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8화
이불 밖은 위험하다
각성자 사이에서 S급 헌터란 절대적이기까지 한 존재다. 그리고 그 반열에 이를 가능성을 지닌 것이 S급 각성자.
이전에도 S급 판정을 받은 각성자는 몇 있었다. 그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스타로 성장할 미래가 약속된 보증수표인 셈. 그러니 1년 만에 등장한 S급 각성자에게 시선이 집중되는 것도 필연적인 결과였다.
“심사 영상 구했어?”
- 협회에 연락 넣었습니다. 그런데…….
“결론만 말해. 못 구했다, 이건가?”
헥터 클랜장, 김홍철이 사납게 내뱉었다. 하지만 성을 내봤자 대답이 변할 리가 만무. 그의 휴대폰에서 면목 없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죄송합니다. 기다려달라는 말밖에 못 들었습니다.
“빌어먹을. 다른 건?”
- 예?
굼뜬 반응에 김홍철은 괜스레 화가 치밀었다. 사람이 성실해 측근으로 두고 있건만. 눈치가 없어 말귀를 못 알아듣고 허둥거리기 일쑤다.
“알아낸 게 뭐 아무것도 없느냔 말이야! 그런 놈이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졌겠어? 최소 누구랑 접촉했다던가, 어디 돌아다녔다던가 눈에 띄는 게 하나라도 있을 거 아니냐고!”
호통을 지르자 바짝 기합이 든 음성이 돌아왔다.
- 예, 예! 협회 지인한테 들은 말이 있긴 합니다.
“네가 협회에 지인도 있었어? 처음 듣는데.”
그게… 대학 동창입니다.
“진작 말해라 제발! 인맥이 있으면 평소에 써먹어야지!”
죄송합니다!
김홍철이 미간을 잡아당기며 한숨을 흘렸다. 심복은 멍청하고, 쓸 만한 놈이 있다 치면 죄다 타 클랜의 스파이. 나날이 스트레스만 더해갈 뿐이다.
“그래. 들은 말이 뭔데.”
- 그 각성자가 저번에도 협회를 찾아간 적이 있다고 합니다. 심사받기도 전에요.
“뭐 하러? 미리 견학이라도 갔나?”
- 각성자 등록을 위해 찾았다고 합니다. 어째 수상쩍다 싶어서 물어봤습니다만 자세한 사정은 못 들었습니다.
김홍철은 탁자를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일반적인 일이라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는 크게 중요치도 않은 일. 그는 판단을 보류하고 화제를 돌렸다.
“그럼 됐어. 아무리 협회에 구멍이 많아도 묻는다고 바로바로 대답이 나오나. 그게 다야?”
- 아니요. 협회에서 웬 남자를 동행한 박아연을 봤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도 두 번이나요.
“뭐? 누구?”
뜻밖의 이름이었다. 김홍철의 머릿속에서 의문이 싹 사라졌다.
- 청일에 그 있잖습니까. 협회에선 악명이 자자해서 그런지 목격자가 많더랍니다.
“그걸 먼저 말하라고, 제발! 하필이면 왜 청일이…….”
말을 멈추고 정보를 정리했다.
소리소문없이 나타난 대형 신인.
그 심사 자리에 청일의 중견 헌터가 동행했다?
“아니, 아니지.”
청일에서 발굴한 보석이라기보단 다른 해석이 합리적이다. 애초부터 클랜 차원에서 심혈을 기울여 키워낸 것. 이쪽이 훨씬 그럴듯하다.
- 대표님?
“순서가 반대다. 그만한 인재가 갑자기 튀어나왔다는 게 말이나 되나. 청일이 이런 짓거리도 다 하는구만.”
- 어… 계속 작업 치면 되겠습니까?
“글쎄다. 가능하다 싶으면 연줄만 만들어 봐. 그렇다고 너무 노골적으로 나가지는 말고. 거기 김 대표 눈 밖에 나면 곤란해지니까.”
- 주의하겠습니다.
내버려 둬도 헥터에 직접적인 타격은 없다. 하지만 안 그래도 입지가 단단한 청일. 덩치가 지금보다 커지면 완전히 청일의 독주 체제가 되어버리고 말 터다.
“일단 영상부터 최대한 빨리 받아와. 어떤 놈인지 봐야겠어.”
- 예. JH에 협력 요청해보겠습니다.
“그쪽도 우리랑 별반 다를 바 없을 텐데. 그건 나한테 맡기고 네가 개인적으로 움직여.”
- 알겠습니다. 그럼 최대한 빨리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랬으면 좋겠군.”
뚝.
통화를 마친 김홍철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입을 다물고 있자니 치워뒀던 의문이 다시 떠올랐다. 가까운 시기에 협회를 두 번이나 방문했다는 것.
‘한 번이야 심사였다지만 그전에는?’
