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자님 뭐하세요-30화 (30/179)

제 30화

최현석

나름대로 고민거리가 많았던 회사 생활 첫날.

유선우는 새삼스러운 감상을 품은 채 퇴근길에 올랐다.

‘나도 이제 직장인이구나.’

사실 벌인 짓이라곤 개뿔도 직장인답지 않기는 했다. 특히나 상사를 팬 일에 대해선 실수했다는 자각이 있다. 한강을 때린 것도 미안한 감정이 남아 있고.

‘그래도 따지고 보면 시킨 일은 확실하게 했어.’

운동하래서 운동했지, 훈련하래서 훈련했지. 공부하라길래 공부마저 했다. 남들보다 조금 더 주도적으로 했을 뿐.

‘이걸 내 욕하면 서운하다 이거지.’

대부분의 세상사는 잘만 포장하면 아름답게 바뀌는 법. 합리화를 마친 유선우가 운전하는 유선혜를 바라봤다.

“선혜야.”

“응?”

“헌터 되게 바쁘지 않나? 이렇게 칼퇴근해도 돼?”

6시 정시 퇴근.

직장인들에게는 꿈만 같은 환경이다.

곰곰이 떠올려 보니 유선혜가 야근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유선혜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야간조랑 교대하거든. 몇 없기는 한데 밤에는 출동 요청도 별로 안 들어와서 괜찮아. 다른 클랜 어떤지는 잘 모르고.”

“햐, 대우 좋다더니만.”

“대신에 던전 들어가면 최소 사흘 내내 일해. 나도 저번 달에 갔어야 했던 건데, 이상하게 말이 없더라. 다른 데서 닫았나?”

유선우는 긴가민가해 머리를 갸우뚱 기울였다. 어쩐지 아는 얘기 같았다. 아마도 귀환 첫날에 다녀온 던전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잘 갔다 왔네.’

동생 일 덜어줬다는 생각에 흐뭇해져 있기를 잠시.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의 진동이 느껴졌다.

폰을 꺼내면서도 발신인은 뻔히 차세정이라 생각했다. 영수증 건 때문에 메시지가 몇 개나 날아왔었으니까.

그런데 막상 보니 의외의 이름이 액정에 떠올라 있었다.

“여보세요.”

- 어라, 받네. 일 벌써 끝났어?

“엉. 6시 칼퇴근.”

- 캬, 복지 봐라. 나도 계약 끝나면 옮길까.

연락을 걸어온 사람은 최현석이었다.

청일에서 일하게 됐다는 말을 해두기야 했는데,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마당에 연락해올 줄이야.

지친 목소리를 들으니 안쓰러운 동시에 실소가 흘렀다. TV에서의 밝은 모습과는 영 매치가 되질 않았다.

“오면 나야 좋지. 거의 아싸 됐거든.”

- 네가? 뭐하다가?

“나보고 낙하산이라 하더라고.”

- 푸흐흐. 웬 낙하산?

아마 지부장이 직접 안내까지 해준 탓이지 않을까. 괜히 푸념하고 있지만 본심은 그저 그러려니 하는 중이다.

오해 덕에 한강과 친해진 감도 있고. 지금보다 오해가 깊어지면 한 번쯤 뒤집어버릴 심산이다.

“근데 무슨 일이야?”

- 밥이나 먹자고. 시간 괜찮아?

“내가 뭐 바쁘다고 빠꾸를 쳐. 넌 안 바빠?”

- 이번 주는 딱히. 지금도 자다 일어난 거야.

“허, 웬일이래. 어딘데?”

- 집. 퇴근했으면 내가 그쪽으로 갈게.

“좀 걸리지 않나? 여기 안 살잖아.”

- 해봤자 30분 정돈데 뭐. 30분 안에 굶어 죽겠다 싶으면 말고.

대화를 주고받자 유선우는 어딘가 묘한 낌새를 눈치챘다. 최현석이 다짜고짜 전화해서 밥이나 먹자고 할 만큼 한가한 사람은 아니니까.

