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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자님 뭐하세요-36화 (36/179)

제 36화

흑우 관리자

유선우와 김정수의 만남이 있기 6시간 전.

지구의 관리자, 엔라는 인간 특유의 자살 충동을 느끼고 있었다.

특별히 크게 상심했거나 절망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현대인과 다를 바 없는 흔하디흔한 이유.

‘일이 안 끝나….’

인간들은 간혹 생각하곤 한다. 잠을 자는 시간이 아깝다고. 24시간을 전부 활용할 수 있다면, 여가활동을 즐기면서 윤택한 삶을 살 수 있으리라고.

개소리다. 안 자면 놀 시간이 생기는 줄 아나?

당연히 그 시간에 더 일해야지.

관리자의 사회가 딱 그렇게 돌아간다.

몇 년에 한 번꼴로 잠드니 낮과 밤의 경계가 모호하다. 밤낮조차 없이 일해도 일이 끝나지를 않는다.

아니, 본래는 눈코 뜰 새 없을 정도로 바쁘지는 않았다. 끝없는 격무를 초래한 것은 다름 아닌 엔라 본인이었다.

“으, 우으, 우으으으으으!”

엔라는 바닥에 널브러져선 이리저리 뒹굴었다.

그나마 유선우와 떠드는 것이 관리자 생의 낙이었건만. 요즘은 잠깐이라도 정신을 놓을 여유가 없다.

할 일이 뭐가 그렇게 많으냐.

여러 차원에서 날아오는 지원 요청을 처리하고.

우호적인 위치의 관리자들에게서 마나를 상납받아 지구에 뿌리고.

지구에 게이트가 연결되면 훅훅 훑어봐서 헌터들에게 던전 정보를 던져주고.

던전이 클리어되면 귀환 게이트도 열어주고.

인간을 굽어살피는 본래 업무는 베이스로 깔고 들어간다.

유선우가 요구했던 인터넷 연결도 말만 쉽게 했지 실상은 다르다. 차원마다 간섭하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 와중에 적대적인 관리자가 각성자를 꼬드겨서 깽판 치기까지.

‘죽고 싶어.’

엔라의 마음은 공허하기까지 했다. 반면 그녀의 몸은 누워 있는 상태로도 업무를 처리했다.

일을 끝없이도 하는데 줄어들긴커녕 쌓여만 가는 실정. 그 탓에 요 며칠간 눈에 띄는 간섭을 제지하지 못했다.

극히 드물게 발생하던 B급 던전의 게이트가 일주일 동안 세계적으로 수십이나 발생했으니 답도 없다.

반복작업을 하면서 엔라가 입을 달싹거렸다.

“죽고 싶어. 자고 싶어. 커피 마시고 싶어. 떠들고 싶어. 멍때리고 싶어. 놀고 싶어. 선우 보고 싶어. 꽁냥꽁냥하고 싶어. 일하기 싫어. 살려줘어…….”

말할수록 서글퍼질 따름. 엔라는 시시각각 메말라갔다.

그러던 엔라가 돌연 눈을 부릅떴다. 그녀가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아, 아앗…!”

머리가 비 온 뒤 하늘처럼 맑게 개었다. 환희에 차오른 그녀가 부르르 떨면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심경의 변화가 생긴 것은 아니다.

단지 뇌리를 스치는 아이디어가 하나.

‘일은 나눠서 하는 게 맞지!’

어지간한 차원에는 전부 협력이라는 개념이 있다. 애초에 혼자서 처리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원시적이었다.

일을 떠넘길 상대는 고민할 필요도 없다. 유선우 덕에 살아난 431-9 차원의 관리자에게 맡기면 된다.

똥 싼 것도 자신이지만, 유선우를 통해 치우기는 했으니까 생색 좀 내도 되지 않을까?

‘아니, 많이 내도 돼!’

현재 상황에서 그년은 개뿔도 바쁘지 않을 터. 관리자는 평균적으로 바쁜 편이지만 그 여자만큼은 다르다.

