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권능의 반지-172화 (172/173)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

원래 없었던 것이기라도 했던 양, 재즈바 따위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에 기괴한 모습들이 채워졌다.

바닥 타일은 사람 얼굴로 되어 있고, 벽에는 수 없이 많은 눈들이 박혀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으며, 천장 샹들리에 대신엔 이름 모를 짐승의 머리가 박혀 있었다.

재빨리 정신을 차리자 일행들이 보였다. 괜찮냐고 물어보기에 앞서, 가벡이 바로 칼을 뽑더니 달려들었다.

“미안하다, 원한은 없다.”

눈앞으로 A등급 짜리 쌍검이 날아들었다.

소궐로는 찔러 들어오는 점 공격과 거궐로는 베어 넘기는 선 공격이 동시에 들어온다!

맞았다가는 어디 하나 내어줘야 할 게 분명했기에, 빠르게 뒤로 뛰어 피했다.

퍼서석!

바닥을 밟자 불쾌한 느낌과 함께 타일로 박혀있던 얼굴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마치 귀를 강간당하는 것 같은 짜증. 계속 듣고 있다간 귀에서 고름이 나올 것 같았다.

‘빌어먹을!’

가벡은 놓치지 않겠다는 듯 다시 한 번 달려들었으나…

쨍!

칼콘이 막아섰다.

“가벡, 너 지금 뭐하는 거야!”

두 병기에서 기괴한 소리가 나며 거친 힘겨루기가 시작됐지만, 그것도 잠시.

“카-알-콘! 이 개새끼야!”

민우가 칼콘에게 달려들어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신체 능력은 칼콘이 압도적으로 높았으나, 현재 칼콘은 가벡과 힘겨루기를 하고 있던 상태!

버티다 못 한 칼콘이 가벡을 포기하고 뒤로 물러섰다. 가벡은 칼콘과 민우 따위 관심도 없다는 듯 바로 지훈을 향해 달려왔다.

타타타탓!

아군으로 있을 때는 그렇게나 든든하던 쌍검이, 적으로 돌변하자 굉장히 매서운 태풍처럼 느껴졌다.

‘젠장, 쏴야하나!?’

집중과 가속을 이용하면 쏠 순 있었으나… 여태까지 함께해 온 시간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정신 차려, 이 새끼야!”

“나는 지극히 정상이다. 죽어라, 김지훈.”

대화 따위는 철저히 배제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받아낼 수 있는 물건이라도 있으면 싸워봄직 했으나, 현재 지훈에게는 A등급 아티펙트를 막을만한 물건이 전무했다.

술래잡기하는 사이 민우가 칼콘에게 소리를 질렀다.

“개 같은 새끼…! 네가, 네가 우리 부모님을…!”

머리와 꼬리 다 잘라내 버린 말이었지만, 칼콘은 저 말을 듣자마자 무슨 뜻인지 전부 이해할 수 있었다.

“네, 네가 설마…?”

탈영은 물론이오, 종족까지 등지게 만든 원인.

평생을 사죄해야 할 사람이 눈앞에 있었다.

‘왜 하필… 지금 여기서….’

칼콘은 민우가 원한다면 목숨 따위 내어 줄 수 있을 만큼 커다란 죄책감을 느꼈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아니었다.

당장은 먼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

칼콘은 민우를 떼어내려 했지만, 그보다 앞서 민우가 목을 조르던 손을 풀어버렸다. 대신…

뻑!

코에 민우의 주먹이 틀어박혔다.

“왜 얘기 안 했어! 왜, 왜!”

“미안해, 나는… 나는 몰랐어. 네가 그 아이인 줄….”

도망가기 위한 변명이 아닌, 진심이었다. 그 모습을 보자 민우는 순간 불같던 마음이 확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칼콘은 본인 손으로 부모를 죽인 아이와 하하호호 웃으며 같이 다닐 수 있는 사이코패스가 아니었다.

자기가 먼저 불편해서 떠났거나 도리어 싹을 자르기 위해 먼저 죽였으면 죽였지, 절대 함께하지는 못할 게 분명했다.

‘진짜… 몰랐던 건가.’

마음은 여전히 칼콘에게 정신 감응을 걸어 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죽음을 선사하라고 외쳤지만, 뇌는 차갑게 식었다.

고개를 돌리자 지훈과 가벡이 싸우고 있는 게 보였고, 그 반대편에는 하즈무포카가 송곳 위에 앉아 흥미롭다는 듯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예상했다는 듯 말이다.

