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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자님 뭐하세요-32화 (32/179)

제 32화

완장 찼다

이진철은 유선우가 뒷배를 믿고 설친다고 판단했다. 멍청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지만 아는 만큼 보이기 마련.

고작해야 C급 각성자인 그로서는 유선우의 유두 꼬집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없었다.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불합리뿐이다.

첫날부터 지부장이 친히 안내를 해주고.

평가에 반영되는 완장들을 독식하고.

무엇보다 팀장인 이성결을 손찌검하고.

‘무슨 대표 아들이라도 되나?’

청렴함으로 이름 높은 클랜인 청일인데 알고 보니 속은 더러운 모양이다.

하기야 어느 단체가 결점 하나 없이 깨끗하겠냐마는, 적당한 선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그는 구원의 손길이라도 뻗어주려 입을 열었다.

“교관님! 이 기구 어떻게 쓰면 됩니까?”

“아, 예! 어떤 기구입니까?”

이진철은 레그컬을 보는 척하면서 유선우를 곁눈질했다.

팔짱을 끼고 발을 까닥이며 바닥을 두드리는 모습. 언짢은 기색이지만 트집을 잡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레그컬 머신이군요. 일단 다리 길이랑 무릎 높이 맞춰서 조절하시고.”

이성결이 헐레벌떡 다가왔다. 비지땀을 흘리는 그에게 이진철이 소곤거렸다.

“괜찮으세요? 저거 완전 싸이코 새끼 아닙니까.”

“하하. 제가 지도 부탁드린 건데 뭘요. 싸이코 같기는 하지만요.”

“보고 있기가 좀 그렇습니다. 이거 협회에라도 찔러야 하는 게 아닌지.”

협회 소리를 듣자마자 이성결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큰일 날 소리 마시죠, 진짜로. 그러다 저 잘립니다.”

“자, 잘린다니….”

“하여튼 이건 엎드려서 아킬레스건 쪽에 패드 대시고, 햄스트링 이용해서 무릎 구부리시면 됩니다. 이렇게.”

교관답게 시범까지 한 번 보여준 뒤. 열심히 하라며 어깨를 두드려주고는 링으로 돌아간다.

이진철은 이성결의 듬직한 등이 어째선지 안쓰러워 보였다. 아버지의 노고를 마음 깊이 깨달았던 겨울날처럼.

‘안 되겠다.’

고작 이틀째인데 저만치 맞고 있으니. 한 달만 지나면 피폐해질 게 뻔하다.

이진철은 감성뽕으로 모자라 정의감 뽕까지 맞았다. 그는 근처의 동기들에게 다가가 정치질을 시작했다.

심경을 공유할 사람은 셋. 하민성과 한강에 김범준이라는 남자 교육생이었다.

하민성은 무슨 말을 지껄이든 조용히 듣기만 했다. 반면 한강은 헉하고 과장되게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대, 대표님 아들이요?”

“쉿! 말이 그렇다는 거지. 최소 지부장님 가까운 친척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은데.”

“그런 사람이 왜 웹툰 결제를 안 할까요?”

“뭐? 웹툰? 지금 농담이 나와?”

동기들은 대부분 한강에게 말을 놓고 있었다. 원체 밝은 성격 때문에 그녀는 얕보이는 경우가 잦았다.

“농담 아닌데요오….”

“강아, 너도 솔직히 보기 안 좋잖아. 저게 사람이야?”

“착한 것 같던데.”

“됐다. 너는 듣기만 해.”

이진철은 남의 말을 귀담아들을 생각이 없었다. 원하는 것은 오로지 동조와 공감. 그의 안에서 유선우는 이미 악인으로 자리 잡은 상태였다.

그중에서 하민성만큼은 담담했다. 그는 정치질에 휘말리기는커녕 공포 영화를 떠올리고 있었다.

‘이런 사람이 제일 먼저 죽더라.’

본인이 하려는 짓을 영상으로 봐야 정신 차릴 텐데. 아마 제발 그만두라고 소리를 질러대겠지.

내심 팝콘을 튀길 때에 김범준의 굵은 음성이 흘렀다.

“사회의 쓰레기 같은 놈입니다. 손이라도 봐줘야겠지 않습니까?”

“과격한 수단은 좀 그렇죠. 김범준 씨도 앞으로 청일에서 일하실 거 아닙니까.”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근데 저놈을 상사로 둘 바에야 계약 안 하고 말겠습니다.”

“흐음….”

귀가 솔깃해진 이진철이 생각에 잠겼다. 말마따나 아직 교육생 신분. 계약을 포기하면 못할 일도 아니다.

하지만 당장 고개를 끄덕이기 힘든 이유가 하나.

‘내가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정의감도 몸보신 앞에서는 하잘것없다. 자신의 앞날을 위해서는 어떤 것이 좋은 선택일까.

링 위로 시선을 돌리자 답이 곧바로 나왔다.

“허억, 허어억!”

“3초 안에 일어납니다. 실시.”

“시, 실시!”

이제는 교관 컨셉까지 그대로 써먹고 있다.

이후에 저딴 빌런과 같은 회사에서 일한다?

