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화
계약
“…예?”
“계약한다고요. 싫으세요?”
“아, 아닙니다!”
김정수가 답지도 않게 고개를 도리도리 가로저었다. 박아연은 대표의 당황한 모습이 낯설어 눈만 깜빡거렸다.
“교육 기간은 어느 정도까지 줄일 수 있죠?”
“절반까지는 가능합니다.”
“3개월이라. 그것도 길기는 한데 감지덕지네요. 아니, 딱히 의미도 없겠구나.”
유선우의 시원시원한 반응에 김정수가 인상을 찌푸렸다. 굳이 제 발목에 족쇄를 채우겠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현명한 결정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어째서죠? 절 떠보시는 겁니까?”
“귀찮게 뭐 하러요? 어차피 헌터 할 예정이기도 했고, 소속은 어디든 상관없거든요. 부탁받은 것도 있어서.”
“부탁 말입니까? 혹시 박아연 씨가….”
“글쎄, 어떨까요?”
유선우의 입가에는 장난스러운 미소가 맺혀 있었다. 반면에 눈빛만큼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잠자코 듣고만 있던 박아연이 가늘게 몸을 떨었다.
이건 빚이다. 여태껏 유선우가 진 신세를 상환하고도 잔여가 남아도는 빚.
덕분에 클랜 내에서 그녀의 입지가 강해지겠지만 그만큼의 도움을 돌려줘야 하리라.
“아, 맞아. 조건이 두 개 있어요. 하나는 조금 어려울지도 모르겠지만.”
연이은 의미심장한 발언에 김정수가 마른침을 삼켰다. 오히려 이게 본론일지도 모르겠다 싶어서.
그의 예상대로 핵심은 지금부터였다.
“복잡하게 말할 것 없고, 우선 첫 번째. 저는 웬만하면 단독행동을 할 겁니다.”
“이유를 들어볼 수 있을지요.”
“불편하잖아요. 어디 가라, 뭐 해라. 놀고먹겠다는 게 아니라 짜증 나서. 아니면 제가 팀을 꾸리고 싶어질지도 모르죠.”
“음….”
김정수는 턱을 매만지며 고민하는 시늉을 했다. 애당초 상정하고 있던 요구다. 바로 받아들이지 않은 까닭은 양보한다는 이미지를 주기 위함.
“알겠습니다. 수료 후에 권한을 드리죠. 교육과정 중에는 협회에 책 잡힐 구석을 주지 않는 게 바람직하니까요. 클랜 차원에서는 물론이고 유선우 씨에게도요.”
“그 정도로 억지 부릴 생각은 없어요. 내부 잡음은 괜찮으시겠어요?”
“청일은 직책은 딱 떨어지더라도 실질적으로는 그리 수직적인 단체가 아닙니다. 애초에 헌터 사회라는 게 철저한 실력주의이니까요.”
“그럼 두 번째. 솔직히 이게 가장 중요해요. 허가를 받고 싶습니다.”
“허가라 하시면?”
유선우의 입에 짙은 미소가 걸렸다.
“활동하면서 방송 좀 해도 될까요?”
“……방송이요? 아, 혹시 공인이셨습니까?”
김정수는 유선우에 관한 기록이란 기록은 전부 알아보고 왔다. 혹시나 빠뜨린 정보가 있나 싶어 물어보니 예상치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공인까지는 아니고요. 파프리카TV BJ였죠.”
그제야 몇 줄의 정보가 김정수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겨우겨우 찾아낸 선우라는 BJ에 대한 정보. 본명을 쓸 수야 있겠다만 우연이라고만 생각했었다. 아니면 동명이인이라던가.
‘그게 진짜였을 줄이야. 또 실책이군.’
사실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유선우의 시청자가 수천수만 명 있던 건 아니었으니까.
그의 사진도 인터넷에 퍼져있지는 않았다. 실종 사건은 몬스터와 각성자의 출현으로 자연스레 묻혀버렸고. 하도 오래된 BJ라 사이트에도 유의미한 정보는 남아 있지 않았다.
“딱 말씀해주세요. 가능?”
유선우가 생기 넘치는 표정으로 재차 물었다. 김정수는 전에 없이 결연하게 대답했다.
“어떻게든 비벼보겠습니다. 모든 인맥을 다 써보죠.”
“해보실 거냐는 게 아니라 가능하시겠냐는 겁니다. 길게 말했지만, 이게 안 되면 말짱 도루묵이거든요.”
“가능합니다. 타 클랜에서 밥 먹듯이 하는 요구에 비하면 훨씬 간단합니다.”
