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1화
헌터 협회장
‘비라도 오려나.’
카페 창가에 앉은 유선우는 선글라스를 슬쩍 내려 바깥을 살폈다. 하늘이 우중충하다. 먹구름 낀 날씨에 괜스레 기분이 울적해진다.
‘우산 비싼데.’
머지않아 갑부가 될 예정이지만 지금은 첫 월급도 타지 못한 인턴. 지갑에 든 돈은 어머니가 쥐여준 만 원짜리 지폐 한 장뿐이다. 마시고 있는 커피도 며칠 전에 받은 기프티콘을 사용했다.
유선우가 협회장을 불러놓고 카페로 온 이유는 간단했다. 그냥 오래 걸릴까 봐. 언제 올지 모르는데 가만히 기다려줄 생각은 없었다.
멀리 가기는 뭣해서 사옥을 돌아다녔다. 그렇게 도착한 곳이 카페. 연예인처럼 이것저것 뒤집어쓴 탓에 시선이야 끌렸으나 큰 소란은 없었다.
‘할 거 없나.’
유선우는 빨대를 잘근잘근 깨물며 폰을 꺼냈다. 인터넷을 켜서 헌터 갤러리에 접속. 어제 알게 된 사이트라 틈만 나면 훑어보고 있다. 한창 재미를 느낄 때가 아닌가.
‘헌갤인데 정작 현직 헌터는 별로 없단 말이지.’
가끔 헌터 인증이 뜨면 바로 개념글로 올라간다. 등급이 과하게 낮으면 비웃음을 살 뿐이지만. 어쨌건 개념글을 쭉 둘러보니 페이지 당 하나꼴로 익숙한 이름이 보이고는 했다.
‘창민이가 네임드일 줄은 몰랐는데.’
하기야 파릇파릇한 21살에 A급이니 자랑이라도 하고 싶겠지. 실명을 고정 닉네임으로 쓰는 것부터 의도가 빤하다.
‘관종 새끼.’
그렇게 욕하는 유선우도 만만찮은 관심종자였다. 그는 자신의 본명으로 닉네임을 파고 있었다.
‘왜 안 돼? 중복인가.’
누가 벌써 선점한 모양이다. 뒤에 온점을 붙일까 고민하다가 어째 자신이 한심스러워 그만뒀다.
갤러리는 유선우의 화제로 들썩거리고 있었다. 어제보다는 덜하지만 열기는 여전했다. 게시글을 둘러보던 유선우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 윾X우 여친.jpg
“미친.”
절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확인해보자 차세정과의 투샷이 첨부되어 있었다. 그것도 버스에서 연인처럼 머리를 기댄 사진이. 변명이라곤 씨알도 안 먹힐 장면이었다.
‘난 초상권도 없냐…….’
그때는 심신의 피로와 잡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 눈치채지 못했다. 협회부터 집 살 생각까지 했었으니 당연했다.
‘택시 탈걸.’
스캔들이 터지면 여자 쪽이 더 타격을 받는다. 차세정의 복학에도 차질이 생기지 않을까.
급히 차세정에게 전화를 걸어봤으나 응답은 없었다. 꼭 이럴 때만 안 받지. 저장한 사진을 메시지로 보내려는 차에 폰이 착신 화면으로 넘어갔다.
발신인은 차세정이 아닌 김정수였다. 이쪽이 본론이었음에도 자그마한 실망감이 피어올랐다.
- 어디 계십니까?
“앞에 카페요.”
- ……얼른 올라오시죠.
“벌써 왔어요? 늦장 부릴 줄 알았더니.”
- 그러게 말입니다…. 되도록 빨리 와주십시오. 굉장히 어색한지라.
“아, 그래요?”
- 부탁드리겠습니다. 정말로.
하기야 거북할 법도 하다. 김정수는 정면으로 협회와 반목하는 자리에 서게 됐으니. 그렇다고 그만큼 점잖은 사람이 면전에서 윽박지르진 않을 테고, 그냥 둘이 앉아서 커피라도 마시나?
