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6화
세상이 시끄럽든 말든
유선우는 돈을 입금받자마자 집을 구했다.
서울시 광진구의 아파트. 12억하고도 2천만 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43평짜리 집을 마련했다. 청일 본부가 위치한 송파구와 가까운 위치였다.
부모님도 집 자체는 만족스러워했으나, 자식의 독립을 아쉬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예 서울로 전근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애초부터 위험성 탓에 떨어져 지내기로 한 것. 지역만 옮겨봐야 의미가 없었다.
한편 유선우뿐만 아니라 유선혜도 자취를 결심했다. 자취에 로망을 가지고 있었던 그녀에게 이번 이사는 좋은 기회였다.
둘은 각자의 집을 구할 동안은 기존의 아파트에 남아 있기로 했다.
개인적인 일 외에 사회적으로도 떠들썩한 시기.
하루가 멀다고 유명인들의 스캔들이 터져나가는 와중에, 유선우는 영화관을 찾았다.
“꺄악!”
옆자리에 앉은 한강이 작게 비명을 질렀다. 영화관이라 알아서 볼륨을 조절한 듯했다.
“야. 공포영화 잘 본다며?”
“저 눈 한 번도 안 감았거든요?”
“그건 병원 가봐야지.”
유선우는 심드렁하게 대꾸하며 턱을 괴었다. 그는 본래 공포영화를 좋아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오랜만에 보니 긴장감은 개뿔도 안 느껴지더라. 실제로 악마 얼굴을 지겹도록 봤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변화였다.
결국엔 화면에서 시선을 떼고 한강을 관찰했다.
‘와, 눈 오지게 커.’
한강은 눈을 부릅뜬 채 영화를 관람하고 있었다. 마치 한 장면도 놓치지 않겠다는 것처럼. 그러면서도 콜라를 양손으로 꽉 움켜쥐고 있다.
몸을 오들오들 떨면서도 빨대를 쫍쫍 빤다. 유선우는 팝콘을 하나 집어서 내밀어줬다.
“입.”
찰떡같이 알아들은 한강이 아, 하고 입을 벌렸다. 먹이를 받아먹는 듯한 모양새. 흐뭇하게 웃은 유선우가 입안에 팝콘을 넣어줬다.
하지만 한강의 입은 닫히지 않았다. 더 달라는 소리다. 두 개를 더 먹여주자 입을 다물고 오물거리기 시작했다.
‘진짜 애 같네.’
유선우가 소리죽여 키득거렸다. 그의 오른쪽에 앉은 박아연이 팔을 툭툭 건드렸다.
“뭐해요. 영화 안 봐요?”
“얘 얼굴이 더 재밌어요.”
“…아, 그래요.”
박아연이 떫다는 듯이 대꾸했다.
셋은 지금, 퇴근 후 여가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유선혜는 자리에 없었다.
하필이면 퇴근 직전에 출동 요청을 받은 것.
남들이 놀고먹는 날에도 그녀는 눈물을 머금고 고블린을 때려잡고 있었다.
‘처음으로 내가 사는 건데 말이야.’
오늘의 유흥비는 전부 유선우가 지불했다. 잔고가 5억에 가까운 수준이라 그깟 팝콘쯤이야 얼마든지 사줄 수 있었다. 돈 자랑은 아니고, 여태까지 받아먹은 것에 대한 답례였다.
유선우는 고개를 돌려 박아연을 바라봤다. 그녀는 잔뜩 굳은 채로 팔걸이를 붙잡고 있었다.
“박아연 씨. 이런 거 잘 못 보나 봐요?”
“무, 무슨 소리예요. 저 지금….”
- 꺄아아아악!
스크린에서 비명이 터지자 박아연이 눈을 질끈 감았다. 속눈썹뿐만 아니라 입술마저 떨어댄다.
“저기요. 괜찮아요?”
“스, 스….”
“스?”
