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권능의 반지-173화 (최종화) (173/173)

<최종화.>

하나의 총알이 두 신을 꿰뚫는 순간, 모든 것이 멈췄다.

마치 영화 필름이 끊어지기라도 한 양 시야 앞은 암전되고, 몸은 하늘에 붕 뜨기라도 한 것처럼 가벼웠다.

몸이 뜬다?

좀 이상했다.

어떻게 잘 표현을 할 순 없었지만 마치 무거운 옷을 벗어 버리듯, 육체마저 초탈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눈을 아래로 내려 몸을 쳐다보려 했지만,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뭐지?’

본인 몸이 사라졌다는 건 어떻게 보면 매우 끔찍한 일이었으나, 이상하게도 그런 기분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포근한 기분이 들었다.

- 혼란스러워하지 말라, 내 떨어져 나간 일부이자 다시 내가 될 파편이여. 내가 곧 너이고, 네가 곧 나일지어니.

소리가 난 방향으로 마음을 돌리자 거대한 빛 덩어리가 느껴졌다. 태양처럼 밝고, 끊임없이 꿈틀거리는 게 꼭 거대한 소용돌이처럼 느껴졌다.

그 소용돌이 주변으로 작은 빛 덩어리들이 빨려 들어가기도, 떨어져 나가기도 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깨달을 수 있었다.

근원.

아흐마.

수레바퀴.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

수없이 많은 이름으로 불리지만, 그 뜻은 하나로 통하는 존재가 바로 앞에 있었다.

‘내가 왜 당신 앞에 있는 거지. 죽은 건가?’

- 죽는다는 표현은 옳지 않다, 또 하나의 나여. 단지 시간이 지나 네 삶이 끝나면 다시 내게 돌아올 뿐이다. 그리고 너의 삶 또한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럼 왜 내 앞에 나타났지?’

- 네가 신을 죽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복이라도 할 생각인가?’

- 필멸자로 태어나, 내가 직접 만든 세상들을 관리할 존재를 죽인 존재다운 대답이구나. 하지만 틀렸다. 하나가 없어지면 다른 하나가 나타나듯, 신이 죽었다면 그 자리를 차지할 새로운 존재가 필요하다.

이해할 수 없는 얘기였으나, 저게 끝이었다.

친절한 설명 따위는 없었다.

- 말해보아라, 또 다른 작은 나여. 네가 제일 염원하는 게 무엇이냐? 네 마음속 근원에는 무엇이 있느냐?

‘모든 걸 끝내고 싶다. 여태까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속 달려왔다. 이제 결승점을 넘었으니 전부 정리하고 집에 가서 맥주나 한잔하고 싶군. 그러니 개 같은 소리는 짧게. 이게 내 마음속 제일 깊은 염원이다.’

지훈의 말에 근원이 작은 파동을 일으켰다.

부르르 떠는 모습이 어찌 보면 분노 같기도 했으나, 그와는 조금 달라 보였다. 굳이 비교하자면 웃는 것 같달까?

- 알겠다. 인간으로 태어나 신을 죽인 존재, 김지훈. 내가 생각하지 못한 변수였으나, 이 또한 나쁘지 않구나. 하지만 네가 그리고 쌍둥이 신이 깨어놓은 인과율은 반드시 복구되어야만 한다. 까닭에 너는 내가 새로운 신을 낳을 때까지, 그 대리를 맡아라.

‘잠깐, 그게 무슨 소리지?’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단지 근원의 소용돌이가 크게 휘몰아치는 듯싶더니, 지훈을 집어삼켰을 뿐이었다.

☆ ☆ ☆

이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단지 시간에서 초탈한 지훈만이 여러 가지 일을 하며 지냈다.

이제는 사라진 아쵸프무자와 하즈무포카의 소유물들을 파악하고, 근원이 맡긴 신의 대리자 일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 권능을 수련했다. 그렇게 억겁이 시간이 지나갔을 때, 지훈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Aktiveri võmu, Aeg kontrolli. (권능 발동, 시간 제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멈춰있던 시간이 뒤로 돌기 시작했다.

