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3화
완장 찼다
유선우는 탕비실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오늘은 차세정의 기프티콘도 없어서 간만에 믹스 커피. 이틀 연속으로 박아연의 카드를 쓰기에도 미안했다.
탕비실에는 유선우를 제외하고도 세 명이 있었다. 그들은 아닌 척하면서 유선우를 힐끔힐끔 엿봤다.
막상 유선우는 시선에 익숙해진 참. 그는 커피를 한 손으로 쥔 채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화면에는 글자가 가득했다. 최현석이 추천해줬던 걸그룹 육성 소설의 1부였다.
‘은근히 잘 읽히네.’
글자와 떨어져 지낸 지 오래. 읽기 불편할 줄 알았는데 생각 외로 불편함이 없다.
미소까지 띤 채로 집중하고 있기를 잠시.
한 통의 전화가 흐름을 끊었다.
액정에 표시된 이름은 차세정.
유선우는 거절을 누르려다 생각을 바꿔먹었다. 지금껏 써본 적 없는 통화 거절 메시지 기능. 대충 ‘회의 중입니다’를 선택해서 전송해줬다.
다시 여가 활동에 집중하길 몇 초가 지났을까.
스마트폰이 또 까만 화면으로 진입했다.
이쯤 되면 열 받는 게 정상이다. 콧김을 푹 내뿜으며 통화를 연결했다.
“야, 나 지금 회산데.”
- 운전 중이라며?
“웬 운전? 나 뚜벅이잖아.”
- 지가 보내놓고.
“잘못 눌렀나 보다. 그거 있잖아, 회의 중입니다.”
- 회의는 무슨 회의. 지금 점심시간이잖아.
서러운 망발이다. 점심에 회의하는 직장인들도 많을 텐데.
“허, 그걸 어떻게 안대. 내 속옷 색깔도 알아?”
- 검정이겠지.
“너, 미친. 와. 엿보기 구멍 뚫어놨어? 소름 끼치네.”
진심으로 떨면서 말하자 코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 옛날부터 맨날 검정 팬티만 입었잖아, 너. 점심시간은 어제 네가 알려줬고. 뇌세포 괜찮니?
“…그랬나?”
생각해보니 맞는 말 같기도 하고. 검은색 팬티밖에 입어본 기억이 없다.
이내 차세정이 쿡쿡 웃더니 용건을 꺼내왔다.
- 하여튼 영화. 영화 보고 싶어.
“영화는 혼자 보는 게 재밌지.”
- 찐따가 또 찐따하네.
유선우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찐따하다가 무슨 동사일까?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자 차세정이 말을 이었다.
- 너랑 보고 싶어. 내일 시간 돼?
“내일?”
- 응. 내일 밤에.
아쉽게도 내일은 최현석과의 약속이 있다. 여자 때문에 절친과의 선약을 미룰 수는 없는 노릇. 무엇보다 꽤 중요한 일이기도 하다.
“내일? 내일은 약속 있….”
퍽!
말을 끝맺기도 전에 등이 확 밀쳐졌다. 난데없이 누군가가 부딪쳐온 것이었다.
“아.”
꼴사납게 넘어지지는 않았다. 다만 무방비 상태였기에 자세가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손에 있던 커피를 쏟은 것은 필연적인 결과. 종이컵이 기울어지고, 식은 내용물이 주위에 흩뿌려졌다.
- 유선우?
차세정의 부름에 유선우는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말은커녕 미동도 없이 가만히 있을 뿐.
갑작스레 싸해진 분위기 속.
다음으로 그의 귀에 닿은 소리는 남자의 육성이었다.
“아, 죄송합니다. 다친 데 없으세요?”
목소리에는 걱정이 담겨 있었다. 거의 절절하기까지 한 어조. 유선우는 그 속에서 가식을 잡아챘다.
그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등을 돌려 남자의 상판을 확인했다.
미세하게 입꼬리가 올라가 있는 얼굴. 어디선가 봤다 싶더니 교육생 동기다.
남자, 이진철은 송구하다는 듯 허리를 굽혔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다 치울 테니 옷부터 갈아입으시죠. 정말로 사고였습니다.”
“네, 뭐. 그러시겠죠.”
