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7화
소피아
10월 26일의 오후.
교육 방송 도중, 유선우는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발신인은 김정수. 그의 용건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경매에 관한 것.
경매는 순조롭게 끝났고, 실수령액으로 48억이 입금되리라는 얘기였다. 초기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액수였다.
유선우는 10억이 넘어간 순간부터 돈에 연연하지 않게 되었다. 그다지 실감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애초에 집 사고 남은 돈으로도 생활에 부족함은 없었고.
두 번째는 클랜들과 협회의 관계를 정리한 자료를 메일로 전송했다는 말이었다. 메일을 꼼꼼히 확인한 유선우는 정보를 요약했다.
대형 클랜으로 손꼽히는 단체는 여섯.
협회 측에 우호적인 산호와 CHC.
기회주의적 성향의 네스트와 헥터.
협회와 적대적인 위치에 있는 녹랑과 청일.
중소 클랜은 태반이 협회의 손아귀에 있으나 상황에 따라 돌아설 수 있고, 예외적으로 보조계 중소 클랜인 한철은 협회와 충돌이 잦다.
‘한철이라.’
눈에 익은 이름이다. 생산계로 이름 높은 클랜.
업계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는 만큼 협회에 굽힐 필요가 없는 단체다.
어쩌면 재정 면에선 어떤 클랜보다 부유할지도. 충돌이란 협회에서 숟가락을 들이밀어서 발생하는 것이리라.
‘창민이가 전에 쓰던 창이 4천만쯤이라고 했었지. 침 흘릴 만도 해.’
유선우는 혀를 내두르며 정보를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자세하지는 않아도 이쯤이면 충분하다.
‘좀 움직여야겠어.’
접촉해볼 클랜들은 정했으니 약속만 잡으면 끝. 연락처가 필요하겠지만, 굳이 김정수에게 묻거나 빨빨 돌아다닐 필요는 없다.
명함이야 진작에 다 받아뒀으니까.
***
헥터의 대표 김홍철은 마른침을 삼켰다. 애써 내색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셔츠는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과하게 긴장하는 감은 있다. 자신도 알았지만, 도저히 마음이 편해지질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한국에서 가장 화제성이 뛰어난 사람과 독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왜 보자고 하셨는지.”
“일단 드시면서 하시죠. 파전 맛있네요.”
둘이 앉은 테이블에는 파전이 다소곳이 올라와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데도 유선우는 잘만 찢어먹었다. 정말로 식사나 한 끼 먹으러 온 사람처럼.
김홍철은 물컵을 비우곤 주위를 둘러봤다.
테이블이 고작 세 개뿐인 협소한 식당. 대형 클랜 대표의 벌이를 생각하면 초라한 장소다. 하지만 김홍철은 불쾌감보단 안정감을 느꼈다.
‘여기 오는 것도 오랜만이군.’
이곳은 김홍철이 직접 정한 식당이었다. 유선우는 은밀한 만남을 원했고, 김홍철이 알기로 이만큼 그에 적합한 장소가 없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곳입니다. 마음에 드셨다니 저도 좋군요.”
“집만 가까우면 자주 왔을 텐데. 저는 용인 살거든요.”
“저도 자주 오지는 못합니다. 일이 원체 바빠서.”
“자리가 자리니까요.”
시시콜콜한 대화가 한참이나 이어졌다. 유선우는 시종일관 여유로운 태도를 고수했다. 만나자 한 본인이 입을 다물고 있는 상태. 덕분에 김홍철이 초조해지는 구도가 되어 있었다.
그릇이 반쯤 비워졌을 때 김홍철이 물었다.
“제 협력을 바라시는 겁니까?”
“네. 밥이나 먹자고 부른 건 아니죠.”
진짜로 식사만 하던 사람이 뻔뻔하긴. 김홍철은 차마 투덜거리진 못해 침음성을 흘렸다.
“새 보금자리를 찾으신다는 얘기이길 원했는데… 생각처럼은 되지 않나 봅니다. 우선 얘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어떤 얘기요?”
“협회랑 사이가 많이 안 좋으시다고요.”
“뭐, 그렇죠. 협회장한테 멱살도 잡혔었거든요.”
멱살은 아니고 어깨였지만 오십보백보. 기분이 더 나쁜지, 덜 나쁜지의 차이일 뿐이다.
“…그 협회장이요?”
“네. 김한성 씨요.”
김홍철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가 아는 협회장은 김정수만큼이나 점잖은 인물이었다.
‘예상보다 심각한 모양인데.’
어쩐지 최근 움직임이 영 심상찮더라니. 주판을 튀겨본 김홍철은 심드렁한 태도를 연출했다.
“그래요. 어쨌든 제가 청일을 돕는다고 칩시다. 저한테 돌아오는 건 뭡니까?”
“…….”
