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자님 뭐하세요-44화 (44/179)

제 44화

던전 방송

가파른 경사 아래, 원형의 오아시스. 오아시스의 물은 맑았으나 펼쳐진 평지는 붉었다. 카펫처럼 깔린 핏물이 새하얀 모래를 덮었다.

“이게 얼마 만이야.”

유선우의 눈에는 수백의 몬스터가 비치고 있었다. 개미 떼처럼 바글거리는 군세. 익숙한 광경이다. 익숙하지만 쥐뿔도 그립지는 않았던 광경.

하지만 피가 끓는 것만큼은 별수 없었다. 이전의 기괴한 차원에서도 비슷한 경험은 했었으나, 그건 여러모로 예외적인 상황이었다.

가늘게 뜬 눈으로 특이한 개체들을 추려냈다.

새까만 와이번과 머리 두 개 달린 오우거. 평균보다 두 배는 덩치가 큰 트롤도 보였다.

‘아홉 마리.’

던전 클리어 목표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란 숫자. 이곳을 정리한 뒤에도 한동안은 돌아다녀야 할 듯싶다.

유선우가 우둑우둑 소리를 내며 관절을 꺾었다. 몸을 푸는 사이에 벤츠가 도착했다.

“형! 일단 뒤로 좀 오시죠. 걸리면 진짜 큰일 납니다.”

“됐으니까 우리 카메라맨이나 잘 지켜.”

“제가요?”

“너 아니면 누구겠어. 그리고 창 내놔.”

유선우는 강창민에게서 창을 강탈해 조립했다. 시험 삼아 휘둘러 보니 가벼운 감은 있어도 그럭저럭 만족스러운 수준이었다.

창대를 느슨하게 쥔 그가 얼빠진 강창민에게 히죽 웃어 보였다.

“후딱 갔다 온다.”

유선우가 도움닫기 하며 오아시스 한복판으로 뛰어올랐다. 멀어지는 등을 바라보며 강창민이 허탈한 목소리를 냈다.

“그거 비싼 건데….”

유선우는 지면으로 낙하하면서 마력을 방출했다. 서로 싸우던 몬스터들이 움직임을 멈추더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으워어어!”

그가 착지한 장소는 대형 트롤의 배 위였다.

트롤은 큼지막한 덩치에도 불구하고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수십 마리의 몬스터가 끝도 없이 물어뜯으니 특유의 재생력도 쓸모가 없었다.

창에 푸르스름한 검기가 감돌았다. 창끝에 맺힌 검기가 길게 뻗어진다. 유선우가 창대를 미끄러트리면서 반원을 그리듯이 휘둘렀다.

궤적에 따라 트롤의 몸이 갈라졌다. 휘몰아치는 칼바람이 매섭다. 득달같이 달려들던 몬스터의 떼가 휘말려 처참하게 난도질당했다.

‘이것보단 한 번에 처리하는 편이 편하긴 한데.’

문제는 임팩트다. 과시하기엔 육탄전이 제격.

성가신 데다 피도 잔뜩 튀어 찝찝하겠다만 별수 없다.

‘이만한 기회도 몇 없지.’

이번 일은 예상보다도 큰 반향을 불러올 것이다. 물론 좋은 방향으로.

과하게 시선이 쏠릴지도 모르겠지만, 헌터라는 분야에 있어서 유선우가 감당하지 못할 직함은 없다.

‘교육생 짓도 슬슬 접을 때가 됐어.’

벌써 질린 건 아니다.

그저 3개월 이상을 허비하고 싶지 않을 뿐이지.

게다가 겨우겨우 교육생 신분을 벗어나도 헌터 등급을 찔끔찔끔 올리려면 얼마나 걸릴지. 상상만 해도 진저리가 쳐진다.

유선우의 눈이 시커먼 와이번을 포착했다. 상체를 낮게 숙이고 몸을 용수철처럼 퉁긴다.