빠르게 뒤로 돌아가는 시간의 흐름 속. 지훈은 느린 움직임으로 주머니를 집었다. 하즈무포카의 주머니이자, 세드라고 불렸던 주머니 차원이었다.

“피곤하다, 집에 가자.”

☆ ☆ ☆

… …

… … …

“이봐, 지훈! 언제 출발할 거야?”

누군가 몸을 툭 건드는 느낌과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굉장히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절대 잊을 수 없었던 목소리. 칼콘이다.

“이미 다녀왔어.”

“잉?”

“형님, 긴장된 건 알겠지만 그게 무슨….”

다녀왔다는 말에 칼콘과 민우가 뭔 개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아마 지금 시간대에서는 출발도 하지 않은 상태였기에, 오히려 저게 당연할 수도 있었다.

“됐어, 집에 가자.”

설명해 줄 수도, 권능을 발휘해 지나갔던 시간 사이에 있었던 일을 모두 깨닫게 해 줄 수는 있었지만, 그만뒀다.

지금 당장은 세드에 돌아왔다는 기분을 만끽하고 싶었다.

그렇게 하즈무포카를 죽이기 위해 모였던 병력 들은본인이 출발했고, 또한 죽었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한 채 흩어졌다. 다들 김이 샌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오로지 지훈만 그 모습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들 죽지 않아서 다행이다.’

☆ ☆ ☆

집으로 돌아가자 지현이 엉뚱한 표정을 지었다.

“놓고 간 거 있어?”

지훈 입장에서는 억겁의 시간을 지나 돌아온 거였지만, 지현 입장에서는 나간 지 반나절도 안 돼서 돌아왔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어, 오라질 동생년 하나 놓고 갔지.”

“아! 진짜, 마지막까지 이럴래?”

“됐고, 통장하고 카드 내놔 이 년아.”

설명할 것도 없이 통장하고 카드를 모조리 뺏었다.

아직 소비 습관이 제대로 들지 않은 동생 손에 뒀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증발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아쵸프무자와 하즈무포카의 물건이 전부 지훈 소유가 됐기에 이제 돈 따위는 휴짓조각만도 못해졌지만, 그래도 그건 그거였고 동생 교육은 교육이었다. 괜히 돈 펑펑 쓰게 내버려 뒀다간 애가 망가질 게 분명했다.

통장과 카드를 압수한 뒤 침대에 누웠다.

형언할 수 없는 편안함이 몰려옴과 동시에, 그제야 돌아왔다는 현실감이 엄습했다.

“씨발… 존나… 힘들었다.”

딱 3단어. 그것도 그중 2단어가 욕이었지만, 저 한 마디가 지훈의 마음을 제일 잘 대변하는 말이었다.

한동안 침대에 누워있자니, 갑자기 눈물이 나올 것 같았기에 슥 닦아내고는 지현을 불렀다.

“야!”

“왜.”

“와봐, 빨리! 급해!”

“아, 왜!”

“와보라고!”

지현이 후다닥 달려왔다.

“왜 그래?”

“가서 맥주 좀 가져와.”

지현이 ‘씨발놈아!’ 하고 욕을 내뱉었지만, 지훈은 그 모습을 보며 훈훈한 미소만 지었다.

‘진짜 돌아왔구나… 이제 전부 끝났다….’

☆ ☆ ☆

시연은 지훈이 돌아오자마자 말없이 끌어안았다.

가끔은 백 마디 말 보다, 단 한 번의 포옹이 더 값지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수고했어. 힘들었지?”

“응, 많이.”

“이제 나랑 같이 있자. 어디 가지 말고.”

등살을 파고드는 시연의 손가락이 부르르 떨렸다.

그 진동에서 사랑하는 남자가 몸 성히 돌아왔다는 안도감과 다시 한 번 얼굴을 볼 수 있다는 행복이 묻어나왔다.

