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2화
피습
한동안 일선에 서지는 않았으나 S급. 감이 녹슬었을지라도 위용마저 사라지진 않았다.
김한성이 흉포한 기세로 내뱉었다.
“적당히 설치는 게 좋을 거야. 내가 참을성이 그리 좋지는 않아.”
김정수는 무의식적으로 허벅지를 움켜쥐었다. 맨몸으로 맹수와 맞서는 듯한 감각. 본능적인 공포가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하지만 견뎌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제가 할 말입니다. 한국에 둘밖에 없는 S급이 허무하게 반으로 줄지는 않았으면 좋겠군요.”
“지금 뭐라 했나?”
목소리가 천둥소리처럼 머리를 울린다.
굽히지 않는다. 아무리 설쳐도 죽을 일은 없다.
아니, 죽는다 한들 혼자 죽지는 않을 것이다.
유선우를 떠올리니 이 와중에도 웃음이 나왔다.
“그 예쁘다는 소피아도 병원에서 골골거리는데. 배 나온 아저씨라면 더 고생하지 않겠습니까?”
“…….”
굵은 전류가 김정수의 눈앞을 돌아다녔다. 당장이라도 쏘아져 전신을 구워버릴 것처럼.
그중 한 줄기의 벼락이 길게 뻗어졌다.
파지직!
코앞까지 다가온 전류가 아지랑이로 변해 흩어졌다. 마나가 가라앉고, 압박감마저 풀어진다.
김한성이 낮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흐흐. 싸가지가 많이 없어졌어. 배짱도 늘었고.”
“유선우 씨 영향인가 봅니다.”
“더 말해봤자 소용도 없겠군. 그만 일어나지.”
김정수는 왜 반말이냐고 따지려다가 참았다. 죽진 않더라도 병원 정도는 갈 것 같았다.
“다음엔 좀 유쾌한 자리에서 뵙길 바라죠.”
“재미는 충분히 봤을 텐데. 이걸로도 부족한가?”
“같이 즐기면 더 좋지 않겠습니까.”
“그놈이랑 놀면 딱 맞겠군.”
김한성이 엉덩이를 일으켰다. 그는 배웅은 필요 없다는 인사와 함께 자리를 떴다.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던 김정수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마중 나가래도 안 나갑니다.’
***
어스름한 달빛이 거리를 물들인 새벽.
바깥의 고요함이 무색하게도 유선우의 집은 왁자지껄했다.
집들이였다. 새집은 40평가량의 복층 주택. 회사와 5분 거리에 있는 건물이었다.
유선우는 입주하자마자 지인들을 집에 초대했다. 차세정과 유선혜는 물론이고 회사 동료들까지.
아쉽게도 김광수는 연락이 되지 않았고, 소피아는 병원 신세를 지고 있었다.
모인 인원은 유선우로선 전부 일상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그들 사이의 관계는 마냥 단순하게 정리되진 않았다.
“어, 음. 오랜만이다.”
“그러게. 졸업하고 나서는 못 봤지? 근데 이상하게 안 어색하네. TV에서 봐서 그런가?”
“나는 어색한데…….”
먼저 최현석이 차세정을 일방적으로 거북해했다. 학창시절에 유선우와 차세정 사이에서 시달렸던 기억이 생생했기 때문이다.
“맞다. 너도 청일 다닌다고?”
“어, 어?”
“유선우한테 들었어. 혹시 회사에서 무슨 일 있었으면 듣고 싶은데.”
“글쎄. 난 현장만 돌아다녀서 잘…….”“……그래? 뭐, 됐어. 앞으로 종종 연락할게.”
차세정은 여러 소식을 알려줄 귀를 얻었고,
“오빠. 저분이 그 언니야?”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알아.”
“알면서 무슨. 사진보다 예쁜데. 모델인가?”
“아니, 그냥 대학생.”
“왜 모델 안 하고 공부를 해?”
“한국대 다녀.”
“……아.”
차세정의 실물을 처음 본 유선혜가 유선우를 놀렸으며, 강창민은…….
“형, 형. 쟤 있잖아요. 남자친구 있어요?”
“강이? 없지 않나.”
“말고요. 형 동생이요.”
“뭐 인마?”
유선혜에게 눈독을 들였다.
“사실 회사에서 봤을 때부터 맘에 들었거든요.”
“…….”
“이야, 이게 이렇게 되네요. 나이도 동갑이고.”
강창민은 유선우의 표정도 못 보고 실실거렸다. 허황한 꿈에 사로잡힌 그가 진지하게 말했다.
“매제로 저 어떻습니까.”
“매제는 개뿔이.”
유선우는 동생의 연애사에 참견할 생각은 없었다. 남매랍시고 끼어들 일이 아니니까. 문제는,
‘얘는 좀 아니지.’
