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4화
CHC
비명 가득하던 훈련이 끝난 후.
교육생들은 유선우의 화제를 꺼내지 않게 됐다.
관심이 식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저 이름을 부르기는커녕 눈을 마주치기도 두려워할 뿐.
‘조금 심하긴 했어.’
사실 커피를 쏟은 보복으로는 과한 감이 있었다. 시비 한 번 걸렸다고 사내 양호실로 보내버렸으니까. 유선우 본인도 과함을 알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래야 본보기가 서지.’
한두 대로 끝내거나 좋게좋게 타일렀으면?
불 보듯 뻔하다. 정신 못 차리고 사사건건 성가시게 굴어왔겠지.
마냥 무시하기에는 하루 이틀 볼 사이도 아니지 않은가. 필요해서 기강을 잡았을 뿐이다. 물론 감정도 들어갔지만.
‘어쨌건 앞으론 서로 참견하지 않게 되겠지.’
다만 깽판 부렸다는 자각이나 미안함은 있다. 이진철 패거리가 아니라 이성결과 청일에 대한 미안함이다.
막무가내로 행동한 만큼 사과의 표시를 보여줘야 할 터. 청일에서 원하는 바는 알고 있으니 고민할 필요도 없다.
‘마침 잘 됐어. 어차피 계약할 생각이었고.’
직접 둘러본 결과 청일은 나쁘지 않은 클랜이었다. 상사의 인격은 물론이고 사원 복지도 만족스러운 수준. 다른 클랜이 어떤지는 몰라도 청일만 할지는 글쎄.
시간은 많이 남았지만 때로는 빠른 결단도 필요하다. 무엇보다 계약을 진행할 일정은 진작에 잡아뒀다. 김정수는 까맣게 모르고 있겠지만 싫어하진 않겠지.
생각이 정리됐다면 다음은 실천이다. 유선우는 초라할 정도로 얇은 지갑을 꺼냈다.
지갑에 든 돈이라고는 달랑 만 원짜리 지폐 한 장. 하지만 그의 지갑 속엔 돈보다 값진 종이가 많았다.
여태 받아온 명함이 제법 되어 뒤적거리기를 잠시. 원하던 명함을 찾아내자마자 전화를 걸었다.
“김 대표님. 내일 시간 되세요?”
***
인턴 생활 사흘째.
오늘따라 유선우는 배부른 사자처럼 얌전했다.
이성결에게 손찌검을 한 횟수는 어제의 절반 이하. 지적만큼은 날카로웠지만 폭력성의 저하가 눈에 띄었다.
오후에도 크게 다를 바는 없었다.
교육생 사이의 분위기는 경직되어 있었으나 그뿐. 유선우는 신경도 안 쓴다는 듯이 태연하게 조각에 몰두했다.
이진철 일행도 뺨을 맞는 등의 불상사를 겪지는 않았다. 본인들이야 유선우가 근처에만 있어도 벌벌 떨어댔지만. 어쨌건 퇴근 시간이 되도록 큰일은 없었다.
조용하게 일과를 마친 뒤.
유선우는 회사 앞 카페에서 최현석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극은 없어도 나름대로 괜찮았지.’
오늘의 평화는 유선우가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결과였다.
채찍은 충분히 휘둘렀으니 더 휘두르면 그냥 미친놈. 이제는 입 다물고 할 일만 해도 다들 알아서 설설 기게 되리라.
흡족하게 웃은 유선우는 카페에 앉아 시간을 죽였다. 차세정과 약속을 잡고, 소설도 마저 읽고. 그러다가 최현석에게서 전화가 오자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착했어?”
- 어. 스벅 맞지?
“지금 나갈게.”
전화를 받은 지 5초 만에 귓가에서 폰을 떨어뜨렸다. 끊기 직전, 흘러나오는 어색한 목소리에 손가락이 멈췄다.
- 미안하다.
“미안은 무슨. 나도 거기서 약속 잡았어.”
- 뭔 소리야?
“보면 알아. 그보다 진짜 괜찮아? CHC 엿 먹이는 거.”
말하면서도 얄궂은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최현석의 커리어를 망치는 일임은 명확하니까.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을 터다.
그러나 의외로, 돌아온 대답에는 후련함마저 담겨 있었다.
- 안 괜찮을 게 어딨어. 내가 부탁한 건데.
“…그래.”
본인이 괜찮다면야 상관없겠지.
엿이라면 거하게 준비해뒀다.
***
CHC 인천 지부장 장동호.
룸식 한식당 안에서, 그는 긴장감에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장동호가 앉은 테이블에 다른 사람은 없었다.
