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1화
완장 찼다
둘은 식사가 끝난 뒤에도 당장 헤어지지는 않았다. 커피도 마시고 코인 노래방도 다녀오고.
11시가 되어서야 최현석은 귀갓길에 올랐다. 핸들을 잡은 그의 표정은 방금과는 달리 굳어 있었다.
‘쪽팔리게 진짜.’
부탁은 시원스럽게 받아들여졌다. 유선우에게 내일이라도 상관없다는 확답을 받았다. 오히려 정말 괜찮겠냐는 걱정의 말까지 들었다.
긴장했던 게 무색할 만큼이나 훌륭한 결과.
그것이 최현석을 미치도록 부끄럽게 만들었다.
‘CHC에 들어왔으면 좋겠냐고.’
자신의 사정 따위는 신경조차 쓰이지 않았다.
단지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친구의 입에서 그딴 말이 나오게 만들었다는 사실이.
최현석은 어릴 적부터 유선우와 자신을 비교하며 살아왔다. 딱히 경쟁심이 강하다거나 성격이 모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유선우는 무엇을 하든 곧잘 해냈으니까.
축구나 게임뿐만 아니라 취미로 배웠던 기타까지. 정말로 뭐든지 흥미만 생기면 잘만 해냈다.
평범한 사람과는 태생부터가 달라 보였다. 그런데도 유선우는 주변인을 깔보는 법이 없었다.
최현석이 허영심에 차 있던 때는 쓴소리도 했었지만, 결코 비하하는 의도는 아니었다.
덕분에 둘은 대등한 관계를 쌓아올 수 있었다. 최현석에겐 하나의 자랑거리나 다름없었다.
S급 각성자가 됐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다르지는 않았다. 잠시간 허탈하기는 했지만 그뿐. 유선우답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니 대등한 위치를 지키려면 일에 매달려야만 했다.
‘어지간한 B급보다 못한 A급 컨셉 헌터.’
최현석을 따라다니는 모욕적인 꼬리표였다. 수치심을 감내하고 일에 매진하려니 친구를 꼬드기란다.
그가 보기에 CHC는 판에 박힌 악덕 기업이었다. 세력 확장을 위해 무리하게 늘린 지부. 그 부담은 소속 헌터들에게 고스란히 가중되고 있다.
계약서에는 독소조항을 넣어 찍소리도 못하게 하고. 능력 없는 낙하산마저 수두룩한 실정이다.
유선우가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었다면 손을 내밀었을 터. 하지만 앞길 창창한 친구를 더러운 곳에 처박을 생각은 없었다.
‘처음부터 엿을 박았어야 했던 건데.’
얄팍한 지위가 소중했는지 몸을 사려버렸다. 그래놓고도 덜 쪽팔리고 싶어서 입을 다물었건만. 결국에는 부탁이니 뭐니 지랄을 하고 말았다.
“하아…….”
최현석은 숨을 크게 토해내고 주차장에 차를 댔다. 집으로 올라가기 전에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담뱃갑은 반쯤 비어 있었다. 그는 한 개비를 꺼내려다가 문득 손을 멈췄다.
‘내가 언제부터 담배를 피웠더라.’
CHC에 들어온 이후라는 것만 어렴풋이 기억날 뿐. 요 몇 년간은 뭘 하고 살았는지도 잘 모르겠다. 학창시절 기억은 잘만 나는데.
툭.
담뱃갑을 쓰레기통에 던지고는 폰을 꺼냈다. 지부장에게 메시지를 보내기 위함이었다.
해는 떨어진 지 오래.
12시가 다 되어간다만 엿 먹으라지.
시각은 모레 8시, 장소는 기흥구의 고급 한식집. 메시지를 전송하고 대충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집으로 걸어가는 도중에 지부장에게 들었던 협박이 떠올랐다.
“새끼, 인생 안 망칠 기회 맞네.”
들었을 때는 개 같았는데 틀린 말은 아니더라.
친구를 팔아먹는 인생을 살지는 않게 됐으니까.
***
인턴 유선우의 직장 생활.
그 두 번째 날이 밝았다.
오늘도 관리자 콜은 없었다.
덕분에 어제와 마찬가지로 숙면을 취했다.
이게 벌써 며칠째인지.
슬슬 빤스런 한 게 아닌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만남이 기약 없이 미뤄졌기 때문일까.