자신을 신격화해서 차원 내에 유일한 종교를 만들었기 때문. 일이 터져도 신도들에게 계시만 툭툭 던져주면 해결되는 셈이다.

‘처음에 종교 만들 때 내가 많이 도와줬으니까. 나도 도움 좀 받아야 돼.’

엔라는 결론이 나자마자 지구를 떠날 채비를 마쳤다.

좌표를 설정해서 차원을 넘고.

기억을 더듬어 관리자의 개인 공간을 찾아냈다.

언덕 위에 세워진, 굉장히 소박한 가정집. 관리자라는 위치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건물이다.

‘컨셉질도 여전하네.’

관리자는 궁전이라도 단숨에 만들어낼 수 있는 존재. 그런 여자가 허접한 건물에서 사는 이유는 간단하다. 시골 처녀가 되어 유선우와 천년만년 오순도순 살고 싶어서.

김칫국 마시는 건 본인 맘이라지만 엔라가 보기엔 등신 같았다.

한차례 콧방귀를 뀐 엔라는 본격적으로 행동을 시작했다.

쾅!

“여봐라!”

문짝을 걷어찬 엔라가 당당하게 외쳤다. 그녀는 집 안으로 들어가면서 실내의 모습을 둘러봤다.

‘토할 것 같아.’

벽이고 천장이고 이곳저곳에 한 남자의 사진이 가득하다. 정확히는 3초가량의 영상이 무한히 재생되는 움짤. 한두 장이면 몰라도 사방에 가득해, 당장 발을 돌리고 싶어질 지경이다.

‘어라.’

질색하는 와중에 엔라의 눈이 사진 한 장에 꽂혔다. 특별하지는 않지만 뭉클하고 설레는 사진. 드물게도 해바라기처럼 활짝 웃는 유선우의 얼굴이 담겨 있다.

‘이거 한 장만 뽀려야지.’

엔라는 사진을 떼어내서 자신의 옷 안에 숨겼다.

그녀가 혹시나 들킬세라 눈치 보기를 잠시.

묘한 소리가 공기를 타고 들려왔다.

“하아, 하아….”

소리는 오른쪽 구석에 있는 방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무슨 상황인지 대충 예상한 엔라가 제 이마를 짚었다.

‘이름값도 못 하는 년 같으니.’

색욕의 지배자는 무슨. 어떻게 올 때마다 학학대는지. 여태까진 타이밍이 나빴다고 생각했건만 저게 디폴트였던 모양이다.

방으로 다가가 보니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가구라고는 침대 하나뿐이었으나 발 디딜 곳 없이 복잡했다. 바닥에 온갖 수정구와 사진들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반쯤 벗겨져서 질질 끌리는 침대 시트. 위에는 복숭아를 연상케 하는 분홍색 머리칼의 여자가 누워 있었다.

여자는 거의 나신에 가까운 차림이었다. 노출된 살갗뿐만 아니라 잔뜩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색기를 더했다.

“쮸웁, 쮸우우웁!”

여자는 한창 수정구를 붙잡고 미친 듯이 빨아대고 있었다. 얼마나 핥고 빨았는지 표면에서 침이 뚝뚝 떨어진다. 당연하게도 수정구에선 유선우의 영상이 재생되는 중이었다.

“선우… 선우야. 헤, 으히. 쯉쯉!”

“별 미친….”

엔라는 떠름한 눈초리로 바라보면서 뒷걸음쳤다. 오래 보고 싶지는 않은 모습이었다.

***

여자가 정신을 차린 것은 10분이 지난 뒤였다. 못마땅하게 혀를 찬 엔라가 새삼스럽게 여자를 노려봤다.

“아브나바. 오늘도 대단하구나.”

“하아, 하아….”

아브나바는 여자의 이름이었다.