‘자살하고 말지.’

이진철은 둔재였지만 나름대로 자신은 있었다.

30대 초반이라는 그리 많지 않은 나이. 최근에 각성한지라 활활 타오르는 근거 없는 자신감.

자유 헌터로 시작해 높은 자리까지 올라간 헌터의 일화를 여럿 들어보기도 했다.

생각의 방향을 바꾸니 썩 괜찮아 보였다. 그는 마음을 굳게 먹고 옹졸한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저희가 고등학생은 아니잖습니까. 폭력은 자제하죠.”

“저놈이 고등학생인 줄은 차마 몰랐습니다.”

“선우 오빠 급식이었어요? 지금 학교 갈 시간인데?”

“강아, 사람 얘기하는 데 끼어드는 거 아니야. 훠이!”

“히잉….”

이진철의 말에 한강의 가슴이 철렁거렸다.

‘내가 사람이 아니라 이거야?’

살면서 이런저런 비하 발언을 들어보기는 했다.

자신이 답답하다는 건 알지만 사람이 아니라니.

무려 한 달 만에 듣는 폭언이다!

서운한 기억은 10초면 지워지는 그녀도 이번은 달랐다.

‘이제 다 싫어.’

확 토라진 한강은 러닝머신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가면서도 고개를 돌려봤으나 기대는 배신당했다.

위로는커녕 자기들끼리 쑥덕쑥덕!

친밀한 모습을 보니 인터넷에서나 접하던 단어가 떠올랐다.

‘이게 말로만 듣던 왕따라는 걸까.’

본인이 왕따를 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한강은 눈물을 머금고 러닝머신을 조작했다.

***

오늘도 어김없이 찾아온 점심시간.

유선우는 흥겨움에 콧노래를 불러대고 있었다. 오랜만에 손맛도 즐기고 혀도 풀었더니 마음이 가벼웠다.

싱글벙글 웃으며 오늘의 밥상을 음미했다.

붉은빛이 감도는 소스를 먹음직스럽게 두른 스테이크. 다채로운 샐러드를 이용한 플레이팅은 예술적이기까지 하다.

나이프로 스테이크를 내려긋자 다소곳한 속살이 드러났다. 고기의 결만 봐도 워낭소리가 들려오는 기분이다.

‘언제나 오늘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

식사는 더할 나위 없고 회사 분위기도 마음에 쏙 든다. 김정수 대표가 배운 사람이기는 한 모양이다.

‘응?’

유선우는 스테이크를 먹다가 문득 눈치를 챘다. 한강의 상태가 오늘따라 묘했다.

닭 뼈까지 먹던 먹성은 여전하나 문제는 표정. 눈꼬리가 축 처져선 당장 울음을 터뜨릴 듯하다.

본래라면 유선혜가 말을 걸었겠다만, 오늘 그녀는 외근을 나갔다. 유선우는 별수 없이 한강의 고민을 들어주기로 했다.

먼저 더 궁금한 것부터 물어보고.

“박아연 씨는 일 안 나가요?”

“밥 먹다 말고 무슨 소리예요.”

“원래 순찰도 다녔잖아요. 안 바쁜가 해서.”

첫 만남을 떠올린 박아연이 추억에 잠겼다.

어느새 한 달이나 지난 일. 그새 유선우에게도 익숙해져 버렸다. 슬슬 인생의 불량식품 같기도 해 없어지면 서운할 지경.

그녀의 목소리에 온기가 담기기 시작했다.

“저번 달까지만 해도 바빴어요. 점심도 샌드위치로 때우고.”

“지금은 아니고요?”

박아연은 입을 가리고 음식물을 삼켰다. 휴지로 입술을 닦은 그녀가 싱긋 웃었다.

“선우 씨랑 있는 게 제 일이에요.”

유선우의 턱이 잠깐 움직임을 멈췄다.

정말로 별말 아닌 것 같은데, 가끔 훅 들어온다.

허구한 날 ‘선우 씨 미쳤어요!?’ 하고 소리치는 여자. 그런 여자가 사근사근 대하니 가슴이 간질간질하다.

그와 반대로 박아연은 태평하게 수저를 놀렸다.

말없이 조용하게 식사가 진행되는 와중.

한강의 낯은 구긴 캔처럼 찌그러지고 있었다.

‘아무도 나한테 신경 안 쓰나 봐.’

알고 지낸 기간이 짧기는 했다. 그래도 이상하다는 것쯤이야 눈치챌 법도 한데.

사람이 아니라는 폭언을 들은 것도 따지고 보면 유선우를 커버해준 탓이다.

정작 유선우는 밥만 먹고 있고. 다음 주까지 기다리지 말라고 웹툰 내용도 미리 말해줬는데!

가슴이 북받쳐서 눈가에 물기가 차오르려는 순간. 때마침 유선우가 한강에게 관심을 던져줬다.

“강아. 더 먹을래?”

울컥!

개뿔도 위로처럼 느껴지진 않아도 담긴 감정은 따뜻했다. 아이에게는 기나긴 말보단 마음을 전하는 게 중요한 법. 정신연령이 어린 한강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까부터 봤는데 표정 안 좋더라. 힘들 땐 먹어야지.”