‘어우, 내가 다 어색하냐.’
상상해본 유선우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상층으로 돌아가니 대표실로 향하는 비서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발소리를 들었는지 비서가 커피 트레이를 든 채로 뒤를 돌아봤다.
“아, 유선우 씨. 한 잔 드릴까요?”
“괜찮아요. 귀찮으실 건데.”
담담하게 거절한 유선우가 앞서 걸어갔다. 노크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손님이 문을 열어주는 구도. 비서가 묘한 기분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 고마워요.”
“제가 들어가려는 건데요?”
“……아, 네.”
“주세요. 제가 할게요.”
유선우는 떨떠름한 낯의 비서에게서 트레이를 받아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대표실의 소파에는 두 중년이 마주 앉아 있었다. 상상하던 그대로였다.
유선우가 들어오자 둘의 반응이 극명하게 엇갈렸다. 김정수의 안색은 밝아졌고, 김한성은 커피 심부름하는 모습을 보고 기괴한 표정을 지었다.
“협회장님이시죠? 유선우입니다.”
“김한성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악수 대신 커피를 건네면서 김한성을 훑어봤다. 평범한 인상이다. 눈에 띄는 카리스마도 없고, 꼬장을 부릴 것 같지도 않고. 어디에나 있을 법한 아저씨라고나 할지. 여러모로 예상외였다.
스캔을 끝마친 유선우가 김정수에게 말했다.
“대표님. 죄송한데 자리 좀.”
“알고 있습니다.”
“아, 커피 가져가세요. 전 마셨거든요.”
“…그러십니까.”
김정수는 어색하게 웃으며 김한성을 살폈다. 나름대로 페이스가 말렸는지 뺨이 움찔거린다.
‘시작은 괜찮군.’
의도한 것 같진 않지만 덕분에 걱정을 덜었다. 그는 속을 쓸어내리고는 대표실을 나섰다.
둘만이 남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소파에 앉았다. 자리가 만들어지자마자 김한성이 말문을 열었다.
“실례지만 휴대폰을 꺼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휴대폰요?”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요.”
김한성은 녹음 여부를 확인했다. 주머니에 녹음기를 숨겨뒀을지도 모르니 그다지 의미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기록이 남는 대화를 원하지 않는다는 의사의 표현일 뿐.
유선우는 불평하지 않고 소소한 여흥으로 받아들였다. 암묵적인 합의가 끝난 뒤에야 김한성이 본론을 꺼냈다.
“우선 방송….”
“협회장님.”
유선우가 엇박자로 말을 끊었다. 예의 없는 행동이었으나 사소한 요소가 대화의 주도권을 결정하기 마련. 그는 입가에 호선을 그린 채로 운을 뗐다.
“사실 전부터 좀 궁금했어요.”
“무슨 말씀이신지.”
“S급 헌터요. 지구에 8명밖에 없다잖아요.”
“공식적으로는 그렇지만 모르는 일이죠. 그 자리에 걸맞은 사람이 어딘가에 숨어 있을지도. 왜 나서지 않는지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만.”
좋게 해석하면 유선우의 역량을 인정한다는 뜻. 다른 면에서 보면 갑작스레 튀어나온 실력자를 의심한다는 뜻이다.
받아치기 전에 김한성이 한 발짝 물러났다.
“당장 내일 아프리카 오지에서 S급에 준하는 각성자가 나타날지도 모르고요. 미래는 원래 불확실하다지만 헌터 업계는 더 심한 편이죠.”
“하긴. 막 영화처럼 다른 세상 다녀온 사람도 있으니까요.”
“예?”
“만나본 적 없으세요? 제가 알기로만 두 명 있는데.”
“…만약 있다면 소개라도 받아보고 싶군요.”