“정말요?”
확인 차 던진 말에 김정수가 프레젠테이션이라도 하듯이 설명했다.
“협회에 굽히는 게 출혈은 컸지만 그게 다 빚 아니겠습니까. 인터넷 방송쯤이야 이자 수준이죠. 여러 제약은 있겠습니다만, 좋은 방향으로 이끌면 저희 클랜에도 플러스가 되어줄 테고요.”
“좋아요.”
짝!
결론이 떨어짐과 동시에 유선우가 손뼉을 쳤다.
“나머지 사항은 천천히 듣기로 하죠. 앞서 말한 두 조건 이외에도 확인은 하겠지만, 알아서 선은 지키실 거라 믿습니다. 연봉이나, 계약 기간이나. 계약서는 교육 기간에 쓰는 거죠? 그때까지 맞춰봐요.”
“예. 박한 대우라 생각지는 않으실 겁니다.”
“그리고 무슨 검사 받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일정은 부하를 통해 전해드리겠습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김 대표님.”
대화가 정리되자 셋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몸을 일으켰다. 김정수와 박아연이 나간 뒤, 유선우는 고소한 웃음을 흘렸다.
‘방송이 고작 이자 수준은 아닐 텐데.’
관리자에게 걸었던 조건인 던전 내 인터넷 개통. 그건 실시간 던전 방송이라도 해보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활용 방법은 그 외에도 무궁무진하다. 던전 공략에도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도움이 되어줄 터. 공익에 연연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좋은 게 좋은 거다.
‘문제는… 쓰바.’
집안에서 향해오는 시선 탓에 뒤통수가 간질간질하다. 뒤를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가족이 무언으로 설명을 요구하고 있었다.
***
유선우는 헌터 일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결과만 말하자면 반응이 그리 좋지는 않았다.
워낙 급작스럽게 진행됐으니 당연한 일.
충분히 시간을 들이고 실력을 입증해나갈 필요가 있었다.
그는 가족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고자 밖으로 나섰다. 스마트폰을 꺼내 몇 없는 연락처를 뒤져보기를 잠시. 맨 윗줄에 있는 김광수의 이름이 눈에 밟혔다.
‘맞다. 이 사람이 있었지.’
연락하긴커녕 번호를 등록해둔 것도 잊어먹고 있었다. 때마침 한가해 전화를 거니 끊어지기 직전에 연결되었다.
- 예. 누구십니까.
“접니다.”
- 아, 연락 언제 주시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다리기는. 저 누군지 모르시죠.”
- 예에~ 아는 척하면 다 넘어가더랍니다.
역시는 역시 역시다. 돌아와서 나름 사람을 만나긴 했어도 이만한 미친놈은 없었다.
“혹시 바쁘세요?”
- 인생 중 가장 바쁩니다. 끊어도 됩니까?
“일하고 계시나 보네. 그럼 됐고요.”
일은 아니고요. 지금 PC방 와 있습니다.
“엥. 수요일 3시에요?”
어… 3시 34분이네요. 반올림하면 4시입니다.
꼭 그렇게 따져야 하나.
일단은 참고 대화를 이어갔다.
“그게 아니라 김광수 씨, 군인 아니에요? 휴가라도 받으셨나.”
- 영구 휴가받았습니다.
“…네?”
- 그만뒀습니다.
김광수에게서 군인을 빼면 뭐가 남는 걸까.
***
WIN!
모니터에 떠오른 글자를 보며 김광수가 싱글벙글 웃었다.
“캬, 역시 서든은 민간인이 해야 꿀잼이지 말입니다.”
“민간인이 아니었던 적이 없어서 모르겠는데 꿀잼이긴 하네요.”
“한 판 더 어떻습니까?”
유선우는 떨떠름한 낯으로 전직 하사를 곁눈질했다. 일 때려치우고 게임에서 총이나 쏘고 자빠졌으니. PC방비를 내준 건 고맙다만 아무리 봐도 오늘만 사는 놈 같다.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집안 상태도 엉망인데 백수 둘이서 서든이나 하고 있다. 문제는 이게 또 미치도록 재밌다는 것. 시간을 보니 벌써 7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혹시 일 왜 그만뒀는지 물어보면 분위기 싸해지려나.’
평소 같았으면 침울해하든 말든 신경도 안 썼을 터. 하지만 이 사람 앞에서는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면 이번엔 겟엠 하시죠. 제가 중딩 때만 해도 훨훨 날아댕겼습니다.”
