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7화
A급 게이트
김정수는 눈을 뜨자마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평소에는 늑장을 부리다가 억지로 졸음을 몰아내기 일쑤였는데, 오늘은 컨디션이 좋았다.
김정수는 아침부터 스마트폰이 아닌 다른 물건을 찾았다. 서랍장에 고이 잠든 종이 한 장. 그에게는 로또 당첨 용지만큼이나 값진 종이였다.
“하.”
입꼬리가 절로 올라간다.
어제의 일이 꿈이었다면 집안을 뒤집었을지도.
다행히도 기억은 또렷했고, 계약서의 질감도 선명했다.
‘드디어 따냈다.’
집을 나서 회사에 도착한 뒤에도 기쁨은 가라앉지 않았다. 김정수는 여태껏 고생해준 이들에게 직접 전화를 돌렸다. 박민상과 박아연, 이성결에 유선혜까지.
말로 내뱉어보자 비로소 실감이 들어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
온종일 들떠 있으니 주변에서도 알아차리기 마련. 커피를 가져온 비서가 덩달아 생글거렸다.
“대표님, 좋은 일 있으셨나 봐요.”
“있었지. 올해 중 최고의 일이. 잊지 못할 날이 될 거야.”
“저도 좋네요. 눈호강도 하고, 회사 분위기도 살고.”
“다 늙었는데 눈호강은 무슨.”
김정수가 커피를 홀짝이고는 농담조로 말했다.
“아니, 그럼 평소에는 회사 분위기가 별론가?”
“음…. 오늘보다는요?”
비서도 장난스럽게 화답했다. 엄격한 회사였다면 쓴소리를 들었겠으나 청일에선 자연스러웠다.
선을 넘으면 처벌은 한다만, 개념이 있으면 적당히 하기 마련. 이곳은 비각성자인 그녀에게도 일하기 편한 직장이었다.
마음속으로 새삼 감사를 표한 비서가 고개를 꾸벅였다. 김정수는 방 밖으로 나가는 비서를 보다가 상념에 잠겼다.
‘계약은 잘 풀렸어도 할 일은 많지.’
던전 정보의 소실. 몇 번이나 있었던 일이다. 정보가 없으면 곤란하긴 하나 비상사태라곤 할 수 없다.
문제는 클리어 시에도 귀환 게이트가 열리지 않는다는 것. 여태까지는 정상화됨에 따라 늦게나마 귀환할 수 있었다만, 전례를 맹신하면 뜻밖의 상황에 대처하기가 힘들어진다.
‘게이트 빈도 증가도 신경 쓰이고.’
일주일간 국내에서만 B급 게이트가 넷이나 발생했다. 대처야 가능하지만 세계적으로 보면 심각한 상황. 이 페이스가 계속 이어지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어질 터다.
‘이러다 A급이라도 나타나면….’
지금은 유선우도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한다. 교육생 신분으로는 C급 이하 현장을 참관하는 게 고작이니까.
어떻게든 비벼볼 수야 있겠으나 과연 유선우가 자발적으로 움직일지. 김정수가 보기에는 절대로 아니었다.
그는 앓는 소리를 내다가 싱겁게 웃었다.
‘갑자기 A급은 무슨. 그럴 리가 있나.’
걱정을 털어내고 몸을 일으킬 때였다.
띠리리리!
내선전화가 요란하게 울기 시작했다. 익숙한 소리였지만 김정수에겐 오늘따라 꺼림칙하게 들렸다. 그는 얼굴이 돌처럼 굳은 채로 수화기를 들었다.
- 대표님, 일 터졌습니다!
두서없는 말에서 다급하다는 감정이 묻어나왔다. 자세히 묻기도 전에 목소리가 이어졌다.
- 게이트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경찰에서 직통으로 왔으니 허위신고는 아닐 겁니다.
“게이트야 매일 열리는 거지. 어딘데?”
- 강남역 근방입니다.
“…무슨 역?”
- 강남역 1번 출구입니다. 사진 받았는데, 초기 규모가 심상치 않습니다.
듣자마자 머리가 지끈거려 이마를 짚었다.
왜 하필이면 오늘. 그것도 강남역이라니.
속으로 끙끙대는 와중에도 머리는 빠르게 돌아갔다.
김정수는 우연이라는 말을 잘 믿지 않았다. 세상만사에는 모두 이유가 있는 법이라 생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추론이 완성되었다. 정확성은 제쳐두고서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추론.
‘몬스터 입장에서는 서울만 한 곳도 없지.’
좁은 땅덩어리에 집중된 행정구역. 말 해봐야 입만 아픈 인구밀도. 이쯤 되니 지금까지는 왜 노리지 않았는지 의문일 지경이다.
