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화
던전
기묘한 정적이 지나간 뒤. 휑해진 부락에 새로운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뉴페이스는 신장이 2.5m는 될 법한 오크. 어깨에는 나름대로 멋들어진 철판이 덧대어져 있었고, 체구에 어울리는 대형 도끼가 손에 쥐어져 있었다.
오크 제너럴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동족이 보이지 않아 적잖이 당황한 낌새였다.
문득 놈과 유선우의 눈이 마주쳤다. 그제야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걸까. 오크 제너럴의 낯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크르어어어어!”
동굴을 뒤흔드는 흉포한 함성. 살의 가득한 포효에도 유선우는 귀를 후벼댈 따름이었다.
“장군감이 따로 없네.”
“장군 맞습니다. 제너럴이지 않습니까.”
“…몰라서 그런 거 아닌데요.”
“하하. 말할수록 추합니다.”
“아니, 진짜로.”
유선우는 정색까지 해가면서 부정했다.
오크 제너럴이 다시 한번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크르흐어어어어!”
“히끅!”
방금보다도 확연하게 큰 울음에 박아연이 움찔거렸다. 한편 김광수는 냉정해졌는지 허허 웃는 여유마저 보였다.
“제너럴 감이 따로 없습니다.”
“…….”
“아무고또 말 모타죠?”
유선우가 눈에 핏줄을 세우며 김광수를 노려봤다. 까면 깔수록 새로운 면이 나오는 양파 같은 남자. 문제는 안으로 들어갈수록 쉰내가 풀풀 난다는 거다.
‘참자, 참아.’
이 정도는 저쪽 차원에서 겪은 일에 비하면 약과. 그는 1년이 10년 같던 하루를 떠올리며 꾹 참았다.
“던전 나갈 준비나 해요.”
유선우가 던전의 주인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열 받은 감정이 묻어나오는 빠른 발걸음.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박아연이 입술을 짓씹었다.
‘한심해.’
박아연은 던전에 처음 와본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경험은 풍부한 편이었다. C급 던전은 국내에서도 수두룩하게 찾아볼 수 있으니까. 그녀는 성실하게 실적을 쌓아서 B급까지 승급한 케이스였다.
그런데도 혼자 겁에 질려 있다니. 헌터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정신 차리자.’
헌터 일을 해온 시간이 어디 하루 이틀인가.
지금껏 넘어온 사선이 얼마나 되는가.
상황이 워낙 특수해서 주눅이 들었을 뿐이다.
박아연은 술렁이는 마음을 애써 다잡고 유선우에게 다가갔다.
“선우 씨, 저도 도울게요.”
“그래요?”
그리 물으며 되돌아보는 유선우의 표정은 몹시도 딱딱했다. 여태까지와는 딴판으로 심각한 모습. 그게 박아연을 불안케 했으나, 그녀는 주먹을 움켜쥐어 두려움을 떨쳐냈다.
“어쩔 수 없네. 알았어요.”
결연한 얼굴을 본 유선우가 깊게 한숨 쉬었다. 그는 손가락을 뻗어 김광수를 가리켰다.
“그럼 한 대만 때려줘요.”
“…잘못 들었어요?”
“저 사람 명치 한 대만 때려달라고요. 억 소리 나게.”
“저 말입니까?”
지목된 김광수가 어리둥절한 소리를 냈다. 박아연은 멍청하게 서 있다가도 인상을 구겼다.
“장난치는 거 아니에요. 그야 선우 씨가 보기에는 못 미더울 수도 있겠지만… 이번은 아니라구요.”
“저도 장난 아닌데요. 제일 급한 일 맡긴 건데.”
유선우가 싱거운 웃음을 흘렸다.
“싫으면 그냥 보기나 해요.”
오크 제너럴을 쳐다보며 유려하게 손을 휘젓는다. 그의 지휘를 따라서 동굴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진원지는 수십의 마력창이 꽂혀 있던 부락의 벽. 창들이 잘게 경련하면서 하나하나 뽑혀 나왔다.
심상치 않은 현상임은 명백했다. 위험을 감지한 오크 제너럴이 땅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크워어어어어!”
거대한 덩치임에도 움직임은 재빨랐다. 놈의 눈에서는 타오르는 듯한 살의가 일렁거렸다.
