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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자님 뭐하세요-38화 (38/179)

제 38화

A급 게이트

평화로운 하루를 보낸 뒤.

유선우는 실로 오랜만에 꿈속에서 눈을 떴다.

언제 봐도 정신이 이상해질 법한 하얗디하얀 공간. 그 한가운데에는 눈에 띄게 수척해진 관리자가 있었다.

관리자는 유선우를 보자마자 뺨을 실룩거렸다.

오랜만인 만큼 몹시도 반가웠으나 지금은 체통을 지켜야 할 시점. 성공적으로 대출까지 받아왔으니 칭찬을 받고 싶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유선우는 말을 꺼내질 않았다.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관리자가 헛기침으로 침묵을 끊었다.

“흐, 흐흠! 저기….”

말문을 열자 유선우가 입을 움직였다.

“야.”

“으, 응?”

“너 뭐 하는 새끼야.”

유선우는 제대로 꼭지가 돌은 상태였다. 말도 없이 잠적하더니 갑자기 의기양양하게 나타난다?

아니, 잠적 정도야 이해할 수는 있다. 가끔은 서로 얼굴 보기 싫은 날도 있을 테니까.

그러나 그는 알았다.

요 며칠간 이 여자가 얼마나 똥을 쌌는지.

부자연스럽게 늘어난 게이트 발생 빈도.

무엇보다 뜬금없이 튀어나온 한국 최초 A급 게이트.

강남역에 떡하니 나타난 놈이라 하루 만에 사진이 여럿 찍혔다. 분석하기 좋아하는 네티즌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 게이트 규모를 통해 등급 정도야 추정할 수 있었다.

그러니 말이 많아지기 전에 정부에서 공식으로 발표했다. 강남역에 A급 게이트가 나타났으며, 이는 정찰로 얻어낸 정확한 정보라고.

정찰이라는 것은 단어 그대로의 의미다. 게이트에 입장해 던전 정보만 뽑고 복귀하는 행동.

토벌대에는 보통 정찰을 맡은 인물이 하나둘 끼어있고, 이번 역시 마찬가지였다.

곧바로 공략을 개시했다는 말은 국민을 안심케 했다. 미친 짓이라고 지적하는 여론도 있지만 극소수. 타인의 안전보다는 자신의 삶이 소중한 법이다.

그리고 지금, 유선우는 모든 난리의 원흉을 보고 있었다.

“야, 벗어. 옷 벗고 알몸으로 절해.”

“…잘못 들었다?”

“잘 들은 거 맞아. 진짜 돌았니?”

관리자의 감정은 순식간에 바뀌었다. 처음에는 어처구니없어했고, 다음으론 서운해했다. 대체 무슨 과정을 거쳤는지 마지막으로는 콧대가 솟았다.

“후후. 외로웠나 보구나. 오랜만에 보니까 막 가슴이 설레고 그러느냐?”

“넌 몇 대를 처맞아야 정신을 차릴까?”

뒤늦게 분위기를 파악한 관리자가 시무룩하게 말했다.

“나 아무것도 안 했는데….”

“아무것도 안 했으니까 내가 지랄하는 거잖아요오~! 서울에 A급 뜬 거 몰라?”

그 말에 관리자가 몸을 흠칫거렸다. 사실 누구보다 깜짝 놀란 것은 그녀 본인이었다. 돌아와 보니 차원에 주먹만 한 구멍이 뚫려 있더라.

비유하자면 지구는 구멍이 송송 뚫린 집이다. 집을 보수하는 데 필요한 자원이 바로 간섭력인 셈.

모든 구멍을 막을 수는 없어서 B급 이상의 게이트만 어찌어찌 처리해왔다. 그런데 대출받으러 갔다가 빈집털이를 당할 줄은 몰랐다.

그녀도 어이가 없고 면목도 없었지만 우선 변명부터 했다.

“나도 바빴단 말이다!”

