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9화
최현석
이성결은 박민상의 탄식에 마음 깊이 동의했다.
“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나 싶습니다. 가르치는 것도 저보다 나아 보이고요.”
“이거 국가적 인력 낭비 아닌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살다 보니 이런 일도 다 생기는구만…….”
박민상은 끙끙거리며 애꿎은 책상만 두드렸다. 다행히 청일에서 실수한 점은 없다. 유선우가 기대보다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기대를 너무 충족시켜서 문제지. S급 각성자를 과소평가한 감이 있다.
“나쁘지는 않지, 나쁘지는. 그래서 이 팀장, 자넨 뭐 어쩌겠다고?”
“예?”
“꼬장 안 부리고 오늘처럼 있을 거냐고.”
“부려야 합니까? 개인적으로는 기회로 여기고 있습니다만.”
“가만히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않나. 위계질서라는 게 있는데.”
고민하던 박민상은 박아연에게 화살을 돌렸다. 이 자리에서 유선우를 가장 잘 아는 건 박아연이었다.
“박 팀장, 적당히 누를 만한 방법은 있나?”
“누를 방법 말이죠.”
“그래. 반발하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토스를 받은 박아연이 고심에 잠겼다. 그녀 역시 지켜본지라 상황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알려지면 제재하라는 목소리가 나오긴 하겠지.’
신입이 까마득한 선배를 두드려 패고 지적질을 해댔다. 신입도 신입 나름이지 유선우는 아직 정식 헌터도 아니다. 혹여나 새어나간다면 좋은 소리는 절대로 나오지 않으리라.
골머리를 싸매던 도중 박아연은 문득 의문을 가졌다.
“굳이 눌러야 하나요?”
“응?”
“선우 씨는 이대로 두는 게 맞아요. 저희가 뭐라 해봤자 어차피 제멋대로 할 텐데.”
“아니, 깽판 치게 내버려 두자고?”
“깽판도 깽판 나름이죠. 듣자 하니 이 팀장님도 별 유감없어 보이는데. 그리고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선우 씨는 나쁜 놈은 아니에요. 미친놈은 맞지만.”
본인이 들으면 섭섭할 소리였으나 그녀는 진심이었다. 반면에 박민상은 꺼림칙한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협회에서 알면 귀찮아져.”
“걔들이 어떻게 알아요? 감시라도 하나. 만약 걸리면 역으로 지랄해주죠, 뭐. 지부 물 흐린 교육생, 클랜에다 스파이 심은 협회. 터지면 어디가 더 아프겠어요?”
“……그런가?”
박민상은 순간 귀가 솔깃해졌다.
어쩐지 맞는 말처럼 들리기도 해서.
그는 반쯤 귀가 펄럭인 시점에서 다른 문제를 꺼냈다.
“사내 잡음은 어쩌고? 아무리 S급이라도 시끄러울 텐데.”
“에이, 저희 지부에서요? 물 좀 흐린다고 잡음이 나온다고요?”
“아.”
지부장으로서는 불편한 발언이지만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강창민 그놈이 있으니.’
강창민. 청일 용인 지부의 21살짜리 헌터다. 자유 헌터 신분으로 시작해 1년도 안 되어 A급을 찍은 천재. 그런 인재가 청일에 들어온다 했을 때는 얼마나 놀랐었는지.
막상 들어오니 첫 출근 이후로 일주일을 통째로 결근했다. A급을 찍자마자 인생 목표가 사라진 것처럼 제멋대로 산다.
처음에는 이런저런 말이 많았지만 다들 적응은 하게 되더라. 한마디로 말해서 이미 물이 잔뜩 흐려졌다는 얘기다.
박민상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흐름이 좋기야 해도 유비무환이라. 어디서 발을 헛디딜지 모르니 대비는 해둘 필요가 있다.
얄팍하게나마 자리를 만들어주면 되겠지.
“이 팀장. 보조자는 구했나?”
“이렇다 할 사람을 못 찾아서 혼자 진행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러지 말고, 유선우 씨 시켜.”
이성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교육생을 말입니까?”
“찾아보면 이상한 일도 아니야. 짬 좀 차면 시키는 편이긴 한데, 있는 감투는 다 씌워줘야지. 박 팀장, 생각나는 거 있나?”
“음, 교육생 기수장도 있겠네요.”
“옳지. 생각나는 거 아무거나 다 던져줘. 달리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주던가. 조무사 같은 거 있잖아. 눈 가리고 아웅이라도 티끌만 한 도움은 될 거 아냐.”