하지만 구태여 캐묻지는 않았다. 용건이 있으면 만나서라도 하겠지. 서로 사정을 숨기고 끙끙거리는 얕은 관계를 쌓아오진 않았다.

그러니 작게 웃음 짓고 말할 뿐.

“나 돈 없다, 네가 사. 나는 초밥.”

- 기대도 안 했어. 맛있는 집 알아?

“어. 지갑만 가져와.”

- 그럼 지금 나간다?

“집 말고 성소고 앞으로.”

- 그래, 이따 보자.

유선우는 똑같이 그래, 하고 전화를 끊었다. 폰을 내려놓자 줄곧 곁눈질하던 유선혜가 물었다.

“누구야?”

“현석이.”

“아, 연예인 오빠. 만나재?”

연예인 오빠라니. 미묘한 어감에 유선우가 속으로 되뇌어봤다. 친구를 그렇게 부르니 남 얘기처럼 어색했다.

“응. 밥이나 먹자네. 성소고 근처에서 내려줘.”

“다음에는 나도 낄래. 되게 바쁘다고 못 본 지 좀 됐거든.”

“물어보고. 자기 말로는 이번 주는 별로 안 바쁘다는데?”

“그럼 그런 거겠지. 만나면 나도 얻어먹겠다고 말해줘.”

친오빠에게는 스마트폰을 사준 동생이 오빠 친구에게 밥을 얻어먹겠단다. 유선우는 어째 뭉클해지고 미안해져서 떵떵거리며 외쳤다.

“내가 월급만 받으면 다 사줄게, 다!”

“뭐래. 교육생보다는 내가 더 많이 받거든?”

“내 월급 다 털면 되지. 아, 컴퓨터는 사고 싶은데.”

“됐네요. 아빠 시계나 사드려.”

“바깥에도 안 나가시는데 왜?”

“장 보러 가시잖아. 쓰레기도 버리시고.”

“시계가 필요한가…?”

한참이나 잡담을 떠들던 유선우가 방긋 웃었다.

오늘은 입이 호강하는 날인 듯하다.

***

유선우는 성소고등학교의 정문에서 하품을 뱉고 있었다. 기다리는 것을 싫어하는 편은 아니지만 심신이 노곤했다.

눈꺼풀이 무거워질 즈음, 그의 앞에 벤츠 한 대가 멈춰 섰다.

차는 두어 번 본지라 익숙해지기는 했다. 반면 차에서 내리는 남자의 얼굴만큼은 적응이 되질 않았다.

졸음이 확 달아난 유선우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얘는 왜 이렇게 잘생겼을까?’

5년 동안 무슨 변화가 있었던 걸까.

능력이 잘생겨지는 능력인가?

시답잖은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최현석이 다가왔다. 최현석은 유선우를 훑어보더니 감탄한 어조로 말했다.

“오, 차림 말끔하네.”

“회사 갔다 왔는데 당연하지.”

“첫 출근 소감은?”

“일단 입 말고 발 움직여. 배고파 뒈질 것 같으니까.”

툴툴대자 최현석이 피식거리면서 “타”하고 대꾸했다.

초밥집은 성소고등학교에서 5분이 조금 안 걸리는 장소에 있었다. 차를 적당한 곳에 주차하고는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굉장히 협소했다. 카운터 앞의 둥그런 테이블과 4인 테이블 3개가 전부인 식당.

종업원도 없이 바쁘게 손을 놀리는 사내 한 명이 있을 뿐이다. 숨겨진 맛집이라는 분위기를 풀풀 풍기는 장소였다.

유선우는 카운터로 걸어가 사장에게 꾸벅 머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오, 또 오셨네요.”

“친구가 산대서요. 저거 혹시 예약석 아니죠?”

“비어 있는 거 맞습니다. 메뉴 정하시면 불러주세요. 음식 나오는 데는 좀 걸립니다.”