“이러고도 할 말이 있으시구나.”

“걔가 그랬다. 커피 타오라고 했다. 빨래하라고, 라면 끓이라고 했다. 나, 다 했다. 시키는 대로!”

“이걸 남 탓을 한다고? 걔는 또 누구야.”

“그, 그게….”

관리자는 제대로 설명조차 못 하고 허둥댈 따름이었다. 아브나바가 제시했던 조건 중 하나. 그것은 아브나바에 대해서 함구하는 것이었다.

관리자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문득 궁금해져서 물었다.

“근데 너는 왜 안 갔느냐?”

“어딜?”

“던전 말이다.”

타박하는 유선우도 집에서 퍼질러 자고 있다. 관리자는 순간 내로남불 느낌을 받았으나 유선우는 당당했다.

“내가 왜 가? 아무짝에도 도움 안 되는데.”

“응? 도움이 안 된다니, 혼자서도 깰 수 있지 않으냐.”

“그야 짬이 있는데 깨겠지. 나한테 도움이 안 된다고. 막말로 돈이 돼, 뭐가 돼?”

애초에 유선우가 토벌대에 참가할 수 있는 지도 불확실하다. 잘 비벼서 들어가 봤자 짐꾼 노릇이나 하겠지.

메리트가 없지는 않더라도 가성비가 시궁창 수준이다. 오히려 이후에 감당해야 하는 후폭풍이 훨씬 크지 않을까.

대답이 의외였는지 관리자가 멍청한 소리를 냈다.

“애국심 같은 건?”

“내가 탈세를 했어, 음주운전을 했어? 범죄도 안 저지르고 애국 잘하고 있는데 무슨.”

“그럼 나는 왜 욕먹고 있는 것이냐?”

유선우는 떳떳하게 외쳤다.

“보기 X 같으니까! 제발 일 좀 똑바로 해.”

“응…….”

침울해져서는 훌쩍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관리자를 지켜보던 유선우는 한숨을 내쉬곤 비난을 그만뒀다. 꾸짖기만 하는 것은 그다지 생산적이지 않다.

“그래서 어떻게 된 건데?”

“간섭력이 하도 모자라서 조금 빌려왔다.”

“간섭력은 또 뭐야.”

“마나의 순우리말이다.”

“순우리말 이 지랄.”

“나 한국 사람 아니다.”

“아, 응.”

관리자는 천천히 사정을 읊었다. 설명이라기보다는 하소연에 가깝다고나 할지. 5분이 넘도록 구구절절 떠들었지만 2줄로 요약이 가능했다.

자기가 너무 가난했다.

그래서 사채 좀 썼다.

유선우로서는 솔직히 별 관심도 감흥도 없는 이야기였다. 현실에도 똑같이 신세 망친 사람 많으니까. 진심으로 자기가 잘했다고 여기는 꼴이 우습기만 할 따름이었다.

유선우는 대리자에 관해서도 물었다.

관리자 오피셜, 타 차원의 관리자가 접촉해서 수족으로 삼은 것이 대리자.

예상한 그대로였다. 제출한 시험지에 동그라미가 쳐져서 돌아왔을 뿐이고, 유의미한 정보는 얻지 못했다.

기대치가 없기 때문인지 이제는 화도 나지 않았다. 슬슬 지루해지던 참에 관리자가 말했다.

“이제 좀 여유가 생겨서 인터넷도 연결할 수 있게 됐다.”

“어, 진짜?”

“응. 지금 바로 할까?”

유선우의 언짢음 가득하던 시선이 따뜻해졌다. 민폐만 끼치다가 이렇게 훅 들어오니 굉장히 예뻐 보였다.

“아니다. 기다려 봐.”

문득 큰 그림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는 세부적인 내용을 채워 넣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하나만 묻자.”

“응?”

“그 A급. 지금 상황 어때?”

