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3화
제가 뭐라고요?
폰을 꺼내니 차세정의 이름이 액정에 떠올라 있었다.
“여보세요.”
- 카톡 봤어. 어쩔 거야?
‘내 인생 어쩔 거야?’라는 뉘앙스는 아니었다. 따진다기보다는 이후로 어쩌겠냐는 질문. 버스에서 같이 찍힌 사진 얘기다.
유선우는 나오려는 한숨을 애써 참아냈다.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건 차세정에게 실례였다. 더욱 혼란스러울 그녀도 예의를 갖추고 있으니까.
“그러게. 남의 일에 뭔 관심들이 이렇게 많은지.”
- 유명해졌으니까. 나한테도 연락 엄청 오더라.
“누가 뭐래?”
- 그냥 동창이랑 대학 사람들. 진짜냐, 소개해주면 안 되냐, 그래서 비싸게 굴었냐.
“어떤 놈이야? 돌았나.”
마지막 말이 유선우의 심기를 건드렸다. 장난이든 진심이든 인성이 의심되는 발언이다.
격한 반응에 차세정이 웃음을 흘렸다. 화를 내주는 것마저 그녀는 마냥 좋았다.
- 있어. 머리 모자란 사람. 하여튼 해명할까?
“해명이라. 무슨 연예인 같네. 너는?”
- 글쎄….
십여 초간 침묵이 흘렀다. 이내 차세정이 말을 이었다.
- 조용히 넘어가자.
“그러고 싶어?”
- 사실 마음 같아선 공개연애라도 하고 싶은데, 일단은 입 다물고 있는 게 맞아. 나는 어쨌든 너한테는 그게 좋을걸.
목소리는 의외로 담담했다. 애써 태연한 척하는 것처럼 들리지도 않았고. 유선우가 의아함을 표하기도 전에 차세정이 말했다.
- 그런다고 안 만날 것도 아니잖아. 그치?
“……맞는 소리긴 한데, 왜 이렇게 태평해?”
- 심각하게 굴 일이야?
차세정은 정말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했다. 불안감이라도 내비칠 줄 알았는데. 여러모로 예상 밖이어서, 유선우는 끈질기게 물었다.
“그럼 아니야? 대학 사람들도 말 많다며.”
- 나 복학할 때까지 4달 넘게 남았어. 그땐 좀 조용하겠지.
“또 어디서 사진 찍히면?”
- 그땐 인정하면 되지 뭐. 아예 결혼할까?
당돌한 대답에 유선우는 잠시간 말을 잃었다. 그는 결국 키득거리며 너스레를 떨었다.
“코 안 꿰이려면 조심해야겠네. 일단 그렇게 알아둘게.”
- 응. 오늘은 바쁘다 했었나?
“조금. 할 건 빨리 끝내고 쉬려고.”
서울에서의 용건은 끝마쳤으나 최현석과도 얘기해둘 필요가 있다. 협회장에게 듣기로 CHC는 이미 협회에 붙었다고 하니까. 이후 전개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명약관화하다.
- 열심히 해. 그럼 이제 할 말 다 끝났지?
“어, 응. 지금 바빠?”
- 화장실. 씻고 있거든.
어쩐지 목소리가 울리더라니. 유선우가 침을 꼴깍 삼켰다.
“……물소리는 안 나는데.”
- 그야 욕조에 있으니까.
“그래. 적당히 해. 감기 걸리겠다.”
- 보고 싶어?
첨벙첨벙. 물장구치는 소리를 내면서 짓궂게 묻는다. 유선우는 괜스레 헛기침만 내뱉었다. 차세정이 쿡쿡 웃음을 흘리더니 도발적으로 말했다.
- 10초 줄게. 보고 싶으면 영상통화 걸어.
유선우가 전화를 뚝 끊었다.
***
용인으로 돌아온 후에는 최현석과 강창민을 불러 간단하게 설명했다. 강창민까지 호출할 필요는 없었지만, 이러니저러니 앞으로 가깝게 지내게 될 사이. 일이 돌아가는 꼴은 알려두는 게 나았다.
강창민은 심각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즐겁다는 듯 실실거릴 따름. 그는 정치판을 좋아하진 않아도 개판을 보는 건 좋아했다.