이제는 생각의 방향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딱히 만날 필요가 없어.’
굳이 꼽자면 대리자에 대해서 듣고 싶긴 하다. 하지만 이미 최소한의 정보는 가지고 있는 상태. 대리자니 뭐니 떠들어봐야 실상은 초라한 놈들이다.
자기 차원의 가치가 떨어져 지구로 손을 뻗은 머저리들의 하수인. 이 이상으로 필요한 정보는 기껏해야 대리자의 머릿수나 능력의 한계 정도다.
그리고 감히 예상하건대.
‘우리 빡대가리는 모를 것 같아.’
불 보듯 뻔하다.
물어보면 시선을 피하면서 머쓱머쓱!
고게 도대체 무슨 소린지 모루겠구나!
관리자와 하도 떠들어대서 그렇지, 개인적인 호감을 빼면 단순한 멍청이다. 가치라고는 매력적인 외모와 인터넷뿐.
‘인터넷도 아직 감감무소식이란 말이지. 연결해준다고 한 지가 언젠데.’
사실 당장 연결이 된다고 쳐도 지금은 의미가 없다. 아직은 교육생 신세이니 방송은커녕 던전을 드나들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이대로 못 만나도 실질적 손해는 전혀 없단 얘기지.’
유선우는 한결 편해진 기분으로 숟가락을 들었다. 찌개를 크게 한술 뜨려 하자 어머니가 말했다.
“아들, 일은 할 만해?”
“하루 지났는데요 뭘. 아직까진 일이랄 것도 없어요.”
“직장이나 사람이나 첫인상이 제일 중요한 거지.”
“음… 나름 괜찮던데요. 회사에서 운동까지 시켜주고.”
비엔나를 씹던 유선혜의 낯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회사에서 운동을 시켜줬다?
사람이 말은 똑바로 해야지.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부렁을 내뱉는다.
“당연히 재밌었겠지. 이 팀장님한테 운동도 시키고.”
“무슨 말이야? 선우 뭐 실수했니?”
“아니? 오빠가 워낙 일을 잘해서.”
퍽이나 그렇다는 듯이 과장된 어조. 어머니는 캐물으려다가 아버지에게 선수를 빼앗겼다.
“뭐든 적당히 해라. 적당히.”
“그러려고요. 어제는 첫날이라 조금 긴장했었거든요.”
수긍한 유선우가 짙은 웃음을 지었다.
헌터들의 육성을 때려치운 것은 아니다. 오히려 결심이 단단히 굳어 직장 생활 첫 목표가 되었다.
다만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법. 차근차근 부드럽고 느긋하게 진행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야 할 줄 알았다.
***
유선우는 출근하자마자 이성결에게 이상한 말을 들었다. 무어라 길게 씨부리긴 했는데, 반쯤은 흘려들었다.
“어, 죄송한데 다시 말해주실래요? 다 못 들었는데.”
“우선 교육생 기수장 되시겠습니다. 딱히 의무 같은 건 없고, MT나 수련회 조장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수련회 조장이 얼마나 바쁜데요. 안 해 보셨어요?”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다음은….”
이성결은 말하려다 말고 뚝 끊었다. 하나하나 설명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어차피 대부분은 감투를 씌워주기 위해 만든 일회성 직함. 그러니 솔직하게 밝히기로 했다.
“그냥 명분을 드리는 겁니다.”
“다짜고짜 무슨 소리예요?”
“어제 하루만 해도 별일이 다 있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지부장님과 여러모로 상의해본 결과, 완장 채워드리기로 했습니다. 어차피 깽판 치실 거면 합법적으로 하시라고요.”
“허.”
유선우는 얼척이 없었다.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면서도 대충 알아채기는 했다.
아직 계약도 하지 않았으니 잘해주기는 해야겠고. 누구 초상 치른 것도 아니라 괜찮다 싶었겠지.
상황을 한마디로 정리해 이성결에게 말했다.
“생각하기 귀찮았나 보네요.”
“박아연 팀장 아이디어입니다.”
“그럼 맞네. 이래도 돼요?”
“개인적으로는 유감없는 편입니다. 당장 A급 달아도 이상할 게 없으신데 옆에서 떡고물이라도 받아먹어야 남는 장사 아니겠습니까.”
유선우는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하도 말투가 담담해 거짓 같지는 않았다.