자리는 4인용 테이블 하나가 딱 남아 있었다. 착석한 유선우는 연갈색 종이를 집어 최현석에게 건네줬다.

메뉴판이라고 부르기에도 뭣한 빳빳한 종이. 적혀있는 메뉴라고는 모듬 초밥과 사시미, 알탕과 매운탕에 주류가 전부였다.

“딱 아는 사람만 아는 식당이란 느낌이네.”

최현석은 정겨운 분위기에 옅게 미소지었다. 화려한 레스토랑에도 지겹게 다녀봤으나 항상 어색했다. 몸에 맞지 않은 옷에 거추장스러운 치장까지 두른 것처럼.

“여기는 어떻게 찾았어?”

“차세정이 데려와 줬지. 꿀맛이더라고.”

“어, 누구?”

“뭐야. 말 안 했었나?”

정말로 까먹고 있던 유선우가 반문했다. 생각해보면 연락할 때마다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가기 일쑤였다.

부재중 전화를 확인한 최현석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으면 잡담이나 실컷 해댔었지.

“저번에 롤 하다가 만났어.”

“롤에서 만났다고?”

“무슨 개소리야?”

유선우는 거하게 터져버린 백수 시절의 일을 읊었다.

대리자의 자세한 정보는 생략했다. 식사 전에 꺼내기에는 무거운 화제였으니까. 고민도 있어 보이는데 머리를 더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무슨 귀신이라도 씌었나. 어떻게 그래?”

최현석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흘렸다. 실종됐었던 사람이 테러에 휘말릴 확률이 얼마나 될까.

한편으론 사지 멀쩡히 살아있으니 다행이다 싶었다. 걱정은 이미 가족에게 들을 만큼 들었을 터. 호들갑을 떨어봐야 불편해질 뿐이다.

“그건 그렇다 치고, 너희도 진짜 징하다.”

“나도 신기하긴 해.”

“졸업하고는 한 번도 못 봤는데. 어떻게 PC방에서 딱 만나냐.”

“그래? 다음에 부를까?”

최현석이 거북함을 잔뜩 드러내며 도리질했다.

“아니. 난 걔 좀 무섭더라고.”

“옛날부터 이상하게 불편해하더라. 걔한테 맞았어?”

“맞기는 무슨. 그냥 성격 차이야.”

그는 목이 타 물컵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학창시절에 얼마나 차세정의 눈치를 봤었는지.

둘이 같이 있을 때 끼어들려 하면 죽일 듯이 노려보고. 무슨 기념일만 되면 밤새도록 상담이랍시고 왈왈 으르릉 낑낑.

정작 유선우 앞에서는 도도하게 굴더라. 차세정과 알고 지낸 후로 최현석은 여자를 믿을 수 없게 됐다.

“일은 어때? 아직도 TV에서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다.”

최현석이 불편해하자 유선우는 적당히 화제를 돌렸다. 이렇다 할 화제가 없으면 떠들지 못하는 사이도 아니다. 아무 말이나 꺼내도 죽이 잘 맞는 친구가 있기 마련이다.

“일이야 맨날 똑같지. 곁가지가 문제인 거고.”

“응?”

“인터넷에 기사 뜬 게 있거든? 기다려봐. 어이없어서 북마크 해뒀어.”

최현석이 스마트폰을 조작하더니 화면을 보여줬다. 유명인의 일상을 포착한 흔하디흔한 찌라시. 스마트폰을 받아든 유선우가 기사 제목을 그대로 읽었다.

“CHC 최현석, 그의 현란한 혀놀림?”

“제목 보고 놀라고 사진 보고는 빡쳤지.”

“사진… 이게 뭐야.”

스크롤을 내려보자 둥글고 긴 것을 먹는 최현석의 사진이 있었다.

어디서 많이 봤다 했더니 스크류바였다. 유명인은 아이스크림만 먹어도 구설수에 오르는 모양이다.