둘은 그렇게 오랜 시간 꽉 끌어안고 있다가 떨어졌다.

“있잖아, 시연아. 예전에 내가 했던 말 기억나?”

둘이 했던 수없이 많은 대화 중 어떤 말을 얘기하는 걸까, 시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떤 거?”

- 돌아오면 나랑 결혼하자.

굳이 저 말을 입에 담을 필요는 없었다. 단지 손 위로 작은 선물 상자를 소환한 뒤, 한쪽 무릎을 꿇었다.

“백시연 씨.”

“으, 응? 갑자기 왜 그래?”

시연은 갑자기 변해버린 분위기에 당황했으나, 지훈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내가 잘난 사람도 아니고, 멋진 사람도 아니지만 내 여자 하나는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해. 여태까지 속도 많이 썩이고, 잘못도 많이 했지? 미안해.”

사과가 끝나자마자 손에 있던 선물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이 세상 그 어느 보석보다도 아름다운 반지 한 쌍이 들어있었다.

“앞으로 계속 네 옆에 서서 속죄하며 살아가고 싶은데… 그러려면 평생도 부족할 것 같아. 나랑 함께 있어 줄래?”

시연은 그 말을 듣자마자 울먹거렸다.

“이번에는 진짜 참으려고 했는데… 너 진짜… 이러면….”

“참지 않아도 돼. 우는 모습도 예쁘더라.”

결국, 시연이 눈물을 떨어뜨렸다.

“나 요즘 너무 많이 우는 것 같지 않아?”

“결혼하고 나서는 다시는 흘릴 일 없을 테니까, 지금 미리 울어 둔다고 생각해.”

그 말에 시연이 행복한 눈물을 잔뜩 토해냈다.

☆ ☆ ☆

지훈은 칼콘과 민우를 한 자리에 불러냈다.

“그 날 이후로 오래간만이네. 다들 잘 지냈냐?”

“응. 조만간 클랜에 한 번 더 다녀오려고 준비하고 있어.”

“예, 저는 뭐 지현 씨랑… 잘 지내고 있죠.”

민우는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돌렸다.

아마 최근 들어 지현이 아침에 들어오거나 외박을 하는 일이 잦았는데, 아마 저 녀석 때문이리라.

한 대 쥐어박을까 싶었지만 그만뒀다.

지금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얘기가 있기 때문이었다.

칼콘이 민우의 부모님을 죽였다.

일행 모두가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지금은 시간을 되돌린 까닭에 칼콘과 민우 둘 다 모르고 있던 사실이었다.

예전에야 짐작만 하고 있었기에, 괜히 파냈다가 폭탄에 불 지피는 것 같아 그만뒀지만… 지금은 확실해진 사실이었기에 해결해야만 했다.

상처도 내버려 두면 곪듯, 이 문제도 똑같았다.

“직설적으로 얘기할게. 칼콘, 너 서울 침공 때 기억 나냐?”

칼콘이 씁쓸한 얼굴로 얘기를 이어나가자, 민우의 표정이 점점 더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둘 다 적당히 짐작했으리라고 본다. 너희 둘이서 해결해야 할 문제지만… 내가 조금 끼어들자면, 칼콘은 그 문제로 클랜을 나왔고 평생을 사죄하면서 살았다. 그래서 죄 없는 사람은 절대로 죽이지 않으려고 했고.”

칼콘, 민우 둘 다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잘 됐으면 좋겠다. 그럼 얘기들 나눠.”

둘만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섰다.

위험한 일이 생길 수도 있었지만, 미래에서도 서로 죽이지 않았듯 이번에도 서로 잘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었다.

☆ ☆ ☆

하즈무포카에 대항해 힘을 보태줬던 모든 존재에게는 그에 합당한 보상을 줬다.

그가쉬에게는 원하는 대로 아티펙트를 제공했다.