“협회와 척을 지기엔 리스크가 너무 큰 것 같은데. 그만큼 메리트가 크지도 않고요.”
칼 같은 거절에 유선우는 피식거리며 웃었다.
“오해가 있으신 모양인데. 정정해도 될까요?”
“그러시죠.”
“전 청일의 헌터로 온 게 아니에요. 아직 헌터도 아니지만요. 개인적으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김홍철의 낯이 의아함을 띠었다. 그로서는 의도를 파악할 수 없는 발언이었다.
“그럼 더 불리해지셨군요. 헥터를 뭐라고 생각하시는지는 몰라도 저흰 자선단체가 아닙니다.”
“그리고 척 지라는 말도 반쯤은 틀렸어요.”
“예?”
“협회장 하나만 엿 먹이자는 소리죠. 지금 협회 무너지면 큰일 나요.”
협회와 클랜 체계는 한국에 깊숙하게 뿌리박혀 있다. 협회가 무너지면 클랜들의 치열한 경쟁이 시작될 터. 결국은 경쟁의 승자가 협회의 역할마저 맡으면서 독재 체제가 만들어질 것이다.
한마디로 개판이다.
김홍철 또한 익히 알고 있는 얘기였다.
“무슨 말씀인지는 이해했습니다. 그게 가능한지 어떤지는 둘째치고, 아직도 보이지가 않아요. 유선우 씨가 줄 수 있는 게 뭡니까?”
“제가 직접 드릴 건 아무것도 없어요. 가진 것도 없는데 공수표만 날려서야 쓰나.”
그 말에 김홍철은 속으로 혀를 찼다.
‘시간만 날렸군.’
이제는 긴장감도 날아갔다. 협력을 바란다면서 아무런 보상도 제시하지 않을 줄이야. 유선우의 가치를 염두에 두더라도 얼토당토않은 소리다.
생각을 정리한 김홍철이 몸을 일으켰다.
“그럼 전 이만 일어나보겠습니다.”
“그러세요. 돌아가서 천천히 생각해보시고.”
“헥터로 오신다는 얘기라면 언제든 환영입니다.”
유선우는 김홍철을 붙잡지 않았다. 그는 애초부터 당장 도움을 받을 생각은 없었다. 목표는 협회장이 몰락할 미래를 머릿속에 심어두는 것뿐.
그때가 되면 김홍철은 오늘을 떠올리겠지. 협회장을 끌어내리는 데 스스로 손을 보태줄 것이다.
‘앞으로 세 명 더.’
다음은 회라도 얻어먹을까.
***
주말 동안 유선우는 네 명의 클랜장을 만났다.
헥터와 네스트는 단호하게 제안을 거절했고, 녹랑과 한철은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으나 협조에는 난색을 내비쳤다.
‘설계는 이 정도면 됐어.’
시기가 오면 알아서 제 밥그릇을 챙기려 할 터. 마무리는 맡겼으니 신호탄을 쏘아 올리는 것은 유선우의 몫이었다.
그리고 찾아온 월요일.
출근날임에도 유선우의 입가에선 웃음이 떠나지를 않았다. 이유는 다름 아닌 통장 잔고. 경매 대금이 입금되어 액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다.
‘23살에 50억 넘겼네.’
탈세조차 하지 않고 50억.
귀환한 지 2달도 되지 않아 이루어낸 쾌거였다.
‘솔직히 이쯤 되면 자서전 써도 된다.’
잔고를 볼 때마다 걱정이 눈 녹듯이 사라진다. 막상 돈을 쓸 곳은 별로 없지만 자본주의 사회.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르다.
‘이제 고양이 한두 마리만 키우면 완벽한데.’
괜찮은 집도 알아뒀다. 평생 살기는 뭣해도 몇 년 살기에는 모자람 없는 집. 한참을 싱글벙글대던 유선우가 최현석에게 물었다.
“오늘은 뭐해?”
“오후에 게이트 처리. 수지구 쪽으로.”
“고생하네.”
“고생은 무슨. 예능 나가는 것보단 훨씬 낫다.”
최현석은 청일에 입사하자마자 일을 시작했다. 등급이 낮은 게이트 수습에도 발 벗고 나섰고, 순찰에마저 자원했다. 자신의 실력이 부족함을 알기에 성실성으로 어필하려는 심산이었다.
“나는 그렇다 치고. 너는?”
“내가 하는 게 맨날 똑같지.”
“살살해. 창민이 울겠더라.”
“울다 보면 세져.”
무덤덤한 목소리에 최현석이 심각하게 고민했다. 웬 허접이 말했다면 코웃음을 쳤을 터. 하지만 유선우의 발언을 허투루 넘길 수는 없었다.
쓸데없는 고민을 하는 사이에 유선우가 말했다.
“점심은 여기서 먹지?”