드문 일이었다. 그는 어지간해선 약속 장소에 먼저 도착하는 일이 없었다. 여유로운 태도가 상대와의 격차를 보여준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한 장동호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 그의 절박함을 명백하게 드러내는 사실이었다.
‘실수해선 안 돼.’
승진이냐 좌천이냐.
오늘의 결과에 따라서 희비가 엇갈린다.
자신이 없지는 않다. 오히려 차고 넘친다.
CHC는 어떤 클랜보다도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정치판이다. 그런 곳에서 지부장 자리를 따낸 만큼 처세술에는 일가견이 있다.
‘S급 각성자라 해봤자 군대도 안 갔다 온 애송이지.’
애초에 승산이 없다면 자리를 마련할 수도 없었을 터다. 이 만남이 성사된 데는 어떠한 이유가 있으리라.
청일에 유감이 있거나, 최현석과의 관계가 생각보다 각별하거나.
‘이번 일은 잘 해줬지만… 최현석은 슬슬 정리해야겠어.’
아까운 패이기는 하다만 말을 안 들어먹으니.
지금보다 위상이 더 높아지면 위협이 될 가능성도 크다. 밟을 수 있을 때 철저하게 밟아둘 필요가 있다.
‘만들어진 스타는 부수기도 쉬워. 설계도가 다 이쪽에 있으니.’
장동호가 생각에 잠겨있기를 한참.
고급스러운 장지문이 열리고 두 청년이 문턱을 넘었다. 셋이 모이자 최현석이 말문을 열었다.
“먼저 와 계셨네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차가 막혀서.”
“나도 방금 왔는데 죄송하기는. 아, 유선우 씨 되십니까?”
장동호가 엉덩이를 일으키며 은근슬쩍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약속은 8시 정각. 현재 시각은 7시 50분경. 늦지는 않았으니 좋다면 좋은 신호다.
“예.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하하. 영광은요. 우선 앉으시죠.”
유선우는 장동호가 도로 앉고 나서야 자리에 앉았다. 엿 먹이기 전까지는 저자세로 나갈 계획이었다.
잠깐의 침묵 후 장동호가 명함을 내밀었다.
“장동호라고 합니다. 이미 들어 아시겠지만 CHC 인천 지부를 맡고 있습니다.”
“예. 제 이름은 아시는 것 같고. 청일에서 인턴으로 근무….”
유선우가 헛기침하고 말을 정정했다.
“청일에서 교육받고 있습니다. 직함이라기엔 민망하네요.”
“다들 받는 교육인데 민망할 게 어딨습니까. 제 때는 없었습니다만.”
“아, 그렇습니까.”
“그… 현석이랑 사이가 좋으시다고 들었습니다.”
말이 끊어지려 하자 장동호가 곧바로 다른 화제를 꺼냈다. 음식이 나올 때까지는 말을 이어가야만 했다.
“어릴 적부터 쭉 같이 다녔죠.”
“둘이 인물이 아주 훤칠합니다. 하하. 유선우 씨를 TV에서 볼 일도 머지않은 것 같습니다.”
“너무 금칠해주시네요. 그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홍보만 잘해도 금방 현석이만큼 유명해지실 겁니다. 워낙 화제성이 뛰어나시니까요. 비주얼도 더할 나위 없으시고.”
유선우는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만 주억거렸다.
얼굴 칭찬해주니 좋기는 한데, ‘홍보만 잘해도’ 란다. 너무 속 보이는 발언이라 무어라 대꾸하기가 불편했다.
‘무슨 연예기획사도 아니고.’
이내 요리가 하나하나 들어오기 시작했다. 속으로 지루해하던 유선우도 음식을 보자 군침이 확 돌았다.
코스의 시작은 견과류가 정갈하게 올려진 햇밤죽. 다음으로는 사과 드레싱을 두른 계절야채샐러드였다.
침을 꼴깍 삼키고 있자 장동호가 눈치 빠르게 식사를 권했다.
“일단 드시면서 말씀하시죠. 몇 번 와봤는데, 맛이 괜찮습니다.”
이곳에서 들은 말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말이었다.
이후로도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상에 올랐다.
한방 수육과 소라회무침에 궁중잡채 등등.
만복감이 느껴질 즈음이 되어서 장동호가 본론을 꺼냈다.
“아직 청일과 계약하지 않으셨다고 들었는데, 맞으십니까?”
“아무래도 고민이 많아서요. 청일에 유감은 없지만요.”
“예. 물론 훌륭한 클랜입니다.”
유선우는 흘려듣고는 뒷말에 집중했다.
그래도, 하지만, 이라는 말이 나올 시점. 아니나 다를까 장동호의 얼굴이 진지함을 띠었다.
