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화
던전
“크르흡!”
공간이 협소한 터라 놈들도 무작정 달려오지는 않았다. 그저 한 발짝, 두 발짝. 사냥감을 몰아넣듯이 성큼성큼 걸어올 뿐이었다.
‘역시 지구산 맞구만.’
유선우에겐 모든 것이 익숙했다. 특유의 고약한 악취와 녹색 피부. 울긋불긋한 근육에 2m 안팎의 신장. 아무리 봐도 지구에는 없어야 할 지구산 오크였다.
이로써 한 추론이 사실로 입증됐다. 게이트는 하위 차원과 지구를 연결하는 다리라는 추론이.
유선우는 다시 둘에게 시선을 돌렸다. 박아연은 손가락을 튕기는 자세를 잡고 있었다. 한편 군인은 소총이 아니라,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권총을 든 상태였다.
“하나님 부처님 가네샤님 알라님 공자님 엔티티님, 제에발…!”
“진짜 다 죽었지 말입니다, 으흐하하하하!”
극한 상황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본성은 퍽 우스웠다. 입가를 씰룩인 유선우가 발걸음을 내디뎠다.
“됐어요. 비켜 봐요. 캠코더도 가져가시고.”
“어차피 다 죽을 건데 순서가 뭐가 중요합니까. 하하하.”
“지, 지금 장난 같아요? 위험하니까 가만히 있어요, 진짜.”
“아 됐다고요. 말하기 미안한데 아까 보니까 좀….”
대놓고 말하자니 영 불편해서 말을 흐렸다. 그러자 박아연이 울먹거리면서도 화를 냈다.
“좀 뭐요! 저 말하다 마는 거 엄청 싫어하거든요?”
유선우는 대답 없이 느슨하게 주먹을 쥐었다. 손안의 공간에 기운이 모여들어 푸르스름한 창이 빚어졌다.
“무, 무슨… 선우 씨?”
“으워어어어!”
전투 의지를 보이자 오크 다섯이 일제히 땅을 박찼다. 그러나 땀 냄새 나는 개싸움을 받아줄 이유는 없었다. 유선우의 눈빛이 착 가라앉더니 허공에 선이 그어졌다.
푸확!
실선을 따라 오크 다섯의 상반신이 잘려나갔다. 몸이 두 짝으로 분리되어 엇갈리면서 피분수가 솟구쳤다. 공방의 교환 따위나 간담이 서늘해지는 파공음은 없었다.
“아까 보니까 좀 허접하더라고요?”
“어어…?”
얼이 빠진 박아연은 몇 번이나 거칠게 눈을 비볐다.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광경은 달라지지 않았다.
깔끔하게 갈라진 오크의 시체.
동굴의 벽에 튀긴 핏자국.
실실 웃고 있는 유선우까지.
‘얄밉게 왜 저래. 때리고 싶게.’
조롱하는 듯한 표정을 보니 정신이 조금 맑아졌다. 당황스럽고 어처구니가 없었으나 결론은 금세 나왔다.
“어, 음. 혹시 각성자이셨습니까? 현직 헌터신가?”
박아연이 입을 열기도 전에 군인이 물었다.
당연한 귀결이다. 맨몸으로 오크를 죽일 수 있는 건 각성자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헌터는 99%가 각성자로 이루어져 있다.
박아연은 속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도 보험도 없이 던전에 쳐들어온 무뇌아는 아닌 듯해서. 그러나 미친놈이라는 생각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잠깐만요. 그럼 여태까지 각성이고 몬스터고 대체 왜 물어본 거예요?”
“아까 말했잖아요. 몰라서 물어본다고.”
대답하는 음성이 담담하기 그지없다. 전후 사정을 모르는 군인은 어리둥절할 뿐이었지만, 박아연은 다시 열불이 치밀었다.
“아, 몰라서 물어보셨다?”
“그런데요.”
“당신 각성자 맞죠?”
“아닌데요.”
“지금 저 놀리는 거죠?”
“그것도 아닌데요.”
“명치 한 대만 때려도 돼요?”
“에이, 제가 뭐 했다고.”
꽈악.
박아연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 새끼 진짜…….’
사실 그녀도 오크를 죽이는 장면은 잘 보지 못했다. 무슨 기다란 막대가 생겼었고, 막대를 살짝 휘저은 것이 끝.
그뿐인데 오크가 죽어 있었다. 하지만 보지 못했을지라도 유선우가 했다는 정황은 확실했다.
“입에서 나오면 다 말인 줄 아시나. 당신이 한 거잖아요, 저거.”
손가락으로 시체를 가리키자 유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했죠. 말했잖아요. 좀 답답했다고.”
“그래서 뭐예요? 자기는 그냥 민간인인데 손 휙휙 하니까 오크가 죽었다? 뒤질래요 진짜?”
“저기, 진정 좀 하십시오.”
“죄송한데 좀만 입 다물어봐요.”
쏘아붙이니 군인이 조용히 찌그러졌다.
“민간인이 몬스터 좀 잡을 수도 있지.”
정작 유선우는 대수롭지 않은 듯 어깨를 으쓱거릴 따름이었다. 그리곤 능청스레 반문하기까지.
“아니면 혹시 무슨 몬스터 보호법 같은 거 있어요? 그럼 좀 봐주세요. 벌금 무는 거 아니죠?”
“후욱! 후욱!”
박아연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그녀의 짜증이 깊어지고 있을 때.
유선우는 오히려 저가 더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혹시 헌터 중에 일반인은 없어요? 그러니까, 각성 안 한 사람 말이에요.”
“아예 없는 건 아닌데….”
“거의 없습니다. 그분들도 말이 헌터고 총기 전문가라고 보시면 됩니다.”