“스크류바 빠는데 현란한 혀놀림 이 지랄 찍 싸놨네. 머리에 무슨 똥이 차 있으면 이런 생각이 다 나와? 일상생활 가능한가?”

“그거 가지고 전략팀한테 한 소리 들었잖냐.”

“집 나오면서 아이스크림도 빨지 말라고?”

“아니, 콘으로 먹으래.”

“천재네. 괜히 전략팀이 아니구나.”

이후로도 시시콜콜한 얘기들이 오갔다.

유선우가 한강의 얘기를 꺼내고.

최현석은 가끔 짬 내서 보는 소설을 홍보하고.

주제가 탱탱볼처럼 튀는데도 웃음이 가득했다.

음식은 모듬 초밥과 사시미, 알탕을 하나씩 주문했다. 식사 도중엔 대화가 많이 오가진 않았다.

맛집에서나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혀 대신에 턱을 움직였고, 쉴 새도 없이 젓가락을 놀렸다.

남은 음식이 거의 사라지고 나서야 분위기가 달라졌다. 시종일관 밝던 최현석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오래도 걸렸다.’

유선우는 쓴웃음을 삼키며 조용히 기다렸다. 최현석은 한참을 우물거리다가 입술을 벌렸다.

“부탁 하나만 해도 되냐.”

“하는 건 네 맘이지.”

들어줄지 어떨지는 사안에 따라서. 찰떡같이 알아들은 최현석은 고개를 주억였다.

“이런 말 하는 거 진짜 죽을 만큼 싫은데.”

“밑밥 까는 거 별로 안 좋아해.”

“그래, 그랬지.”

최현석이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이 작은 식당에서 수도 없이 웃었다. 하지만 지금만큼 어색하고 불편한 웃음은 처음이었다.

“CHC 얘기야. 우리 클랜에서 너한테 목을 매더라고. 저번에 찍힌 사진이 페북에 올라갔나 봐. 그거 보고 가능성 있다고 생각했겠지.”

“사진?”

“처음에… 이렇게 말하니까 이상하네. 하여튼 저번에 만났을 때 기억 안 나?”

“아, 아아. 요즘 애들?”

최현석이 머리를 까딱여 수긍했다.

여기까지 들으면 설명으로는 충분한 수준이다. 유선우의 머릿속에서 곧바로 전후 사정이 그려졌다.

다만 용건은 별개.

무슨 부탁이 나올지는 들어야 안다.

“다른 클랜들은 상대가 상대이다 보니 그러려니 하고 있는데, 우리 쪽은 청일이랑 마찰을 빚어도 감수하겠다는 스탠스야. 그걸 죄다 나한테 떠넘긴 거고. 대체 왜 지랄인지.”

“잘 꼬드겨서 영입해봐라?”

“그래. 여태까지 무시했더니 슬슬 열 받았나 보더라고. 나보고 너희 집 주소 안 까면 지부장이 직접 청일까지 찾아가겠단다.”

“재밌는 사람이네.”

유선우는 싱겁게 미소지었다. 장작을 태울 땐 이런 가능성을 떠올리지 못했는데. 애꿎은 곳에 불이 옮겨붙었다.

뜻밖이긴 했지만 경솔한 짓을 저질렀다며 후회하진 않았다. 세상만사를 하나하나 다 따져가며 행동할 머리는 없으니까.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런 번거로운 삶은 질색이다.

“그래서?”

“이번 주에 시간 좀 내줬으면 좋겠다.”

“네 부탁이 정확히 뭔데. 내가 청일 걷어차고 CHC에 들어가는 거?”

최현석은 그 담담한 말투에서 속내를 읽어내지 못했다.

진심으로 아무렇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동시에 실망한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는 방금까지와는 달리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했다. 이따위 대화가 1초라도 길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으니까.

“아니. 미쳤어?”

“엉?”

“그냥 만나서 딱 한 마디만 해줘.”

최현석이 씩 웃고 말했다.

“X 까고 뒈지시라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