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6화
각성자 심사
박아연은 심사 결과를 가감 없이 대표에게 전했다. 보고 과정에서 그녀는 변명이라곤 한마디도 뱉지 않았다.
유선우에게 진 빚이 남아 있으니 그를 나쁘게 말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유선우의 잘못이라고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 이건 예상도 못 했는데…….
“각성자가 아니라고 듣기는 했었습니다. 어찌 됐든 제 과실이에요.”
- 과실은 아니지. 난 아직도 잘 이해가 안 되는군.
스마트폰에서 한숨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선우 씨가 파란만장하게 살았다는 건 알겠지만.”
여러모로 신기한 사람이야. 전역 후에 영입하는 게 최선이겠지?
“아무래도요. 협회를 건드리면 이득보다는 손실이 크겠죠. 클랜 입장에서는 물론이고 선우 씨한테도.”
정치질로 비빈다고 치면 큰 움직임이 있을 수밖에 없다. 겨우겨우 각성자로 인정받더라도 이미지가 시궁창이 되면 전부 허사.
시간은 시간대로, 노력은 노력대로 낭비하는 악수다.
- 일단 내 쪽에서도 백방으로 알아보지. 비슷한 전례는 기대할 수 없겠지만 무슨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니.
“저는 선우 씨 의사 확인해보겠습니다. 이번 일, 거듭 죄송합니다.”
- 죄송은 무슨. 어쨌든 수고 많았네.
통화를 마친 박아연은 핸들에 머리를 처박았다. 한탄스러운 마음이 도저히 가라앉지를 않았다.
‘1년 반…….’
딱히 기다리지 못할 기간은 아니다. 그러나 유선우의 능력을 떠올려보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다.
청일을 넘어 한국을 대표하는 헌터가 될 인물.
어쩌면 헌터 협회장보다도 큰 위상을 지니게 될지 모르는 인재이건만. 하필 군대에 발이 묶여버렸다.
“하아, 나라 꼬라지 진짜.”
괜스레 아쉬운 소리가 나왔다.
***
이후로 유선우의 분위기가 180도 달라졌다.
건드리기만 하면 터져버릴 법한 상태.
걸어 다니는 폭탄이나 다름없었다.
‘군대만큼은 절대 가기 싫어.’
유선우는 하루의 태반을 잠으로 보내고자 마음먹었다. 다름이 아니라 관리자를 만나기 위함.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이었다.
잠에 빠져들자 여느 때와 같은 공간이 나타났다. 그는 어느새 익숙해진 공간을 가로질러 관리자에게로 다가갔다.
“야.”
“음?”
“봤지?”
“으음.”
남의 일이라는 듯 태연한 태도가 짜증스럽다. 유선우는 한숨을 푹푹 내쉬고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조작 같은 거 못해?”
“나비효과라는 말은 들어봤느냐.”
“그냥 숫자 하나면 되잖아. 응?”
“그리 단순한 일은 아니다. 수치를 바꾼 뒤에는 너희가 벌인 소란을 지켜본 사람들의 기억도 건드려야 하지.”
CCTV 영상이나 결과지 등 기계적인 증거의 수정은 간단하다. 반면에 사람의 인식 개변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안 돼?”
“안 될 거야 없다만 귀찮다. 그리고 뒷감당은 네 몫이니라. 내가 인간 하나를 과하게 편애한다는 오해가 생기면 다른 관리자들이 어떻게 나올지.”
유선우는 빠짐없이 이해하곤 실 끊긴 인형처럼 축 처졌다. 애초에 억지임을 알면서도 혹시나 해서 말해봤을 뿐이다.
“그나저나 오해는 얼어 죽을. 나 편애하는 거 맞잖아.”
“아, 아니다!”
“으, 으느드!”
관리자가 앞니로 입술을 질끈 깨물고 눈을 부릅떴다. 그녀는 입도 벙긋 못하다가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따라 하지 마라.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억측을 하는 건지.”
“뜨르 흐즈 므르!”
“하지 마라, 하지 마!”
애처럼 씩씩대는 모습이 퍽 우습다. 유선우는 실실거리다가도 금세 다시 침울해졌다. 상체를 엎드린 그가 탁자 위에서 고개를 뒹굴뒹굴 굴려댔다.
“씁. 진짜 방법 없나.”
“그렇게 싫으냐?”
“내 짬에 삽질을 하라고? 시간 낭비잖아. 심지어 여자도 못 만나!”
총은 무슨, 창 한 자루로 드래곤도 잡아봤다. 저쪽에서는 신창이라고도 불렸는데 뭐가 아쉬워서.