그 모습을 보자 원망의 화살이 그쪽으로 향했다.

따지고 보자면 부모님이 죽은 직접적인 이유는 칼콘이었지만… 그 근본에는 하즈무포카가 있었다.

‘만약 포탈이 열리지 않았다면, 부모님도 돌아가시지 않으셨겠지. 일단 지금은 저 새끼 먼저 죽인다.’

마음이 정해지자 행동은 빨랐다.

“나중에 다시 얘기해, 이 새끼야.”

민우는 칼콘에게 등을 돌렸다. 용서는 아니었다.

분노를 뿜어내야 할 순위가 달라졌을 뿐이었다.

“미안해, 나도 나중에 다시….”

“닥쳐. 지금은 일단 싸워.”

대화는 그걸로 끝났다.

칼콘이 돌진해서 가벡을 들이받았고, 가벡은 낙법을 친 뒤 하즈무포카를 보호하듯 슬금슬금 경계하며 이동했다.

“얘기 끝났냐.”

숨 돌릴 틈이 났기에, 지훈은 나머지 둘에게 물었다.

“네, 형님.”

“응, 끝났어.”

“너희가 하즈무포카에게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 다 알아. 그래도 나와 함께 싸울 수 있겠냐?”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칼콘은 잠시 망설였다.

“만약 저 녀석을 죽이면… 세드가 멸망해?”

“아니, 아쵸프무자가 뒤처리를 해 줄 거다. 걱정하지 마.”

칼콘은 그걸로 됐는지, 눈동자에 있던 망설임이 사라졌다.

셋의 눈동자가 서로를 훑어, 마음을 알아챘다.

이제 저 오만한 신을 땅으로 끄집어 내리기만 하면 됐다.

“칼콘, 앞에 막아. 민우, 후방 지원.”

둘이 대답을 맞추며 순식간에 진열을 맞췄다.

정신 감응 따위는 필요도 없었다. 마치 원래 한 몸이었던 양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만드라고라를 시작으로,

그가쉬 클랜,

페커리 사냥,

러시아 하수도,

아쵸프무자의 창고,

연예인 호위,

연구팀 호위,

FS 유적,

칼날 정글,

일본 개척지.

모두 함께였다.

그 간의 경험은 모두를 하나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준비 끝났냐?”

침묵이 긍정을 대신했다.

가벡에게 달려들 준비를 하고 있던 찰나,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하즈무포카가 입을 열었다.

“뭐야, 숫자가 안 맞잖아. 사실 반지 사용자 말고는 전부 필요 없었어. 칼콘, 민우. Poisid surra. (너네 죽어.)”

하즈무포카가 성의 없는 손짓으로 크락과 민우를 가리켰지만,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왜 이래?”

지구에 공기가 있는 게 당연하듯, 이 공간에서는 곧 하즈무포카의 말이 전부였다. 마음만 먹으면 미물 따위 말 한마디로도 죽일 수 있어야 정상이었다.

하즈무포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몇 번 더 죽으라고 중얼거렸지만, 칼콘과 민우는 여전히 멀쩡하기만 했다.

비명과도 같은 하즈무포카의 짜증이 울리는 사이, 방 한구석에서 한 여인이 나타났다.

일그러진 왼쪽 얼굴에 붉은 머리.

아쵸프무자였다.

“오랜만이네, 언니.”

그녀는 유유히 하즈무포카에게 걸어갔다.

“어, 어째서 네가 여기에? 너는 여기에 올 수 없을 텐데?”

“그랬었지. 한때 내가 신이었을 때는.”

의미심장한 말 한마디에 하즈무포카의 얼굴이 부풀었다.

“설마… 너….”

“난 이제 신이 아니야. 머지않아 너와 함께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겠지. 왜냐하면, 난 내 신격을 증발시키는 대가를 치러서라도 널 막을 거거든.”

“미친년! 돌았구나! 겨우 게임, 게임이잖아! 이렇게까지 하면서까지 이기고 싶었어? 신격을 포기하면서까지!?”

아쵸프무자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넌 아직도 이게 게임 같니?”

“그게 아니면 뭔데. 여긴 내 세상이고, 저 안에 있는 생명체들은 전부 내 소유야! 내가 어떻게 쓰던 내 자유라고!”

“그 하찮은 게임에 얼마나 많은 존재가 죽었는지 알아?”

“그딴 거 알 바 뭐야? 어차피 근원으로 모두 돌아가 환생하잖아. 그저 수레바퀴가 돌듯, 모두 다시 시작할 뿐이라고!”

