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화
관리자
눈꺼풀을 수도 없이 여닫고 까지라 비볐다. 하지만 그런다고 상황이 달라질 리가 만무했다.
[색욕의 지배자가 침을 질질 흘립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언제나처럼 기분 나쁜 메시지. 그리고 비웃는 기색인 관리자의 모습뿐.
“불렀다.”
“에, 에이. 잘못 불렀겠지. 섭섭하게 왜 이래? 간다니까 삐졌어?”
“응. 걔 맞아.”
“후욱! 후욱!”
유선우는 거칠게 콧김을 내뿜고는 목청이 터지라 외쳤다.
“당장 꺼지라 해!”
“나보단 낫겠다더니. 싫은가?”
“좋겠냐? 넌 좋아? 재밌냐고. 빨리 치워보라고!”
욕지거리까지 뱉고 나서야 관리자가 화사하게 웃었다. 그녀가 손을 휘젓자 메시지가 비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색욕의 지배자가…….]
[색욕의 지…….]
[색욕의…….]
마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는 모양새. 유선우는 등골에 소름이 돋아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되었다.”
5초가량이 지나자 말소리가 귓가에 앉았다. 눈을 열어보니 관리자의 말대로 메시지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에 의기양양해진 그녀의 얼굴이 보일 따름.
“자, 이제 대화를 시작하지.”
***
대화는 예상보다도 길게 이어졌다.
세 번이나 리필한 커피잔을 내려놓은 유선우는 관리자를 쳐다봤다.
‘예쁘긴 하네.’
단아한 외모에 차분한 분위기. 겉모습은 흠잡을 구석이 없다. 입 벙긋하면 예쁜 멍청이로 격하된다는 게 문제지만.
이윽고 그녀의 입술이 벌어졌다.
“그러니까, 던전에다 인터넷을 연결해달라?”
“몇 번을 말해?”
인터넷의 연결. 그것이 유선우가 활동의 대가로 제시한 조건이었다. 이민의 꿈은 물 건너갔어도 공짜로 일해줄 생각은 없었다.
“그래. 못할 건 없다. 오히려 인간들의 던전 공략에 큰 힘이 되어주겠지. 다만….”
관리자 역시 어지간한 조건이라면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제시된 조건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고.
그런데도 대화가 길어지고 있는 건 그녀의 의심병 탓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찜찜한데.”
“아니, 내가 무슨 인터넷으로 지구 정복이라도 하나. 애초에 어떻게 해?”
“어째 욕심이 너무 없다 싶어서 말이다. 오래 살면 너도 나처럼 되니 이해하거라.”
“답답해서 이러는 거지. 오히려 궁금하다. 내가 뭘 욕심내야 되는데?”
“뻔한 것만 해도 여럿 있지 않으냐.”
관리자가 테이블을 툭툭 두드리며 예시를 나열했다.
“부나 명예, 혹은 권력이나 이성일 수도 있겠지.”
“돈은 내가 벌면 되고, 좋은 이미지는 가져봤자 귀찮기만 하지. 권력은 의미가 있나? 대통령 뚝배기 깨도 아무도 나 못 잡아갈 텐데.”
유선우가 혀를 차고 말을 이었다.
“여자는 참나, 내가 엘프도 만나본 사람이야. 까먹었어?”
하나하나 따박따박 반박하고 난 뒤.
드디어 관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으으음… 인터넷만 연결해주면 어디 안 가는 거 맞지?”
“생각해보고.”
“대답이 신통찮구나. 그야 내가 아쉬운 입장이긴 하다만.”
“쫄리면 뒈지시든가.”
사실 유선우로서도 반쯤은 되는대로 던져본 말이었다. 그런데 상대의 반응으로 보아 정말로 해줄 생각인 듯했다.
“내가 부탁하고도 말하기는 뭐한데, 그게 돼? 던전이든 뭐든 다 각 차원 아닌가?”
반신반의한 질문에 관리자가 픽 코웃음을 쳤다.
“어렵긴 하나 못할 일도 아니지. 걱정할 필요는 없다.”
“걱정보다는 무슨 문제 되는 거 아니냐고.”
“애초에 게이트라는 게 다 내 허가도 없이 멋대로 열어대는 거다. 날 끔찍이도 싫어하는 놈들이 지구에 구멍을 내는 셈인데, 내가 자제할 필요가 있을까.”
질문과는 핀트가 어긋났으나 만족스러운 대답이다. 유선우는 그러려니 머리를 주억거렸다.
“그럼 나는 청소 돕고, 너는 인터넷 열고. 이렇게 쇼부 본 걸로 알면 되지?”
“으음….”
아직도 주저하는 낌새.
귀찮음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던 때였다.
“딜.”
“딜.”
정상회담의 끝을 알리는 말. 그제야 유선우가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러모로 짜증이야 났다마는 유익한 대화였다. 흐릿하던 진로가 뚜렷한 현실성을 띠기 시작했으므로.
“이제 보내줘.”
“좀만 더 있다 가면 안 되나?”
“왜. 친구 없어?”
