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1화
이놈이고 저놈이고
“…그거랑 한국에 머무는 거랑 무슨 상관이죠?”
“오히려 제가 묻고 싶은데.”
유선우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짙어졌다. 그와는 달리 눈빛에선 온기가 사라져갔다.
“왜 별것도 아닌 놈들 때문에 거처를 바꿔야 하나요? 그나마 있는 현실감까지 버리면서까지.”
그래서야 돌아온 의미가 없다. 편하게 살길 바라서, 출세를 원해서 귀환한 것이 아니다. 유선우는 그런 말들을 입안에서 중얼거렸다.
소피아는 여전히 알아듣지 못했다. 그녀의 눈엔 유선우가 미련하고 완고하게만 보였으나, 더는 캐묻지 않았다. 집착에 가까운 무언가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녀는 물끄러미 유선우를 쳐다봤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아이와도 같은 눈빛이었다.
‘재밌는 사람이네.’
소피아의 입에서 들뜬 음성이 흘러나왔다.
“선우.”
“또 왜요.”
유선우는 하품하며 대꾸했다.
유선우 씨였다가, 선우 씨였다가, 선우였다가.
다음에는 어떻게 바뀔지 궁금해진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긍정적인 면도 있다.
부르는 방법으로 기분을 유추할 수 있으니까.
지금 보니 의외로 답변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우리 앞으로도 자주 볼까요?”
“이런 얘기만 안 하면요.”
“안 할게요. 걱정하지 마요.”
대화가 일단락되자 유선우가 몸을 일으켰다. 이번엔 소피아도 제지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며 말했다.
“일어났으니 슬슬 가볼게요.”
“더 있다 가지.”
“내일도 올게요. 만날 사람이 있어서.”
“누구요?”
유선우는 스마트폰을 꺼냈다.
수십 건의 부재중 전화.
그중에 눈에 들어오는 이름이 있었다.
“여자친구요.”
방금의 대화 탓일까. 차세정이 보고 싶었다.
***
- 저흰 이번 일에서 손 떼겠습니다.
“…뭐라 하셨습니까?”
김한성의 목소리가 협회장실에 퍼졌다. 짐승처럼 험악한 어조였으나, 위협은 먹혀들지 않았다.
- 손 떼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무리 봐도 가망이 없잖습니까.
철새 새끼 같으니. 김한성은 주먹을 움켜쥠으로 치미는 화를 참아냈다.
“장재원 씨. 그런다고 그놈이 당신을 받아줄 것 같습니까?”
- 하하. 그건 기대도 안 합니다. 이제 와서 무슨.
“그럼 왜…!”
씹듯이 뱉은 말에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마치 자기가 더 답답하다는 듯한 투로.
- 그러게 진작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빨리빨리 밟아야 한다고. 저도 이럴 줄은 몰랐습니다만, 협회장님 잘못도 크다는 얘깁니다.
“그나마 자연스럽게 묻으려면 그게 최선이었습니다. 아실 텐데요.”
김한성은 그동안 신중을 기해왔다.
상대는 세계적인 명성을 단숨에 쌓아 올린 남자. 당연하게도 섣불리 건드릴 수는 없었다.
그러니 천천히 깎아나가고 있었건만. 이 판국이 되어서도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 애초에 공작을 자연스럽게 한다는 것부터가 틀린 소리죠. 화제를 아예 몰고 다니는데 찔끔찔끔 건드린다고 뭐가 달라집니까?
“지금은 잘잘못을 따질 때가 아닙니다.”
전 세계에서 협회의 행동에 의구심을 품고 있다. 해외도 떠들썩한데 한국은 어떠할까. 이대로 일이 한 번만 더 터지면 대중들이 스스로 일어날 터였다.
‘망할.’
김한성이 이를 악물었다. 유선우에게 받은 모욕을 눈곱만큼도 갚아주지 못했는데 이 꼴이다.
- 하기야 그렇죠. 소피아가 참견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장재원이 하지만, 하고 덧붙였다.
- 이제 저랑은 관계가 없는 얘기가 됐군요.
“다시 한번 생각해보시죠. 제일 적극적이지 않으셨습니까.”
- 그야 그놈이 불쾌하긴 합디다. 그런데 개인적인 감정으로 움직일 시기는 이미 지났습니다. 저도 이제 클랜 생각해야지요.
완전히 등을 돌린 낌새다. 김한성은 더 이상의 설득은 의미가 없다 판단했다. 그의 말투가 대번에 협박조로 바뀌었다.
“좋은 선택은 아니실 텐데요. CHC에도, 장재원 씨 개인에게도. 제가 누군지 잊으셨나 봅니다.”
- 하하. 누가 보면 영화인 줄 알겠습니다.
“장난 같습니까?”