관리자는 멍청할 뿐이지 능력만큼은 차고 넘치는 여자다. 던전을 지켜볼 수 있다는 것쯤은 유선우도 익히 아는 바였다.

관리자는 토 달지 않고 눈을 감았다. 그녀에게 유선우가 가까이 다가갔다.

피부는 새하얗고 내려앉은 속눈썹은 기다랗다. 입 다물고 가만히 있으니 확실히 매력적인 외모다.

‘진짜 인형 같네.’

그는 무의식적으로 속눈썹에 손을 가져다 댔다. 손가락이 닿자 관리자가 소스라치며 괴성을 질렀다.

“히약!”

“미안. 계속해.”

“건드리지 마라.”

뾰로통한 얼굴로 눈을 흘기더니 다시금 눈을 감는다. 10초 정도가 지나자 그녀의 입이 열렸다.

“아, 그거 그렇게 하는 거 아닌데….”

“누가 감상하랬어? 상황 어떠냐고.”

“썩 좋지는 않구나. 연계는 허접하고 차량도 터졌다.”

“깨기 힘들어 보여?”

“으음.”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여 긍정한다. 한국인으로서는 썩 좋지 않은 상황. 하지만 유선우의 표정은 단박에 환해졌다.

“게이트 언제 다시 열리는지 알아?”

“일주일쯤 걸릴 것이니라. 들어가려고?”

“응. 생각이 좀 바뀌어서.”

“뭣하면 당장 열어줄 수도 있다만.”

관리자가 생각보다도 다재다능하다. 제안 자체는 의외였으나 유선우는 딱 잘라 거절했다.

“갑자기 게이트 딱 열어서 달려가면 내가 빌런 같잖아. 부자연스러운 건 피하려고.”

“참 귀찮구나.”

“하여튼 지금은 됐어. 달리 할 일도 있고.”

“그럼 인터넷은?”

“그것도 나중에.”

미리 연결해두면 세계적으로 이득이기는 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메리트가 있는지는 글쎄. 이기적인 감은 있지만 세상 사는 게 원래 이렇다.

“잘 몰라서 그러는데, 바로바로 연결이 돼?”

“던전마다 전부 연결하려면 며칠 걸리겠지. 한 군데쯤이야 금방이니라.”

“그럼 신호 주면 열어줘.”

관리자가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머리만 위아래로 흔들었다. 이제야 조금 암이 낫는 기분. 써먹으니 이렇게 편할 수가 없다.

흐뭇하게 미소짓는 유선우에게 관리자가 속삭였다.

“저기….”

“응?”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 음.”

“왜. 또 뭐.”

퉁명스럽게 말하자 관리자의 목덜미가 붉어졌다. 그녀가 시선을 피하면서 우물쭈물 말했다.

“앉아서 얘기나 좀 하고 가라고….”

***

다음날 유선우는 굳게 결심했다.

본격적으로 본인의 훈련에 박차를 가하기로.

출근한 그는 아침부터 막 나가기 시작했다.

“이 교관님. 한 일주일 동안 오전에 모의전투실 좀 쓸게요.”

“예? 훈련은 어쩌시고요.”

“훈련하려고 하는 건데요. 장난도 적당히 할 때 됐죠.”

당당한 발언에 이성결이 떫은 표정을 지었다. 써도 되겠습니까, 하는 질문이 아니었다. 반대하든 말든 알아서 쓰겠다는 의미.

하지만 대놓고 수긍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성결은 여태껏 유선우의 신경을 긁지 않게 조심해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이미 계약도 한 마당이니 그는 조금 세게 나가기로 했다.

“그럼 저는 어쩌고요? 저보고 햇병아리들이나 돌보라 이겁니까?”

그는 햇병아리들보다 본인 훈련이 더 중요했다. 배운 지 며칠 됐다고 일주일이나 혼자 훈련하겠다니. 제자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처사였다.

그리고 유선우로서는 얼척이 없었다.

