은 없어요? 인재 한 번 더럽게 없네.”
“애초에 각성자가 생긴 것부터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요. 치유나 분석이나 전부 특수계로 묶는다는 것도 우스운 일입니다.”
유선우는 절반 정도밖에 납득하지 못했다. 그의 기준에서 5년은 굉장히 긴 기간이었으니까.
아무리 봐도 여러 면에서 발전이 더디다. 여러 기관이 생기면서 헌터가 성장하고, 좀 살 만해지니 위기감이 줄어들었으리라.
‘5년 만에 고여버렸어.’
협회와의 대립은 순전히 개인적인 감정이 원인이었거늘. 전면적인 개혁이 필요해 보인다.
“일단 계속 찾아주세요. 한 명은 있겠지. 미국 측에서는 어때요?”
“딜런 씨가 잘 막아주고 있더군요. 능관부 측에서 인도를 요청하고 있긴 합니다만, 정확한 상태는 모릅니다. 소피아 씨 본인 희망을 무시할 생각도 없어 보이고요.”
“다행이네요. 아직까진 안 새어나갔나 보다.”
“입막음에는 신경 쓰고 있습니다. 저희에게도 사활을 건 도박이니까요.”
김정수가 한숨을 흘렸다. 결국은 정황이 문제. 들키면 합동 방송을 용인한 청일도 욕을 먹을 게 뻔했다.
그는 고개를 가로젓고 분위기를 환기했다.
“그래도 잘만 해결되면 큰 이득이 될 겁니다.”
“그렇겠죠.”
소피아는 물론이고 테일러 가문과의 친분. 그 가치는 상상보다 찬란할 터였다.
대화는 마치 보고라도 하듯이 흘러갔다.
10분이 지나 화제가 마를 즈음.
김정수가 망발을 내뱉었다.
“이럴 때 다른 일이라도 터지면 참 골치 아프겠습니다. 하하.”
“제발 그런 소리 좀 하지 마세요.”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플래그.
하지만 경험상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