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7화
인턴 유선우
식사 후 박아연의 카드로 커피까지 사 마시고.
점심시간이 끝나자 교육생들은 지정받은 장소로 집합했다.
빠짐없이 모인 뒤에 이성결이 느긋하게 걸어왔다. 온몸을 얻어맞았음에도 그의 상태는 멀쩡했다.
힐러의 신세를 진 게 아니고, 애초부터 다치기는커녕 멍도 들지 않았다. 본인의 내구력이 뛰어날뿐더러 유선우가 잘 때리기도 했기 때문이다.
“점심들 잘 드셨습니까. 잘 드셨겠죠. 주방장님 연봉이 저보다도 훨씬 높으시니 말입니다.”
“맛있더라고요.”
유선우가 칼같이 대답하자 이성결이 몸을 움찔거렸다. 이성결은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태연함을 가장했다.
‘나는 교관이다. 할 일은 해야지.’
오전엔 추태를 보였으니 이젠 관록을 보여줘야 할 때. 때마침 지금부터는 마나 운용 훈련에 들어간다.
아무리 S급 각성자라도 아직 마나 사용은 능숙하지 못할 터. 서투름을 비웃는 것이 아니라 교육자의 책무를 다할 생각이다.
‘배울 건 배우고, 알려줄 건 알려주고. 이상적인 관계야.’
이성결이 목을 가다듬고 스케줄을 알렸다.
“지금부터는 본격적으로 능력훈련에 들어갑니다만, 그 전에 하나 약속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오전 일과 시간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실 겁니다.”
“푸흡. 아, 죄송합니다.”
근엄한 척하는 말투에 박아연이 웃음을 터뜨렸다. 흐름이 끊기자 이성결의 낯이 떨떠름해졌다.
“…아연아. 안 가냐?”
“저 요즘 안 바쁜 거 아시잖아요. 노는 김에 보조해드릴게요. 한 명씩 봐주기 불편하실 텐데.”
실제로 박아연은 평온한 직장 생활을 구가하고 있었다. 대표 지시로 유선우의 지원을 전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비서처럼 붙어 다니진 않지만 언제든지 달려갈 수 있도록 대기하고 있는 것. 출동을 안 나가니 평소엔 한가하다는 얘기다.
무엇보다 박아연은 유선우의 성장에 손을 보태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도록.
물론 질투가 아예 없다면 거짓말이리라. 하지만 헌터 사회에서 질투를 시작하면 끝도 없다.
“그래. 제발 입만 조심하고. 알지?”
“당연하죠. 하면 되는 여자예요.”
“그럼 평소에도 좀 조심해라….”
이성결도 딱히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신병 굴리는 일이 마냥 편하기만 하진 않으니까.
불평은 불평대로 하지, 조금 칭찬해주면 으스대지. 특히 능력훈련 때는 한시라도 눈을 떼서는 안 된다.
그러니 박아연만 한 숙련자가 보조를 자청해주면 고마울 따름이다.
“훈련은 제3 모의전투실에서 실시됩니다. 가면 까만 봉투 널려 있을 건데, 바로 꺼낼 수 있도록 하나씩 가지고 계시면 됩니다. 그럼 이동하겠습니다.”
간략하게 브리핑한 이성결이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교육생 중 일부는 이성결의 등을 못마땅하게 바라봤다. 오전의 사건으로 인해 교관에 대한 기대감이 깨져버린 것이다.
B급 헌터가 의외로 약한 것일지도. 혹은 유선우의 뒷배에 쫄아서 그냥 맞아준 것일지도.
아직은 햇병아리인 그들에겐 유선우의 실력이 잘 와 닿지 않았다. 마음속에서 낙하산 의혹이 더욱 불거졌을 뿐.
정작 유선우는 하품하면서 박아연과 떠들고 있었지만 말이다.
“선우 씨. 아까는 좀 어이없었지만 뭐, 기대하고 있어요.”
“너무 기대하진 마시고요. 저도 마나는 잘 몰라서.”
“잘 아는 게 이상한 거죠. 각성한 지 얼마나 됐다고.”
“그러게요. 저부터 쓸 만해져야 제자도 키우고 꿀도 빠는 건데.”