“스크린 터뜨릴 뻔했어요. 하아아.”
유선우는 어이가 없다가도 한편으론 아쉬웠다. 상상해보니 그림이 재밌어 보여서. 뒤처리야 곤란을 겪겠지만 말이다.
“평소랑 엄청 다르네요.”
“진짜 아니거든요.”
박아연이 재빠르게 부정했다. 그녀는 눈이 따갑다면서 괜스레 눈가를 비비적거렸다.
“에이. 인정하면 편해요. 몸은 솔직한데.”
“……일부러 그러는 거죠?”
“뭐가요?”
“됐어요. 영화나 봐.”
목소리가 새침하다. 오히려 한강보다도 무서워하는 게 아닐까. ‘선우 씨 미쳤어요?’를 입에 달고 살던 여자가 이럴 줄이야.
‘차세정은 잘만 보던데.’
유선우는 눈을 반짝거리며 호러 영화를 보던 차세정을 떠올렸다. 그녀는 유선우가 여자 둘과 영화관에 온 것에 대해서 쓴소리를 하지 않았다.
애초에 이 자리는 차세정의 의도로 성립되었다. 한강이 요즘 외로워한다고 케어 좀 해달라더라. 그동안 바빠서 소홀히 한 감이 있기는 했다.
‘근데 케어 두 번 해줬다가 죽겠네.’
한강은 어느새 앞자리에 머리를 처박고 있었다.
***
10월 22일.
경매가 열리는 날에도 유선우는 회사에 있었다.
오늘의 청일은 평소보다도 한층 떠들썩했다. 원인은 유선우와 함께 출근한 한 남자. CHC에서 청일로 이직한 최현석이었다.
“이렇게 보니까 또 색다르네.”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로비가 인파로 북적거렸다. 그래도 기자로 바글바글한 바깥보단 덜해, 유선우는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이제 좀 살겠네. 여기까진 못 들어오나?”
“당연히 못 들어오지. 목숨 한 세 개쯤 되면 몰라. 선혜야, 괜찮아?”
“벌써 익숙해졌어요. 저희 오빠 때문에.”
그 말에 유선우가 머쓱하게 볼을 긁적였다. 그는 방송 이후로 명성을 얻었지만, 그에 따른 유명세도 치르고 있었다. 기자들이 회사 앞에서 텐트를 치고 있다거나 하는 일들을.
“근데 어떤 식으로 계약한 거야?”
“응?”
“팀장급보단 높을 거 아냐.”
A급은 어지간해선 예비 병력으로 취급받는다.
공식적으론 강남역 게이트의 던전을 토벌한 것도 최현석으로 되어 있는 상황. 등급이 떨어질 우려는 없을 터다.
“창민이랑 비슷해.”
“월급 루팡 한다고?”
“아니, 내 재량으로 일 받아서 하는 식. 슬슬 방송 그만두고 발로 뛰려고.”
“그래?”
“안 그래도 요즘 말 많잖아. 이럴 땐 몬스터나 잡는 게 낫지.”
며칠 전부터 CHC에서 본격적으로 최현석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대대적으로 루머를 퍼뜨리지는 않았다. SNS를 이용해 그의 약점을 꼬집은 것이다.
등급에 비하면 떨어지는 실력과 부족한 실적.
방송에 전념해온 그에게 몬스터와 관련된 실적이 많을 수가 없었다.
꼽자면 강남역 게이트가 있으나 그건 형식적으로만 의미가 있을 뿐. 유선우가 원맨쇼를 했다는 것은 초등학생도 아는 일이다.
“하여간 양아치들. 내 실적은 무시해놓고.”
유선우의 공은 공식적인 기록으로 남지 않았다.
반면 최현석의 공은 실질적으로 무마된 상황.
유명인들의 스캔들도 잇달아 터지고 있어, 유선우의 화제는 자연스럽게 식어가고 있었다.
협회와 CHC도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나로서는 오히려 잘 됐지.”