최현석은 자리가 파하자마자 김정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미뤄뒀던 답변을 주기 위함. CHC에서 수작을 벌여오기 전에 든든한 뒷배를 구해둘 필요가 있었다.
CHC의 얼굴과 청일의 대표.
진작부터 서로의 가치를 알고 있었으니 손을 잡는 것쯤은 언제든지 가능했다.
그리고, 거리가 노을로 벌겋게 물든 시각.
유선우는 저녁이 되어서야 집에 도착했다.
귀가가 늦은 이유는 전적으로 강창민 탓이었다. 하도 붙잡아대서 같이 시간을 보내고 왔다.
놀면서 강창민의 이야기를 조금 듣게 되었다. 각성한 지는 3년도 더 됐는데, 미성년자였었던 탓에 활동은 못 했었다고. 각성자의 미성년자 코스를 수료한 뒤엔 놀고먹었다고 한다.
그동안 게임보다는 당구나 볼링 등을 즐겼다나. 창을 잡은 까닭도 큐대가 익숙했기 때문이라고 들었다.
‘썩은물 같으니.’
강창민은 헌터로선 유선우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으나 오락에서는 달랐다. 돈이야 더치페이로 냈다만 속수무책으로 진다는 건 유선우에겐 익숙지 못한 일이었다.
유선우는 떫은 낯을 지은 채 운동화를 벗었다. 신발장에는 유선혜의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왔나 보다.’
늦어지길래 걱정했는데 무사히 돌아온 모양. 아니나 다를까 유선혜는 거실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드라마나 예능은 아니었다. 토론 비슷한 프로그램. 진행자들이 떠드는 화제는 던전 내의 변화에 대한 것이었다.
- 어제 이후로 던전과 이쪽의 연결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다행히도 긍정적인 측면으로 말이죠. 이미 이곳저곳에서 같은 얘기가 들려오고 있어요. 이제부턴 던전 공략에 가속이 붙을 겁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요.
- 게이트의 출현 빈도가 잦아지고 있다는 일설도 있습니다. 청신호로만 받아들이는 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 그건 언제나 그래왔죠. 3년 전까지만 해도 C급 던전 하나 찾기가 힘들었었어요. 그런데 아시겠지만, 피해는 그때가 더 심했었습니다.
- 위협이 커지는 것보다도 빠르게 헌터들이 성장하고 있다, 이 말씀이시군요.
- 옳게 보셨습니다. 이번 변화는 저희에게 큰 도움이 되어주겠죠.
‘속 편한 소리 하고 앉았네.’
유선우는 진행자의 말에 반쯤만 동의했다. 표현이 틀려먹었다. ‘저희에게’가 아니라 ‘그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는 쪽이 옳다. 각성자와 비각성자 사이의 갈등은 골이 깊다.
현재 상황이 계속해서 이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B급 이상의 게이트가 우후죽순 불어나겠지. 그만큼 헌터의 힘도 강해질 것이다.
즉, 각성자의 의존도가 높아지게 된다. 그야말로 기하급수적으로.
‘딴 생각하는 새끼들은 무조건 나와.’
각성자는 돌연변이 취급을 받고 있다. 이에 반발하고, 오히려 비각성자를 깔보는 놈들이 점차 많아지리라.
관리자들이 휘두르기에 제격인 놈들. 그중에서도 과격하고, 뛰어난 몇몇이 대리자가 될 터다.
‘아무리 봐도 지구는 답이 없는데. 관리자를 다 죽이지 않는 이상은.’
고민이 깊어지려 할 때, TV 화면이 꺼졌다. 정신이 확 들어 유선혜를 보자 시선이 마주쳤다. 유선우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을 건넸다.
“언제 왔어?”
“2시쯤에. 지형이 넓어서 좀 오래 걸렸어.”
“고생했네.”
“오빠가 더 고생했지. 엄마한테 들었어. 인터넷도 봤고.”
“아, 그래.”
절로 머쓱한 대답이 나왔다. 유선혜가 싱겁게 미소지었다.
“왜 그렇게 굳어 있어? 누가 보면 나쁜 일이라도 한 줄 알겠다.”
“또 한바탕 싸울 줄 알았거든.”