와이번의 등에 사뿐하게 착지한 그가 한가운데에 창을 꽂았다.

“키에에엑!”

와이번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온몸을 흔들어댔다.

유선우는 창대를 붙잡아 몸을 지탱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 한강이 띄운 폰이 보였다.

‘일 잘하네.’

흡족하게 웃고는 손을 휘저었다. 잠깐의 지체 후에 가파른 빙벽이 솟아올랐다. 빙벽은 거대한 원을 그리며 오아시스를 감쌌다.

도망칠 곳 없는 천연의 투기장.

벽을 완성한 유선우는 쓸모를 다한 와이번의 목을 잘랐다. 사체가 추락하기 전에 등을 박차 공중을 날았다.

비행 몬스터는 어림잡아 오십. 하나하나 족치기에는 귀찮은 숫자다. 유선우는 처리하기에 알맞은 방법을 떠올렸다.

사아아.

한기가 연기처럼 퍼졌다. 이성결에게 써먹었던 얼음덩이가 만들어져 하늘을 메웠다.

변화를 가미한, 팽이를 옆으로 눕힌 형태. 끝부분이 날카로워 몬스터의 비늘을 뚫어내기에도 부족함이 없을 듯했다.

얼음덩이들이 일제히 쏘아지고, 곳곳에서 단말마의 신음이 들려왔다. 훈련이 쓸모없진 않았는지 명중률이 거의 9할에 수렴했다.

공중을 처리한 유선우가 지상으로 떨어졌다. 착지 장소에서는 때마침 오우거가 근육이 울긋불긋한 팔을 뻗어오고 있었다.

“꺼져, 새끼야!”

유선우가 노호를 질렀다. 그는 낙하하는 자세 그대로 창끝을 아래쪽으로 겨눠 짧게 그었다.

“크어어어!”

손바닥부터 팔뚝까지. 왼팔이 반으로 갈라진 오우거가 비명을 내지르며 몸부림쳤다.

유선우는 피를 뒤집어쓴 채로 지면에 내려섰다. 그가 살랑거리듯 창을 흔들었다.

허공에 소용돌이 형태의 검기가 여럿 맺혔다. 검기는 점점 커지면서 서로의 간격을 잡아먹었다.

끼기긱!

소용돌이가 겹치더니 쇠 긁는 소리가 요란하게 퍼졌다. 하나로 합쳐진 소용돌이가 자석처럼 주위의 몬스터들을 끌어당겼다.

청색 검기가 핏빛으로 물들었다.

시산혈해. 시체의 산이 쌓여간다.

유선우는 창을 한 번 털어내곤 등을 돌렸다.

‘역시 많긴 하네.’

몬스터들은 서로 합의라도 봤다는 듯 유선우에게만 몰려들었다. A급 헌터라도 주저앉아 실금할 듯한, 맹목적인 적의의 한복판. 유선우는 무덤덤하게 창을 고쳐잡았다.

그의 싸움은 빈말로도 고상하다고 표현할 수는 없었다. 창을 휘두르다가도 손으로 몬스터의 목을 뽑고, 입안으로 주먹을 박아넣어 머리를 터뜨리기도 했다. 짐승 같으면서도 야만적이었다.

머지않아 몬스터들이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적의보다 두려움과 생존 욕구가 강해졌기 때문이다.

놈들은 방향을 돌려서 미친 듯이 빙벽을 긁고, 몸을 부딪쳤다. 심지어 깨물다가 이빨이 부러진 놈도 있었다.

쿵!

“뭐야.”

묵직한 소리에 유선우가 옆을 돌아봤다. 머리 둘 달린 오우거가 벽을 허물고 있었다. 완력이 보통은 아닌지 후려칠 때마다 금이 갈라졌다.

유선우는 잔당들을 처리하며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의 몸에는 피가 묻지 않은 곳이 없었다.

말 그대로 혈인(血人).