교란의 일환이라 여겼는지 반응이 딱딱하다. 가족한테도 알려주지 않은 일인데 사치스럽기는. 싱겁게 웃은 유선우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냥 해본 소리였어요. 그래서 왜 보자고 하셨는지.”
탐색전은 끝이다. 김한성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긴장을 해소하기 위한 그만의 버릇이었다. 별 것 아닌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생각보다 도움이 되는 법이다.
“어느 쪽이 취향이십니까?”
“밑도 끝도 없네요. 남자 여자 따지자면 여자요.”
“길거나, 짧거나. 전 개인적으로 짧은 편을 선호합니다.”
“편하신 대로요.”
느긋한 대답에 김한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적으로 말씀드리죠. 유선우 씨가 저희 쪽으로 와주셨으면 합니다.”
“‘저희 쪽’이 정확히 어딘데요?”
“제 직함을 벌써 잊으셨나 봅니다.”
“아쉽게도 금붕어는 아니네요. 이 정도도 안 알려주시면 좀 섭섭한데.”
유선우는 유들유들한 태도를 고수하며 김한성을 주시했다. 과하게 딱딱한, 어울리지 않는 옷이라도 입은 듯한 사람. 무미건조한 얼굴 속에 감춰진 속내가 무척이나 궁금했다.
“굳이 관계를 따지자면 몇몇 클랜이 있겠군요. 다들 협조적이긴 해도 이런 건 상대적이니까요.”
“당연한 소리나 하려고 오셨어요?”
심드렁하게 말하자 김한성이 입을 다물고 시선만을 보내왔다. 신경전이라도 하려는 모양인데, 결과는 뻔했다. 언제나 여유 없는 쪽이 지는 법.
수 초가 지나지도 않아 김한성이 백기를 들었다.
“…유선우 씨와 연이 있는 건 CHC 정도입니다.”
“아, 그쪽에 붙었나 보네요. 그 외에는?”
“일일이 말씀드리기도 뭣하군요. 지원이 끊어지면 금세라도 망할 클랜이 수두룩하죠.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요.”
중소 클랜의 목줄을 쥐고 있다는 의미다. 헌터 업계는 대형 클랜들이 버티고 있는 레드오션. 헌터의 전망은 밝다지만 새로운 단체가 두각을 드러내기는 어렵다. 협회의 지원마저 끊기면 중소 클랜쯤이야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리라.
노골적으로 변한 태도에 유선우가 히죽 웃었다.
“이제야 좀 솔직하게 말씀하시네. 나머지는요?”
“협회의 자금이 다 어디서 나오는지 아십니까?”
“아뇨. 알아본 적이 없네요. 솔직히 관심이 없어서. 정부에서 나오나?”
“물론 정부에서도 나오긴 합니다만, 턱없이 부족하죠. 예산이 넉넉지는 않은 편이니까요.”
“스폰서가 따로 있다? 하기야 헌터는 유용하죠.”
헌터는 몬스터를 때려잡는 칼이지만 칼이 어디 한 가지 용도로만 쓰이나. 헌터를 원하는 재력가는 차고 넘칠 터다.
전후 관계는 알았으니 본격적으로 협상할 때다. 유선우는 감정이 희미한 김한성의 눈을 들여다봤다.
“정확히 짚어두고 싶어요. 제가 그쪽에서 뭘 해야 하는지.”
“게이트를 처리하거나 헌터가 필요한 현장으로 지원을 나가시게 되겠죠.”
“헌터가 필요한 현장이라… 두루뭉술하네요. 개처럼 끌려다니는 건 취향이 아닌데.”
“능력에 맞는 대우는 해드리겠습니다.”
“그게 전부면 좀 실망이겠는데요.”
그 말로 인해, 김한성은 유선우를 오인했다.
본인의 가치를 모르고 있다고.
청일이 아무리 대단하다지만 일개 클랜이고 기업이다. 김정수가 제시한 계약 조건은 알지 못하나 그보다는 협회의 대우가 후할 터. 자신한 김한성이 말을 이었다.