강력한 물건을 줬다가는 괜한 분란을 낼 것 같아, C~B등급 아티펙트를 10개 정도 제공했다.

“내 노력에 합당한 대가로군.”

가슴을 쫙 펴고 당당히 말하는 그가쉬에게 ‘너 들어간 지 30분 만에 죽었다.’ 라고 말을 하려다 말았다.

그가쉬는 이 아티펙트로 전쟁을 하려 시도했으나, 핵을 필두로 한 한국 정부의 무력시위에 꼬리를 말고 포기했다. 쥐에게 황급 발톱을 달아준다고 한들, 쥐는 어디까지나 쥐였다.

겐피 부족은, 겐피가 원하던 대로 독립했다.

그가쉬는 본인들이 지배하던 부족이 빠져나가자 ‘이런 건 거래 내용에 없었다.’ 며 항의했지만, 이에 지훈이 무력을 보여주자 입을 싹 닫아버렸다.

황금을 탐하다 호랑이의 노를 사면 황금을 쓰기도 전에 죽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가쉬는 분명 탐욕스럽고, 멍청한 녀석이었지만 눈치까지 없진 않았다.

겐피 부족은 독립 후 리뱃 주변으로 이주했다.

인간들의 영토와 가까웠기에 충돌에 대한 우려가 있었지만, 다행히 겐피의 훌륭한 통치로 화합을 이룰 수 있었다.

이후 겐피 부족은 고블린 특유의 작은 몸을 이용해 리뱃 광산에서 일하기 시작했다는 소문을 들을 수 있었다.

‘폭탄 쓰던 녀석 답네. 어울린다.’

가벡은 신이 되길 원했으나, 실질적으로 들어주기 불가능한 부탁이었기에 아티펙트를 회수하지 않는 선에서 봐줬다.

평생을 발쿠할에 가길 원했던 가벡이었다.

아마 그로서는 반신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제안을 거절할 수가 없었겠지. 어렴풋이 이해는 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역시 배신에 대한 용서는 되지 않았다.

하지만 가끔은 묻어둬야 더 좋은 것도 있었기에 그냥 입 다물고 보내줬다.

마지막에 실수했다고 한들 큰 피해를 받은 것도 아니었고, 그간 같이 다닌 추억이 더 컸기 때문이었다.

좋은 추억의 끝에 피비린내를 남겨놓고 싶지는 않았다.

“이제부터 뭐 할 생각이냐?”

“너희가 헌팅 그만둔다니, 이제 나도 뭘 해야 할지 모르겠군. 클랜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말이지. 용병이나 할까 싶다.”

쌍검을 쓰는 버그베어 용병.

덫도 어느 정도 다룰 줄 알고, 총도 적당히 쏘니 아마 인기가 좋을 게 분명했다. 게다가 손에 든 아티펙트도 A등급이지 않던가. 어디 가서 푸대접받진 않을 터였다.

“생각해 둔 곳은 있냐?”

“지구에 있는 소말리아라는 곳에 가볼까 생각 중이다. 거기에 있는 오우거 헬레이저 강습 부대가 그렇게 강력하다고 하더군. 싸워보고 싶다.”

“들어간 지 5분 만에 발쿠할 가봐야 정신 차리지.”

“그렇다면 그거 나름대로 영광이다.”

약 2년 정도 후에, 소말리아에 있던 드 휼라 전복과 함께 그 1등 공신으로 가벡의 얘기가 뉴스에 나왔다.

피식 웃으며 솜씨 좋네 하고 말았다. 그 이후로는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원하던 대로 발쿠할에 간 걸까?

알 수 없었다.

차원 여행자들은 보상을 원하지 않았다.

그들의 목적은 단지 신들의 싸움 속에서 동족이 희생되는 것을 막는 것. 그게 다였기 때문이었다.