하지만 본인의 피는 한 방울도 흐르지 않았다.

서른의 몬스터가 추가로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오우거가 벽을 부숴냈다.

탈출구가 열린 셈이다. 몬스터들의 반응은 사람과 다를 바가 없었다. 서로 밀치고 짓밟으면서 미친 듯이 바깥으로 달려나갔다.

짐승들의 행렬.

그 뒤에서 유선우가 한쪽 무릎을 굽혔다.

무릎이 펴지자, 벼락이 사막을 가로질렀다.

콰드드득!

길을 가로막던 놈들의 몸에 구멍이 뚫렸다. 대포알이라도 지나간 듯한 모양새였다.

“와….”

차 안에서 지켜보던 셋은 입을 다물질 못했다. 셋뿐만 아니라, 수많은 시청자가 이구동성으로 같은 마음을 품었다.

강창민이 흥분에 차올라 중얼거렸다.

“떴네요. 두 번째 S급.”

“너희 대표님 제대로 계 타셨네.”

최현석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유선우가 강하다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저 정도일 줄이야. 도박이라 생각했던 스스로가 우스울 지경이었다.

“글쎄요. 마냥 좋은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의외로 강창민의 반응은 시원찮았다. 그의 눈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지만, 최현석의 말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응?”

“우리나라 헌터 기관들 돌아가는 꼴을 봐요. 아무리 대형 클랜이라도 협회에는 굽히죠. 그 이유가 뭐겠어요?”

당연하다는 어조. 최현석이 눈을 얇게 떴다. 그가 대답하기도 전에 강창민이 말을 이었다.

“권한을 주니까? 반쯤은 그런데, 반쯤은 협회장이 무서워서 그런 거예요. 클랜 대표쯤 되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거든요. 그 새끼한테 밉보여서 좋은 일 없다는 거.”

“무슨 소리예요?”

“개소리니까 몰라도 돼.”

강창민은 한강에게 설명하기가 귀찮았다. 구구절절 말해도 이해할 것 같지도 않고. 애초에 둘보다는 시청자들에게 말한 것이었다.

실시간으로 전 세계에 퍼지고 있는 방송이다. 중계까지 따지면 수만은 족히 넘을 터. 공론화될수록 협회가 간섭하기 어려워진다.

방송이 끝났을 때.

대중들은 제 손으로 유선우의 이름에 금칠을 해줄 것이다.

고심하던 최현석이 말했다.

“시끄러워지겠네.”

“당연하죠. 국내 한정이긴 해도 협회장 이름에서 유일한 S급 딱지가 떨어지는 건데. 움직이지도 않는 아저씨, 현장에서 활동하는 젊은 청년. 누굴 더 응원하고 싶겠어요?”

최현석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얼핏 건방져 보여도 고의성이 다분하다.

현직 A급 헌터의 입에서 나온 발언이다. 노골적일수록 시청자들도 감탄하며 받아들이겠지. 유선우를 치켜세워주려는 의도가 너무 뻔했다.

오늘 처음 만난 사람한테 그럴 이유가 있나?

“너, 쟤 진짜 좋아하네.”

“그래 보여요?”

강창민이 헤실헤실 웃었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유선우가 보였다. 악귀처럼 몬스터를 도살하는 모습이 그에겐 눈부셨다.

“멋있잖아요.”

발의 움직임, 근육의 꿈틀거림, 창을 쥐는 방법.

사소한 동작 하나하나에서 범접할 수 없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능력에 의존하지도 않는, 말하자면 무의 극치.

인간이 무의 끝에 다다르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고 있는 듯했다.

강창민은 안주하는 이들을 혐오했다. 어중간하게 강하니 주변에서 칭찬해주고, 자만하면서도 위를 올려다볼 생각은 않는 머저리들.

그것이 A급을 달자마자 일을 멈춘 계기였다. 그런 인종들과 어울리며 정체되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혼자 창술을 가다듬고 말지.

