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화
이불 밖은 위험하다
어쩐지 목소리가 귀에 익더라니. 얼굴 역시 낯익었다. 기억보다는 성숙해진 모습이고 헤어스타일도 달랐지만, 유선우로선 알아채지 못하기가 더 힘든 사람이었다.
유선우는 말문이 막힌 채로 주춤거렸다. 손님의 태도가 돌변하자 알바, 차세정이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필연적으로 시선이 마주치게 되는 각도였다.
“손님… 어?”
차세정의 목소리가 뒤집혔다. 그녀도 한눈에 유선우를 알아봤다. 5년이 지났다지만 외견이 역변하지는 않았으니까. 무엇보다 서로를 모르고 스쳐 지나갈 관계가 아니었다.
‘미친.’
식은땀이 유선우의 등골을 타고 내렸다. 단순한 동창이라면 반갑다고 하이파이브나 쳤을 터.
그리고 이렇게 말했을 거다.
반가운 건 개뿔도 중요하지 않아요오~!
내가 서비스 한두 시간으로 만족할 거 같냐고오!
하지만 반응은 상대에 따라서 달라지기 마련.
전 여자친구 앞에선 절대 불가능한 말이다.
“으, 으흠! 됐어요, 그냥!”
유선우는 눈을 피하며 자리를 모면하고자 애썼다. 당연하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이봐요. 저 누군지 알죠.”
“PC방이 영 별로네, 에잉!”
“맞는 거 같은데. 성소고 유선우.”
유선우의 동공이 파들파들 떨렸다. 지인을 만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해봤다. 그야 학교를 이쪽에서 다녔으니까. 사실 뜻밖의 만남을 기대하는 마음도 있었다.
‘근데 얘는 아니지!’
학창 시절의 연애라는 게 가벼움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혈기 때문에 진지할 땐 끝없이 진지해지곤 했었다. 게다가 끝이 좋지도 않았기에 여전히 씁쓸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만큼 어색해져 일단 시치미를 뗐다.
“그게 누구예요? 아이돌인가. 아이돌은 잘 몰라서요. 죄송.”
“개소리하는 거 보니까 맞네. 네가 어떻게 여기 있어?”
최현석도 그렇고 왜 저딴 방법으로 사람을 구별하는지. 예전이나 지금이나 개소리를 일삼지는 않았는데.
“너 여기서 딱 기다려. 아니지, 나가서 얘기하자.”
“일하고 계신 거 아니세요?”
“일이고 뭐고…!”
차세정은 다급하게 카운터에서 뛰쳐나왔다. 근무 시간이 6시간이나 남았지만 알 바가 아니었다. 정전된 실내에서 태풍의 전조마저 흘렀다.
그때였다.
콰아앙!
“꺄아아아악!”
“뭐, 뭐야!”
갑작스레 위층에서부터 폭음이 터져 나왔다. 건물 전체가 흔들리고 깨진 조명의 조각들이 비처럼 내렸다.
손님들은 소리 높여 비명을 지르면서 몸을 웅크렸다. 정전과는 비할 바가 아닌 혼란이 퍼져나갔다.
반면에 유선우의 낯은 차분하게 식었다. 그는 천장을 바라보면서 재빨리 사고했다.
‘이건 또 무슨 일이야.’
건물 내에서 뜬금없이 폭발이라니. 허름한 상가도 아니고 인파가 바글거리는 시네마 건물이다. 이보다 위층은 아비규환의 현장이 되었으리라.
‘전기도 안 들어오고. 상황이 좀…….’
쾅!
재차 요란한 폭발음이 터졌다. 사태는 멈추기는커녕 심각한 방향으로 흘러갈 뿐이었다.
‘하필이면 이럴 때 난리네.’
유선우는 카운터에 매달린 차세정을 힐끔 쳐다봤다. 평소의 그였다면 혼자 건물을 나왔을지도 몰랐다.
타인의 안전은 민간인이 아니라 경찰이 신경 쓸 일이니까. 그러나 차세정을 생판 남이라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충격이 멎고 십여 초가 지난 뒤.
손님들이 헐레벌떡 일어나서는 출구로 달려갔다.
유선우는 멍하니 서 있는 차세정의 어깨를 두드렸다.
“정신 차려. 나가자.”
“어, 뭐? 어디를.”
“왜 이렇게 얼빠져 있어? 네가 나가서 말하자며.”
태평한 어조로 말했으나 속까지 여유롭진 않았다 마법사가 아닌 이상 꺼릴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유선우는 차세정의 손을 잡아끌며 바깥으로 향했다. 머지않아 차세정이 차분함을 되찾았다.
“이쪽이야. 계단은 뒷문이랑 더 가까워.”
앞으로 나서더니 되레 자기가 길을 이끈다. 그녀를 보면서 유선우는 여전하다며 실실 웃었다.
