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화
각성자 심사
지구 생활 16일째.
햇볕이 쨍쨍한 낮에 유선우는 집을 나섰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하얀색의 BMW. 차체의 앞에는 정장 차림의 여성이 서 있었다.
“힘세고 강한 아침!”
“낮부터 개소리할래요?”
박아연이 타박하며 싱겁게 웃었다. 잠깐 멈칫한 유선우가 그녀를 뚫어지라 쳐다봤다.
“뭘 그렇게 봐요?”
“오늘따라 되게 있어 보이셔서. 오늘 바뀐 거 없냐고 물어보시는 줄 알았죠.”
“안 하니까 서운한가 봐. 저 오늘 바뀐 거 없어요?”
“음….”
유선우가 눈을 가늘게 뜨고 박아연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렌즈라도 꼈는지 눈은 커 보이고 머리카락도 단정한 게 미용실을 다녀온 모양이다. 정장은 구겨진 데가 전혀 없고 화장도 공들인 티가 팍팍 난다. 본인이 했을 리는 없으니 아예 메이크업 샵이라도 들린 것 같다. 몸에 밴 향수 냄새도-”
“…변태. 말투도 등신 같아요. 하지 마.”
매도당하는 순간 그의 가슴이 철렁거렸다.
‘변태 소리가 왜 이렇게 달달하지?’
본래 유선우의 성적 기호는 지극히 평범했다. 하지만 평범하다는 말에는 변화의 가능성이 담겨 있기 마련. 그는 욕구에 충실한 남자였다.
‘뭐라고 부탁해야 다시 들을 수 있을까.’
한 번만 더 변태라고 해주세요?
솔직함이 미덕이기는 하나 정말로 변태 같다.
유선우는 생각을 180도 달리 먹었다. 고단수로 허를 찌르기로 했다.
일부러 화를 내 놀림감이 되는 것.
그는 철저한 계산 하에 입을 열었다.
“한 번만 더 변태라고 해봐요, 진짜.”
목소리를 깔고 빡친 듯 부들대는 게 포인트. 정도가 심하면 미안해할 수도 있으니 적당한 선을 지켜야 한다. 딱 놀려먹기 좋은 정도가 이상적인 수준이다.
박아연이 생글생글 웃었다. 그녀도 장난기가 동했는지 꿀 떨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변태.”
유선우는 숨이 멎어 속으로 외쳤다.
‘감사합니다!’
그는 한참이나 제자리에 서서 굳어 있었다. 기다리다 못한 박아연이 그를 재촉했다.
“얼른 타요. 예약 해뒀는데 놓치면 귀찮아지니까.”
오늘은 각성자 등록을 하는 날이다.
***
서울 여의도의 헌터 협회에는 쉴 새 없이 사람들이 드나든다. 헌터뿐만 아니라 일반 직원들. 심지어는 특종을 따고자 위장한 기자들까지.
“저기다 폭탄 한 번만 던져보고 싶다.”
바글바글한 인파에 질색한 유선우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의 바로 옆에 있던 박아연의 낯빛이 새하얗게 변했다.
“미, 미쳤어요!?”
“아니, 농담도 못 해요?”
“자제해주세요. 선우 씨가 그러면 장난 같지가 않아서.”
유선우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허. 뭐 비슷한 건 할 수 있는데.”
“여기 기자도 되게 많으니까 말 좀 조심해요. 각성자는 말 한마디 실수하면 진짜 훅 가거든요.”
“훅 가면 저도 훅 보내죠. 그냥 언론사 건물 펑 터뜨려버리지. 개꿀잼 인정해요, 안 해요.”
“아이 씨, 좀 보고 싶긴 한데…….”
박아연은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머리를 양옆으로 흔들었다. 이번에도 유선우의 페이스에 말려든 느낌이었다.
“됐으니까 일단 따라와요.”
“아까는 저 혼자 가라고 하지 않았어요?”
“생각 바꿨어요. 불안해서 혼자 못 보내.”