괜스레 퉁명하게 묻자 고개를 홱 돌린다. 반응으로 미루어보아 뼈라도 맞은 모양이다.
“어째 하는 짓이 아싸 같더라니.”
“……지는 뭐가 잘났다고.”
처음부터 고수해온 말투까지 버리고 툴툴대는 꼴이란. 유선우가 피식거리니 관리자가 헛기침하며 컨셉을 다잡았다.
“하여튼 더 있다 가거라.”
그는 거절하려다 말고 잠시간 고민했다. 당연하게도 개인적인 원한은 여전히 남아 있다.
하지만 지구가 개판이 난 건 확실한 결과. 431-9 차원에 가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게이트 때문에 진작 죽었을지도 모르지.’
아니꼽기는 해도 애증의 대상이라고 할까. 묵은 감정과 싸가지만 제외하면 나쁘지 않은 상대다. 그 둘을 쳐내면 얼굴과 몸매만 남으니까.
고민 끝에 유선우가 별수 없다는 듯 혀를 찼다.
“의자 바꿔줘. 푹신한 걸로.”
***
꿈속에서의 만남이 끝나고 아침이 밝았다.
유선우는 식탁에 앉아 졸린 눈을 비볐다.
‘푹 잤는데도 피곤하네. 말 더럽게 많아.’
도대체 몇 시간을 떠들었는지. 씹어 죽일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거리감이 한없이 가까웠다. 오랫동안 별의별 모습을 다 보여줬기 때문이리라.
‘내가 남 말할 호구가 아니구나.’
우선 대화하면서 앞으로의 방침도 정해뒀다.
거래는 했다만 죽어라 싸돌아다닐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인터넷 개통도 당장은 어렵다고 하니 편하게 놀고먹을 예정.
아니, 그럴 예정이었다.
“백수가 밥도 잘 먹네.”
“쿨럭! 컥, 켁켁!”
어머니가 툭 던진 말에 아버지의 목에 사레가 들렸다. 눈물까지 찔끔 흘리기에 유선우가 물을 건네줬다.
하지만 어머니의 눈에는 그마저도 못마땅하게 보인 모양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밥 나와, 물 나와. 댁이 최고야.”
“푸흡!”
“하다 하다 식탁까지 더럽히고. 또 내가 닦아야지.”
“아니, 이 여편네가! 입에서 나오면 다 말인 줄 알아!”
아침부터 집안 분위기가 개판이다. 유선우는 입맛이 뚝 떨어져 밥알만 깨작거렸다.
‘광역딜 진짜….’
어제 막 돌아온 백수로서는 가시방석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헌터 노릇을 할 셈이니 직업에 대한 걱정은 없다마는. 한동안은 휴식할 겸 게임 좀 하고 친구도 만날 생각이었다.
‘근데 이대로는 등짝 처맞겠어.’
재회의 감동도 한 달이 가지 못할 터다. 그는 아버지와 싸잡혀서 욕먹는 미래를 상상해보곤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선우야, 더 안 먹니?”
“입맛이 좀 없어서요. 피곤한가 봐요.”
“그래. 참, 침대도 하나 들여야 되는데. 일단 안방 가서 쉴래?”
“괜찮아요. 할 게 얼마나 많은데요.”
자리를 벗어나기 위한 빈말은 아니었다. 고인 신세에서 벗어나야 하고, 스마트폰도 구해야 한다. 더해서 옛 지인들에게 연락을 돌리기도 해야겠고.
‘박아연 씨가 있어서 다행이지.’
공직자 인맥이 있다기에 여러 귀찮은 절차를 맡겼다. 자기 일을 떠넘긴 셈이지만 편한 길을 마다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다른 문제가 한 가지 있으니.
‘설마 선혜한테 폰 사달라고 해야 하나?’
***
유선우가 지구 생활을 재개한 지 나흘째. 그의 동생인 유선혜는 회사에서 긴 휴가를 받았다.
본인의 의지가 아니라 클랜장에게서 쉬라는 연락이 날아온 것. 이를 전해 들은 부모님은 잘렸나 싶어서 크게 경악했다.
‘오해 풀리니까 아버지가 굉장히 안심하셨었지.’
안도하는 표정이 유선우에겐 충격적이었다. 자식이 해고당하면 부모가 걱정하는 건 당연하지만, 걱정의 방향이 조금 다른 듯해서.
그리고 현재.
유씨 집안 남매는 휴대폰 대리점에 와 있었다.
“이건 어때? 우리 회사에 쓰는 사람 많더라.”
유선혜가 전시된 모델 하나를 가리켰다. 동글동글한 디자인이 인상적인 기종. 사람 눈은 다 똑같은지 인기라는 꼬리표도 붙어 있었다.
“괜찮긴 한데….”
“별로야? 스펙은 신경 안 써도 돼. 요즘 나오는 기종 중에 후진 게 얼마나 있다고.”
“아니, 그게 아니라. 가격대가 좀.”
가격표를 본 유선우가 기겁했다.
무려 94만 원. 94원도 없는 그로서는 손이 달달 떨리는 액수였다.