“또또 이상한 소리 하시네. 하여튼 힘내요. 졸지도 말고요.”
모의전투실에 입장하자 유선우는 기시감을 느꼈다. 헌터 협회에서 마지막 심사를 치렀던 심사장과 구조가 비슷했다. 넓이도 상당해 휘파람을 불고 있자니, 이성결이 말했다.
“여러분의 심사 결과는 점심에 확인해봤습니다. 원래는 아무리 늦어도 아침까지는 받았어야 했던 건데, 이번은 경우가 조금 다르더군요. 협회가 하도 복작거려서 말입니다.”
이성결은 잠시간 말을 멈추고 기억을 되짚었다. 치유나 버프 같은 특수능력을 보유한 교육생은 없었다.
“확인 결과 원거리 계열 다섯, 근거리 계열 셋이더군요. 가끔 몬스터를 끌고 와서 실전 연습을 하기도 합니다만, 기본적으로는 오전 일과와 비슷합니다. 그냥 죽도록 능력 쓰세요.”
“그게 다입니까?”
설명은 한결같이 대책 없었다. 교육생들 사이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러자 박아연이 끼어들어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현 단계에서 여러분이 신경 쓰실 건 하나예요. 능력을 쓰는 데 익숙해지는 것. 구체적으로 따지자면 마나의 효율적인 사용, 위력의 조절, 능력의 연속적인 발현과 마나 총량 정도겠죠.”
“그렇습니다. 죽도록 쓰다 보면 그게 다 됩니다. 애초에 몇 년 되지도 않은 분야에 체계적인 교육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과정에서 저희가 해드릴 수 있는 건 몇 가지 어드바이스 뿐이죠. 어디 클랜을 가나 똑같을 겁니다.”
“막히는 점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질문하세요. 신체 강화 관련은 이 팀장님께, 외부 발현 관련은 제게 물어보시면 될 거예요. 설명은 충분했나요?”
그녀는 이성결을 도와주면서도 내심 어이가 없었다. 설마 지금까지 이딴 식으로 진행했나 싶어서. 꿀 빨겠다는 심정은 이해하지만 일은 똑바로 해야 하지 않나.
‘보조자 요청은 왜 안 넣었대.’
한숨을 내쉰 박아연은 세세한 지시를 내렸다.
너는 저쪽을 써라, 뭐 누르면 과녁이 나온다.
교육생들은 엉거주춤 각 자리에 섰다.
한강은 염력 능력자를 위해 준비된 온갖 잡동사니들 사이.
유선우는 다트판 같은 과녁 앞이었다.
‘마나랑 마력이랑 상충하는 부분은 있겠지.’
유선우는 우선 아무거나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주위를 전부 얼릴 수는 없는 노릇. 과녁을 부수는 행위도 그다지 의미가 없다.
한참을 끙끙대다가 문득 한 가지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조각상이나 만들어볼까?’
지속적 능력 발현으로 마나의 운용이 세밀하고 정교해질 터. 효율이 뛰어남은 물론이고 보람도 있을 듯하다.
생각이 끝났다면 곧바로 실천.
모델 선정도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관리자나 만들자.’
무릎 꿇고 주저앉아서 울어대는 모습을 상상했다. 조각을 보면 잠적한 관리자가 연락해오지 않을까.
‘이 조각은 내가 집도한다.’
우선 준비물부터. 얼음을 만들면 될 뿐이지만 표면이 매끈매끈해야 한다.
평소에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먹으면서 감은 잡아뒀다.
마나를 퍼부어 큼지막한 얼음덩이를 꺼내고. 삐죽하게 튀어나온 부분은 손으로 쓸어 정리해주고. 서투른 손길로 무릎부터 빚기 시작했다.
‘각성한 이후로 알아낸 게 좀 있지.’
핵심은, 능력 발현은 여러 단계를 거친다는 것. 마나는 체외로 나가자마자 특정 능력의 형태를 띠게 된다.
유선우의 경우에는 곧바로 얼음으로 변환. 그리고 얼음에 마나 공급을 끊는 시점에 형태가 고정된다.
즉 마나의 공급만 유지해주면 조각칼이 필요 없다는 뜻. 점토라도 빚듯이 자유자재로 변형시킬 수 있다.