이성결은 깊은 걱정을 담아 물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말이 감투지 유선우의 모든 행동을 용인해주겠단 얘기다. 어째 되는대로 지껄이는 것 같다는 감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염려와는 달리 박민상의 정신은 또렷했다.
“원래부터 어지간한 건 다 들어줄 생각이었네. 문제는 강창민 고 새낀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조용히 있지는 않겠지?”
“오늘은 안 나왔습니까? 사실 바로 들이닥칠 줄 알았습니다.”
“고 새끼 회사 안 나오는 게 하루 이틀, 아니, 원투데이인가?”
“왜 굳이 그렇게 말씀하세요?”
“젊어 보이려면 말투부터 신경 써야 한다고 들어서…….”
놀고먹는 강창민이 관심을 보이는 것은 싸움뿐이다. 이성결보다 더한 쌈닭이 S급 각성자에게 관심이 없을 리가.
평화롭게 지나갈 방안을 고민하는 가운데.
이성결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뭐? 왜?”
“제가 강창민 씨한테 많이 맞아보지 않았습니까.”
“그걸 자랑이라고 지금…. 아니, 계속 말해봐.”
“근데 유선우 씨한테 맞는 게 더 아프더랍니다. 솔직히 울 뻔했습니다.”
“이건 누가 더 센가 하는 문제가 아니야. 어느 쪽이 이기든 간에 귀찮아지겠지.”
안 봐도 각이 나온다.
강창민이 이기면 떠벌리고 다닐 테고.
만약 진다면 시도 때도 없이 들이댈 터.
그러니 박민상은 간절히 바랄 수밖에 없었다.
‘그냥 이대로 회사 나오지 마라…….’
***
노을마저 지고 해가 완전히 떨어진 시각.
최현석은 비몽사몽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눈을 떴음에도 한동안 침대에서 일어나질 못했다. 밤샘 촬영의 피로가 물먹은 옷처럼 온몸을 무겁게 만들었다.
“하아….”
생활 리듬이 매일같이 바뀌다 보니 하루하루가 고단하다. 여태까진 몸만 피곤했었다만 요즘은 정신까지 만신창이다.
누운 상태로 팔만 뻗어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부재중 전화 2건. 확인하면 전화하라는 문자 1통. CHC의 인천 지부장에게서 온 연락이었다.
‘또 지랄하려나.’
한숨을 푹푹 내쉬며 지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금세 연결되었다.
- 이제는 전화도 씹는구만.
“새벽 촬영 때문에 자고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 죄송이고 개뿔이고. 어떻게 됐어?
“촬영이라면 순조롭게….”
- 야, 내가 지금 그딴 게 궁금해서 세 시간을 기다린 줄 알아?
그딴 거. 시킬 땐 그토록 중요하다고 지랄을 하더니 말본새하고는. 최현석은 욕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입은 뻔한 말만 뱉었다.
“죄송합니다.”
- 아직도 아무런 성과가 없다?
“…죄송합니다.”
- 이게 몇 번째야? 죄송하면 결과를 내라고, 결과를! 친구라며!?
안 그래도 피곤한데 일어나자마자 듣는 고함이란. 참다못한 최현석이 콧김을 내뿜었다.
“저 이번 일만큼은 정말 못 하겠습니다.”
- 아니, 세상에 못 할 일은 별로 없어. 그냥 네가 하기 싫은 거겠지.
“예, 하기 싫어요. 더러워서 말도 꺼내기 싫습니다.”
잠이 덜 깨서일까. 평소였으면 상상도 못 할 말이 술술 튀어나왔다. 알아먹었으면 제발 닥쳤으면 좋겠는데.
그러나 CHC는, 또 지부장은 최현석의 생각보다도 몸이 달아올라 있었다.
- 네가 못 하겠으면 내가 대신해도 돼. 네 친구 놈, 어디 살아?
“지부장님.”
- 왜, 이것도 말하기 싫어? 조금 위험하긴 해도 따라붙으면 접촉은 간단해. 최소한 어디 지부로 갔는지는 아니까. 지금은 너한테 기회를 주는 거고.
“무슨 기회요? 관계 X 같이 만들 기회?”
- 네 인생 안 망칠 기회. 못할 것 같아?
최현석은 하마터면 휴대폰을 벽에다 던질 뻔했다. 대표에게 한 소리 들었는지 오늘따라 집요하다.