훈련소 수료도 하기 전에 다 터뜨려버릴 수도 있다. 오히려 안 가는 게 국가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을까.
“돌아와서 계집질은 한 번도 안 하지 않았느냐.”
“계집질이라니……. 말조심하자.”
유선우의 눈빛이 짜게 식었다. 단어 선정이 상당히 저급하다.
“원래부터 아무나 사귀진 않았어. 괜찮은 사람이랑 눈 맞은 거지.”
“으음. 하기야 미색이 빼어난 이들만 골라잡더구나.”
“예쁘면 마음도 잘 가더라고.”
그새 대화가 주제를 탈선해버렸다. 잡담도 때로는 유익한지 정신이 제법 차분해졌다.
뒤늦게 진정한 유선우는 관리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어떻게 해야 돼?”
“무얼 말이냐.”
“내 발이 묶이면 제일 곤란한 게 너잖아. 생각이 있으니까 가만히 있는 거 아니야.”
“하여간 눈치는 빨라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참….”
“너한테만큼은 옛날얘기 듣기 싫다.”
“조금은 괜찮지 않으냐.”
관리자가 입술을 비죽 내밀고 툴툴거렸다. 그녀가 처음부터 도와주지 않은 이유는 한 가지. 그저 유선우의 힘 빠진 모습을 조금만 더 구경하고 싶었다.
‘그래도 수단은 있나 보네.’
유선우는 고마움을 느끼는 한편으로 언짢기도 했다. 유선우가 군대에 과민반응을 한 것도 결국 게이트 탓이다. 바삐 돌아다닐 예정은 없지만 거물이 나오면 잡기는 해야 하니까.
그리고 게이트 탓이라는 건 관리자의 탓이라는 말과 일맥상통하다.
“여기만 오면 내가 진짜 호구 같단 말이야.”
“흐흥. 내 매력이 아니겠느냐. 어디 가서 못났다는 말은 들어본 기억이 없다.”
“말해줄 친구가 없는 거겠지. 기왕 물어보겠는데, 왜 여성체야? 얼굴도 내 취향에 맞춰준 건가?”
“음?”
이번에는 정말로 못 알아들은 기색이었다. 뜬금없다기보다는 말의 의미 자체가 헷갈리는 듯했다.
“그 뭐야. 신이라 하면 그냥 빛 덩어리일 것 같은 이미지라서.”
“오해가 있나 보구나. 내가 왜 신이냐. 어디 내가 한 번이라도 전능했던 적이 있었느냐?”
“아니. 오히려 뒈지게 무능했지.”
“닥치고. 하여튼 1차원 2차원 하는 개념이 있지 않으냐. 네겐 내가 초월적인 무언가로 보이겠다만, 내 위에는 또 비슷한 무언가가 있지. 그뿐인 얘기다. 자세히 말하면 더 복잡하지마는.”
유선우는 설명을 곱씹어 나름대로 정보를 정리했다. 따지자면 관리자와 인간의 관계성은 인간과 개미와도 흡사한 셈.
관리자는 사람이 개미집을 들여다보듯 차원을 관측할 수 있는 동시에, 간섭도 가능하다는 거다.
“너 진짜 친구 없구나.”
“……대체 뭘 어떻게 생각해야 그런 결론이 나오지?”
“맞잖아. 네 동족 중에 어울려주는 사람이 없어서 나랑 떠들고 있는 거 아냐. 머리… 괜찮니?”
“아니라니까아!”
쾅!
열불 터진 관리자가 탁자를 치며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부릅뜬 눈으로 유선우를 노려봤다.
유선우가 관리자를 놀리는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이었다. 꼭지가 돌면 컨셉을 잊어먹는지 애처럼 변한다. 외견과의 갭 때문에 귀엽게 느껴지기도 했다.
한참을 씩씩거리던 관리자의 표정이 바뀌었다. 무언가를 알아차렸다는 것처럼 그녀가 음흉하게 미소지었다.
“나를 그렇게 보고 있었을 줄은 몰랐구나.”
“엉?”
“후후. 어쩐지 시선이 묘하더라니.”
“갑자기 뭐라는 거야. 짜증 나니까 웃지 마.”
“네가 보고 있는 모습이 딱 내 본체다. 내가 얼마나 예뻐 보였으면 그런 오해를 다 하느냐?”
“…말이 그렇게 되나?”
유선우는 첫 만남 때부터 관리자의 외견에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환심을 사려고 커스터마이징을 한 게 아닐까 싶어서. 자신의 여성 취향을 다 꿰고 있으니 그럴 법도 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실제로는 본인의 민낯이었고, 그게 유선우의 취향에 딱 들어맞았다는 얘기다.
