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5화
CHC
“푸흡!”
문득 최현석이 웃음을 터뜨렸다. 장동호가 보기에는 이 자리에서 가장 만만한 인물. 그가 잡아먹을 듯한 시선으로 최현석을 쏘아봤다.
“웃기냐? 재밌어? 이런…!”
“저래서 제가 CHC를 싫어하는 겁니다. 소속 헌터를 무슨 부품이나 하인처럼 대하죠.”
김정수가 어깨를 으쓱거리면서도 싸늘하게 비난했다. 현직 CHC 헌터인 최현석도 동의하는 의견이었지만, 장동호에게는 모욕적인 언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김정수, 지금 말 다 했나?”
아무리 소속이 다르다 해도 대표와 한낱 지부장. 지위의 차이가 큼에도 장동호는 화를 참아내지 못했다.
반면에 김정수는 아리송하다는 듯이 갸웃거릴 뿐이었다.
“장동호 씨였던가요. 대구, 아니. 성남 지부?”
턱을 매만지다 기억났다는 양 탄성을 터뜨린다.
“아! 경주. 경주 지부장이 여기까지 오실 줄이야. 대단한 맛집인가 봅니다? 음식이 좀 남았으면 좋았을 텐데.”
“뭐, 뭐?”
“슬슬 가보셔야 할 텐데요. 경주까지는 멀지 않습니까. 저희는 일 얘기가 있어서.”
“이런 싸가지 없는 새끼가!”
쾅!
상을 주먹으로 내리친 장동호가 씩씩거리며 일어났다.
희망고문으로 모자라서 조롱까지. 다혈질적이고 콧대 높은 그로서는 무시할 수 없는 일이었다.
힘으로 어떻게 해볼 생각은 없다. 그저 알량한 자존심을 세우기 위함.
본래라면 비벼보지도 못하겠지만 장소가 장소다. 폭력을 행사하기에 부담스러운 건 김정수도 마찬가지라 판단했다.
그가 위협하려는 찰나에 서늘한 음성이 흘렀다.
“일어난 김에 그대로 나가세요.”
유선우의 말에 장동호가 입술을 깨물었다. 김정수에게 정신이 팔려있었지만, 애초에 이 판을 만든 장본인이 누구인지는 명약관화했다.
“별의별 잡것들이…!”
참다못한 장동호가 유선우에게로 걸어갔다.
그리고 두 걸음도 떼지 못하고 발이 멈췄다.
언제부터인지 목에서 한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뜨겁게 달아올랐던 머리가 단숨에 차가워졌다. 장동호가 목울대를 넘기고는 눈알만 굴려 아래를 내려다봤다.
‘이, 이게 언제…….’
살갗에 얼음의 송곳이 닿아 있었다. 한 발짝만 더 내디디면 목이 꿰뚫리고 말리라.
유선우가 자리에 앉은 채 송곳을 겨누며 말했다.
“나가시든가, X 까고 뒈지시든가.”
날고 기는 A급 헌터들도 유선우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지 못했다. 장동호를 제지하려던 최현석마저 숨을 덜컥 멈췄다.
‘역시 이 사람은….’
한편으로 김정수는 가슴의 벅차오름을 느꼈다.
끝 모를 무위를 자신의 두 눈으로 접한다는 것. 별것도 아닌, 찰나의 일이었지만 그에게는 충분했다.
“허억, 허억!”
장동호는 무의식적으로 유선우의 표정을 살폈다.
방금까지만 해도 태평하게 실실거리던 얼굴. 지금은 귀찮다는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다.
아무렇지 않게 목을 찌를 기세였다. 장동호는 헐레벌떡 자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뛰쳐나가는 와중에도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저놈이 이대로 청일로 넘어간다면.
애초에 청일이 감당할 수나 있을까.
머리는 복잡했지만, 몸은 본능에 따라서 잘만 움직였다.
이윽고 미닫이문을 열었을 때.
“계산 안 하고 가면 뒤집니다. 진짜로 찾아가.”
‘저런 사이코 새끼…….’
***
장동호가 돌아간 이후 방 안에는 어색함이 감돌았다. 확실히 만족스러운 결과였지만, 이대로 돌아가기에는 아직 일이 끝나지 않았다.
짝!
유선우가 손뼉을 치고는 말문을 열었다.
“일단 죄송합니다. 이상한 일에 말려드시게 했네요.”
“은근히 재밌었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CHC에는 묵은 감정이 좀 있어서 말이죠.”
“그렇게 말해주시면 다행이고요.”
“어제 말씀하셨던 건….”
“아, 네. 계약서는 후딱 쓰죠.”
김정수는 드디어 불안을 털어낼 수 있었다.