그제야 유선우가 입을 열었다. 그는 차세정에게 다시 연락하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미쳐 날뛰면서 뒤집지는 않았다. 단지 손을 몇 번 움찔거렸을 따름. 그러다가 그대로 탕비실에서 나가기 시작했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뒷모습은 무척이나 태연했다. 그걸 바라보는 이진철은 가까스로 웃음을 참아내고 있었다.
‘등신인가? 찍소리도 못하네.’
옹졸한 행동이었지만 쾌감은 대단했다.
한 대 얻어맞지 못한 게 아쉽기는 하다. 폭력에 대비해서 동기들에게 촬영을 부탁해뒀으니까. 그래도 만족스러운 결과이니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한편으로 유선우의 머릿속은 활화산처럼 뜨거웠다.
‘저 티모충 같은 새끼가…….’
뻔뻔한 낯짝을 보자마자 하마터면 얼굴을 찢어버릴 뻔했다.
떡하니 서 있는 사람 등에 몸뚱어리를 냅다 받아버린다? 이게 무슨 겟엠프드도 아니고.
이것저것 따져 결론 내릴 필요도 없이 고의다.
뒤에서 꼼지락대는 새끼들도 전부 확인해뒀다. 애초부터 벼르고 있었는데 지금 딱 정했다.
탕비실의 문을 나서기 전.
유선우는 고개를 반쯤 돌리고 무감정하게 내뱉었다.
“동기님들. 모의전투실에서 봅시다.”
그리 말한 뒤 대답도 듣지 않고 자리를 떴다.
유선우는 더럽혀진 옷을 갈아입지 않았다.
순간의 분노가 사그라지지 않도록.
한 새끼는 꽝꽝 얼려서 냉동인간으로 만들어줄까 했다. 하지만 그래서야 값이 너무 싸다.
한 10억년쯤 존버해서 다시 살아나면 어쩌려고.
꽉 쥐고 있던 스마트폰을 보니 다행히도 멀쩡했다. 동생이 월급 털어서 사준 폰을 이깟 일로 망가뜨릴 뻔했다.
시각은 12시 47분.
오래 기다릴 것도 없이 곧 점심시간이 끝난다.
인내는 쓰고 결실은 달콤한 법. 젖은 옷이 달라붙는 불쾌감을 견뎌내며 숨을 죽였다.
***
지하의 복도를 걷는 이성결의 발걸음은 경쾌했다. 맞을 때야 괴로웠으나 지금은 마사지라도 받은 기분이었다.
고작 이틀 만에 강해질 단초도 잡았고. 앞으로의 6개월은 기대보다 훨씬 보람찰 듯했다.
점심시간이 끝나기 정확히 1분 전.
모의전투실에 도착한 이성결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부터는 알아서 모이라고 해뒀는데 다행히 지각은 없었다.
‘분위기가 좀 묘하긴 한데. 내가 신경 쓸 건 아니지.’
대충 주위를 훑어본 이성결이 말문을 열었다.
“오늘 식사도 만족스럽더군요. 여러분께는 그다지 기쁜 일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하하.”
가벼운 투로 말했지만 반응은 전무. 교육생들의 얼굴에는 떫은 감정이 가득했다.
머쓱해진 이성결이 안면몰수하고 지시했다.
“훈련은 어제처럼 진행하시면 됩니다. 질문 있으시면….”
“이 교관님.”
말허리를 끊은 것은 유선우였다. 바밤바보다도 차가운 목소리. 환각통을 느낀 이성결은 애써 평정을 가장했다.
“예. 질문이라도?”
“제가 알기로 이곳은 모의전투실입니다. 맞습니까?”
“말투가 좀….”
“맞습니까?”
“맞습니다.”
불평하려다 곧바로 깨갱 찌그러졌다. 어조에 짙은 짜증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닥치고 굽히는 것. 이성결이 사회생활을 통해 가장 먼저 익힌 처세술이다.
유선우가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했다.
“여기는 모의전투실이고, 저희는 헌터 되려는 사람들 아닙니까.”
당연하고 뻔한 발언뿐이다. 이성결은 유선우의 의도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기분이 나빠 보인다는 것만 어렴풋이.
어리둥절한 채로 예, 하고 수긍했다.
곧 유선우의 목소리가 근엄해졌다.
“그럼 저희에게 적합한 훈련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죽어라 토만 하는 마나 훈련? 아니면 경험치 쌓이는 실전형식 대련? 제가 보기엔 닥후입니다, 닥후.”