‘이거 미친놈 아닌가?’

단독행동은 곤란하다는 식으로 반대하리라고 예상했건만. 남이 보면 자신이 이성결에게 일을 떠넘긴다고 오해하지 않을까.

“그게 교관님 일이잖아요.”

“어차피 오전 시간에는 할 일도 없습니다. 이제 다들 기구 쓸 줄 아는데 제가 필요합니까?”

“맞는 말 같기는 한데…. 하도 주먹구구식 같아서. 회사가 너무 느슨한 거 아니에요?”

“학교에서도 자습 자주 시킵니다. 정 뭣하면 박 팀장 부르면 되고요. 저랑 같이 훈련하시죠.”

결국은 그게 목적이었다.

유선우는 거절하기도 수긍하기도 뭣해 잠시간 고민했다. 제자가 훈련에 목매다는 건 바람직한 현상이다. 그래도 책임자치고는 언행이 너무 가벼운 게 아닐까.

이성결은 유선우의 망설임을 눈치챘다. 그는 흐름을 바꾸고자 햇병아리들에게 물었다.

“여러분. 대타 불러도 괜찮으십니까?”

그리 묻자 이진철을 포함한 셋이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괜찮음을 넘어서 제발 그렇게 해달라는 것처럼. 그들은 어떻게든 유선우와 관련되고 싶지 않았다.

이쯤 되니 유선우도 거절할 수 없었다.

방해되지는 않을뿐더러 상대가 있으면 다양한 훈련도 가능할 터. 다 좋긴 한데 너무 막 나가는 듯해 찜찜할 뿐이다.

“…그러세요, 그럼. 지부장님한테 욕먹어도 전 모릅니다.”

“이 바쁜 와중에 저한테 신경을 쓰실 리가 없죠.”

“바쁘다뇨? 무슨 일 있었나?”

“게이트 외에 다른 게 있겠습니까. 강남역 말입니다.”

“토벌대 보낸 거 아니에요?”

“저희 지부에서도 몇 차출됐습니다. 보냈다고 끝이면 좋겠습니다만, 혹시 모르니까요.”

토벌에 실패할 수도 있고, 단순히 기간을 넘길 수도 있다. 게이트가 다시 열리면 강남역을 보호할 인원이 필요한 시점이다.

시간적 여유는 있는 편이지만 문제는 인력 부족이다. B급 게이트도 다수 발생했으니 소집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상황을 정리해본 유선우는 곧바로 스마트폰을 꺼냈다. 계획해뒀던 큰 그림이 순조롭게 완성되고 있었다.

“일단 먼저 들어가 계세요. 제 동기분들 돌볼 사람도 찾아오시고. 저는 잠깐 전화 좀.”

“아, 예.”

유선우는 인적 없는 곳으로 이동해 김정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느 때처럼 전화는 금방 연결되었다.

- 여보세요.

“목소리가 좀 안 좋으시네. 많이 바쁘신가 봐요?”

- 우는소리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빈말로도 한가하다고는 못 하겠군요. 하하.

“그러시구나.”

- 하루 내내 전화만 붙들고 있습니다. 하여튼 무슨 일이십니까?

유선우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인원 다 찼어요?”

- 무슨 인원 말씀이신지.

“그거 있잖아요. 게이트 대기조.”

말뜻을 파악하는지 김정수가 잠시간 조용해졌다. 현 상황에서 게이트라 해봤자 하나뿐. 수 초가 채 지나지 않아 대답이 들려왔다.

- 아, 예. 아무래도 썩 좋지는 않습니다.

“사람이 그렇게 없어요?”

- 인력난도 있고, 뭣보다 실수하면 몰매 맞기 십상이니까요. 현역 A급은 애초에 머릿수도 거의 없고.

김정수답지 않게 푸념하는 말투다. 유선우가 싱겁게 웃고는 본론을 꺼냈다.

“제 자리 비워두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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