“저기요. 조금….”
“어, 뭡니까? 쫄?”
사람이 너무 해맑다. 같이 있기만 해도 학창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 전혀 닮지 않았음에도 예전 최현석의 얼굴이 겹쳐 보일 지경이다.
그렇게 우물쭈물하다가 시간이 이렇게나 지나버렸다. 유선우는 더는 안 되겠다 싶어 본론을 꺼냈다.
“일은 왜 그만뒀어요?”
“일 말입니까. 별 건 아닙니다.”
예상대로 김광수의 표정이 오묘해지기 시작했다. 이상한 점은 침울함보다는 짜증이 느껴진다는 것. 별 것 아니라던 김광수는 이를 바득바득 갈기 시작했다.
“그냥 X 같게 굴더랍니다.”
“사회생활이 다 그렇잖아요.”
“시말서나 삽질은 이해합니다. 의도가 어쨌든 군이라는 집단에서 독단적인 행동을 했으니 말입니다.”
“어, 음. 죄송합니다.”
전부 무사하긴 했으나 던전 사건의 원흉은 자신. 유선우가 솔직하게 사과하자 김광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선우 씨가 왜 죄송합니까?”
“저 때문에 가셨던 거잖아요. 던전.”
“아, 아아. 그러고 보니 그랬습니다.”
눈앞에 있는 탓인지 혹은 사이가 가까워진 탓인지. 어째 거짓말이 굉장히 허접하다.
“여기까지 와서 뭘 숨기시나. 쓴소리 안 할 테니까 말해보세요.”
“크흠. 그게 말입니다.”
김광수가 시선을 회피하더니 어색하게 웃었다.
“그때는 그냥 여자분이 이쁘셔서… 그런 거 있잖습니까. 극한 상황에서 싹트는 찐한, 으음.”
“그러셨구나.”
진짜 미친놈이긴 한 모양이다.
어쩐지 던전에서 별 폼을 다 잡더라니.
총 쏘면서 석양이니 뭐니 지랄할 때 알아봤어야 했다.
‘그러고 보니 이 새끼….’
박아연 앞에서는 쿨내 찐하게 풍겼었다. 뒤늦게 진상을 알아차린 유선우가 무감정하게 김광수를 쳐다봤다. 눈빛이 따가웠는지 김광수가 다급하게 말을 돌렸다.
“하, 하여튼. 하다 하다 패드립을 치는 게 아닙니까. 아무리 군대라도 쓰발, 할 말이 있고 못 할 말이 있다는 겁니다.”
“네. 이해합니다. 당연하죠.”
“제가 관상 좀 볼 줄 아는데 고 새끼는 분명 마이충입니다.”
이상한 비유인데도 더없이 와닿았다.
관상 볼 줄 안다는 말이 허풍은 아닌 듯했다.
“어우, 확 빡치네. 그럼 저는요?”
“지금 진지한 거 안 보이십니까? 애초에 포부를 가지고 선택한 직업도 아니었습니다.”
유선우는 이전에 들었던 말을 곰곰이 떠올렸다. 분명 전 여자친구가 군복 페티시였다고 했었던가. 결국은 즐거운 성생활을 위해서 고른 직업이었다는 얘기다.
‘군복이야 민간인도 입을 수 있지만… 대충 이해는 가.’
상황극의 리얼리티가 다르다. 언제 헤어졌는진 몰라도 한동안은 뜨겁게 놀지 않았을까.
“다들 애 같다고는 했습니다만, 그냥 애로 살랍니다. 코난이랑 반대로 사는 거죠. 가사딘의 말마따나 힘의 균형은 유지되어야 하니 말입니다.”
“별 걸 다 갖다 붙이시네.”
유선우가 실소를 흘렸다. 그는 심각한 대화를 진작부터 포기하고 있었다.
‘뇌 구조부터가 일반인이랑은 다르니까.’
일반인의 언어를 쓸 리가 만무. 이쯤 되면 각성자가 아닌지 의심될 지경이다.
“하아, 약간 흥분한 것 같습니다. 방금 여쭤보신 거, 듣고 싶으십니까?”
“관상 말이죠? 네. 그런 거에 나름 조예가 깊어서.”
“으흠. 흐으으음.”
김광수가 머리를 양옆으로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눈썹을 찡그리다가 턱을 매만지다가.
유선우가 슬슬 짜증을 낼 무렵에 입이 열렸다.
“잘 모르겠는데요. 겟엠이나 합시다.”
한 대쯤 때려도 괜찮을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