“대련이 커리큘럼에 포함되어 있기는 합니다. 그래도 해봐야 이틀째인데 느닷없이 대련이라니요.”
“대련은 너무 이르다?”
“당연하죠. 현재 과정이 그리 체계적이지는 않더라도 나름대로 연구를 거친 결과물입니다. 1달, 아니 최소 2주라도 지나야….”
“하하, 이 교관님.”
유선우가 이성결에게 가까이 다가가 어깨를 두드렸다. 가라앉은 눈으로 입꼬리만 올린 섬뜩한 얼굴이었다.
“과시하려는 건 아닌데, 제가 꼴에 S급 각성자이잖습니까.”
“예, 예….”
본인의 입에서 나온 터무니없는 등급과 교관의 대답. 교육생들이 저마다 경악 혹은 의심의 감정을 품었다.
한국에 S급 각성자 판정을 받은 사람은 3명뿐. 곧이곧대로 믿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반면에 이성결은 오줌을 지릴 것만 같았다.
‘X 된 것 같은데…….’
어깨에 올라온 손등을 보니 근육 도드라진 상태가… 사람이 아니다. 힘을 얼마나 주고 있는지 부들부들 떨기까지.
‘말 한마디 잘못 꺼내면… 어깨 부서진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제대로 꼭지가 돌았다. 자칫 실수하면 바로 응급실. 이성결은 어느새 이빨을 딱딱 부딪치고 있었다.
공포심을 감지한 유선우가 과장되게 웃었다. 그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상냥하게 말했다.
“긴장 풀어요. 아직 아무것도 안 했어.”
이성결이 왈칵 눈물을 쏟을 뻔했다. 앞으로는 할 수도 있다는 소리다.
“저, 저한테 왜 그러십니까….”
“하려는 말이 뭐냐면 말이죠. 제가 보기에 몇몇 동기들이 굉장히 훌륭하다 이거예요.”
유선우는 몇몇 교육생들에게 시선을 보냈다. 특히 커피 빌런과 집요하게 눈을 맞췄다.
“저한테 커피를 쏟더라고요? 옷에 이거 보이시죠? 하마터면 화상 입을 뻔했잖아요.”
거짓부렁에 이진철이 무어라 반박하려 했다. 시도는 그의 동료 중 하나, 김범준에게 막혔다. 무슨 말을 하나 들어나 보자는 심산.
덕분에 대화는 방해받지 않고 계속되었다.
“크, 큰일이셨겠습니다. 근데 그거랑 대련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굉장히 X 같… 아니, 감탄해서. 저한테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거든요. 일반적인 각성자랑은 다른 인재들이다 이겁니다. 제 말 이해하세요?”
“그게….”
“이해, 하시겠죠?”
이윽고 이성결이 울 듯한 낯으로 머리를 주억였다. 그제야 만족한 유선우가 흐뭇하게 미소지었다.
“잘됐네요. 제 직함 중에 트레이닝 뭐시기가 있더라고요?”
“트레이닝 어시스턴트 말입니까.”
“아, 그래요. 그거. 제가 생각하는 위치가 맞겠죠? 맞았으면 좋겠는데.”
이성결은 더는 아무 말도 뱉지 못했다. 그저 고장 난 기계처럼 끄덕이기만 할 뿐.
누가 봐도 압박하는 구도였다. 이진철을 비롯한 셋이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는 광경.
서로 간에 긴말은 필요치 않았다.
“교관님. 저희는 상관없습니다.”
“저분 말도 일리는 있어 보이고요. 괜찮지 않습니까?”
“저는 조금….”
이성결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B급 헌터가 발리는 모습을 봤으면서도 굳이?
유선우에게 들었을 때부터 정신병자들이라 생각은 했는데.
더닝 크루거 효과라는 용어가 있다. 잘못된 결론에 이르더라도 능력이 없어서 실수를 눈치채지 못하는 현상을 뜻한다.
그냥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다.
‘매가 약이지.’
이성결은 대련을 허가하기 전에 유선우와 눈빛으로 대화를 나눴다.
‘제발 적당히 해주십시오.’
‘빡친 만큼만 때리겠습니다.’
***
제3 모의전투실의 한 중앙.
잡동사니들을 치우자 명칭에 걸맞은 장소가 되었다. 거리를 두고 유선우와 마주 본 이진철이 마른침을 삼켰다.