“구체적인 건?”
- 대피는 곧바로 시작했다고 합니다. 게이트는 확실치 않습니다만 아무리 못해도 B급은 되어 보이고요.
“당장 나한테 사진 보내. 지금 손 비어 있는 헌터 얼마나 있는지 확인하고. B급 이상으로.”
- 확인해보겠습니다.
“협회에는 내가 연락하지.”
- 알겠습니다!
김정수는 수화기를 내리고 한숨을 토해냈다. 앞으로 벌어질 일이 환상처럼 눈앞에 아른거렸다.
‘어쩐지 운수가 좋더라니.’
***
엔라가 아브나바의 수발을 들고 있을 무렵.
강남역 1번 출구에는 서른 남짓의 헌터들이 포진해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무질서한 정렬이었지만, 그것이 본인들의 능력을 발휘하기에 알맞은 위치였다.
‘이런 적은 처음인데.’
청일 소속 A급 헌터, 김천호는 주변을 곁눈질했다. 대형 클랜의 주전력과 중소 클랜의 간부, 협회 소속 헌터까지. 머릿수는 많지 않으나 정예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는 전력이다.
과한 병력은 아니었다. 목적은 게이트 자체가 아니라 최대한 적은 피해로 수습하는 것. 강남역을 폭격할 수는 없으니 헌터만으로 사태를 정리해야만 한다.
분위기에 압도된 김천호에게 그의 동료인 박승현이 물었다.
“형, 형. 저 사람 장민수 맞죠?”
“누구?”
“저기 맨 앞에 키 큰 사람이요.”
“진짜네. 무슨 클랜 만들었다더니 왜 직접 나왔대?”
장민수는 한국에 몇 없는 S급 각성자 출신의 A급 헌터다. 그의 독립 소식은 한동안 헌터 사회를 뜨겁게 달궜었다.
김천호가 현장에서 보는 것은 자그마치 반년만의 일이었다.
“잘 안 되고 있잖아요. 실력이랑 클랜 운영은 아예 다른 문제니까.”
“그건 그렇지. 비각성자가 클랜장인 곳도 많고.”
“아마 실적 쌓으러 온 것 같은데요. 와, 이세원에 최설까지 있네. 사인받아올까요?”
박승현은 시도 때도 없이 두리번거렸다. 그는 한참을 호들갑 떨다가 결국 게이트에서 시선을 멈췄다. 게이트는 열리지 않은 채 불쾌한 소리만을 내고 있었다.
“대체 언제 열릴까요? 한 시간은 넘지 않았나?”
“나도 몰라, 쓰발. 하필이면 서울에 A급이 나오냐.”
“역시 A급 맞겠죠?”
“이러고 B급이면 우습지.”
A급 게이트가 발생한 것은 이번이 세 번째. 국내가 아닌 전 세계를 기준으로 했을 때다.
처음은 방글라데시였고, 끔찍한 결과를 낳았다.
두 번째는 미국이었다. S급 헌터만 무려 셋인 미국. 셋 중 둘이 직접 토벌에 참여해 게이트를 닫았다.
‘정작 우리나라 S급은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으니.’
한국에서 가장 강한 헌터이자 헌터 협회장.
상징성에 권력까지 쥐어버린 탓에 엉덩이가 너무 무거워졌다. 만약 협회장이 죽기라도 하면 혼란 정도론 끝나지 않으니, 오늘도 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래도 금방 정리되겠죠. 이 인원으로 못 막을 리가 있나.”
“승현아. 생각 좀 하고 살자. 응?”
“아니에요?”
“막고 난 뒤가 문제지. 아마 이대로 토벌대 짜지 않을까 싶은데.”
“바로 들어간다고요? 뭐 준비 개뿔도 안 했는데?”
“글쎄. 아무리 늦어도 다음에 열리면 들어가겠지. 강남역을 이대로 몇 주나 내버려 둘 수는 없잖냐. 지금쯤 위에서도 난리 났을걸.”
헌터가 모여들수록 예상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A급만 세어봐도 스물 안팎. 대처만을 위한 병력이라 보기에는 어렵다.
“대체 몇 명이나 부른 거야?”
“얼핏 봐도 총 50명은 되는 것 같은데요.”
“강창민 저 새끼까지 왔어. 이제 보급 차량만 오면 빼박이야.”
“으… 저 튀면 안 됩니까?”
“협회장이랑 싸우든가, 가족한테 전화나 돌리든가.”
“협회장 때리고 오겠습니다.”
그리 말한 박승현이 헐레벌떡 자리를 벗어났다.