아쵸프무자가 한숨을 내뱉었다.

대화가 통하지 않을 거라는 것 따윈 알고 있었다.

단지 다시 과거처럼 잘 지낼 수 있을까 하는 일말의 희망으로 물었거늘, 왜 그랬을까 하는 후회가 스쳤다.

“하즈무포카, 우리는 너무 멀리 왔어.

“닥쳐, 꺼져! 내 공간에서 나가! 당장!”

하즈무포카가 소리를 질렀으나, 아쵸프무자는 사라지지도 나가지도 않았다. 그저 서서히 걸어 하즈무포카를 껴안았다.

“처음부터 내가 말렸어야 했는데, 전부 내 잘못이야.”

아쵸프무자의 얼굴에 씁쓸함이 지나갔다. 이후 아쵸프무자는 하즈무포카 바로 앞까지 다가가 입을 열었다.

“닥쳐, 너 따위가 뭘 안다고 그래? 지금 하려는 짓 당장 그만둬! 이런 거 하나도 재미없어! 알아!?”

“우리 이제 그만하자. 이 지겨운 게임도, 썩어 문드러져 가는 삶도 모두 그만두고 근원으로 돌아가자.”

아쵸프무자가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하즈무포카를 껴안았다.

- tühistamine. (말소)

아쵸프무자는 이 장소까지 올 때까지 아껴뒀던 힘들 모조리 개방했다. 무한히 반복되는 끔찍한 저주이자, 누군가에겐 그저 게임밖에 되질 않는 싸움을 끝내기 위해서였다.

본디 같은 신격을 가진 존재끼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간섭할 수 없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얘기였다.

하나의 존재에서 분화된 존재. 쌍둥이는 달랐다.

상대가 곧 나였고, 내가 곧 상대였기에 모든 걸 내려놓는 순간 상대도 반강제로 모든 걸 내려놔야 했다.

콰아아아아아아 -

불, 빛, 바람.

그 어느 단어로도 설명할 수 없는 기운이 엄청난 기세로 일행을 후려쳤다. 일행뿐만이 아니라, 주변에 있던 구조물까지 모조리 날려버렸다.

“끄아아아악!”

가벡 역시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빌어먹을, 버텨! 휩쓸리면 어디까지 날아갈지 모른다!”

오로지 지훈 일행만 서로의 힘을 합쳐 버텼을 뿐이었다.

몇 초, 몇 분, 몇 시간.

얼마나 견뎠는지도 몰랐다.

단지 눈을 떴을 땐 지훈 일행과 하즈무포카 그리고 아쵸프무자밖에 없는 무의 공간이 나타났다. 마치 블랙홀 안에 들어오기라도 한 듯, 모든 게 검디검은 암흑만 가득했다.

그저 경계만 하고 있자니, 아쵸프무자가 말했다.

“나와 함께 하즈무포카를 죽여, 김지훈. 지금이라면 가능할 거야.”

총을 겨누긴 했으나, 쉬이 쏠 순 없었다.

둘이 나눈 얘기로 봤을 때, 지금 쏘면 둘 다 영원히 사라져 버릴 가능성이 컸다.

“괜찮겠나? 이거 말고 다른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즈무포카가 쏘지 말라고 비명을 질렀지만 무시했다. 지훈이 듣고 싶은 건 오로지 아쵸프무자의 의견뿐이었다.

“다른 방법은 없어. 그리고 이 방법도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 무용지물이 되어 버려. 어서 나를 쏴.”

그 순간 지훈은 아쵸프무자가 왜 본인에게 모든 걸 걸었는지 알 수 있었다. 아마 자길 죽일 수 있는 녀석을 원했겠지.

“후회하지 않겠나?”

“없어. 수 없이 생각했고, 검토해서 나온 의견이야. 그리고 누군가는 이런 짓을 벌인 책임을 져야 해.”

더 이상 묻지도, 말을 걸지도 않았다.

그저 하즈무포카가 도망가지 못하게 꽉 안고 있는 아쵸프무자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타타타타타탕 -

총알이 날아오는 아주 짧은 시간 사이에, 아쵸프무자는 지훈을 향해 복잡한 감정이 섞인 미소를 지었다.

‘미래를, 앞으로 세드가 나아갈 미래를 부탁해. 처음엔 혼란스럽겠지만, 필요한 정보는 그 반지 안에 전부 넣어 놨어.’

퍼버버버벅!

총알이 아쵸프무자와 하즈무포카를 동시에 꿰뚫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