“히잉…. 네에.”

한강은 옆자리의 유선우에게 거의 안기듯이 달라붙었다. 유선우는 현기마저 감도는 얼굴로 한강을 토닥여줬다.

“아니, 누가 내 거 먹으랬어? 박아연 씨 거 먹으라고.”

“쒸이익! 오빠 진짜!”

유선우의 미소에는 구름 한 점이 없었다. 그는 아이를 돌보는 것을 굉장히 좋아했다.

이계에서도 시간이 날 때면 고아원에 방문해 봉사했었다.

소아성애 같은 정신병은 절대 아니고. 아이에게 원망을 많이 받아본 만큼 속죄하기 위함이었다.

당시를 회상한 유선우는 상냥하게 한강의 울분을 잠재워줬다.

“똑같은 식당에서 똑같은 접시에 똑같은 음식을 똑같은 수저로 먹는 건데 배에 들어간다고 다를까?”

“당연히 다르거든요!”

“자, 눈을 감고 먹는다고 생각해보자. 내 스테이크와 박아연 씨 스테이크를 구별할 수 있겠니?”

“그, 그거야 못하지만….”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지? 너 똑똑하잖아. 혹시 내가 잘못 생각한 거야?”

“어, 어……?”

한강은 혼란에 빠졌다. 아무리 뜯어봐도 개소리다. 그런데 반박하면 바보가 되는 걸까?

유선우의 얼굴을 바라보니 눈빛이 온화하기 그지없다. 정말로 자신이 똑똑하다고 생각해주는 것처럼.

똑똑하다는 말을 들은 게 대체 얼마 만인지. 한강은 가슴이 벅차올라 어쩔 줄을 몰랐다.

한편 박아연은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자기 음식 주기 아까워서 저 지랄을 하네.’

그녀는 속으로 헛웃음 치면서도 재빨리 접시를 비우려 했다. 하지만 전부 유선우의 손안이었다.

“박아연 씨, 강이 표정 안 보여요? 하, 이런 사람인 줄 몰랐네. 애 고기 한 점 덜어주는 게 그렇게 싫으세요?”

“허, 허! 이거 제 탓이에요?”

“원래 애들은 아빠보단 엄마한테 달려들잖아요. 모성애도 없어요?”

“한강 씨가 제 가족도 아닌데 모성은 얼어 죽을.”

“아니이! 애 앞에서 그런 소리를 하면 안 되지!”

박아연의 뺨이 쉴 새 없이 움찔거렸다.

없어지면 서운하기는 개뿔이 서운하겠다. 인생의 불량식품은 무슨. 20살 넘고서는 불량식품 한 번도 안 먹어봤다.

끝내 자포자기한 그녀가 허탈하게 웃었다.

“네. 마음껏 드세요.”

“그, 그래도 돼요?”

“그럼요. 미천한 제가 참아야죠.”

한강은 고기를 콕 집고는 입으로 옮겼다. 어리둥절하던 표정은 턱이 움직일 때마다 풀어졌다. 어느덧 얼굴에는 싱글벙글한 웃음이 만개했다.

심히 불쾌한 상태였던 박아연도 그 웃음에는 무너졌다. 그녀는 턱을 괸 채 흐뭇함 반 걱정 반으로 질문했다.

“한강 씨. 무슨 일 있었어요?”

“지금 보니까 별일 아닌 것 같아요. 괜히 오버했나 봐.”

“에이, 별일 맞아 보이는데.”

“오빠들이 선우 오빠 뒷담 깠거든요. 실드 쳐줬다가 사람 얘기하는 데 끼어들지 말라고 들었어요. 훠이! 이랬어요.”

“훠이?”

그 말은 박아연에게 불쾌감을 안겨주었다. 오빠들이라는 사람들이 어마어마한 쓰레기인 것처럼 들렸다.

그렇다고 거짓말 같지도 않고. 뒷담은 어쨌든 애한테 말이 너무 심하지 않나?

그때 유선우의 이마에 핏줄이 섰다.

“어떤 새끼가 그래? 할 말이 있고 못 할 말이 있지. 제정신인가?”

“오빠…….”

이미 화가 가라앉은 한강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굉장히 소중하게 여겨지는 느낌. 욕먹었다고 이만치 화내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심지어는 박아연마저도 관심을 기울여줬다.

“혹시 괴롭힘당하면 말해요. 제가 꼬장 부리는 걸 좋아하지는 않아도 할 때는 해야죠. 나이도 먹을 대로 먹은 것들이 뭐 하는 짓이래.”

“저기요. 양심 없죠? 누가 꼬장 부리는 걸 안 좋아한다고?”

“진짜 뒤질래요?”

“히히. 저 이제 괜찮은데.”

한강은 마냥 좋아서 헤실거리며 식사를 즐겼다. 그녀는 어제 일이 기억도 안 나는지 잘만 먹었다. 다람쥐처럼 볼이 빵빵해질 정도로.

1시간 후가 되면 도로 뱉어버리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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