나쁘지는 않아도 만족스럽지도 않던 나날이었다.

그러다가 유선우를 만났으니. 홀릴 수밖에 없다.

강창민은 저만한 사람이 옹졸한 알력 다툼 따위로 더러워지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판도가 바뀔 겁니다. 저희 대표님, 적어도 일주일은 못 주무실걸요. 좋은 일은 아니죠?”

최현석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짐승의 울부짖음이 멎었다. 모래바람이 가라앉고 시야가 선명해졌다.

핏물과 찢어지고 뜯긴 살덩어리가 가득하다. 사진 속의 풍경처럼 모든 것이 정지해 있다. 이내 시체의 한가운데서 그림자가 꿈틀거렸다.

하늘을 올려다본 유선우가 날숨을 내뿜었다. 창을 쥔 손바닥이 끈적거린다. 가볍게 휘두르자 달라붙은 피와 내장의 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아, 비린내.”

샤워가 간절했다.

***

유선우 일행은 잠시간 휴식 시간을 가졌다.

시청자들이 방송은 끄지 말라며 후원을 퍼부었으나 결과적으로 방송은 일시중지됐다.

유선우가 찝찝함을 호소했기 때문이었다. 피칠갑을 한 채로 방송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는 홀라당 벗고 오아시스로 들어갔다. 근처엔 시뻘건 웅덩이가 가득했는데, 신기하게도 오아시스는 아주 더럽지만은 않았다. 식수로는 절대 못 써도 몸을 씻을 수는 있었다.

유선우는 친한 척하면서 같이 들어온 강창민에게 물었다.

“여기 모이는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닌 모양인데. 물이 깨끗할 수가 있나? 아니, 깨끗하진 않지만.”

“숨어서 봤었는데 완전 성지 취급하더라고요. 물 안에서는 절대 안 싸워요.”

“신기하네.”

유선우는 두 손으로 물을 한가득 떠봤다. 마력이 함유되어 은은하게 빛나는 물. 미약하게나마 정화작용도 하는 듯했다.

“있잖아요, 형.”

대뜸 들려온 진지한 목소리에 유선우의 눈썹이 솟았다. 강창민이 시선을 맞추더니 심각하게 낯을 굳혔다.

“어쩔 거예요?”

“뭘?”

“제 창이요. 쓰레기 다됐던데.”

할 말이 없어진 유선우가 헛기침을 뱉었다. 중간에 흥분한 탓인지 힘 조절을 조금 삐끗해버렸다. 아마 검기가 부담되지 않았을까.

“와장창 수준은 아니어도 이빨 다 나갔어요. 창대에도 금 갔고.”

“별로 험하게 쓰지도 않았는데…. 더 좋은 놈으로다가 사줄게.”

“특주품인데요. 창이 다른 무기보다 싼 편이긴 해도 4천만 원은 훌쩍 넘어요.”

“돌았나. 어디서 그따위로 바가지를 씌워?”

“에이, 바가지라뇨. 무기값치고는 싼 거지.”

“그게? 어디서 샀길래.”

그리 묻자 강창민이 설명을 시작했다.

“한철 클랜이요. 우리나라에 괜찮은 데가 거기밖에 없어요. 협회 거 쓰다가 돈 좀 쌓이면 넘어가는 거죠.”

“협회가 무기도 빌려줘?”

“빌려주기는요, 당연히 사야죠. 견습공 작품 중개해서 팔아주는 대신에 수수료 떼먹고.”

“대단한 새끼들이네.”

“그래봤자 푼돈 뺏는 정도에요. 어지간해선 재료 가져다가 직접 주문하거든요. 대장장이 클랜에선 재료 매입도 하니까 밥 먹듯이 들리게 되죠.”

귀가 솔깃해진 유선우가 시체 밭을 가리켰다.

“저게 다 돈이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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