이에 뭐라도 손에 쥐어주고 오려고 했지만, 기토킨이 한사코 반대했기에 어쩔 수 없이 맨손으로 돌아왔다. 대신…

“너희가 날 도왔듯, 언젠가 너희가 위기에 처하면 나도 너희를 도와주겠다. 약속하지.”

맹약을 남겨줬다.

엘프들 역시 보상을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본인들의 의지로 성전에 참가했다는 것에 의의를 두는 것 같았다. 역시나 차원 여행자들처럼 대화가 통하지 않았기에 어쩔 수 없이 맨손으로 돌아왔다.

“다시 한 번 고맙습니다, 사자님.”

에르파차 형제는 지훈에게 고개를 숙였지만, 딱히 인사 받을 게 없었기에 손만 휘적거려 쫓아냈다.

“원래 인생 삽질하면서 사는 거 아니겠냐. 앞으로 안 그러면 되지. 됐어, 임마.”

에르파차는 추후 외교관으로 인간과 엘프 사이를 조율하는 일을 맡았고, 그 형은 유명한 용병으로 이름을 떨쳤다.

러시아에 있던 도본옙스코에게는 장갑차 10대 만큼의 돈을 보내줬다. 마지막 보는 순간까지 조카 이름을 읊으며 으르렁거렸지만, 가볍게 무시해줬다.

“네가 그렇게 속이 좁으니까 삼류인 거다, 멍청아.”

석중은 보상으로 A등급 아티펙트를 요구했다.

“아니, 할배. 잠깐만. 언제는 아들이라면서? 아들놈 죽으러 가는데 공짜로는 못 도와주는 거요?”

“미친놈 보라? 니는 이럴 때만 아들 소리니, 호로 쓰애끼야! 거는 거고, 이는 이다. 빨리 아티펙트 내 논나!”

누가 장사꾼 아니랄까봐, 역시 거래에는 에누리가 없었다. 이에 아쵸프무자의 창고에서 포션을 하나 건네줬다.

석중이 원한 건 보나 마나 A등급 무기였을 게 분명했지만, 그딴 거 던져줬다가 무슨 괴상한 사건을 벌여놓을 게 안 봐도 훤했기 때문이다.

“하이고, 쳐묵고 디지라 이기니?”

“거 혓바닥이 뭐 이리 길어. 그냥 처마시쇼 좀.”

얼마 후 석중이 휠체어에서 일어났다며, 도대체 이 약 뭐냐는 전화가 걸려왔지만, 그냥 웃고 말았다.

가끔은 모르는 게 약일 때도 있는 법이었다.

스토커는 지훈에게 괴상망측한 것을 요구했다.

“나랑 결혼하자.”

“지랄. 좆이나 까 잡숴, 이 미친놈아. 뭔 보자마자 프로포즈야. 거기다가 내가 남자 싫다고 몇 번을 말하냐, 앙!?”

스토커는 입맛을 다시며 ‘그거 말곤 없는데.’ 하며 중얼거렸다. 이에 적당히 현금으로 보상해 줬다.

아마 언더 다크 한국 개척지부장으로 있다 보면, 여기저기 돈 나갈 게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었다.

“뭐 이것도 나쁘진 않네.”

“고마웠다. 죽지 말고 오래오래 잘 살아라.”

“어머, 자기 지금 나 걱정 해주는 거야?”

“됐다. 말을 말자, 이 새끼야.”

칼날 정글의 주인에게는 제 새끼의 생명을 찾아줬다.

“Aktiveeri võimu, omal kontrolli. (권능 발동, 고유시제어.) 이제 됐어, 내일쯤이면 깨어날 거다.”

민우의 부모님 같은 경우는 시체도 없었기에 살려내는 게 불가능했지만, 주인의 새끼는 아니었다. 아직 시체가 남아있었기에 그 존재의 시간 자체를 돌려 버리면 됐다.

근원에 들어간 영혼을 끄집어내는 일이라 꽤 어렵기도, 불쾌하기도 했지만, 정글 주인이 기뻐하니 그걸로 만족했다.