구내식당에서의 일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강창민이 한강과 다투면서 했던 ‘그 발언’들.
낡아빠진 가부장적 성향이 다분한 놈을 매제로 받아들이라니. 가족 전체가 두고두고 후회할 일이었다.
“저 지금 진지합니다.”
“나도 진지해. 진짜 처맞는 수가 있어.”
“저 정도면 나쁘지 않죠. 키는 뭐, 좀 작긴 해도 얼굴 낫배드에 돈도 잘 벌고.”
“근데 약하잖아.”
자존심 긁는 말에도 강창민은 태연했다. 남에게 들었으면 화났겠다만, 그에게 있어 유선우는 거의 무술의 신이었다. 신에게 약하다고 들어서 진심으로 화낼 사람은 많지 않다.
“그야 형이 보기엔 약하겠죠. 그래도 제가 한국에 300명도 없는 A급입니다.”
“허, 진짜 그거밖에 없어?”
“그럴걸요. 누나, 맞죠?”
강창민이 박아연을 보며 물었다.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긴 맞는데, 왜 갑자기 친한 척이죠?”
“저희 친하잖아요. 제가 몇 번 조언도 해줬는데? 벌써 까먹었어요?”
“아, 네. 저보고 뒤지게 약하다고 그랬었죠?”
박아연의 말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입만 살았다, 평생 자기 못 이길 거다, 더 늙기 전에 남자나 잡아라. 또 뭐 있었더라.”
한 맺힌 목소리. 여태까지 계속 쌓아두고 있었던 모양이다. 듣던 사람들의 얼굴이 죄다 떨떠름하게 변했다.
“어떻게 사람이 볼수록 쓰레기냐.”
“그, 그냥 장난이었죠.”
“알아요. 저도 별로 신경 안 써요. 다 저 잘되라고 말해준 거잖아요.”
정말 괜찮다는 듯이 묵묵히 술잔만 채운다. 유선우는 어째선지 박아연의 모습이 눈이 부셨다.
보살 같은 발언에 강창민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당연하죠. 스물여섯이면 위험한 거 맞잖….”
퍽!
“악!”
유선우가 강창민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아예 뇌절을 해버리네. 26살이면 젊구만.”
“아으…. 늙다리 아니에요?”
“취향 알았으니까 입 다물고 대가리 박고 있어.”
“예.”
박아연은 술만 목구멍에 들이부었다.
혀에 감도는 술맛이 오늘따라 유달리 썼다.
***
- 우웨에에엑!
굳게 닫힌 화장실. 문 너머로 흘러나오는 소리. 듣는 유선우마저 목이 까끌까끌해져 연달아 침을 삼켰다.
‘그러게 적당히 처먹지.’
시각은 오전 5시경. 일찍 일어난 게 아니라 자질 않았다. 그는 박아연과 밤새도록 대작했다. 혼자 퍼마시길래 불쌍해서 어울려줬더니 이 꼴이 났다.
“저기요. 괜찮아요?”
- 하아, 하아. 죽고 싶어요.
“그러게 누가 그걸 다 처먹으래요.”
- 선우 씨는 왜 괜찮… 우웁!
“…알아서 치우세요.”
집 산 지 얼마나 지났다고.
튀어나오는 한숨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 진짜 미안해요. 내가 다시는 술 안 먹을게.
“퍽이나 그러시겠습니다.”
- 하아, 등 좀 쳐줄래요?
“싫어요. 냄새나.”
일축한 유선우는 창문을 죄다 열었다. 코가 마비되어 스스론 알 수 없었지만 술내가 진동할 터였다.
그대로 박아연을 방치한 채 거실에 누웠다. 옆에는 차세정이 담요를 덮고 잠들어 있었다. 침대라도 있으면 옮겨줬겠으나 아직 가구를 들이지 않았다.
추운 날씨다. 새벽 공기가 쌀쌀하니 담요를 하나 더 덮어줬다. 유선우는 차세정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다가 눈을 감았다.
잠에서 깨어난 것은 9시 즈음이었다.
둘러보니 집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천만다행이었다. 소주병 거꾸로 쥐고 회사까지 찾아가지 않아도 되어서.
“우응….”
옆에서 움직인 탓에 차세정이 뒤척거렸다. 유선우는 더 자라며 다독여주곤 조심스레 일어났다.
다른 사람은 다 돌아갔는지 집이 휑했다. 혼자 살기엔 넓은 공간이다. 유선우는 약간의 허전함을 안은 채로 몸을 씻었다.
머리를 정리하고 옷을 입었다. 차세정에게 금방 오겠다는 메시지를 남겨두곤 현관을 나섰다.