“좀 어이없긴 했는데… 잘 모르겠더라. 내가 왜 화를 내나 싶고, 과하게 반응하는 것 같아서. 그동안 거리감을 잘못 재고 있었나 봐.”
유선혜는 유선우의 달라진 점을 볼 때마다 참을 수 없이 마음이 복잡했다. 일상적으로도 때때로 위화감을 느꼈고, 헌터 일에 대해선 다른 사람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부모님이 그렇듯이 믿고 넘어가면 되는 일이지만, 그녀가 유별나게 신경을 쓰는 것은 특수한 상황이 원인이었다.
21살이라는 새파랗게 젊은 나이.
친구들은 대학에 다니는데 자신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가족을 부양하고 있다.
억울함에 가끔 눈물도 흘리는 와중에, 죽은 줄 알았던 가족이 기적같이 돌아왔으니. 필연적으로 더욱 가깝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유선우와 충돌하는 것도 당연했다. 유선우는 명확하게 선을 긋고 있었으니까. 그는 구구절절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을 생각은 없었다.
‘적어도 가족한테 말하고 싶진 않지.’
털어놓음으로써 생기게 될 괴리감. 쏟아지게 될 동정 어린 시선.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변화가 아니었다.
“하여튼 그렇다고. 얘기 다 했어. 밥은?”
유선혜는 재차 웃음을 흘렸다. 그녀는 진지한 분위기가 불편했고, 심신 또한 노곤했다.
“아직. 어머니랑 아버지 신발 없던데, 어디 가셨어?”
“장 보러.”
유선우는 고개를 끄덕이곤 툭 지나가듯 말했다.
“맞다. 선혜야.”
“응?”
“나 슬슬 독립하려고. 회사 근처로 집 구할 건데 너도 올래?”
뜬금없는 말에 유선혜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갑자기?”
***
유선우는 가족에게 독립뿐만 아니라 가족의 이사 얘기까지 꺼냈다. 부모님은 부담스러워했으나 설득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지금 사는 집에 애착이 없었기 때문이다.
몇 번이나 옮겨 다녔으니 애착이 있을 리가.
문제는 장남의 돈을 빼먹고 싶지는 않았다는 건데, 50억 얘기를 해주자 아버지도 입을 다물고 말았다.
가족이 흩어진다는 점은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유선우는 독립하기에 아주 이른 나이는 아니었고, 같이 살기에는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다. 명성에는 유명세라는 것이 따르는 법이다.
다만 마음마저 편치는 못해서, 식구들은 저마다 복잡한 심경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이후 주말 내내 유선우는 인터넷만 돌아다녔다. 그밖에는 딱히 할 일이 없었다. 방송하기에는 마땅한 컨텐츠도 없었고. 그리고 무엇보다,
‘인터넷 확인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야.’
지금은 그야말로 격동의 시대였다.
헌터들의 던전 방송이 시작된 것. 유명 헌터들은 물론이고, 클랜 차원에서 방송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수록 유선우의 이름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을 따름이었다. 어떤 헌터들이 날고 기어도 유선우만큼은 못해서. 강남역 던전의 영상을 본 사람이라면 내심 비교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월요일이 됐을 때.
유선우는 뜨거운 시선을 받으며 회사에 출근했다.
‘분위기 왜 이래.’
평소보다 로비에 사람이 많았다. 바글거리지는 않아도 서른이 넘는 인원. 그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유선우를 쳐다보거나 힐끔거리고 있었다.
‘가서 일이나 하지.’
주목받는 것은 익숙해도 불쾌하기는 매한가지. 언짢음이 더해가고 있자니 지부장 박민상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A급 헌터 아니랄까 봐 거의 날아오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이야, 오늘도 훤칠하십니다! 회사가 다 밝아지는 것 같습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근데 아침부터 어쩐 일이세요?”
시원찮은 반응에 박민상이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그는 입에 달라붙지 않는 존댓말을 의식해서 사용했다.
“대표님으로부터의 전언이 있어서 말입니다.”
박민상은 김정수에게 들은 대로 설명했다. 내용이 길거나 복잡하진 않았으나 파격적이긴 했다.
“…청일 명예 고문이라고요? 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