유선우는 거리가 가까워짐에도 동요 없이 손만 움직였다. 선명한 푸른빛을 머금은 창. 그 전부가 허공에 비스듬히 눕혀져 포진되었다.
부우웅!
그가 벌레 치우듯 손을 떨치자 창이 일제히 쏘아졌다. 오크 제너럴은 그에 맞서 도끼를 휘둘렀다.
조금이라도 피해를 줄이겠다는 본능적인 행동. 그러나 도끼는 창에 닿자마자 부서져 파편으로 변했다.
푸욱!
처음으로 뚫린 부위는 어깨였다. 덧대어져 있던 철판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근육을 간단하게 뚫어낸 뒤. 창은 지면에 박혀 오크 제너럴의 몸을 고정했고, 큼직한 과녁에 연달아 창이 꽂혔다.
투욱.
자루만 남은 도끼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오크 제너럴은 마지막 숨을 흘리고는 모든 동작을 멈췄다.
유선우는 고슴도치 꼴이 된 시체를 눈에 담았다. 그걸 보면서도 그는 일말의 연민이나 혐오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러기엔 너무 익숙해져, 그의 표정은 담담할 따름이었다.
[던전 내 모든 적 처치 완료]
[던전을 클리어했습니다.]
떠오르는 문구를 무감정하게 바라봤다. 게임처럼 보상을 주는 것 같지도 않고. 만일 준다고 해도 그리 기대가 되지 않았다.
유선우가 등을 돌리려는 순간이었다.
[생명을 탐하는 자가 혀를 찹니다.]
[만년설의 수호자가 당신의 활약에 통쾌해합니다.]
[색욕의 지배자가 당신의 팬티를 보고 싶어 합니다.]
[귀환 게이트가 열립니다.]
“응?”
***
박아연은 불과 3초 전만 해도 압도되어 있었다. 유선우의 화려한 기술에 눈이 현혹된 것이었다.
상대적인 무력감과 함께 느껴지는 살았다는 안도감. 다리가 풀리지 않은 것이 용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유선우가 돌발행동을 시작했다.
“이, 이 미친 놈들아아아아!”
느닷없이 노발대발하며 울부짖는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다 삿대질하기까지. 그가 이만큼이나 감정을 드러내는 모습은 또 처음이었다.
“선우 씨, 왜 그래요?”
박아연의 표정에 짙은 근심이 어렸다. 오늘 처음 만난 사이지만 그녀에겐 유선우가 친구처럼 가깝게 느껴졌다. 던전에서의 시간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농밀했기 때문이다.
‘사실은 엄청 무리했던 거 아닐까?’
합리적인 추론이다. 자신만 해도 능력을 쓰다 보면 금세 심신이 허해진다. 유선우라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터다.
박아연의 염려가 더해지는 한편.
김광수 하사의 마음은 또 복잡했다. 나타난 귀환 게이트를 바라보는 눈빛이 고즈넉하다.
‘시말서 쓰겠다.’
눈물 한 방울이 땅을 적셨다.
던전을 공략했는데도 누구도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가장 심각했던 것은 단연코 유선우. 그는 동굴을 부술 기세로 난리 치다가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이 새끼들은 왜 따라온 거야!’
이계에서 활약하며 관리자들의 도 넘은 관심을 받았던 몸. 이제야 관음증 정신병자들한테서 벗어나나 싶었건만. 아무래도 섭섭해할까 봐 따라온 모양이다.
‘무슨 처음 보는 놈도 있네. 씁…….’
진짜로 콱 죽어버리고 싶다. 아마 평생 반길 일이 없을 것이다. 인터넷의 신이 던전에 광랜을 연결해주지 않는 이상은.
‘얘네는 다 한가한가? 왜 나한테 붙어서 이러는 거야.’
이 중에는 지구의 관리자도 있을 게 뻔했다.
이렇게 처노니까 지구가 개판이 된 것이리라.
‘도움이라도 되면 불평은 안 하지.’
개뿔도 도움이 안 되니까 이러는 거다.
뭐만 하면 사사건건 참견해오더라.
말하는 CCTV,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처음엔 말만 잘 들으면 되겠구나 싶었었다. 전지전능하다고 착각했었으니까.