박아연이 말을 흐리자 군인이 부연설명을 했다.
실제로 미각성 헌터가 있기는 있다. 헌터 인원의 1% 정도밖에 되지 않는 비율이지만.
그들은 전부 총기를 사용한다. 또한 어지간해선 C급 이하에 머물러 있는 수준. 즉 오크를 단숨에 때려잡을 정도는 절대로 아니라는 얘기다.
‘도무지 말이 안 통해.’
박아연은 벽에다 대고 소리치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심호흡을 거듭하고 있자니 군인이 끼어들었다.
“나중에 확인해보시면 되겠죠. 사는 게 먼저 아닙니까.”
“아까랑은 되게 다르시네요?”
“군인들은 원래 다 이럽니다. 잊어주십쇼.”
박아연은 마지못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녀는 동굴 벽을 두드려대는 유선우를 바라봤다.
‘종잡을 수가 없는 사람이야.’
탱탱볼처럼 이리저리 튀는 성격.
무엇보다 입이 떡 벌어지게 만드는 실력.
설레발일지 몰라도 최소 A급은 되지 않을까.
‘대체 이런 사람이 어디서 나온 건지. 알 수가 없네.’
그녀의 고뇌를 모르는 유선우가 툭 내뱉었다.
“여기 계속 있을 거예요? 후딱 깨고 돌아갑시다.”
그가 던전 깊숙한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하자 군인도 뒤를 따랐다. 박아연은 둘의 등을 쳐다보면서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하아.”
자포자기한 그녀는 둘의 그림자를 밟았다.
숙취는 이미 날아간 지 오래였다.
***
평범한 병사한테마저 발리던 5년 전.
이제는 까마득해진 그 시절부터 유선우는 창만을 사용해왔다.
대단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냥 길어서. 당시의 그에게 리치의 이점은 몹시도 달갑게 느껴졌었다.
전투에 유리할 것 같았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그리고 전투에 익숙해진 뒤에도 무기를 바꾸지는 않았다. 창 외에 다른 무기를 들 필요성이 없었으므로.
굳이 문제점을 꼽자면 달리 창을 쓰는 사람이 몇 없었다는 것. 431-9 차원의 실력자들은 대부분이 검사나 권사 혹은 마법사였다. 최상위의 강자들은 남들에겐 없는 신비한 힘을 쓰기도 했고.
창을 쓰는 놈은 해봤자 일반 병사나 은거기인 뿐. 가르침을 청할 만한 인물이 없었는데, 그것은 범재에게나 해당하는 문제였다.
유선우는 달랐다.
그는 독학으로도 최강자의 반열에 올랐다.
오히려 스승이 있었다면 발목을 잡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뛰어남을 넘어 압도적이기까지 한 재능.
무엇보다 간절함에서 나오는 독기.
돌아가겠다는 일념 아래에 무(武)를 극한까지 가다듬었다.
실전적인 창 솜씨에 반해 제자가 된 이도 있었다.
그렇게 악착같이 강해져서 악마군주의 뚝배기를 깨버린 뒤.
유선우는 한창 양학을 하는 중이었다.
부웅!
창을 휘두를 때마다 오크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진다. 던전이 괜히 던전이 아닌지 오크의 수는 제법 많았다.
여태까지 죽인 것만 해도 스물은 족히 넘었다. 그리고 지금 유선우가 있는 공동에만 일곱. 놈들은 포진한 채 활을 겨누고 있었다.
오크라고 무식하게 주먹질이나 도끼질만 하지는 않는다. 고구려의 후손처럼 자연스럽게도 활시위를 당긴다.
쐐액!
쏘아지는 화살의 기세가 매섭다. 터질 듯한 근육만 봐도 위력을 가늠할 수 있다. 유선우 역시 타지 생활 1년 차 때는 오크한테 엿깨나 먹고는 했었다.
교묘하게 시간차를 두고 날아오는 화살. 유선우는 그에 맞춰 벼락같이 창을 휘둘렀다. 창끝이 과녁이라도 맞추듯 화살을 하나씩 격추했다.
“스읍.”
숨을 깊게 들이쉬고 왼발로 지면을 밟았다. 지축이 흔들리기까지 하는 충격. 그와 더불어 공동의 오크들이 공중에 둥실 떠올랐다.
끼기기긱!
창끝이 붓처럼 궤적을 그리면서 공간을 찢었다. 이내 오크들의 몸뚱어리가 일제히 잘리기 시작했다.
“와…….”
박아연은 마법 같은 광경을 바라보며 입을 헤 벌렸다. 그녀는 던전 내부로 들어갈수록 기가 질렸다.
‘절대 일반인은 아니야.’
그런데 과연 그를 헌터라고 할 수 있을까.
사람은 상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박아연의 상식 안에서 헌터는 저렇게나 강대한 존재가 아니었다. 평소에 베테랑이다 뭐다 콧대 세우던 자신이 우스워질 지경이었다.
사실 B급은 절대 만만한 등급이 아니다. 실제로 그녀는 클랜 내에서도 유능한 헌터로 꼽힌다. 낮지 않은 경지에 서 있기에 더욱 눈을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설마 S급은 아니겠지.’
세상에 여덟밖에 없는 S급 헌터.
그것을 판단하기에 박아연은 A급에 대해서도 자세하지 못했다. 1층에서는 2층의 모습도 제대로 안 보이는데 10층은 어떠할까.
박아연은 유선우를 자신의 잣대로 재어볼 수 없었다. 터무니없는 강자라는 것만 확신하고 있을 뿐.
“흐흐흠.”
오크를 처리한 유선우는 휘파람을 불며 발을 내디뎠다. 그는 땀방울을 흘리기는커녕 호흡조차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 태평함이 박아연에겐 복잡하면서도 경악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