홀로 방문했다면 모를까 바쁜 B급 헌터가 동행했다니. 무언가 의도가 있었을 텐데 짚이는 구석이 없다.
‘담당자를 매수… 한 건 아니겠지. 협회에서도 심사 자체는 어지간해선 안 건드리니까.’
무엇보다 청일의 김정수가 상도덕이 없는 놈은 아니다. 뒷공작을 벌일 생각이었다면 박아연을 붙여주지도 않았을 테고.
‘등신이 아니고서야 절대 안 그러지.’
실력보단 불같은 성격으로 유명한 여자. 정치질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타입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군.’
협회에 떡이라도 돌리려고 갔는지. 아니면 이전 심사에서 퇴짜라도 맞았던 걸까. 첫 단계만 넘어서면 심사가 중단되지는 않을 텐데.
‘그땐 각성자가 아니기라도 했나?’
김홍철은 무심코 실소를 흘렸다.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멍청한 소리다 싶어서.
‘각성하고 싶다고 딱 맞춰서 될 리가 있나.’
각성을 딱지 쳐서 하는 것도 아니고. 생각할수록 의문이 깊어졌지만 의미는 얕아졌다.
‘정보도 없이 깊게 파고 들어봐야 헛수고지.’
생산성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일이다. 잡념을 털어낸 김홍철은 유의미한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
이슈를 몰고 다니는 유선우의 아침은 빠르다.
꿈에서 관리자와 어울려준 탓에 피곤하지만 사람은 사람. 마려우면 싸고 배고프면 밥을 먹는다.
졸린 눈을 비비기를 잠시. 부엌에서 풍겨오는 김치찌개 냄새가 코를 스쳤다.
오늘의 요리사는 아버지. 오늘뿐만 아니라 식사 전반은 아버지가 담당하게 됐다.
이는 김정수의 방문 이후로 생겨난 변화였다.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장남이 일자리를 구한 상황.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을 느낀 아버지가 가사를 도맡게 된 것이다.
덕분에 집안에서 고성이 오가는 일도 절반은 줄어들었다. 화가 완전히 풀리지 않은 건 유선혜뿐. 아니, 그녀가 품은 감정도 화라기보단 서운함에 가까웠다.
또 한편으로는 제 오빠를 미친놈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 이유는 유선우의 행동거지 때문이었다.
“쮸으으읍.”
식사가 끝나자 유선우는 믹서기로 과일주스를 만들었다. 설탕을 팍팍 넣어 미친 듯 흔든 뒤. 능력으로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빨아대고 자빠졌다.
유선우의 기행을 보며 유선혜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왜 능력으로 저딴 짓을 할까?’
저게 S급 각성자라니. 무언가의 착오가 있었던 게 아닐까 싶을 지경이다.
그녀의 눈초리에 떨떠름함이 더해갈 무렵.
유선우의 스마트폰에 불이 들어왔다.
“오빠, 전화.”
“또?”
최근 들어 그의 폰은 잠잠할 날이 없었다. 협회에서 정보를 흘렸는지 매일 같이 연락이 날아드는 실정. 물론 본인은 귀찮다며 전부 무시해버리지만 말이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을까. 유선우는 폰을 집어던지기는커녕 바로 전화를 받았다.
하는 짓거리야 여전했지마는.
“쮸읍쮸읍?”
아마도 여보세요, 라고 말하는 듯하다. 빠는 소리가 가벼운 것으로 보아 반가운 사람인 모양.
“흐으음. 쯉. 쮸으읍.”
소리가 늘어지면서 심각한 느낌이 물씬 풍긴다. 어떤 고차원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일지도.
“쯉, 쯉, 쯉쯉, 츄읍!”
이제는 또 강렬해졌다. 반응이 다채로운 것이 정말로 대화가 통하는 듯이 보인다.
“츄르르릅! 쮸읍!”
- 그만하라고, 미친놈아!
착각이었다.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유선혜가 볼을 긁적였다.
‘기분 이상하네.’
가족의 폰으로 직장 상사의 목소리를 듣다니. 이유 모를 근질거림에 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그녀는 통화가 끝날 때까지 기다린 뒤에 물었다.
“뭐래?”
“쯉. 응?”
“아연 언니 아니야?”
유선우가 아이스크림을 떼어내고 싱긋 웃었다.
“별 건 아니고. 월요일부터 회사 나오래. 갈 때 같이 가면 되겠다. 괜찮지?”
“…뭐, 응.”
화가 덜 풀렸다고 주장하는 건지 유선혜의 태도가 뾰로통하다. 유선우는 흐뭇하게 웃고는 다시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었다.
‘근데 오늘 뭐 하지?’
이 세상 거의 모든 사람이 해봤을 고민.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뭐’라고만 쳐도 자동완성으로 나온다.
아 뭐 검색하려 했지, 뭐 먹지, 뭐하지.