- 저희까지 건드릴 시간이 있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아주 바쁘실 텐데? 본인 걱정부터 하셔야죠.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제가 CHC를 어떻게 대해야겠습니까.”
장재원이 한숨을 흘렸다. 김한성의 말에는 전과 같은 무게가 없었다.
- 멀리 보세요. 말년에 이름 먹칠하긴 싫지 않으십니까. 뭐, 시간문제 같기는 합니다만.
김한성의 이마에 실핏줄이 돋아났다. 그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씹으며 욕설을 억눌렀다.
본래라면 클랜 하나에 쩔쩔맬 이유는 없었을 터. 하지만 지금은 패 하나하나가 중요했다. 김한성은 떨리는 음성을 다잡고 말했다.
“머리 식히시고 내일 안으로 연락 주시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너무 기다리진 마십쇼.
쾅!
전화가 끊어지자마자 탁자를 내리쳤다. 통증마저도 머리를 식혀주진 못했다. 오히려 뇌수가 타버릴 듯이 뜨거워질 뿐.
“개 같은 놈.”
김한성은 한참이나 혼잣말을 내뱉었다. 옆에서 보면 정신병자라고 여길 만한 모습이었다.
이윽고 그가 다시금 스마트폰을 들었다.
연락처를 뒤져 찾아낸 이름은,
- 청일 클랜장 김정수
김한성은 망설임 없이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장시간 이어진다. 평소였다면 세 번이 되지 않아서 받았을 텐데. 이런 사소한 변화마저도 그의 분노를 부추겼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무엇 하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두 다리가 미친 듯이 떨렸다. 부재중으로 넘어가기 직전이 되어서야 전화가 연결되었다.
- 여보세요.
담담한 목소리다. 김한성은 무언가의 위화감을 느꼈으나 애써 무시했다. 깊게 생각해봤자 불쾌할 따름이었다.
“시간 괜찮으십니까.”
- 글쎄요… 한두 시간 정도라면 어떻게든.
“잘 됐군요. 그럼 협회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일방적으로 통보하곤 통화를 끊으려 할 때였다.
- 그쪽이 왜 기다립니까?
“뭐라고요?”
- 직접 오시죠. 저번처럼.
“…많이 바쁘신가 봅니다.”
- 뭐, 바쁘긴 합니다. 근데 그보다는 아쉬운 쪽이 오는 게 예의 아니겠습니까?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김정수가 덧붙였다.
- 최근에 오셨으니 길은 아실 거라 믿습니다. 그럼 먼저 끊겠습니다.
그것을 끝으로 말소리가 멎었다. 30초도 되지 않는 짧은 통화. 하지만 김한성에게는 충격적인 시간이었다.
그가 스마트폰을 집어 던지며 외쳤다.
“이런 망하아아아알!”
언제나 점잖던 김정수. 그놈마저 어느새 유선우를 닮아 있었다.
***
김한성은 결국 청일까지 발걸음을 옮겼다. 열불이 치밀고 수치스러울지라도 수단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로비에 들어가자마자 알았다. 청일의 분위기는 더없이 들떠 있었다. 전부 유선우의 화제를 떠들고 있음은 뻔했다.
‘빌어먹을.’
분을 삭이며 대표실에 도착했다. 김정수의 표정은 저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피해의식이라도 생겼는지, 김한성에겐 어딘가 거만하게만 보였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커피 드시겠습니까?”
“됐습니다.”
“그럼 혼자 두 잔 마시죠.”
김정수가 탁자에 놓인 잔 두 개를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뻔뻔한 모습이 또 화를 자극했으나 김한성은 참고 참았다.
“바쁘실 테니 바로 본론부터 말씀드리죠.”
“그래 주시면 감사하겠군요.”
“김정수 씨. 유선우에게서 손을….”
우우웅!
얼굴이 비치는 유리 탁자. 저번에 부순 것과 완전히 똑같은 탁자 위에서 스마트폰이 울었다.
“여보세요.”
- 지금 전화 괜찮으세요?
“예. 한가합니다.
김정수는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전화를 받았다. 눈앞에 있는 사람을 대놓고 무시한 채로. 무례함의 극치였다.
한순간에 병풍이 되어버린 김한성은 말문이 막혔다. 또 한편으로는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익숙했다.
- 부탁이 하나 있는데요.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 별 건 아니고. 며칠간 휴가 좀 받아도 되나요?
대표한테 한다는 말이 휴가 요청이라니. 제삼자가 보기엔 황당할 따름이었지만, 김정수는 흔쾌하게 허락했다.
“물론 괜찮습니다. 혹시 예정이라도 있으신지.”
- 그냥 취재당하기 싫어서요. 병원도 들려야 되고. 지부장님 번호를 몰라서 전화 드린 건데, 좀 민폐죠?
“그럴 리가요. 소피아 씨 상태는 괜찮습니까?