“빼박이죠? 아무고또 말 모타죠?”
“얘가 처돌았나….”
“반박 못 하죠? 회피 역겹죠?”
“이젠 뭐 있는 척도 안 하네.”
말투를 지적하자 관리자가 의자에 몸을 파묻고 늘어졌다.
“귀찮아. 입에도 잘 안 달라붙어.”
“애초에 하지를 말지.”
“있어 보이잖아!”
말마따나 고아한 겉모습과 어울려 고귀한 인상은 있었다. 다만 유선우가 듣기엔 영 별로였다.
“오히려 이쪽이 낫네.”
“그, 그래애?”
“하여튼 어쩌려고. 헌터 직함 없이 몬스터 잡기는 불편할 텐데.”
“그냥 각성하면 된다. 으, 막상 고치려니까 잘 안 돼.”
“맞다. 각성은 뭐고 마나는 뭐야?”
핵심을 물으니 관리자가 슬쩍 눈을 피했다. 아무래도 찔리는 구석이 있는 낌새. 유선우가 눈에 불을 켜고 쏘아보자 그제야 머뭇머뭇 대답이 돌아왔다.
“그게… 지구엔 폭격이나 독극물 같은 거 빼곤 몬스터 잡을 수단이 없었거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무기 쥐여준 거지.”
“그 결과가 각성자다?”
“응. 마나는 우리가 쓰는 마력 같은 건데, 내 지인들한테서 삥… 아니, 적선 받아서 무작위로 뿌렸어. 지금도 그러고 있고. 그걸 운 좋게 받아들이면 각성하는 거야.”
아무도 모르는 각성의 진상이 이다지도 허무하게 밝혀졌다. 유선우는 어처구니없어 헛웃음치곤 계속해서 캐물었다.
“마나에 마력에 드럽게 헷갈리네. 뭐가 다른데?”
“인간이 제멋대로 명명했을 뿐이지 전혀 달라. 설명하긴 귀찮아.”
“그럼 말던가. 그래서 각성이라도 시켜주겠다, 이거야?”
반신반의하게 묻자 관리자가 흔쾌하게 긍정했다.
“그러지 뭐.”
“…어, 진짜?”
“별로 어렵지도 않은데. 나랑 연결만 만들어두면 돼.”
“어떻게?”
“에이. 알 거 다 아는 사람끼리 왜 그래? 연결이라면 연결이지.”
그리 말하면서 조금씩 거리를 좁혀온다. 급격히 달라진 분위기에 유선우가 군침을 삼켰다.
“으흠….”
***
끔뻑끔뻑.
새벽에 깨어난 유선우는 한동안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의 몸속에선 묘한 기운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무기질적인 마력과는 다르게 서늘함을 띠는 냉기. 각성은 하고 봐야 안다더니만 확실히 그 말대로였다.
‘참… 이게 이렇게 되네. 결과는 만족스럽지만.’
유선우는 뒷머리를 벅벅 긁고는 스마트폰을 찾아 조작했다. 한참이나 이어지는 신호음.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가기 직전이 되자 잠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 ……지금 몇 신지 알아요?
“5시 34분이요.”
- 알려줘서 참 고맙네요. 근데 5시에 왜 전화질이세요.
“반올림하면 6시인데요. 6시면 일어날 때 됐지.”
인간은 학습하는 동물. 유선우는 김광수에게 들었던 말을 그대로 써먹었다. 그때의 흥분은 박아연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 하, 씨. 잠이 확 깨네.
“앞으로도 계속 모닝콜 해드릴까요?”
- 1년 안에 자살할 자신 있어요.
“에이, 우리 사이에 왜 그러신대.”
하아아…….
화내기도 피곤한지 욕 대신 한숨만이 들려왔다. 곧이어 나름대로 진정한 박아연이 본론을 물었다.
- 무슨 일이에요? 아무 용건 없이 연락 안 하잖아요.
“그야 당연하죠. 백수가 심심하다고 직장인한테 전화해요?”
- 그건 아니지만. 아, 지금 길게 말하기 싫어요.
“그럼 좋은 소식이랑 나쁜 소식 중에 뭐부터 들으실래요?”
- TV가 사람 망친다니까 진짜. 나쁜 소식부터요.
“별 건 아니고. 저희 헌터 협회 또 가야 돼요.”
정말로 별일 아니라서 태연하게 알려줬다. 그런데 박아연은 어떻게 생각했는지 어조가 심각해졌다.
- 이번엔 또 무슨 짓 했어요. 똑바로 말해요, 미친놈아.
“각성했는데요.”
- …네?
“각성했다고요. 방문 예약 잡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