“어딜 봐서?”
“나도 현장에서 뛰고 싶었거든. 하도 방송만 해서 좀이 다 쑤신다.”
“어, 그럼 나랑 훈련 좀 할래?”
최현석이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유선우가 말하는 ‘훈련’. 뮤튜브로 간접 체험해본 그는 차마 수긍할 수 없었다.
***
점심시간, 청일의 구내식당.
강창민과 마주 앉은 최현석이 탄성을 터뜨렸다.
“와, 연어 살살 녹는다.”
“꿀맛이죠? 제가 여기 밥 먹으러 출근하거든요.”
“자랑이다, 인마.”
유선우가 타박하자 강창민이 움찔거렸다.
한동안 맞고 다닌 지라 자연스레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강창민은 볼을 긁고는 너스레를 떨었다.
“근데 이렇게 모인 거 방송 이후로 처음이네요. 저번엔 얘 없었잖아요.”
그리 말하면서 젓가락으로는 한강을 가리킨다. 샐러드를 씹던 한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내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녀가 눈을 부릅떴다.
“오빠들 언제 저 빼고 만났어요.”
“우리 만난 지 좀 됐어.”
“지금 저 왕따하는 거예요?”
토라진 눈치였으나 강창민은 코웃음만 쳤다. 기어코 그의 입에서 문제 발언이 흘러나왔다.
“넌 여자잖아.”
“여자면 안 돼요?”
“안 되는 게 아니라 그… 남자만의 그렇고 그런 게 있다는 거지.”
“그렇고 그런 게 뭔데요.”
“여자는 몰라도 돼.”
이쯤 되니 최현석마저 기가 질렸다.
“미친 새끼…. 강아, 혹시 페북 하니?”
“아이디는 있어요.”
“썰 풀어. 이 새끼는 매장당해야 정신 차려.”
한강은 대답하지 않고 마나를 끌어 올렸다. 강창민의 그릇에 있던 연어가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연어가 깔끔하게 한강의 입으로 날아간다. 강창민은 기겁하면서 젓가락을 놀렸다.
“야 이… 네 거 처먹어!”
“다 먹었거든요!”
빽 외친 한강이 강창민의 젓가락을 덥석 물었다.
그가 애써 잡아낸 연어 네 조각.
한강은 그 반을 물어뜯고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이, 이런 씹…!”
머리끝까지 화가 난 강창민이 부들부들 떨었다.
참지 못해 손을 올린 순간, 서늘한 음성이 흘렀다.
“음식으로 장난치지 마라.”
“아니, 쟤가 먼저 했…!”
“창민아. 자리 바꿀까?”
“닥치고 먹겠습니다.”
최현석은 묘한 감각에 입가를 일그러트렸다. 4인 가족 같다고나 할지. 공통점은 유선우 앞에선 누구도 꼼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죽일 듯 노려보는 강창민을 무시한 한강이 유선우에게 말을 걸었다.
“선우 오빠.”
“응?”
“아까부터 뭐해요? 밥상머리 앞에서 폰 만지는 거 아닌데.”
말마따나 유선우는 스마트폰에 시선을 빼앗겨 있었다. 화면에 떠오른 영상이 흥미로웠던 탓이다.
“방송.”
“어, 형. 지금 방송한다고요?
“하는 게 아니라 보고 있어. 얘 누군지 알아?”
유선우가 강창민에게 폰을 내밀었다. 화면에 비치는 것은 늘씬한 금발 여성. 그녀가 쥔 장검에선 찬란한 흰색 빛이 뿜어져 나왔다.
“지금 이거 실시간이에요?”
“시청자 수 보니까 맞는 것 같은데. 그래서 누군지 알아?”
대개는 제목에 본인의 이름이나 클랜명을 넣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방송의 제목은 인상적이리만치 간결했다.
키워드 따위 아무것도 없이 그냥 Hunting.