“어? 어. 그러려고.”
“그럼 점심 때 봐.”
하지만 둘이 점심을 함께할 수는 없었다.
11시 반, 유선우가 방송을 종료하기 직전. 그는 지부장 박민상의 다급한 호출을 받았다.
- 서, 선우 씨! 지금 어디야?
“어디긴요. 맨날 있는 데 있죠.”
- 미안한데, 하던 거 멈추고 당장 위로 와주게.
박민상의 어조는 상당히 흐트러져 있었다. 그가 호들갑을 떠는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으나 오늘따라 과했다.
“무슨 일 터졌어요?”
- 와보면 알 거야. 일단 지금 바로 올 수 있나?
“갈 수야 있는데. 혹시 게이트라도 생겼어요?
- 차라리 게이트면 다행이지. 하여튼 부탁하네.
“…알겠습니다.”
통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게이트보다 심각한 일이라면 대리자일까. 끈적거리는 불길함이 유선우의 온몸을 휘감았다.
유선우는 서둘러서 최상층을 찾았다. 도착하니 생소한 사람이 지부장실의 문을 막고 있었다. 경호하듯이 등을 곧게 펴고 선 정장 차림의 남자.
‘떡대 뭐야.’
평소와 달리 유선우는 쉬이 말을 걸지 못했다. 상대가 흑인이었기 때문이다. 인종차별적인 마인드를 떠나서 언어가 문제. 그의 영어 실력은 일반적인 고등학생보다 처참했다.
“M, May I come in?”
후진 발음에도 남자는 비웃지 않았다. 오히려 정중하게 문을 열어주면서 옆으로 물러서기까지. 절도 있는 모습에 유선우는 내심 감탄했다.
‘이게 남자지.’
이런 사람을 이계로 보내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지부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소파에는 박민상과 웬 여자가 앉아 있었다. 등지고 앉은 탓에 여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박민상만 보일 뿐. 눈이 마주치자 그가 반색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우 씨! 빨리 왔구만. 방송은 어쩌고?”
“하던 거 멈추고 오라시더니.”
“크흠!”
박민상이 헛기침하며 시선을 피했다. 떫은 낯으로 바라보던 유선우는 여자에게로 눈을 돌렸다.
‘어디서 봤나?’
물결치는 금발이 화사하다. 이유 모를 기시감이 드는 뒤통수. 그런데 지구에 금발녀 인맥이 있었던가. 의아함에 말이라도 붙이려는 순간이었다.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자그마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어?”
잊을 수가 없는 얼굴이었다. 유선우의 첫 후원을 받아간 뮤튜버. S급 헌터 소피아였다.
박민상이 한껏 당황한 유선우를 재촉했다.
“거기 서서 뭐해. 이분 누구신지 알지?”
“아, 네.”
유선우는 얼떨떨하게 대꾸하곤 소파로 다가갔다. 소피아의 눈이 집요하게 그를 따랐다. 일거수일투족을 전부 놓치지 않겠다는 기세였다.
거리가 좁아질수록 유선우의 고민이 깊어졌다. 자신을 만나러 왔다는 것쯤은 뻔했다. 바쁘신 몸인데 본부도 아니고 지부로 찾아왔으니.
문제는 인사말이었다.
‘뭐라고 하지?’
나이스 미츄부터 마이 네임 이즈까지?
다섯 마디 이상 회화를 이어나갈 자신이 없었다. 머리가 팽팽 돌아가는 차에 소피아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유선우 씨, 반가워요.”
“…미투?”
“왜 그렇게 긴장해요? 안 잡아먹어요.”
소피아의 눈꼬리가 곱게 휘어졌다. 유선우는 구멍 난 풍선처럼 폐 안의 숨을 단번에 토해냈다.
한국어가 굉장히 능숙하다. 언어의 장벽이 허물어지니 유선우의 표정도 삽시간에 환해졌다.
자신을 찾아 먼 미국에서 날아온 미녀. 말만 통하면 거북하게 여길 이유가 없다.
“소피아 씨 맞으시죠? 한국어 되게 잘하시네요.”
초면에 이름을 부르긴 뭣해도 어쩔 수 없었다. 성씨를 모르는데 어떡해. 후원은 했어도 검색해볼 정도까지 관심이 있진 않았다.
다행히도 소피아는 개의치 않는 기색이었다. 그녀가 하늘거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릴 때 배웠어요. 열 살 때였던가.”
“열 살… 그러시구나.”
“좋은 가정교사가 많았거든요.”
유선우는 감탄을 넘어 반쯤 기가 질렸다. 열 살. 미국식 계산이겠으나 어쨌건 초등학생 때다.
‘난 그때 뭐 했었더라.’
메이플에서 냉동참치 들고 설치지 않았었나. 참으로 비교되는 유년 시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