장동호를 골려주는 게 즐거웠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그래도 계약이 무산되어서야 전부 헛수고일 뿐이니까.
“어, 음. 난 빠져 있을까?”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된 최현석이 머쓱하게 물었다. 당연히 유선우를 향한 말이었지만 김정수가 먼저 반응을 보였다.
“최현석 씨는 앞으로 어쩌시겠습니까?”
“…글쎄요. 솔직히 뒷일은 생각 안 하고 지른 거라서.”
“CHC에서 이번 일을 그냥 넘기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겠죠. 아예 협회로 들어가면 되려나요.”
최현석은 불편한 낯으로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말마따나 이런저런 문제가 생길 터. 당장 예상할 수 있는 것만 따져봐도 몇 가지는 된다.
계약 파기 시에 지불해야 할 터무니없는 위약금.
이미지를 추락시키기 위한 갖은 언론플레이.
헌터 등급마저 떨어지게 되리라 짐작하고 있다.
통쾌하긴 했다만 앞날을 생각하면 답이 없는 상황. 그가 한숨을 삼키고 있자니 김정수가 뜻밖의 제안을 건넸다.
“이번 기회에 저희 쪽으로 넘어올 생각은 없으신지요.”
“청일로요?”
“예. 물론 대우는 섭섭하지 않게 해드리겠습니다.”
최현석은 어리벙벙해져선 입을 헤 벌렸다. 그는 의견을 구하고자 유선우를 바라봤다.
하지만 유선우는 끼어들 생각이 없는지 어깨를 으쓱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이내 최현석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지금 확답을 드리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솔직히 좀 쪽팔려서.”
“무슨 말씀이신지….”
“전 쟤한테 빚지는 게 죽도록 싫거든요.”
빚을 진다. 김정수는 그 말을 속으로 곱씹었다.
상황만 보면 그렇게 여겨도 부자연스럽진 않다. 유선우와 계약하는 김에 받아준다는 인상이 있을 수밖에.
말뜻을 파악한 그가 머리를 양옆으로 흔들었다.
“확실히 그림이 이상하기는 합니다만, 그런 의도는 아닙니다.”
“뭉뚱그려서 말씀하실 필요 없습니다. 덤이 아니라는 건 알아요.”
최현석이 어색하게 웃었다.
“피해의식이라 여기셔도 어쩔 수 없는데, 전 원래 이럽니다. 이래놓고 내일 당장 대표님께 연락 드릴 수도 있어요. 그래도 지금 덥석 받아들이는 것보단 덜 쪽팔릴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최현석 씨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는 것만 알아두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봐도 애 같았네요.”
자조하는 모습에 김정수가 흐뭇한 낯을 지었다. 그가 재차 고개를 가로젓고는 정중하게 명함을 내밀었다.
“아뇨. 오히려 더 호감이 갑니다. 마음 정하시면 언제든 연락 주시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말은 길게 했지만 아마 근시일 내로 연락 드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럼 전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엉덩이를 일으킨 최현석은 유선우와 시선을 맞췄다. 유선우의 표정은 아리송했다. 서운해 보이기도 하고 기뻐 보이기도 하고.
최현석은 아무런 해석을 붙이지 않은 채 옅게 웃었다. 그제야 유선우도 마주 미소짓고는 입을 열었다.
“빨리 끝내고 전화할게. 집까지 태워줘.”
“차 좀 사라.”
“차는 개뿔. 택시 탈 돈도 없다.”
최현석이 키득거린 뒤에 자리를 비켰다.
둘만이 남은 룸.
적막함 속에서 유선우가 한숨을 쉬었다. 섭섭하기는 해도 그뿐. 본인 선택에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다.
‘애도 아니니까.’
기분을 환기하고 본래 용건에 집중했다. 시선을 돌려보자 김정수는 머리를 반쯤 숙이고 있었다.
“대표님?”
“아, 예.”
고민에 빠져 있었는지 김정수가 답지도 않게 흠칫 놀랐다. 곧 그가 머쓱하게 턱을 긁적거렸다.
“좋은 친구 두셨습니다.”
“그렇죠?”
“일단 계약서 확인해보시죠.”
유선우는 계약서를 받아들고 내용을 읽어내렸다.
근무 장소와 계약 기간.
연봉과 몬스터 부산물의 정산 비율.
조항 하나하나를 주의 깊게 살펴본 유선우가 감상을 말했다.
“까고 말하자면 연봉이 좀, 아니. 굉장히 섭한데요.”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의외로 김정수는 순순하게 인정했다. 그가 세부적인 내용을 설명했다.
“그 연봉은 얼굴값이라 보시면 됩니다. 저희 사에서 숨만 쉬어도 받으실 수 있는 금액이죠.”