김천호는 멀어지는 동료의 등을 보면서 코웃음만 쳤다. 책임감 있는 놈이니 알아서 돌아올 게 분명했다.
이윽고 보급 차량마저 모습을 드러냈다.
소집된 헌터가 모두 집결하자 협회에서 토벌대 편성을 공표했다.
A급 헌터가 23명, B급 헌터가 42명.
더해 짐꾼 역할을 맡은 C급 헌터가 10명.
토벌대장은 A급 헌터 장민수.
헌터 협회장이 직접 결정한 사항이었다.
당연하게도 반발하는 인원은 제법 되었다. 던전이 마음대로 오가는 방탈출 카페는 아니니까. 날고 기는 실력자들에게도 두려움은 있었다.
“질문 하나 괜찮습니까?”
“예, 말씀하시죠.”
김천호가 묻고 협회 소속 헌터 장제헌이 대답했다.
“토벌이 필요한 건 압니다. 근데 시기가 너무 나쁜 게 아닌지.”
“구체적으로 부탁드리겠습니다.”
“다들 알 거 다 알잖습니까. 귀환 게이트까지 안 나오는 상황에 이 인원을 전부 꼬라박는다니. 말이 됩니까?”
이만한 헌터들이 던전에 갇히면 국가적인 손실이다. 그러나 예상한 질문이라는 듯이 곧바로 답변이 나왔다.
“그에 관해서는 전달받았습니다. 이미 정상화되었다고 하더군요.”
“정보 출처는?”
“헌터 협회와 미국 능력자 관리부입니다. 확실한 정보라 보셔도 무방합니다.”
“확인 가능합니까?”
김천호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물고 늘어졌다. 반면에 장제헌은 여전히 담담했다.
“필요하시다면.”
“…괜찮습니다.”
끝끝내 자포자기한 김천호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타이밍 미쳤나….’
여기까지 오면 물러날 수도 없다.
나라의 녹을 먹는 만큼 비상시엔 의무가 따르는 것이 헌터. 특히나 A급 헌터들이 평소에 한가한 이유는 딱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다.
김천호는 머릿속으로 한 여자를 떠올렸다.
청일의 비각성자 직원, 김유진.
생글생글 웃는 미소가 잘 어울리는 여자다.
‘돌아오면 고백하자.’
***
헌터들이 의무를 다하든 말든 직장인의 삶은 여전했다. 인턴 유선우도 마찬가지로 회사에 출근했다.
강남역 얘기로 세상이 떠들썩했으나 그에겐 상관없는 일. 그는 여느 때처럼 조각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우우웅!
주머니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손이 멈췄다.
폰을 확인해보니 발신인은 최현석.
개인적인 전화였고, 근무 시간 한중간이었지만 유선우는 당당하게 전화를 받았다.
평범한 사람들은 눈치를 보면서 쉰다.
그러나 ‘진짜’는 남들이 눈치를 보게 만든다.
“어. 왜?”
- 뭐야. 전화 받네?
“지가 전화해놓고. 하여튼 왜? 나 지금 회산데.”
- 아니, 바쁘면 됐고. 난 또 던전 들어간 줄 알았지.
“강남역 거기?”
- 어. A급만 스물 넘게 모였다더라.
“이야, 많이도 불렀네.”
마냥 영혼 없는 감탄은 아니었다. 국내에 A급이 몇 없다는 것쯤은 유선우도 알고 있었다.
“넌? 안 바쁘다며. 호출 안 받았어?”
- 바쁘진 않은데, 원래 자주 불려가는 편은 아니라서. 내가 잘못되면 CHC도 엿 좀 먹거든.
“뭔 소리야. 어차피 계약 파기할 거 아니야?”
- 아직은 CHC 소속이니까. 그거 있잖아, 아이돌 빡세게 굴린다고 욕먹는 기획사들. 단독행동했다고 변명해봐야 요즘은 아무도 안 믿지.
“아.”
CHC를 엿 먹인 게 불과 어제의 일. 아직 최현석은 CHC를 대표하는 얼굴과도 같다. 무턱대고 보냈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몰매를 맞을 터다.
- 너도 안 불려갔나 보네. 너희 대표님이 뭐라 안 하시든?
“아무 말도 못 들었는데.”
- 그래? 하기야 아직 교육생이니까 불러봐야 협회에서 잘랐겠다. 그럼 됐어. 일하는데 미안. 끊는다.
“어? 어.”
전화는 곧바로 끊어졌다.
유선우는 손에 쥔 폰을 멍하니 바라봤다.
‘지 할 말만 하고 그냥 끊어버린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