당황하기는 하는데 정신만 차리면 행동이 거침없어진다. 외모야 달라졌어도 천성은 그대로인 듯했다.
둘은 서둘러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비상계단에는 어느 정도 선객이 있었다. 통행이 방해될 만큼은 아니라, 빠르게 한 층을 내려갔다. 층계참을 밟았을 때 다시금 충격이 건물을 뒤흔들었다.
‘산책 나왔다가 이게 무슨 봉변인지.’
유선우는 구를 뻔한 차세정을 부축하면서 혀를 찼다. 재난 영화의 한가운데에 떨어진 기분. 아무래도 이계에서의 징크스가 이어지는 모양이었다.
미식 여행을 다니면 와르르르!
공기 좋고 물 좋은 곳 찾아 떠나면 화르르륵!
PC방 오니 쾅쾅쾅!
‘내가 놀겠다는데 왜 지랄이야!’
저주라도 걸린 게 아닌가 의심될 지경이다.
내려갈수록 비상계단도 붐비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잔뜩 겁에 질려 예민한 상태. 게이트 탓에 대피에는 익숙하다지만 불안감은 별수 없었다.
꽈악.
공포가 전염됐는지 손에서 느껴지는 악력이 강해졌다. 옆을 보니 차세정이 담담한 표정을 가장하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애써 웃으며 말했다.
“별일 없을 거니까 표정 풀어.”
“누가 할 소리를. 안 무서워?”
“장례식 치른 사람이랑 손잡고 있는 게 더 무섭거든.”
인파 때문에 이동이 지체되니 얘기할 시간은 있었다. 그만큼 조바심은 커졌지만 차세정은 내색하지 않았다. 입을 다물고 벌벌 떠는 것보다는 낫다고 여겼다.
유선우도 실실거리며 농담조로 대답했다.
“이걸 고인 드립을 쳐버린다고?”
“웃기고 있네.”
차세정의 눈매가 곱게 휘어졌다.
태평한 대화와는 달리 상황은 심각하게 돌아갔다.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막히나 싶더니 행렬이 멈춰버렸다. 반대로 올라가려는 사람마저 나타나 혼란이 가속되었다.
유선우는 역행하는 청년에게 상황을 묻고자 했다. 그가 움직일 필요도 없이 차세정이 청년의 팔을 붙잡았다.
“왜 올라가시는 거예요? 혹시 밑에 무슨 문제라도.”
발목이 잡힌 청년이 언짢은 듯 인상을 찌푸렸다. 이내 그는 차분한 둘의 모습을 보곤 숨을 가다듬었다.
“후우. 밑이 무슨 진흙으로다가 다 막혔어요.”
“진흙이요? 웬….”
“궁금하면 직접 보시든가. 이제 됐잖아요. 놔주세요.”
청년은 손을 뿌리치고는 다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설명은 들었다만 전혀 대답이 되지 않았다. 차세정은 영문을 알 수 없어 눈만 끔뻑였다.
“저게 무슨 소리야?”
“좀 세게 잡을게.”
한편으로 유선우는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했다. 그는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거칠게 길을 뚫었다.
욕까지 들어가면서 한 층의 반을 강행돌파 한 뒤. 난간에 고개를 내밀어 밑을 확인한 그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진흙 맞네.”
청년의 말대로 계단에 진흙이 늪처럼 퍼져 있었다. 대체 어떤 원리인지 발이 파묻혀 버둥대는 사람들도 보였다. 깊은 수렁에 빠지기라도 한 모양새였다.
“누가 좀 당겨주세요!”
“바, 발이 안 빠져!”
진흙이 흘러내리기는커녕 위로 뻗어 멀쩡한 계단까지 침식한다. 진행은 더뎠지만 머지않아 층 전체가 가로막힐 터였다.
‘어쩔까.’
유선우는 선택지를 저울질했다. 바닥을 얼릴 순 있겠다만 진흙이 몇 층까지 깔려 있을지. 게다가 사람이 빠져있으니 막 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쓸 만한 마법 한둘이라도 배워뒀어야 했는데.’
다 무시하고 순수 무인으로 살아온 게 한스럽다. 결국에 진행을 포기한 유선우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하여간 나쁜 놈들이 일은 제일 열심히 해. 인센티브 받나.”
“뭐?”
“저거를 다 퍼다 날랐겠어? 일단 올라가자.”
차세정은 갸웃거리다가 아, 하고 침음성을 흘렸다. 폭발은 둘째 치더라도 비상계단을 막은 기괴한 진흙. 틀림없이 능력을 사용한 테러다.
‘요즘 잦다고는 들었는데.’
뉴스에서도 자주 떠드는 이슈다. 덕분에 각성자의 이미지에도 타격이 크다던가.
남의 일인 줄로만 알았건만 하필이면 맞닥뜨릴 줄이야. 어째선지 현실성이 결여된 듯한 느낌이었다.