‘크기는 등신대가 한계겠다.’
날고 기는 유선우라도 아직 마나 총량은 A급 헌터 수준. 처음부터 대형 조각상을 만드는 건 불가능했다.
“후우, 후우.”
유선우는 한참이나 얼음을 만지작거렸다. 그의 주위에는 한기가 자욱하게 깔려 있었다. 실내의 온도가 몇 도씩이나 떨어졌는데도 그의 이마엔 땀방울이 가득했다.
머지않아 유선우의 집중력이 극한에 이르렀다.
얼마나 몰두했는지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상태. 그는 얼음과 한 몸이 되어 빙신합일의 경지에 도달했다.
그야말로 무아지경.
손놀림이 점점 빨라지며 잔상마저 그려진다.
그쯤 되니 주변의 시선이 집중되는 것도 당연했다. 그새 마나가 거덜 나 죽을 맛이던 교육생들은 복잡한 마음이었다.
겉으로 보니 굉장히 쉬워 보여서.
“원래 조각하던 사람인가 봐.”
“아니, 훈련 시간에 저래도 돼?”
“교관님도 터치 안 하시는데 뭐 어째.”
한편 이성결은 멍한 눈으로 유선우를 주시하고 있었다. 어딘가 신성하고 경건하기까지 한 광경. 그는 허탈한 신음만 흘리다가 박아연에게 물었다.
“저게 가능해?”
“글쎄요. 저런 식으로 능력을 쓰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서.”
“터치 정교한 거 보여? 손이 완전 조각칼이야. 마나를 어떻게 저렇게 쓰지?”
“…그리고 하필이면 왜 저렇게 쓸까요?”
이성결은 대꾸하지 않고 조각 과정을 지켜봤다. 그는 마나를 체내에서 활용하는 신체 강화 계열이지만, 마나의 외부 발현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알고 있었다.
겉으로만 보는 이들은 이를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조금만 파고들면 몸소 깨닫게 된다. 라면 물보다도 정교하게 조절해야 한다는 것을.
‘내가 비벼볼 사람이 아니었구나.’
이성결이 감탄하기를 한참.
어느덧 유선우는 마무리 작업에 착수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머리카락을 씌워주고.
조각상을 스윽 훑어내리며 드레스를 입혀준다.
눈물도 몇 방울 찍어주면 이것으로 완성.
“캬!”
자기 작품이라지만 이렇게 훌륭할 수가 없다.
유선우는 인간적으로 성장한 성취감마저 느꼈다.
때마침 마나도 고갈되어 속이 더부룩했으나 큰 문제는….
빠악!
난데없이 날아온 장난감이 조각상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유선우가 당황함과 동시에 마나 조절이 흐트러졌다.
부웅!
곧이어 큼지막한 레고 블록이 허공을 날았다. 유선우는 조각상을 보호하려 벼락같이 손을 휘둘렀다.
하지만 마나와 정신의 소모가 상당했던 탓일까. 아마 테러 때의 후유증이 남아 있기도 했을 터다.
그의 몸이 크게 비틀거리더니 손이 엄한 곳을 후려쳤다.
콰직!
“아.”
관리자가 엎어지더니 산산이 깨져버렸다. 유선우는 파편이 되어버린 그녀를 허망하게 바라봤다.
“아, 아아앗….”
온갖 부의 감정이 칵테일처럼 뒤섞인다. 이만큼 절망한 게 얼마 만인지. 흡혈여왕에게 감금되었던 때와도 비슷한 기분.
이내 절망은 한순간에 분노로 바뀌었다.
“어떤 샊…!”
악귀처럼 낯을 구긴 유선우가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눈치는 있는지 죄다 시선을 회피한다. 여기저기서 헛기침이 터져 나오는 와중.
“우웨엑, 구에에에엑!”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불쾌한 소리. 그곳으로 머리를 돌리자 구토하는 한강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주위에는 갖가지 장난감이 잔뜩 어질러져 있었다.
“쒸익! 쒸익!”
유선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마나 고갈로 허덕이는 한강에게 다가갔다.
주먹이라면 진작부터 움켜쥐고 있었다. 중지를 반의반쯤만 세우고. 한강의 정수리를 조준해서,
빠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