자칫하다간 누구 초상 치를지도 모르는 일. 그녀는 불온한 상상에 전율한 뒤에 협회 건물의 문을 열었다.
각성자의 심사는 지하에서 진행된다.
능력은 위력도 범위도 천차만별이니 걸맞은 시설이 필요하기 마련. 그런고로 지하의 모든 공간이 특수한 재질로 이루어져 있다.
“근데 심사는 어떻게 하는데요?”
“우선 특수 장치로 마나 수치를 측정합니다. 각성자는 수치가 전부 다릅니다만, 비각성자의 경우는 전부 0이지요.”
“어라. 각성자 구별하기 엄청 힘들다던데 그런 게 뚝딱 나와요?”
유선우와 문답을 나누는 건 협회의 공무원이었다. 일하면서 별의별 진상을 다 만나본 공무원은 유선우의 가벼운 말투에도 사무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설치에 천문학적인 비용이 드는 탓에 국내에는 이곳에 있는 게 유일합니다. 작은 사이즈도 아니고요.”
“호옹이.”
“저 문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결과는 금방 나올 테니 오래 기다리실 일도 없을 거예요.”
공무원이 가리킨 방향에는 큼지막한 문이 있었다. 유선우가 발을 옮기자 팔짱을 끼고 있던 박아연이 다가왔다.
“선우 씨. 저랑 내기했었던 거 기억나죠?”
“넹?”
“넹은 무슨 얼어죽을 넹. 던전에서 그랬잖아요. 그새 까먹었나 봐.”
“아, 뭔지 알겠어요.”
만일 각성자가 아니면 어떤 부탁이든 들어준다고 했었던가. 유선우가 기억을 더듬고 있자니 박아연이 싱그럽게 미소 지었다.
“물리기 없기에요. 기대할게요.”
“저기요. 저는 판돈 안 걸었던 거 같은데. 그리고 제가 지면 곤란한 건 그쪽 아니에요?”
“이거랑 그거랑은 다르죠. 쫄리면 뒈지시든가. 이거 맞아요?”
박아연이 쿡쿡거리며 도발했다. 유선우는 살짝 짜증이 났으나 곧 그러려니 넘어갔다. 이 여자 성격에 무리한 요구는 안 하겠지 싶어서.
‘회사 동료 될 사이니까 간단한 부탁은 그냥 들어줄 텐데.’
유선우는 피식 웃어넘기고는 문을 열었다. 그리고 내부를 눈에 담자마자 기분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사방이 새하얀 방.
요즘 지겹도록 보는 장소와 비슷했다.
다른 점은 다리를 꼬고 앉은 관리자가 없다는 것뿐.
‘처음엔 컨셉 같았는데 이젠 고의적으로 하는 감이 있지.’
몸매만큼은 좋으니 이젠 못 보면 아쉬울 것 같기도 하다.
관리자의 각선미를 떠올리기를 잠시. 벽 한가운데에 달린 스피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 가운데에 가보시면 발자국 모양 있거든요? 거기에 맞춰서 서주세요.
유선우는 군말 없이 지시를 따랐다.
그리고 3초 정도가 지난 시점.
지이잉!
예고 없이 시뻘건 광선이 쏘아졌다. 비슷한 공격에 자주 당해본지라 몸이 멋대로 움직였다. 본능적으로 광선을 회피한 그는 스피커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놀래라 쓰벌! 지금 사람한테 뭘 쏘는 겁니까?”
벽 너머에서 유선우를 바라보던 연구원이 입을 떡 벌렸다. 저걸 도대체 어떻게 피했나 싶어서. 눈이 의심되었지만 그는 애써 동요를 잠재웠다.
- 그거 피하시면 안 됩니다! 스캔하는 거예요!
“아, 이게 검사였어요? 아니, 미리 말을 하지!”
- 여태까지 피한 사람이 없어서…….
“그러니까 돼지도 똑바로 못 잡지. 다시 해주세요.”
곧이어 붉은 선이 유선우의 온몸을 훑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진득하게 어루만진 뒤에야 빛이 거둬졌다.