채널에도 떡하니 Hunter 이 지랄을 해놓고 있었다.
자신감의 표출인 모양인데, 이름을 알 수 없으니 무슨 소용인지. 채팅창은 온갖 외국어가 가득해 꺼둔 지 오래였다.
흥미가 생겨 묻자 강창민이 호들갑을 떨었다.
“형 원시인이에요? 저희 할아버지도 아시던데.”
“모를 수도 있지.”
“모를 수가 없는데.”
유선우가 코웃음을 쳤다.
자기가 안다고 남들도 다 알 리가 있나.
“야, 넌 지금 국무총리 누군지 알아?”
“이낙연 총리잖아요.”
예상외로 강창민의 대답은 즉각적이었다. 괜히 뻘쭘해진 유선우가 화제를 되돌렸다.
“하여튼 이 사람 유명해?”
“소피아잖아. 방송은 또 언제 시작했대.”
최현석이 대수롭지 않은 투로 대답했다.
“그게 누구야.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미국 S급. 금수저라서 취미로 헌터 한다더라.”
“…인생 혼자 사네.”
유선우는 혀를 내두르며 다시 방송에 집중했다. 던전의 지형은 숲. 때마침 뱀의 하체를 가진 라미아가 바닥을 기면서 달려들었다.
터덜터덜 걷던 소피아가 검을 휘둘렀다. 검날에 맺힌 새하얀 기운이 해일처럼 몰아친다. 한순간에 숲이 백광으로 물들었다.
머지않아 빛이 잠잠해졌다. 기운이 휩쓸고 간 자리엔 라미아의 시체는커녕 나뭇가지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과정을 지켜본 유선우가 감탄을 토해냈다.
“이야, 세긴 세다. 사람 맞나?”
강창민과 최현석은 물끄러미 유선우를 바라봤다. 그들의 감상도 똑같았지만 유선우가 할 말은 아니었다.
“형. 혹시 소피아랑 싸우면….”
“내가 얘랑 왜 싸워? 만날 일도 없을 텐데.”
“뭐 어때서요. 남 싸움 붙이는 거 한국인 종특이잖아요.”
유선우가 한심하다는 눈으로 강창민을 응시했다.
“너부터 걱정하자. 이성결 씨한테도 발려놓고.”
“제, 제가 언제 발렸어요?”
“벌써 까먹었어? 무기 받았으면 잘 좀 써라.”
“…쓰던 것보다 길더라고요. 적응이 덜 됐나.”
“추하다, 인마.”
강창민이 시무룩해져 시선을 떨궜다.
그런데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그릇 위는 이미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다.
강창민은 악귀처럼 낯을 구기고 고개를 돌렸다.
한강의 볼이 다람쥐처럼 두툼했다.
“이, 이 미친…!”
“우우움!”
“적당히 싸워라.”
유선우는 둘을 무시하고 방송을 시청했다. 영어를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예쁘네.’
큼지막한 푸른 눈. 날렵한 턱선과 콧날.
귀만 길게 만들고 431-9 차원에 던져놓으면 엘프 취급을 받지 않을까. 금수저라더니 과연. 귀티가 나는 인상이다.
인물 좋은 게 반 이상은 먹고 들어가는 법.
남캠이고 여캠이고 다를 바는 없다.
유선우의 눈을 잡아두기에는 충분한 얼굴이었다.
쉴 생각인지 소피아가 나무 한 그루를 잘라 밑동에 앉았다. 그녀가 눈매를 찌푸리더니 옷을 펄럭거렸다.
- It's so freaking hot.
티 한 장만 입고 있었기에 가슴골이 드러났다.
땀이 맺혀 있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송출됐다.
유선우는 옆자리의 최현석을 툭툭 건드렸다.
“현석아.”
“응?”
“이거 후원 어떻게 해?”
“도네하려고?”
“딱 10만 원만.”
유선우가 처음으로 후원을 해본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