“내 새끼…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 다시는….”

이후 칼날 정글의 주인은 새끼와 함께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깊고 깊은 미개척지로 사라졌다.

간혹 미국 개척지 주변에서 사람 말을 할 줄 아는 거대 짐승이 나타난다는 소문이 돌긴 했으나, 그 실체를 본 이가 없어 말 그대로 소문만 무성했다.

FS 유적 최상위 관리자에게는 영원한 안식을 줬다.

현 시간대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만 년 전으로 되돌아가 아쵸프무자가 남겼던 말 자체를 철회했다.

“유적 같은 거 필요 없으니까, 삽질하지 마라.”

신탁보다는 폭언에 가까웠지만 FS들은 그래도 잘 따른 모양인지, 다시 되돌아오니 FS 유적이 사라져 있었다.

‘만들어지지도 않았을 테니, 지금쯤 환생 몇 번 해서 잘 먹고 잘살고 있겠네.’

원래 유적이 있던 장소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래서, 죽음은 달콤했냐? 이 빌어먹을 깡통 새끼야.”

가볍게 불어오는 미풍이 이상하게 퍽 달콤하게 느껴졌다. 이에 픽 웃어버리고는 자리를 떠났다.

☆ ☆ ☆

보상이 끝난 뒤 지훈은 평화로운 생활을 즐겼다.

그러다 가끔 주머니 차원 안에서 대형 사건(핵전쟁, 종족 멸종, 타 차원의 침입, 고대종 각성 등)들이 터질 기미가 보일 때마다 나서서 일을 처리하며 시간을 보냈다.

시연은 지훈이 신이 된 것을 몰랐기에, 지훈이 자리를 비울 때마다 투덜거렸지만, 딱히 크게 성을 내지는 않았다.

그렇게 5년이 흘렀다.

지훈은 시연과 함께 지구로 돌아와 시골로 귀농했다.

아무래도 여태껏 사람과 부대끼고 살았음은 물론, 피와 살이 튀는 전장에서 너무 오래 살았기 때문에 도시 생활에 염증이 났기 때문이었다.

시연의 직장 때문에 발목이 걸릴까 싶었지만, 이제 시연이 보사에게 아쉬운 게 아니라, 전 세계에 있는 연구 기관이 시연에게 아쉬웠기에 딱히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여보, 오늘 칼콘하고 민우씨 놀러 오는 날이지?”

“그리고 거기에 딸려서 악마 하나 따라오겠지.”

“에이, 아가씨한테 악마가 뭐야, 악마가.”

“그 년은 진짜 악마도 삶아 먹을 년이라니까?”

지훈은 프라이팬에 소금을 뿌리며 대답했다. 이에 시연이 슬쩍 미안하다는 듯 웃었다.

“미안해, 여보. 원래는 전부 내가 준비해야 하는 건데.”

“됐어, 만삭 임산부가 무슨 요리야. 내가 할게.”

원래 요리에는 소질이 전혀 없던 지훈이었지만, 헌팅을 그만두고 나서는 새로운 취미 거리가 필요했다. 이에 사진, 커피, 자동차 등 여러 취미를 만들었지만, 그중 요리도 있었다.

시연의 자존심에 상처를 내지 않기 위해 티는 내지 않았지만, 아마 실력으로 따지자면 지훈 쪽이 월등하리라.

지훈은 프라이팬에 뚜껑을 덮고는 슬쩍 시연을 쳐다봤다.

클래식에 동화를 읽으며 태교를 하는 시연을 보고 있자니, 문득 ‘이게 행복이구나.’ 싶었다.

노을 무렵 민우-지현 부부가 도착했다.

“아, 진짜. 왜 이런 시골 촌구석에 사는 거야! 오는데 시간 엄청나게 오래 걸렸잖아!”

현재 민우-지현 부부는 한국 개척지 서구에 살고 있었으니, 아마 포탈 시간 맞추랴 서울에서 렌트해서 차 몰고 오랴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으리라.