그렇게 죽을 뻔한 게 몇 번인지. 심지어는 고의적으로 엿 먹이는 놈도 있었다.
‘색욕 쟤는 그냥 무서워.’
두 주먹을 움켜쥐고 부들거리기를 한참.
조심스레 다가온 박아연이 말을 걸었다.
“괜찮아요? 이제 나가야죠.”
“전혀 안 괜찮은데요. 진짜 죽어버리고 싶-”
유선우는 말하다 말고 돌처럼 굳었다. 나간다는 말을 듣자 하나의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여기가 하위 차원이라서 그런가?’
여태까지 알아본 결과, 관리자 사회는 철저한 계급제다. 그렇기에 고만고만한 것들은 상위 차원인 지구에 접근할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은 하위 차원인 던전에 들어와 있으니, 허접한 관리자들이 말을 걸어와도 이상하지 않은 셈.
‘지구보다 윗선은 걱정 안 해도 되겠지.’
윗선에서 관심을 보였다면 옛적에 큰일이 터졌을 터다. 5년간 그런 낌새는 없었고, 관리자들은 관음만 했다.
즉 그놈들은 죄다 지구의 관리자보단 허접한 놈들이었다는 얘기다.
‘당연히 본인만 빼고.’
결론을 내린 유선우가 번쩍 머리를 들었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일어나 게이트를 향해 냅다 달려갔다.
“어….”
유선우를 부축하려던 박아연의 손은 갈 곳을 잃었다. 그녀는 멍하니 눈을 깜빡거리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머리가 아픈 거였구나.’
박아연은 알아서 납득하고 유선우의 뒤를 따랐다.
게이트를 넘자 순식간에 풍경이 바뀌었다. 눈앞을 채우는 현대의 경치. 폐부로 들어오는 탁한 공기마저 반가워 눈물이 흘러나왔다.
‘다시는 이딴 짓 하지 말자. 진짜로.’
유선우는 여러 가지 의미로 이레귤러였다. 비슷한 놈이 둘이나 있으면 속 터져 자살하고 말지 않을까.
‘이번엔 또 뭘 하는 건지.’
박아연은 유선우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는 한창 개짓거리를 벌이고 있었다.
휙휙!
미친 사람처럼 고개를 좌우로 돌려댄다. 무언가를 찾는 낌새였는데 허공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내 유선우의 움직임이 딱 멈췄다. 그가 주먹을 움켜쥔 채로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찾았다, 이 새끼야아아아아!”
우렁차게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하아.”
박아연은 한숨만 거듭했다. 유선우의 기행에 적응이 됐는지 이젠 놀랍지도 않았다.
그녀는 주의를 돌려 주변의 상황에 집중했다. 예기치 않게 던전으로 들어간 탓일까. 역북고등학교에는 아직 여럿의 인원이 잔류해 있었다.
문득 박아연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의 시선이 멈춘 장소에 보이는 것은 탈주자 강설호. 강설호는 클랜에 보고를 올리고 있었는지 휴대전화를 든 상태였다.
‘저 나쁜 새끼.’
강설호의 선택이 합리적이었다는 건 안다.
하지만 서운한 건 서운한 것.
박아연은 이성보단 감성을 따르는 편이었다.
그녀는 허둥거리는 강설호에게 다가가서 따지고 따졌다.
왜 버렸어요?
저 싫어하세요?
동료라 생각했는데 저만 그랬나 봐요?
반쯤은 진심이었고 반쯤은 계산에 따른 행동이었다. 이대로는 클랜으로 돌아가서 보고해야 할 판이니까.
물론 그게 맞는 일이겠지만 심신이 지친 박아연은 당장 쉬고 싶었다. 무엇보다 이산가족 상봉이 먼저이기도 하고.
강설호는 차마 박아연에게 아쉬운 소리를 뱉지 못했다. 사정은 궁금했지만 막 사지에서 돌아온 이들을 쪼아댈 수는 없는 노릇.
게다가 셋의 상태가 심각하기 그지없었다.
유선우는 툭 건드리면 터질 듯 화난 상태고.
박아연은 바람만 불어도 울고.
김광수는 무표정으로 군인들에게 둘러싸여 있고.
마치 세상의 종말이라도 보고 온 듯한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