- 끝났습니다. 앞에 문 보이시죠? 들어가셔서 결과지 받아가세요. 이쪽에서도 기록 확인하니 주의하시고요.
‘뭐 이렇게 빨리 끝나.’
유선우는 얼떨떨해하며 방을 가로질렀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때마침 인쇄기에서 용지가 나오고 있었다. 전부 나오자마자 집어서 훑어본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더럽게 기네.’
어림잡아 보기에도 항목이 수십 가지. 조막만 한 글자를 다 읽기도 귀찮아 발걸음을 되돌렸다.
돌아가 보니 박아연은 발로 땅을 미친 듯이 두드리고 있었다. 교무실 끌려간 아이의 학부모를 연상케 하는 모습. 유선우는 그녀에게 쫄래쫄래 다가가 결과지를 내밀었다.
“여기요. 항목이 뭐가 이렇게 많은지.”
“먼저 확인하겠습니다.”
박아연이 손을 뻗자 공무원이 결과지를 잽싸게 잡아챘다. 이런저런 게 빽빽하게 쓰여 있기는 해도 볼 건 하나뿐. 공무원은 Mana Value 항목을 확인하고 말했다.
“유선우 씨?”
“네.”
“유감입니다.”
“넹?”
“이리 줘봐요!”
박아연이 다급하게 결과지를 가로챘다. 그녀는 불신감이 가득한 눈으로 내용을 훑어봤다. 몇 번이나 봐온 문서인지라 봐야 할 곳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망막에 맺힌 것은 터무니없는 결과였다.
[Mana Value : 0]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박아연이 허망한 낯으로 중얼거렸다. 이내 그녀의 눈에 분노의 불씨가 피어올랐다.
“지금 장난쳐요? 협회가 대체 어디서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하다 하다 각성자 심사에까지 끼어들어요? 당신들 진짜 미쳤어!?”
떠오르는 경우의 수는 둘.
유선우가 정말로 비각성자이거나 협회의 수작이 있었거나. 박아연은 후자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왜 이러십니까? 이 단계에선 끼어들 구석이 없다는 거 아실 텐데요. 괜한 트집은 잡지 마십시오.”
“개소리. 이거 굉장히 실수하는 거예요. 이번 일, 절대로 그냥 안 넘어가요.”
“아니, 진정 좀 하시고….”
유선우는 실랑이를 벌이는 둘을 번갈아 봤다. 돌아가는 꼴만 봐도 결과는 자명하다.
입맛이 쓰기는 했으나 그는 절망하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애초에 심사를 받으면서도 반신반의했으니까.
“저기요.”
괜한 사람에게 성을 내는 박아연을 불렀다. 박아연은 혼란이 가시지 않는지 제 머리를 거칠게 헝클어뜨렸다.
“선우 씨.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하, 망할. 어떻게 이딴 개짓거리를 하지? 걱정하지 마요. 이번에 제대로 뒤엎어서라도 똑바로 처리할 테니까. 제가 안 하더라도 대표님이 하실 거예요.”
“아니, 그게 아니고.”
유선우가 빵긋 웃었다.
“내기 제가 이겼는데요.”
태평하기 짝이 없는 발언에 박아연은 귀를 의심했다. 곧 착각이나 환청이 아님을 깨닫고는 얼이 빠졌다.
‘미친놈인 건 진작 알았는데…!’
***
유선우와 박아연은 그대로 협회 건물을 빠져나왔다. 그동안 둘 사이에 대화는 한마디도 오가지 않았고, 차 안으로 들어가서야 박아연이 말문을 열었다.
“이번에도 어영부영 넘어가지는 않을 거라 믿겠어요.”
“옛적에 각성자 아니라고 말했잖아요. 박아연 씨가 안 믿었을 뿐이고.”
박아연은 짜증을 내려다 문득 생각이 미쳤다.
던전에서 나눴던 대화. 전부는 아니어도 현재 화제에 한해서는 떠올릴 수 있었다.
유선우는 자기가 각성자가 아니라고 단언했었다. 하지만 어떻게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녀는 아직도 반 정도는 협회를 의심하고 있었다.