목적지는 병원이었다. 소피아와 근황 방송을 하기 위함. 여태까진 오후에나 병문안을 다녀왔었지만, 오늘은 일찍 돌아와 가구를 사러 갈 셈이었다.
‘뭔 비가 오냐.’
거리로 나오니 빗방울이 아스팔트를 적시고 있었다. 집에 우산도 없어 서둘러 택시를 잡았다.
소피아가 입원한 병원은 영화에나 나오는 고급스러운 시설은 아니었다. 애초에 우리나라에 그런 곳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회복된다기에 거창한 설비는 필요 없었다.
‘근데 지금 퇴원해도 되지 않나?’
간호받는 걸 즐기기라도 하는 걸까. 하여간 이해하기가 힘든 여자다.
택시는 계속해서 빗길을 달렸다.
그리고 병원에 도착한 순간,
꺄아아악!
울려 퍼지는 찢어지는 듯한 비명.
주변에는 깨진 유리창이 널브러져 있었다.
돌발상황에 유선우의 가슴이 두방망이질을 쳤다.
황급히 택시에서 내리자 누군가가 유리문을 깨부수며 날아왔다. 몸에 두른 새하얀 빛. 익히 알고 있는 능력이다.
하지만 기억보다 훨씬 희미했다. 광채라기보다는 반딧불이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이나. 꺼질 듯 어렴풋한 빛을 두른 소피아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유선우는 소피아를 향해 한달음에 달려갔다.
“이봐요. 지금 이게 어떻게 된….”
“하아, 하아. 선우…?”
소피아의 목소리는 빗소리만큼 작았다. 그녀의 온몸은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부축하고자 팔을 두르자 유선우에게 냉기가 전해졌다. 닿은 살결이 얼음장같이 싸늘했다.
“콜록!”
소피아는 대답조차 못 하고 피를 토했다. 현실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모습이다. 하지만 유선우에겐 익숙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어떤 새끼야.”
유선우는 낮게 중얼거리며 감각을 증폭시켰다.
잡아낸 기운은 둘. 기시감이 들었다. 이전에 페이밍에게서 느꼈던 사기(邪氣)와 비슷하다.
하나는 문 너머에서.
그리고 하나는 소피아에게서 감지되었다.
이 역시도 익숙하다면 익숙한 현상이었다.
“당장 마나 가라앉혀요.”
“하아, 선우. 왜 벌써….”
“닥치고 내 말대로 해요. 죽기 싫으면.”
소피아는 말할 기력도 없는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녀가 빛을 잠재우곤 몸을 축 늘어뜨렸다.
“대충 처치만 해둘 테니까 능력 쓰지 마세요.”
그리 말한 유선우가 손을 놀렸다. 소피아의 몸 몇 군데를 손가락으로 찔렀다. 마나의 흐름을 일시적으로 막아둔 것이다.
급한 불은 껐다.
유선우는 소피아를 조심스레 바닥에 눕혔다.
‘딱 봐도 저주인데.’
흑마법사나 강령술사 등의 음침한 놈들이 주로 쓰는 수법. 저주에 걸려 죽는 사람을 지겹도록 봐왔다. 지구에서마저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
‘어떤 놈인지 얼굴 좀 보자.’
어느새 흑창을 손에 쥔 유선우가 땅을 박찼다. 병원의 구석구석을 살필 필요도 없다. 불쾌한 기운을 흘리는 놈. 쥐색 후드티를 쓴 남자가 하나 있었다.
[만년설의 수호자가 분노합니다!]
대리자였나. 뭐든 상관없다. 메시지를 힐긋거린 유선우가 쇄도했다.
콰앙!
“끄으윽…!”
“너, 뭐 하는 새끼야.”
남자의 목을 잡고 벽으로 처박았다. 놈의 살갗에 닿은 창끝이 소슬하게 빛났다. 목젖에서 흘러나온 핏방울이 창을 붉게 물들였다.
유선우는 창끝을 옮겨 남자의 모자를 벗겨냈다. 얼굴은 드러나지 않았다. 가면처럼 씌워진 검은 마나가 민낯을 숨기고 있었다.
“가지가지 한다.”
쿠우웅!
유선우가 흘린 마력이 공간을 찍어눌렀다. 기둥이 갈라지고, 의자와 CCTV가 부서졌다. 민간인은 로비에서 대피한 뒤였으니 자제할 필요는 없었다.
“끄르륵….”
살의가 깃든 마력과 목을 조이는 악력. 남자의 숨이 넘어가며 마나의 복면이 차츰 벗겨졌다.
얼굴을 확인한 유선우는 눈을 의심했다. 그의 입에서 하나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김광수?”
겁도 없이 게이트를 넘던 군인.
이상한 말투를 고집하는, 미워하긴 힘든 놈.
그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