“그래도 시야가 한정되어 있다고 생각지는 않으십니까. 한국에 있는 대형 클랜만 해도 여섯입니다. 어디든 유선우 씨의 행보에 신경을 기울이고 있을 거고요.”
“알고 있습니다. 한동안 폰이 시끄러웠거든요. 지금은 잠잠하지만.”
“청일의 위상이 대단하니 말입니다. 마찰을 빚고 싶지는 않았겠죠.”
유선우는 하품을 참아내는 것이 고역이었다. 그는 빙빙 돌리는 얘기가 지겨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CHC가 가져온 조건을 듣고 싶습니다.”
직구를 던지자 장동호의 뺨이 움찔거렸다. 장동호가 헛기침해 목청을 가다듬었다.
“계약 조건은 물론 잘 쳐 드리고, 대중 노출 측면에선 저희 클랜에 비할 곳이 없을 겁니다. 아니, 없다고 확신합니다.”
“쉽게 말해서 인기네요.”
“예. 현석이만 봐도 아시지 않습니까.”
클랜에 대한 자부심이 철철 흐르는 발언.
최현석으로서는 불쾌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그 자부심은 헌터들의 희생 위에 세워진 것이니까.
최현석의 입매가 일그러졌으나 장동호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연예인도 아니고 무슨 인기냐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만, 아시다시피 헌터에 있어서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영향력을 따져서 등급을 산정하니까요.”
“알고 있습니다. 근데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예. 뭐든지.”
유선우는 환기도 할 겸 궁금했던 것을 물어봤다.
“CHC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모르겠네요.”
“S급이라는 게….”
“S급의 가치를 묻는 게 아닙니다. 다른 클랜들은 실질적으로 저한테서 손을 뗐거든요.”
“방금 말씀드렸을 텐데요. 청일의 심기를 건드릴까 두려웠겠죠.”
“그쪽은 아니다?”
당돌한 질문에 장동호가 일순간 입을 다물었다. 그가 물컵을 홀짝거린 뒤에 말을 이었다.
“까놓고 말씀드리자면 저희는…….”
드르륵!
난데없이 룸의 미닫이문이 열렸다. 대화가 끊기고 세 명의 눈알이 문 쪽으로 굴러갔다.
그리고 들려오는 어리둥절한 목소리.
“유선우 씨?”
청일 대표 김정수가 자리에 끼어들었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유선우와의 약속 때문에 왔건만 룸 안에 있는 사람은 셋. 그중 둘은 뜻밖이면서도 눈에 익은 얼굴들이다.
CHC의 둘은 김정수를, 김정수는 CHC의 둘을 주시했다. 싸해진 분위기 속에서 유선우만이 히죽히죽 웃었다.
유선우가 싱글벙글거리며 김정수를 반겨줬다.
“김 대표님. 혹시 노렸어요? 진짜 딱 맞게 오셨네.”
유선우를 제외한 셋 중 가장 노련한 것은 김정수였다. 진상을 파악하고 표정을 다잡는 데는 5초가 걸리지 않았다.
그가 장동호를 노려보고는 입을 열었다.
“어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달갑지 않은 얼굴이 있군요.”
“별 건 아니고요. 아, 일단 앉으세요.”
“실례하겠습니다.”
다음으로는 최현석이 혼란에서 깨어났다. 그는 여태까지 대화 흐름이 이상해 잠깐 의심도 했었다.
유선우가 배려랍시고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 대충 맞춰달라는 말을 들었기에 조용히 있었을 뿐이었다.
‘미리 말 좀 해주지. 새끼.’
최현석은 속으로 불평하면서도 이해는 했다. 알고 있었으면 재미가 덜했을 테니까.
장동호가 정신을 다잡기도 전.
유선우의 말이 장동호의 고막에 틀어박혔다.
“장동호 씨. 대답 안 하세요?”
“예, 예?”
“무슨 말인지 아시면서. 생각보다 CHC랑 청일 사이가 험악한가 봐요. 이거 죄송해서 어쩌나. 괜히 불렀나 봐요?”
“아니, 그게….”
허둥지둥하는 장동호를 대신해 김정수가 대답했다.
“사이가 좋을 수가 없죠. 방침은 180도 다르고, 클랜 창설 초기부터 별의별 사건이 다 있었으니까요.”
“어쩐지 과하게 달라붙더라니. 청일이 더 잘 나갈까 봐 걱정되셨나?”
“이……!”
장동호는 뒤늦게나마 상황을 파악했다.
순식간에 변한 유선우의 태도를 보면 뻔한 일.
최현석보다 늦게 눈치챈 것은 상대적으로 정보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지금 장난치십니까?”
노기가 깃든 눈으로 유선우를 노려보며 묻는다. 유선우는 이제 알았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넹. 지금 장난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