‘이럴 생각은 없었는데….’
이진철은 어떻게든 꽁무니를 내뺄 생각이었다. S급 각성자라는 것을 믿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는 아직 싸울 준비가 되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민간인이었는데 대련이라니. 학창 시절에도 쌈박질은 안 하고 다녔다.
하지만 결과는 기대와는 정반대. 회피는커녕 첫 타자로 싸우게 생겼다.
이유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유선우가 콕 지명한 탓. 커피를 쏟은 실행범을 그가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긴장한 이진철은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먼저 발을 뗀 것은 참다못한 유선우였다. 태연하게 거리를 좁히자 이진철이 흠칫 놀랐다.
이따금 뉴스에서 다뤄지는 사건이 있다. 평소에 폭력과 거리가 먼 청소년들이 저지르는 살인. 서투름으로 인해 자제력을 잃게 되는 것이다.
이진철은 그러한 기사를 볼 때마다 생각했다. 하나같이 다 쓰레기 같은 것들이라고. 그리고 본인이 지금 그 쓰레기 짓을 시작했다.
“후웁!”
당황한 나머지 자제심이 끊어졌다. 능력을 사용해 입안에 불길을 머금은 찰나.
짜악!
강렬하고 찰진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이진철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격통에 정신이 날아갔다가 금세 되돌아왔다. 자세를 바로잡기도 전에 목소리가 고막에 때려 박혔다.
“괜찮아요? 많이 아파요?”
“아오, 씹…!”
“제 마음도 아파요.”
철썩!
가차 없이 타격이 이어졌다. 손을 휘두르는 유선우의 낯은 눈물을 쏟아낼 듯했다. 정말로 본인이 더 아프다는 것처럼.
그러면서도 팔다리는 잘만 움직였다. 교묘하게 발을 걸더니 상체를 툭 밀어버린다.
반쯤 넘어졌을 때 발밑을 꽝꽝 얼려주기까지. 엉덩이 찧으면 아플까 봐 배려해준 것이다.
“윽…!”
이진철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관절이 무리한 방향으로 꺾이지 않게 몸부림을 쳤다.
결과는 이른바 브릿지 자세.
거꾸로 엎드려뻗쳐다.
우스꽝스러운 꼴이었으나 유선우는 비웃지 않았다. 다만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듯이 한마디.
“그러다 다치면 어쩌려고요.”
다음으론 땅에 닿은 손까지 얼려서 고정시켰다.
“이제 좀 괜찮죠? 어이구. 그 나이부터 허리 나가면 안 되지.”
“허억, 허억! 너 이 새끼, 이게 무슨 대련이야!”
“기다려 보세요. 좀 더 도와줄게요.”
바닥에다 얼음송곳을 수십 개씩 깔아주기까지. 송곳 중 하나는 특별히 길었는데, 그 끝은 정확히 뒷구멍을 겨냥하고 있었다. 만약 넘어지기라도 한다면 대참사가 일어날 터였다.
“넘어지면 찔리겠다. 그쵸? 꽤 아플 건데.”
“저, 적당히 하자. 응? 너도 피 보고 싶지는 않을 거 아냐!”
이진철은 애써 천장을 향해 허리를 내밀었다. 뒤만큼은 죽어도 개통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발버둥은 형편을 쥐뿔도 낫게 해주지 못했다. 엉덩이의 높이에 맞춰 송곳까지 길어졌으니까.
조각상을 만든 경험은 유선우의 안에 녹아 있었다.
이진철이 세상이 떠나가라 절규했다.
“그만, 그만하라고! 아아아아아악!”
“근데 말이 좀 짧지 않아요?”
“뭐, 뭐? 너 몇 살이야 인마. 새파랗게 어린 새끼가!”
“몇 살 같아 보이는데요?”
“지랄하지 말고 풀라고!”
유선우는 가슴의 따끔거림을 느꼈다.
어째서 사람 말을 못 알아처먹는 건지. 짐승은 짐승인 모양이다.
그래서 송곳을 조금 더 길게 만들어줬다.
“아, 닿았어요. 진짜. 아. 아아아!”
이진철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존댓말이 튀어나왔다. 이로써 유선우의 지론이 옳았음이 증명됐다. 짐승은 맞아야 사람이 된다.
유선우는 이진철을 내버려 두고 등을 돌렸다.
아직 검은 머리 짐승이 두 마리나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