“당신이 진짜로 일반인이다?”
“네.”
“솔직히 전혀 못 믿겠어요. 일반인이 어떻게 그렇게나….”
“세냐고요?”
“네. 각성한 지 5년 됐다길래 그러려니 납득하고 있었죠.”
유선우가 차 시트를 매만지면서 대꾸했다.
“뭐라고 말해야 하나… 전 김광수 씨가 말했던 사람에 가깝죠.”
“못 알아듣겠는데. 기억 안 나요.”
“각성 안 한 헌터 있잖아요. 거의 총기 전문가라던 사람들. 일반인도 몬스터는 잡을 수 있어요.”
“경우가 다르잖아요. 막말로 총 뺏으면 고블린도 제대로 못 죽일 테고.”
“처음에나 그렇죠. 계속 싸우다 보면 알아서 머리가 돌아가요.”
그는 자신이 성장해온 과정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무른 부위는 어디고 어느 정도 거리가 유리한지. 자기한테는 어떤 무기가 잘 맞고 또 어떤 자세가 능숙한지. 그렇게 하나하나 뜯어고치는 거예요.”
“능력도 없이 그딴 짓 하면 백이면 백, 얼마 안 가서 죽어요.”
“고작 백 명이면 다 뒈지죠, 당연히.”
유선우 같은 재능을 가진 사람이 그리 흔할 리가. 그가 이계에서 칭송받은 데는 다 합당한 이유가 있다.
“하, 무슨 소린지는 알겠는데….”
“제가 살던 데서는 그게 평범한 거였어요.”
이해하기 힘든 발언이었지만 박아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5년간 실종되었던 사람이니 어디 엄한 곳에서 생활했더라도 부자연스럽지는 않았다.
“마력이라는 게 있긴 해도 그건 직접 써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거니까 넘어가고. 어쨌든 비빌 구석은 있을 것 같아요.”
“심사 얘기죠?”“네. 우선 제일 빠른 건 제가 각성하는 거.”
몹시 진지한 어조였다. 그러나 박아연에게는 우습게만 들릴 따름이었다.
“저도 어떻게 됐는지 모르는데 그게 맘대로 되나. 다음은요?”
“정치질 치는 거요. 실력 보여준 다음에 심사 절차가 이상한 거라고 호소하면 되지 않겠어요?”
“으음….”
박아연은 고심에 빠졌다. 아주 불가능한 방법은 아니나 전례가 없는 일. 짧아도 수개월, 길면 년 단위의 시간이 소요될지도 모른다.
애당초 선례를 만들어버리면 뒤처리가 곤란해진다. 협회의 수작도 없었다니 들이받을 명분도 없고.
“다음은요?”
“방법 없으면 그냥 비각성자 헌터 해야죠, 뭐.”
“가장 가능성 있어 보이네요. 조건이 상당히 엄격하긴 한데 선우 씨라면 괜찮을 거고.”
“그럼 이제 아무런 문제 없는 거 맞죠?”
결론이 나오자 분위기가 한결 풀어졌다. 유선우가 내기 결과로 무엇을 시킬까 고민하던 찰나. 깜빡 잊고 말았던 문제가 터졌다.
“아쉽게도 나아진 건 없네요. 최악은 면했지만.”
“왜요? 다 된 거 아닌가.”
“군 복무 기간 동안 할 수 있는 게 너무 많거든요. 그게 다 날아간 거니까.”
“웬 군머요?”
그리 묻자 도리어 박아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맞을 텐데? 통념적으로 견습 기간이라는 거지, 형식적으로는 각성자의 의무인 거라서. 각성자 아니면 군대 가야죠. 헌터가 되려면 전역 후에 따로 교육도 받아야 하고요.”
이게 무슨 개소리야.
군대 갔다가 공익까지 뛰란다.
유선우는 떨리는 목소리로 확인 차 물었다.
“……진짜?”
“혹시 몰랐어요?”
유선우가 머리를 끌어안고 울부짖었다.
“아아아아아아아아! 망하아아아아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