‘이 사람 꽤 맘에 드네.’
어제부터 느꼈다만 성격이 시원시원하다. 자신이 아무리 S급이고 뭐고 해도 한낱 인턴. 이성결의 입장에서는 굽힌다는 게 쉽지만은 않을 텐데.
‘보답은 해줘야지.’
하고 싶은 거 다 하라는데 자제하면 오히려 실례다. 겸손이 미덕을 넘어서 기본이나 다름없는 한국이지만, 유선우는 외국물을 듬뿍 먹고 왔다.
“근데 잡음은 안 나겠어요?”
“다른 헌터들이라면….”
“아니요. 교육생들이요. 시선이 좋지는 않을 건데.”
“아, 아아. 그게 말입니다.”
말을 더듬으며 횡설수설하는 모습. 누구라도 알아챌 수 있는 신호였다.
‘생각 안 했냐…….’
하여간 이런 타입은 머리가 순수해서 문제다. 그래도 혼자서 내린 결정은 아니라니 괜찮을 터.
지부장이나 박아연은 크게 삐걱거리지는 않으리라 여긴 모양이다. 아니면 직접 해결하라고 던져줬을 수도 있고.
‘낙하산 딱지 제대로 붙겠네.’
하지만 중요하지는 않다.
사람은 누르면 반발하지만 때리면 굽힌다.
“됐어요. 빡치면 다 뒤집죠 그냥.”
처음부터 쑥덕거리길래 짜증이 나긴 했다.
내버려 둘 바에야 터뜨려서 교육해주고 말리라.
자제하거나 봐줄 필요는 없다.
이제는 완장을 찼으니까.
***
이성결은 교육생이 모이자 유선우의 관리직 등용을 알렸다. 쓸데없는 직함은 건너뛰고 교육과 연결되는 사항만을 공지했다.
교육생 기수장에 트레이닝 어시스턴트.
낙하산이 거하게 펄럭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교육생들 사이에서는 큰 동요가 일었다.
낙하산 의혹이 있는 동기가 하루아침에 벼슬아치가 되었다니. 신성한 배움터에서 이러한 부정이 있어도 되는 것인가!
그러나 그들은 불만을 마음껏 표출하지 못했다. 반 정도는 유선우의 특출함을 인정하는 마음이었고, 다른 반은 대놓고 항의하지 못하는 한국인의 특성이었다.
이성결 또한 술렁이는 분위기를 눈치챘다. 그럼에도 그는 아무런 사족을 덧붙이지 않고 일과를 지시했다. 유선우에게 신경 쓸 필요 없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걱정이 되긴 해도 언젠간 터질 일이지.’
불화는 어느 집단에나 있기 마련이다. 자신과 같은 위치에서,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은 눈엣가시인 법. 범재들 사이에 S급 각성자가 끼어 있으니 불가피한 일이다.
정작 유선우는 따가운 시선을 깡그리 무시했다. 그저 새로운 제자의 양성에 몰두할 따름. 그 행운의 주인공은 당연하게도 이성결이었다.
두 남자는 어제도 그랬듯이 링에 올랐다. 서로를 마주 본 채 뜨거운 눈빛을 교환했다.
“이번엔 어제처럼 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셔야죠.”
오늘의 유선우는 창을 들지 않았다. 사람 때리는 데는 맨손이 타격감이 좋으니까. 첫 제자를 키울 때도 똑같이 가르쳤다.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유선우는 이성결이 쥔 목창을 가리키며 화두를 던졌다.
“이 교관님. 그건 왜 쓰세요?”
“창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다른 무기도 이것저것 있잖아요.”
이성결은 고민에 잠겼다.
칼질도 주먹질도 할 수 있는데 창을 잡은 이유.
설명하자면 길고도 긴 얘기다.
바질이 활짝 필 때쯤 그 여름. 3년간의 연애를 끝낸…….
빡!
“아악!”
예고 없이 정강이를 얻어맞은 이성결이 비명을 질렀다. 어제부터 느꼈다만 어찌나 잘 때리는지. 한순간의 고통은 더럽게 큰데 후유증이 남지도 않는다.
그야말로 진기명기.
이성결은 이 기술만큼은 꼭 배우고 싶었다.
그나저나 대체 왜 맞은 걸까.
“제가 뭐 잘못했습니까?”
“제, 제가 뭐 자, 잘못했스… 스, 습니까아?”