- 본인 말로는 일주일쯤 지나면 낫는다고 하네요. 지금은 힘들어 보이지만.
“그렇군요.”
김정수는 자연스레 통화를 이어나갔다. 그는 떠들면서 한 번도 김한성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아, 희소식이 하나 있습니다.”
- 네?
“저번에 맡기신 보석 말입니다. 이번 일로 프리미엄이 붙었습니다.”
- 엥. 프리미엄이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낌새다. 김정수가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유선우 씨와 친분을 쌓으려고 수소문하는 졸부가 많더군요.”
- 그럼 만나봐야 하는 거 아닌가. 귀찮은데요.
“한둘 정도만 골라서 고급 음식 드시고 오시면 됩니다. 입호강도 하실 겸. 싫으시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만.”
- 음. 그러면 얼마쯤 나올까요?
김정수는 머릿속으로 셈을 해봤다.
입만 잘 털면 경매 방식으로 판매할 수 있을 터.
그들이 과연 얼마만큼의 돈을 지불할까.
보석 본연의 가치까지 따지면 보통 액수는 아닐 것이다.
“전부 판매하면 수백억은 족히 넘겠죠.”
- …….
유선우가 침묵했다. 침 넘어가는 소리만이 스마트폰 너머로 전해져왔다.
“어쩌시겠습니까?”
- 흠, 크흠! 다음에 목록 만들어서 전해주세요. 제가 요즘 미식에 관심이 많거든요.
“하하. 알겠습니다. 회사는 언제쯤 나오실 건지.”
- 오래 쉬진 않을 거예요. 어차피 방송도 해야 하고.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죠.
“그럼 제가 연락 넣어두겠습니다.”
김정수는 만족스럽게 대답했다. 그가 봐온 유선우는 가벼울지라도 성실한 사람이었다.
사서 고생하지는 않지만 가만히 있어도 일이 찾아온다고 할지. 아무리 봐도 놀고먹을 팔자는 아니었다.
- 매번 감사합니다. 이만 끊을게요.
“감사는요. 편히 쉬십쇼.”
- 넹.
맥 빠지는 소리와 함께 통화가 끊어졌다.
그제서야 김정수가 스마트폰을 집어넣었다. 그는 한마디 사과조차 없이 잔잔한 웃음만 흘렸다.
“참 재밌는 사람이지 않습니까?”
그동안의 인연 탓일까. 훌륭하게 성공하니 괜스레 자기까지 기분이 좋았다. 사업적 이윤을 떠나서 감정적으로. 물론 이득도 봤지만 말이다.
“선의에는 선의로, 적의에는 적의로. 그 말이 딱 어울리는 사람입니다.”
서로를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선의로 대한 청일의 앞길은 탄탄대로.
반면 협회는 시시각각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진부한 말입니다. 인생엔 별 도움도 안 되죠.”
“그렇긴 합니다. 이득 보는 건 본인보단 주변인이고요.”
김정수는 유선우를 볼 때면 청년 시절을 떠올리곤 했다. 그때는 소신이 넘쳤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것이 어리석다고 여기게 됐다.
하지만 지금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그저 능력이 부족했을 뿐임을. 타협하지 않고도 성공할 능력이 없었다.
“그래도 멋지지 않습니까. 부럽기도 하죠.”
김정수는 잔을 단숨에 비우곤 싸늘하게 표정을 굳혔다. 김한성이 가져온 용건. 그에 대한 답변이라면 충분히 행동으로 보여줬는데, 꼭 말로 해야 알아듣는 모양이다.
“길게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청일이 유선우 씨를 내칠 일은 없습니다.”
확고부동한 결심. 온도 차가 확연한 시선이 오갔다.
“그런다고 그놈이 천년만년 청일에 남아 있을 것 같습니까?”
“그야 본인 선택입니다. 부족함을 느끼면 떠나겠죠.”
김한성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떠나고 나면 뒷감당은 전부 당신 몫입니다. 청일이 아무리 커져도 저희한테 지원받는 처지라는 말입니다.”
“그래서요?”
“어쩌다가 지원이 끊기면 과연 얼마나 가겠습니까. 길어도 1년이면 휘청거릴 텐데.”
노골적인 협박에도 김정수는 여유로웠다. 그는 오히려 가소롭다는 양 코웃음을 쳤다.
“1년이라. 마침 유선우 씨와 계약한 기간이 딱 1년입니다.”
“실수하셨군요. 그게 지나면….”
“실수는 무슨.”
달칵.
잔을 내려놓는 소리. 그리고,
“그쪽이 백수가 될 때까진 반년도 안 걸리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김한성의 이마에 핏줄이 섰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웅혼한 마나가 대표실을 메웠다.
파직!
김한성의 어깨 위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터져나가는 소파, 그을리는 천장. 샛노란 전류가 방안을 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