둘은 비상계단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사이에도 위층에서는 폭음이 이어졌다.
유선우는 차라리 올라가서 범인을 잡을까 싶었으나 그만두었다. 사람이 아니라 폭발물일 가능성도 있으니까. 정황을 보니 아래층에서부터 올라오는 놈도 있을 터였다.
비상구에서 나와 5층에 겨우겨우 도착했다. 눈에 띄는 것은 황급하게 어딘가로 향하는 인파. 그 끝에는 정지된 에스컬레이터가 있었다.
그는 발을 옮기기 전에 차세정의 상태를 확인했다. 혼잡한 통로를 헤쳐오느라 지쳤는지 호흡이 가쁘다. 심적 부담도 상당했을 테니 무리도 아니었다.
“힘들면 업어줄까?”
“너 쓰러지면 내가 업고?”
“좋은데 왜. 고등학생 때 그런 적 있었잖아.”
차세정이 잔잔하게 웃었다. 어디 애 아니랄까 봐 학교에서 별의별 짓을 다 했었다. 그녀는 싱숭생숭한 마음을 내색하지 않았다.
“됐네요. 그러다 굴러서 죽겠다.”
“힘들면 말해.”
“아직 괜찮아.”
마주 웃은 둘은 에스컬레이터를 밟았다. 붐비기는 매한가지라 발걸음에 조급함이 묻어나왔다.
그렇게 겨우겨우 한 층을 내려가기 직전이었다.
크르르르!
“아윽, 아아아악!”
“꺄아악!”
밑에서 들려오는 짐승의 울음소리와 비명. 아래층에서 벌어지는 일은 보지 않아도 뻔했다.
유선우와 차세정의 얼굴에 당혹감이 번졌다. 게이트의 소음이나 대피 경보도 없이 나타난 몬스터. 인적이 드문 장소가 아니라면 생기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착각은 아니었는지 짐승이 하나둘 시야에 들어왔다. 등에서 시뻘건 불길이 출렁이는 들개. 놈들은 도주하는 사람들을 불태워 뜯어먹고 있었다.
“비켜, 비키라고!”
“아아아아악!”
“밀지 좀 마요! 꺄아악!”
“헌터, 헌터 어딨어? 이 밥벌레 새끼들!”
유선우는 약간 짜증이 치밀었으나 우선 참았다. 아직은 헌터가 아니니 자기가 욕먹은 것도 아니었다.
에스컬레이터를 내려가던 이들은 혼비백산해 발걸음을 돌렸다.
또 이리저리 치이는 차세정을 감싸듯 안고 있기를 잠시. 희생자가 몇이 생기고 나서야 통행이 잦아들었다. 몸을 가눌 수 있을 정도가 되자 차세정이 품 안에서 어깨를 비틀었다.
“안 올라가고 뭐 해! 헌터나 경찰이나 뭐든 올 때까지 숨어야 돼. 빨리!”
“글쎄. 동네 헌터로는 좀 빡셀 것 같은데.”
“아니, 올라가라고!”
차세정의 외침이 기폭제라도 되었을까. 들개 셋이 으르렁대며 달려들었다.
민첩성을 자랑하듯 에스컬레이터를 서너 칸씩 뛰며 거리를 좁혀온다. 놈들의 등에서 불길이 사납게 흔들렸다. 열기에 공기가 데워져 아지랑이마저 피어올랐다.
크르르어!
침과 불똥이 사방으로 튄다. 그것을 바라보던 차세정이 질끈 눈을 감았다.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하나가 살아 돌아왔다 싶더니 이번에는 둘이 가는구나.
만일 유선우가 PC방에서 아이스티 한 잔이라도 주문했었다면. 그랬었더라면 진작 서로를 알아봐서 카페에라도 갔을 텐데.
가까워지는 열기에 살이 달아오른다. 공포가 덩치를 불리면서 주마등처럼 기억이 스쳐 갔다.
학생 때는 언제나 솔직함이 부족했다.
혼자 맘고생 하다가 헤어져선 미련만 질질 끌고. 그러다가 어느 날부터 유선우가 학교에 나오지를 않더라.
연락은 두절되고 걱정만 깊어지다가 그대로 졸업. 장례식을 치른 뒤에는 어딘가 정신이 빠진 채 살았다.
‘개 같은 인생이었어.’
오랜만에 잡아본 유선우의 손은 아버지보다도 거칠었다. 차세정은 지푸라기라도 잡듯이 그 감촉에 매달렸다.
‘…어라.’
문득 한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열기는 가라앉고 순식간에 추위가 내려앉았다.
불을 뿜는 몬스터가 다가오는데 춥다니. 의아해하고 있자 유선우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눈 떠도 돼.”
차세정은 그 말을 듣자마자 주저앉을 뻔했다. 왈칵 눈물이라도 나올 것 같아서. 예전에 그녀를 그토록 설레게 하던 온화한 음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