하나같이 가슴을 답답하게 만드는 문장들이다.
‘그냥 TV나 봐도 되겠지만.’
조금 전까지만 해도 게으름이 인생의 낙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다음 주 월요일에 출근이 정해진 상태. 한가하게 보낼 수 있는 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 귀한 시간을 고작 TV나 관리자 놀아주는 데 써야 할까?
‘나는 아니라고 봐.’
집에서는 해봐야 고작 스마트폰 만지작대는 게 끝. 이불 밖은 미지의 가능성으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사람은 능동적으로 살아야지.’
유선우는 산책을 나가기로 결심했다.
가끔은 이런 시간도 필요한 법.
만날 사람이 없으면 만날 사람을 만들면 된다.
***
그렇게 유선우는 시네마 건물의 PC방에 도착했다. 전후 과정이 생략된 감은 있지만 어쩔 수 없는 일. 돈이 없으니 마음껏 돌아다니기도 힘들었다.
코인노래방도 시간 대비 가격은 비싼 편이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만큼 경제적인 장소가 없었다.
‘동생한테 용돈 받아서 PC방 다니는 내 인생이 레전드다.’
유선우는 자괴감에 한숨 쉬면서도 데스크톱의 스위치를 켰다. 방금까진 집으로 돌아갈까 고민했었으나, 막상 문턱을 넘으니 게임은 하고 싶었다.
잽싸게 회원가입 해주고 돈은 2시간 치만 넣고. 게임 목록을 둘러보지만 결국은 헛고생일 뿐이다. 새로운 무언가를 찾으려 해도 어차피 롤 키게 되니까.
띠링!
ㅎㅇ이지 말입니다
피방이십니가/
랭겜 한판 어더십니가
어떠씹니가
쒸프트찐짜안눌리녜
로그인하자마자 김광수에게서 채팅이 날아왔다. 키보드 타령하는 꼴을 보니 어딘가의 PC방인 듯했다.
지금이 아침 9시인데 대체 언제부터 시작한 걸까. 김광수의 인생도 여러모로 레전드이긴 하다.
‘나는 다음 주부터 직장인이다, 이거야.’
유선우는 우월감을 만끽하며 김광수의 전적을 염탐했다. 확인해보니 때마침 승격전 마지막 판. 타이밍이 들어맞았다고 하기에는 공교로운 감이 있다.
‘설마 듀오할 사람 기다리고 있던 건가?’
합리적 의심이다. 더 자세히 파고들자 의심이 확신으로 변했다.
가장 최근에 치른 판이 무려 4시간 전. 그동안 잤다기엔 너무 짧고 쉬었다기엔 너무 긴 시간이다.
‘이 사람 진짜…….’
유선우는 어이없는 한편으로 자부심이 들었다. 자신이 중요한 게임을 함께할 파트너로 적합하다는 얘기니까. 실력을 인정받은 셈이니 들뜨는 것도 당연했다.
‘하, 어쩔 수 없네.’
유선우는 흔쾌하게 듀오 요청을 수락했다. 김광수에게는 다행이게도 게임은 순조롭게 흘러갔다.
전적으로 유선우의 공이었다. 팀원이 다 똥을 싸는데도 그가 혼자 멱살을 붙잡고 있었다. 귀환자의 피지컬은 게임에서도 찬란하게 빛났다.
하지만.
팍!
“엥?”
현대인이라면 한 번쯤은 경험해봤을 재난.
이따금 일어나는 정전이 하필 지금 터져버렸다.
이만큼 부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은 몇 없기 마련. 유선우도 열이 뻗쳐서는 당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료수 서비스 정도로는 안 넘어간다.’
카운터로 냅다 달려가자 아르바이트생이 눈에 들어왔다. 전체적으로 호리호리한 몸매에 긴 생머리. 가녀린 체구인지라 꼬장 부리기가 주저될 정도였다.
물론 평범한 사람들에게나 그렇다는 말이다.
“아니, 장난쳐요? 과제 겨우 다 끝냈더니!”
하던 일이 바뀌기는 했지만 상관없다. 매우 급한 상황이었다는 것만 어필하면 된다. 효과가 없진 않았는지 알바가 연신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이게 갑자기 왜 이러는지.”
“그건 내 알 바 아니고요. 왜인지는 그쪽이 알아야죠.”
“한 번도 이런 적 없었는데…….”
“한 번 생겼잖아요 지금. 하필이면 내가 있을 때!”
“정말 죄송합니다!”
“됐고. 어떻게 보상해줄…….”
유선우는 쏘아붙이다 말고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다름이 아니라 알바의 얼굴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푸르죽죽한 낯빛인데도 인상 자체는 도도함이 묻어나온다. 길거리에서는 보기 드문 미인. 그러나 유선우가 당황한 이유는 미모와는 관계없었다.
‘…얘가 왜 여기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