관리자라고 해도 가지고 태어난 이름은 있기 마련. 무슨 지배자니 뭐니 부르면 서로 쪽팔려서 얼굴도 못 들고 다닌다.

게슴츠레 눈을 뜬 아브나바가 불청객을 바라봤다. 남에게 민망한 모습을 보였음에도 그녀는 수치심 따위를 느끼지 않았다.

“어쩐 일이신가요? 한창 바쁘실 텐데.”

“…옷은 좀 제대로 입는 게 어떠냐.”

“싫어요. 거치적거려.”

엔라를 대하는 아브나바의 태도는 퉁명했다. 그녀에게 있어 엔라는 그다지 좋지 못한 상사였다. 힘은 무식하게 세다지만, 개념이 없을뿐더러 일도 못 하니까.

그래도 복잡한 이유가 있어 1달 전까지는 싹싹하게 굴었었다. 다만 지금은 유선우를 줬다 뺏은 씹어 죽일 년이라는 인식이다.

엔라는 아브나바의 무례함이 불쾌했으나 애써 인내했다. 안 그래도 자신의 위상이 애매해진 지금은 아쉬운 쪽이 굽혀야 했다.

그녀는 앞뒤 재지 않고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부탁할 게 하나 있다.”

“아, 부탁.”

우습다는 어조에도 엔라는 꾹 참았다.

“네가 말했다시피 내 상황이….”

“갑자기 커피가 당기네요.”

“무, 무어라?”

“힘 좀 썼더니 잠이 솔솔 와서. 이러다 선배 부탁도 못 듣고 자버리면 어쩌죠?”

엔라는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회한마저 들었다. 왜 하필이면 유선우를 저년 밑으로 보내서는.

그녀는 어금니를 꽉 깨문 채 속으로 3번 생각하고 말했다.

“미안하지만 그럴 겨를이 없어서 말이다. 지금도 자리를 비워두고 왔느니라.”

“그러시구나. 빨리 가보셔야 하는 게 아닌가요? 하아암.”

“그, 그러니까 부탁을….”

“커피.”

까마득한 후배가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젓는다. 엔라는 쌍욕을 뱉으려다가 문득 생각이 미쳤다.

한순간의 선택이 앞으로의 관리자생을 좌우하리라. 평균보다 멍청한 그녀라지만 연륜은 있었다.

‘한 번만 참자.’

엔라는 입안에서 볼을 씹었다가 애써 웃음을 지었다.

“커, 커피. 그래.”

“설탕 두 스푼. 아시죠?”

“……알았다.”

그때부터 그녀의 고생이 시작되었다.

심혈을 기울여서 커피를 타준 뒤에는,

“죄송한데 청소 좀 해주실 수 있나요?”

“처, 청소 말이지. 알았다.”

“아, 권능은 쓰지 마시고 손으로 정성스럽게. 제가 결벽증이 좀 심해서.”

“으르뜨…….”

구석구석 먼지 털어주고 수정구도 보기 좋게 정렬한 뒤에는,

“어머. 지금 보니까 시트가 축축하네요. 이게 다 뭐람.”

“세탁하면 되겠느냐.”

“제가 결벽증이 좀.”

“소, 손빨래를 해야겠구나.”

살면서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손빨래를 경험한 뒤에는,

“어라. 132번 컬렉션이 안 보이네요.”

“…132번?”

“얼마나 아끼는 건데. 설마 선배 주머니에서 나오지는 않겠죠?”

“으, 응? 주머니 말이냐?”

“농담이에요. 혹시 찾아주실 수 있으신가요? 정말 아끼는 거라서.”

“미안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그제야 나름 만족한 아브나바가 탁자와 의자 두 개를 꺼냈다. 그녀는 기품 있게 자리에 앉고서는 턱을 괴었다.

“제게 부탁이 있으시다고요.”

아까와는 다르게 옷까지 쫙 빼입은 상태. 하지만 차림새 따위야 엔라에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엔라는 이미 자존감이 짓밟힐 대로 짓밟혀 혼이 빠져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인 그녀가 머뭇머뭇하며 손가락을 꼼지락댔다.