“잘 이해가 안 되는데.”
“전에 말씀하셨던 조건대로 유선우 씨는 단독으로 행동할 수 있는 특수한 직함을 받게 되실 겁니다. 실적을 올리시는 대로 전부 성과급으로 들어갈 거고요.”
“아, 용병 같은 느낌이네요.”
“구체적인 사항은 명시해두었습니다. 금액에는 변동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만.”
유선우의 입에서 “호오” 하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어쩐지 업무 내용이나 시간이 정확히 안 적혀 있더라니. 듣고 보니 귀가 솔깃해지는 조건이다.
‘월급 루팡 하기에 딱인데.’
문제는 명시된 계약 기간이 1년이라는 것. 놀고먹기에는 너무 짧은 기간이다.
1년을 놀고 신뢰를 깎아 먹으면 재계약 시에 불이익이 생기겠지.
머리를 굴리는 와중에 김정수가 이어서 설명했다.
“정리하자면 저희 클랜의 이름을 달고 활동하는 자유 헌터라고 보시면 됩니다.”
“일을 제가 찾아다녀야 하나요?”
“그건 아니고요. 클랜으로 들어오는 요청을 임의로 확인하실 수 있도록 조치를 해두겠습니다. 활동하시다 보면 유선우 씨를 지명해 지원을 요청하는 경우가 점차 늘어가겠죠.”
유선우는 슬슬 의심까지 들기 시작했다. 조건이 과하게 좋아 보였다. 심심할 때 던전 닫고 다니면 억대 연봉은 뽑게 생겼다.
“금액에 변동이 생길 수 있다 하셨는데, 어느 정도죠?”
“2할을 넘지는 않을 겁니다. 같은 등급의 던전이라도 공략 난이도가 달라지기도 하니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그걸 다 어떻게 확인하시게요?”
“활동하실 때 영상을 찍어주시면 됩니다.”
“아, 박아연 씨가 했던 것처럼요.”
김정수가 침묵으로 긍정했다. 그는 유선우가 제시했었던 마지막 조건에 관해 말했다.
“방송은 뮤튜브 한정으로 괜찮으시겠습니까?”
“플랫폼은 딱히 상관없어요. 근데 이유 좀 들어봐도?”
한숨을 푹 내쉬더니 푸념하듯 대답한다.
“파프리카는 과할 정도로 깐깐하더군요. 그나마 뮤튜브에서는 최근에 유사한 선례가 생겨 어떻게든 비벼봤습니다.”
규제하는 것도 신기한 일은 아니다.
던전에서 어디 몬스터만 죽나. 헌터가 죽는 경우도 잦다. 어떻게든 돈이야 되겠지만 송출하기에는 부적절한 장면이다.
“구체적으로는요?”
“녹화 영상을 올리는 건 검토만 하면 큰 제약이 없는데, 생방송은 확실하게 검증된 A급 이상의 헌터에게만 허용된다고 합니다.”
“엥. 좀 귀찮아질 것 같은데.”
“이것만큼은 그쪽 방침이라….”
김정수가 면목 없다는 듯 말을 흐렸다.
유선우는 마지못하게나마 납득했다. 징징대기에는 이미 많은 호의를 받아왔다.
영상으로 미리 구독자를 확보해두는 것도 좋은 방법이고.
“이 정도면 충분해요. 정 뭣하면 다른 수단도 있고.”
“저도 몇 개는 떠오르는군요. 그리고 A급까진 얼마 걸리지 않으실 겁니다. 마냥 다행인 일은 아니지만.”
“무슨 뜻이에요?”
뉘앙스가 묘해 캐묻자 김정수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요 며칠간 급작스럽게 게이트 발생 빈도가 잦아졌습니다.”
“허, 심각해요?”
“대처할 수 없는 수준은 아니고요. 그래도 상황이 악화되고 있는 건 명확하죠. 또 이건 좀 다른 얘기인데….”
“말씀하세요.”
“어째선지 던전 정보가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유선우는 듣자마자 주먹을 꽉 쥐었다. 해결방법은 어쨌든 원인은 짐작이 가는 바가 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고 태연한 척 질문했다.
“대충 언제부터요?”
“6시간쯤 되었을 겁니다.”
“아. 6시간.”
“사실 이건 처음 생긴 일은 아닙니다. 여태까지 몇 번 있긴 했는데, 이번만큼은 악재가 겹쳐서 불안감이 크군요.”
눈에 띄게 늘어난 게이트 발생. 자취를 감춘 던전 정보. 무엇보다 테러 사건 이후로 잠적한 관리자.
이로써 모든 게 확실해졌다.
‘관리자 이 년이…….’
이 새끼, 빤스런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