“그걸로도 충분할 거라 약속드리죠. 애초에 일개 클랜에서 유선우 씨에게 합당한 대우를 해줄 수 있으리라 생각지는 않습니다.”
“근데 이래도 돼요? 상도덕 그냥 무시하는 짓 아닌가.”
“그럴 가치가 있으니까요. 청일에도 보상은 해줄 예정입니다.”
협회의 위상이 걸린 상황이다. 김한성은 상도덕이고 나발이고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짧은 침묵이 앉았다. 괜스레 머리만 주억거리던 유선우가 입을 열었다.
“수락했을 경우를 들었으니, 이번엔 반대를 들어봐야겠죠. 제가 여기서 거절하면요?”
김한성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자세도 바뀌지 않았으나 공기에 무게가 실린 듯했다.
김한성이 담담하게 읊었다.
“이런 조항이 있더군요. 권한을 받지 않은 이는 던전에 출입할 수 없다. 교육생에겐 권한이 없죠.”
“그래서 징계라도 하시게요?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은데.”
“예. 대중이 원하지 않을 겁니다. 그들이 바라는 건 유선우 씨가 본인에게 어울리는 등급에 올라 활약하는 거겠죠. 그런데 헌터 등급이 어떻게 매겨지는지 아십니까?”
유선우는 기억을 더듬었다. 이전에 대충이나마 들은 적이 있다.
“영향력 평가에 가깝다고 들었는데요.”
“유선우 씨는 이번에 더할 나위 없는 영향력을 얻어냈죠. 문제는 기록상으로 남은 실적이 있느냐는 건데….”
김한성이 한차례 끊고서 말을 이었다.
“무엇을 하든, 무엇을 했든 기록에 남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얘깁니다. 유선우 씨의 경우에는… 애매하지 않습니까? 전적으로 저희 판단에 따라 달라지겠군요.”
“허.”
유선우가 허탈한 목소리를 흘렸다. 정식 헌터가 아니라는 구실로 평가를 보류하겠다. 아니, 보류보다는 무마라고 보는 게 옳을 터. 예상보다도 과격한 수단이다.
“그래도 괜찮겠어요? 대중이 그렇게 멍청하진 않을 텐데.”
“물론 떠들썩해지겠죠.”
“알면서 그거 가지고 협박을 해요?”
유선우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물었다. 그러자 시종일관 무표정하던 김한성이 작게 미소지었다.
“당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화제로 떠들썩해질 겁니다. 그거 아십니까?”
김한성은 숨을 고르고서 짚어나갔다.
“우리나라에선 별 해괴한 일이 다 벌어지고 있어요. 대형 클랜 간부의 갑질은 기본이고 알려지지 않은 각성자의 범죄까지. 그중에는 국회의원의 자제도 있고요.”
“그걸로 묻힐 거 같진 않은데요.”
“적어도 시선은 분산되겠죠. 유선우 씨의 발이 묶여 있는 동안은요.”
“아, 예.”
유선우는 입매를 일그러뜨린 채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의 경멸감 어린 눈빛에 김한성의 낯이 살짝 굳었다. 김한성은 재빨리 표정을 다잡고 대화를 정리했다.
“이 정도면 이해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저희와 함께하시는 게 영 나쁜 선택은 아닐 겁니다.”
“그러시겠죠. 당근은 밍밍했는데 채찍은 좀 짜증 나네요.”
날 선 말투에도 김한성은 동요하지 않았다. 협회장 자리에 앉은 뒤로 몇 번이고 겪은 일. 감정이 상하기엔 무뎌진 지 오래다.
“유선우 씨라면 한국 헌터의 얼굴이 되는 것도 금방이겠죠. 시간은 넉넉히 드리겠습니다. 대답은 나중에라도…….”
“X 까세요.”
말을 끝맺기도 전에 유선우가 끼어들었다. 그의 입가엔 가소롭다는 듯한 조소가 맺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