“응. 부탁, 있다.”

“말씀해보세요. 바쁘시다면서요?”

“으, 응. 나 바쁘다. 무지 바쁘다. 그래서 받으러 왔다, 도움.”

앉을 생각도 못 하고 우물쭈물. 극도로 소심해진 엔라를 보고 아브나바가 피식거렸다.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도와줄 거냐…?”

“그럼요. 조건은 있지만.”

그리 말한 아브나바가 재차 웃음을 흘렸다. 뒤가 구려 보이는 미소에 엔라는 기가 죽었다.

“조건?”

“일단 먼저 말씀하세요. 아니면 제가 선배 차원으로 갈까요?”

“그, 그건 안 된다!”

그랬다가는 분명히 아브나바가 유선우에게 접촉할 터. 결과적으로 욕먹게 되는 건 엔라다.

“그냥 해본 말이에요. 저도 딱히 깐깐하게 굴 생각 없어요. 성의도 충분히 받았고.”

예상했다는 반응이 돌아오자 엔라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짐을 반쯤 덜어낸 기분으로 의자에 앉았다.

‘조건이라는 게 찝찝하긴 한데.’

문제는 달리 의지할 곳이 없다는 사실. 게다가 봉사까지 해줬으니 꼭 성과를 내고 싶었다.

엔라가 입을 열려는 순간, 아브나바가 선수를 쳤다.

“선배 차원 상태는 저도 알고 있어요. 그런데 솔직히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싶네요.”

“그게 말이다….”

엔라는 당장 대답하지 못하고 한참을 망설였다. 시선을 내리깐 그녀가 의기소침하게 물었다.

“대, 대출 좀 받을 수 있을까?”

“무슨 말이신지 잘.”

“간섭력 대출 좀 받으려고 왔는데….”

“아아. 그런 얘기였어요?”

간섭력이란 각성자들이 마나라 일컫는 힘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간섭력으론 몬스터를 때려잡는 정도가 한계.

그러나 관리자들은 그 힘으로 차원을 관리한다. 던전 정보를 던져줄 때도 적잖은 간섭력이 필요하다.

엔라는 거의 숨 쉬듯이 소모하고 있는 상태. 여기저기서 상납을 받아도 턱없이 모자란 실정이다.

대출을 생각했을 때만 해도 엔라는 들떠 있었다. 세기의 발견이라도 한 것 같아서.

하지만 간섭력은 관리자 기준으론 돈이나 공기만큼 중요한 자원이다. 그런 것을 무턱대고 빌려줄 리가…….

“얼마까지 알아보고 오셨나요?”

상냥한 목소리를 들은 엔라는 귀를 의심했다.

“비, 빌려줄 거야?”

“물론이죠. 어려울 때는 돕고 살아야지 않겠어요?”

흔쾌한 대답에 엔라가 크게 경악했다. 본인이었으면 절대로 안 빌려줬을 테니까. 엔라에게 상납하는 관리자들도 그녀의 힘이 두려워서 줄 뿐이다.

‘이거 완전 호구자너.’

동아줄이라도 내려온 기분. 엔라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괜찮아? 진짜로?”

“전 요즘 써먹을 일이 없어서. 이게 다 선우, 하악. 선우 덕분이죠.”

“아, 응.”

어떻게 이름만 불러도 하악거리는지. 아무래도 불가해하다만 지금은 상관없는 얘기다. 엔라는 깊게 생각지도 않고 덥석 물었다.

“고마워! 혹시 안 되면 그냥 누구 잡아다가 족칠까 했는데!”

“고맙기는요. 어차피 다 갚으실 건데. 아니에요?”

“고럼, 갚아야지! 그래서 얼마나 필요하냐면….”

아브나바가 맞장구쳐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의 얼굴에는 짙은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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