“이 년아. 너는 오자마자 불평이냐!”

지현을 한 대 쥐어박으려 들자, 민우가 슥 끼어들었다.

“형님, 제 여자 때리지 마시지 말입니다.”

“지랄을 해라, 새끼야. 지랄을.”

이에 항상 준비해 뒀던 물건을 꺼내 쏴버렸다.

팡! 팡!

바로 장난감 샷건이었다.

“너 이 자식아, 그래. 내가 언젠가 한 번 샷건으로 조져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이 그 날이네. 잘 걸렸다.”

BB탄을 쏴주고 있자니, 문이 열리며 칼콘이 들어왔다.

“어? 민우 형이랑 지현 누나 먼저 와 있었네?”

칼콘 입에서 툭 튀어나온 형이랑 누나 소리가 꼭 호랑이 점심에 낀 브로콜리마냥 안 어울렸지만, 그러려니 했다.

아마 화해의 과정에서 생긴 변화이리라. 뭐 칼콘이 인간 사회에 적응해가고 있다는 증거였기도 했고 말이다.

“먼 길 오느라 수고했다. 배고프지? 밥부터 먹자.”

지훈, 시연, 칼콘, 민우, 지현 모두가 야외에 마련된 테이블에 앉았다. 맛있는 음식, 좋은 술을 마셔가며 즐거운 얘기가 한참 이어졌다.

“지훈 형 기억 나? 민우 형 처음 만났을 때!”

“그때 저 녀석 바지에 오줌 지렸었지.”

“아니, 이 양반들아. 봐봐, 처음 보는 사람이 금방이라도 죽일 것 같은 눈빛으로 총 겨누고 있으면 무섭잖아! 내가 정상이고, 당신들이 비정상이라니까?”

민우가 항변하자 지현이 끼어들었다.

“맞아, 오빠가 얼마나 지랄 맞게 굴었으면 우리 그이가 그랬겠어! 전부 오빠 잘못이야!”

순간 딸 키워봐야 보약 들어다 남자친구한테 나른다는 말이 왜 나왔는지 깨달음은 물론, 왜 동네 어르신들이 ‘딸은 키워봐야 허사다.’ 하는지 한 방에 알 수 있었다.

“됐다, 됐어. 말을 말자.”

이후 그뿐만 아니라 만드라 고라, 칼날 정글 등…

그간 함께 목숨을 걸고 헤쳐 온 추억들을 꺼내놨다.

나중에 자식에게 들려주면 ‘웃기지 마요, 아빠가 어떻게 그랬어? 거짓말이죠? 그걸 어떻게 믿어.’ 할 얘기들밖에 없었지만, 실제로 모두 헤쳐 왔던 이야기들을 말이다.

어느 정도 얘기가 이어지자, 남자 수다에 지친 여자 둘은 슬쩍 자리를 피해 잠자리에 들었다.

술을 벗 삼아 정신없이 얘기를 나누기도 잠시. 자연스럽게 침묵이 내려앉을 무렵 지훈이 입을 열었다.

“있잖아, 나 갑자기 궁금한 거 생겼다.”

칼콘과 민우가 지훈을 쳐다봤다.

“너희들 시간을 되돌릴 수 있으면 뭐하고 싶냐?”

“당연히 로또 가득 사서 부자… 는 됐고, 별생각 없네요. 이미 재밌는 인생 살았고, 지금 삶에 그냥저냥 만족해요.”

“나도 똑같아. 어차피 시간은 흐르게 내버려 두라고 있는 거지, 마음대로 주무르라고 있는 게 아니잖아. 이미 살아온 인생도 충분히 재미있었고.”

대답에 지훈이 따스한 미소를 지었다.

“있잖냐, 나랑 다녔던 거 재미있었냐?”

칼콘과 민우는 아무런 말 없이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지훈도 그 표정을 보곤 씩 미소를 지었다.

“고맙다, 새끼들아.”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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