아마 단순한 허세는 아닐 터. 괜히 청일에서 쥐새끼처럼 숨어있다가는 일이 복잡해질 우려가 다분하다.
‘개 같은 새끼.’
최현석은 CHC에서 절대로 낮은 위치가 아니다. 그런데도 이토록 욕을 얻어먹는 이유는 간단하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S급 각성자.
소식을 듣자마자 클랜 대표들의 발등에는 불이 떨어졌다. 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유선우의 영입을 원했다. 하필이면 청일이 버티고 있어 뒷공작은 부릴 수 없었지만.
최현석이 속한 CHC도 마찬가지로 유선우를 주목했다. 그뿐이었으면 다행이었겠지만, 문제는 저번 달에 길거리에서 찍힌 사진.
어디 생기발랄한 학생들 아니랄까 봐 SNS에 업로드한 것이다.
화제성 짙은 게시물이니만큼 확산은 빨랐다. CHC 전략팀의 그물망에 잡히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헌터 협회로부터 받은 자료와 대조해보니 어디서 본 얼굴. 아니나 다를까 최현석과 절친한 사이란다.
관계가 각별하다면 비벼볼 만하겠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은 필연이었다.
이후로 CHC에선 최현석에게 유선우의 영입 건을 일임했다. 유의미한 성과를 낸다면 승진에도 도움이 될 거라고 당근을 살살 흔들면서.
지시를 들은 순간, 최현석은 대표를 때려눕히려다가 가까스로 참아냈다.
‘차라리 때렸어야 했는데.’
겉으로나마 받아들인 최현석은 지시를 무시해왔다. 그가 봤을 때 청일은 CHC보다 훨씬 괜찮은 클랜이었으니까.
다만 친구 된 도리를 지키는 데는 대가가 필요했다. 여태껏 어떻게든 미뤄왔지만 이젠 한계에 이르렀다.
‘어떻게 해야 하나.’
많은 생각이 떠오르고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지끈대는 두통을 참아내던 최현석은 문득 회의감이 들었다.
‘내가 왜 이러고 있는 거지?’
매일매일 부당한 욕이나 얻어먹질 않나. 일어나자마자 인생을 망쳐주겠단 협박까지 받았다. 개만도 못한 취급은 이젠 이골이 나버렸다.
“하하.”
- 웃겨? 상황 파악이 아직도 안 되나?
“아니요. 말씀드릴게요.”
- 하. 진작 그럴 것이지. 네가 클랜에 빚진 게 얼마나 되는지는 알아?
“예. 당연하죠.”
최현석은 실실 웃으면서 대화를 이어나갔다. 유선우의 집 주소를 말하지는 않았고, 직접 부르겠다며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저자세를 취하니 만족이라도 한 걸까. 폰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그나마 온화해졌다.
- 이번 일만 잘되면 너나 나나 제대로 날개 다는 거야. 알지?
“그야 알죠. 실망하진 않으실 겁니다.”
- 그래. 내가 널 아껴서 이러는 거 아니겠냐. 생각해봐. 관심 없었으면 매번 이렇게 전화 주고 하겠냐고.
“저도 섭섭하게 생각 안 합니다.”
- 그 뭐야, 방송 일도 잘하고 있어. 네가 CHC 얼굴이나 마찬가진데.
“하하. 제가 뭐라고 얼굴까지 됩니까.”
영혼 없고 역겨운 덕담을 주고받기를 한참. 드디어 푹 쉬라는 말이 최현석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예.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회사에서 뵙겠습니다.”
최현석은 공손한 인사로 통화를 끝맺었다. 휴대폰을 부서지라 움켜쥐었다가 침대에 툭 던져놓았다.
“X이나 까잡수라지.”
하여간 쓰레기 같은 새끼.
1분 전에 한 말도 기억 못 하나?
얼마나 빡이 쳤으면 잠도 벌써 다 달아났다.
최현석은 터덜터덜 화장실로 걸어가 찬물로 세안했다. 머릿속에 가득 차 있던 먹구름이 흩어지는 감각. 한결 맑아진 정신으로 방에 돌아가 휴대폰을 도로 집었다.
연락처는 수많은 사람의 번호로 가득했다.
얄팍한 인연들이다. 서로 있으나 마나 한 관계.
그중에서 몇 없는 절친의 이름을 검색해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연결되자 조금 의아한 기색인 음성이 들려왔다. 밤에 연락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듯했다.
최현석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싱겁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