정박아처럼 말한 유선우가 손을 휘둘렀다. 한 줄기 바람이 지나간 후. 그의 손에는 어느새 제자의 턱수염 한 가닥이 들려 있었다.
“악, 따가!”
“제가 무슨 69 곱하기 74 이런 문제 냈어요? 그거 하나 대답하는 데 뭘 고민까지 하는지 모르겠네.”
“69 곱하기 74는 5106입니다.”
“참 대단하시네.”
“그러는 유선우 씨는 창 왜 쓰십니까?”
이성결은 3초 안에 대답이 안 나오면 창을 휘두를 셈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반항은 행해지지 않았다. 유선우가 잠깐의 지체도 없이 대답했다.
“전 그냥 길어서 잡았죠. 주먹질하긴 무서웠거든요.”
“…헌터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지금도 헌터 아닌데 그때라고 헌터였겠어요?”
당시의 유선우는 헌터는커녕 각성자도 아니었다. 쥐뿔도 없이 맨몸이었으니 당연한 선택이었다.
사실 활을 달라고 했었는데, 깔끔하게 무시하더라. 뭣도 없는 고등학생에게 발언권은 없었다.
“그리고 못 할 말은 또 뭐예요. 자신 없으면 무서워해야지. 싸울 때나 맘껏 용기백배하시고, 아닐 때는 쫄아 있는 게 맞아요. 그래야 절박해지거든.”
“대충은 알겠습니다. 근데 방금 질문이랑은 무슨 상관인지.”
“아니, 무슨 장점이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골랐을 거 아니에요.”
이성결은 사색에 잠겼다. 충분히 고민하게 해줄 요량인지 구타는 날아오지 않았다. 프레젠테이션하듯 길게 뽑아내라면 못할 것도 없겠지만, 답은 간단했다.
“저도 비슷한 이유입니다. 유리할 것 같았습니다.”
단순한 동조는 아니었기에 담긴 감정은 확고했다.
그런데 또 무엇이 신경을 긁었을까. 유선우는 만족하기는커녕 꼭지가 돌은 기색이었다.
“그러면서 왜 그따위로 써먹어요? 지금 잡은 것도 봐. 왜 그렇게 짧게 잡는데요?”
“어….”
지적당한 이성결은 창을 쥔 손을 내려다봤다. 손은 창대의 중간 지점보다도 창끝에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
“어제 보니까 능력은 준수해 보이던데, 문제는 기술이에요. 최신형 컴퓨터에다가 비스타를 깔아놨으니 약하지.”
“애초에 기술이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창 잡은 지 몇 년이나 됐다고.”
“또 처맞을래요? 하여튼 쓸데없는 기교 없이 기본기만 제대로 익히면 지금보단 훨씬 나아지겠죠.”
“혹시 노하우 같은 건… 아아아아악!”
듣다 듣다 유선우가 이성결의 유두를 정확히 꼬집었다. 평소에는 시원시원하더니 왜 가르쳐줘도 지랄일까.
젖꼭지를 빙빙 돌리다가 문득 알아챘다.
이 사람은 시원시원한 게 아니다.
그냥 평소에 생각을 안 할 뿐이지.
“떨어져요, 아, 아! 떨어져! 아!”
비명을 듣다 보니 어릴 적 했던 테런이 떠올랐다.
“떨으어진다아~! 얍얍얍얍얍얍!”
“아흑, 아아악!”
“제 제자가 봤으면 억울해서 쌍욕을 했을걸요. 말실수 한마디 하면 며칠 굶겼거든요.”
그 앞에서 업진살 구워 먹으면 화룡점정.
사람은 굶으면 짐승이 되지만 약한 짐승은 굶으면 사람이 된다. 부탁이라는 걸 할 줄 알게 되니까.
그런데 새로 받은 제자가 한다는 말이 노하우?
기껏 가르쳐 주려니 시작부터 꼼수 부릴 생각을 다 한다. 거저 얻은 능력이 있기 때문인지, 절박함에서부터 차이가 난다.
못마땅함으로 인해 행해지는 체벌. 지켜보는 교육생들은 저마다 복잡한 심경이었다.
나이도 어린 것이 상관의 유두나 꼬집고 있으니 당연한 일. 교육생 중 하나, 이진철은 굉장히 불쾌한 기분이었다.
‘역겨운 낙하산 새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