‘진짜 미쳤나?’
어떻게 스마트폰은 아직도 가격이 이따위인지. 이계에서 금화 펑펑 쓰고 다니던 시절이 그리울 지경이다.
“돈은 신경 안 써도 된다니까.”
“그게 어떤 돈인데 신경을 안 써. 피쳐폰은 안 파나?”
최대한 저렴한 기종을 찾아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대리점 직원이 다가와 넉살 좋게 말을 걸었다.
“남자친구분한테 선물하시나 봐요?”
“남자친구 절대 아니고 그냥 오빠예요.”
“아, 아아. 그러시구나.”
유선혜의 대답에 직원의 미소가 약간 깨졌다. 응접하는 모습으로 보아 숙련자는 아닌 모양이다.
‘진짜 죽고 싶다…….’
차라리 서로가 서른 즈음이었다면 덜 쪽팔렸을 터. 그런데 유선혜는 여전히 고등학생 태가 남은 21살이다.
연상의 가족이 어린 동생에게 비싼 폰 선물 받는 기분이란…….
싼 것으로도 괜찮다, 아빠 용돈 깎아서 사주겠다. 옥신각신한 뒤에 보급형 스마트폰을 구매했다. 동생이 카드를 건네주는 모습은 차마 보기가 힘들었다.
“오빠, 옷이랑 컴퓨터도 사야지.”
“…컴퓨터는 괜찮아.”
옷은 어쩔 수 없었다.
***
폰이 개통되긴 했다만 온종일 붙잡고 있지는 않았다. 연락을 돌리려 해도 연락처가 없었다. 요즘 시대에 번호를 외우고 다니는 사람은 드무니까.
유선우 역시 가족 외의 전화번호는 몇 알지 못했다. 그중 하나는 연락하기 어려운 사람이고, 하나는 번호를 바꿨더라.
결과적으로 연락이 닿은 건 한 명뿐이었다.
“진짜 유선우네.”
머리를 금발로 물들인 남자가 걸어와 중얼거렸다. 학생 시절 유선우의 절친이었던 최현석. 번호 끝자리가 헷갈렸으나 다행히 유선혜를 통해 연락이 이어졌다.
“선혜도 그러더라. 가짜 유선우도 있어?”
“한두 명 만나봤지. 사실 이번에도 별로 기대 안 하고 왔거든.”
“허, 별 미친놈들이 다 있네. 나 사칭해서 뭐 한다고.”
“네가 자주 그랬잖냐. 뭘 하든 더한 놈은 있을 거라고. 그게 그렇게 와닿더라.”
최현석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의 입에는 담배 한 개비가 물려 있었다.
‘음.’
달라진 친구를 훑어본 유선우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예상했던 것보다도 어색하고 낯설다. 흡연은 둘째치고서 외견이 문제다.
‘뭐 이렇게 훤칠해졌어.’
담배만 피워도 화보.
유선우는 흡연자에 대한 선입견은 없는 편이었다. 다만 담배 빨면서 폼 잡는 걸 꼴값이라고 여길 뿐.
그런데 미남이 피우니 분위기부터가 다르다. 원래부터 곱상한 외모였었는데 나이를 먹더니 제대로 물이 올랐다.
“혹시 아이돌 뭐 그런 거 하냐?”
“개소리하는 거 보니까 이제 좀 진짜 같다.”
“아니야? 그럼 모델인가.”
“응, 아니야. 선혜한테 못 들었나 봐?”
“남이 뭐 하고 다니는지 떠들고 다닐 애는 아니지.”
“맞네. 명함 줄게, 잠깐만.”
최현석이 담배를 꼬나물곤 지갑을 꺼내기 시작했다. 자연스러우면서도 여유 넘치는 언행. 이전과는 달리 사회인의 느낌이 물씬 났다.
‘얘가 이렇게 변했을 줄이야….’
유선우는 옛 기억을 더듬었다. 그가 알던 최현석은 본래 겉멋이 가득 든 팔푼이였다.
- 선우야, 나는 대학은 안 갈란다!
- 공부해서 좋은 대학 나오고, 대기업 들어가는 게 과연 좋은 인생일까?
이리저리 치여 살다가 죽는 게 의미가 있기는 할까?
그때도 공감은 전혀 안 됐었다. 최현석의 모의고사 성적은 7.5등급이었으니까. 듣다 듣다 어이가 없어서 쓴소리 한 번 했었다.
좋은 대학은 너 안 받아줘!
넌 대기업에 이력서도 못 넣어!
그래서 오지게 싸웠던 날이 엊그제 같거늘. 5년 사이에 가족뿐만 아니라 친구마저 이리도 변해버렸다.
새삼스레 변화를 느끼고 있자 최현석이 명함을 내밀었다. 유선우는 명함을 받아들곤 앞뒤로 돌려가며 살펴봤다.
“응?”
CHC 클랜, 치프 헌터 최현석.
지갑 속에 잠든 박아연과 유선혜의 명함과 다를 바가 없었다.
‘헌터 얼마 없는 거 아니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