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쵸프무자와 하즈무포카 그리고 유혹.>
무의식 속에 이상한 목소리가 들렸다.
- Aktiveeri võimu, aeg peatub. (권능 발동. 시간 정지.)
☆ ☆ ☆
불유쾌했다.
마치 거대한 짐승의 식도를 통과하듯 온몸에 끈적끈적하고 미지근한 액체가 잔뜩 들러붙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꿀럭, 꿀럭 하고 몇 번 이동하자…
퉤 - !
거대한 입이 지훈을 토해냈다.
가까스로 넘어지지 않은 뒤 자세를 잡았다. 눈에 전장과는 거리가 먼, 재즈 바라고 해야 옳을 것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딴 - 따라라, 딴. 따따따 -
무대 위에선 검은 양복을 입은 악단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선율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형광등의 반쯤 되는 조도를 가진 노란 간접등은 얘기하기 적당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왔어? 늦었네.”
목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검은 드레스를 입은 붉은 머리 여자가 앉아있었다. 독특하게도 오른쪽 얼굴이 일그러진 여자였다.
‘아쵸프무자? 아니다, 달라!’
짙은 그을음 냄새를 맡자 순간적으로 사고가 멈췄다.
대신 바로 들고 있던 총으로 여자를 향해 발사했다.
타아아아아 -
원래대로라면 그대로 CR 탄이 여자를 꿰뚫어야 했지만, 이상하게도 총은 불을 뿜어내던 그대로 멈춰버렸다.
“봤던 대로 난폭하네. 예절도, 기품도 몰라. 확실히 여태까지 봤던 반지 사용자와는 다르네. 그래서 신선해. 꼭 클래식 곡조에 섞인 불협화음 같아.”
“누구냐, 너.”
생긴 건 아쵸프무자와 같았지만, 이상하게도 흉터 위치가 달랐다. 아쵸프무자가 왼쪽이 일그러져 있고, 그에 따라 가르마도 왼쪽으로 탔다면 앞에 있는 여자는 모두가 반대였다.
흉터, 가르마 전부 오른쪽이다.
여자가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아쵸프무자(Achophoomzhah)가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았나 봐? 반가워, 나는 하즈무포카야(hahzmoohpohca). 아쵸프무자의 큰 쌍둥이지.”
아쵸프무자. A Cho Phoo m zhah.
하즈무포카. Hah Z Moo Hpoh Ca.
‘잠깐만, 뭐?’
일종의 아나그램으로, 이름이 정확하게 반대였다. 어렴풋하게 이름이 비슷하다고는 느끼고 있었지만, 설마 같은 이름일 줄은 예상도 못 했다.
“몰랐다니, 그게 더 재밌네. 네 과거를 둘러보다 안 건데, 마법서 펼쳤을 때 내 이름 적혀있지 않았어?”
과거 마법을 처음 배우려고 했을 때를 말하는 거였다.
- 마법은 … 것으로, 시간과 백열의 신 hahzmoohpohca(하즈무포카)가 처음 엘프에게 … 전해진다.
설마 저런 사소한 일상에서 이런 중요한 문제가 지나갔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동생이 마지막으로 준비한 자리인 만큼, 나도 이번에는 재밌게 즐겨보고 싶어. 와서 얘기 좀 하는 게 어때?”
“좆이나 까라. 피차 얘기하려고 만난 게 아닐 텐데?”
제안에 욕설로 대답하자, 일순간 하즈무포카의 얼굴에 짙은 화마가 일었다가 사라졌다.
“istuvad. (앉아.)”
딱 한 마디.
그 말이 끝나자마자 눈앞이 일그러지더니, 바로 앞에 테이블과 하즈무포카가 보였다. 본인이 태어난, 본인의 수족 같은 공간이었으니 당연했다. 아마 말로 뭐든 할 수 있으리라.
하즈무포카는 테이블 위에 거울을 하나 올려놓았다.
“네 친구들이 지금 어떻게 되고 있을지 궁금하지 않니?”
“무슨 개소리지?”
돌아오는 대답 없이, 그저 거울에 영상이 맺히기 시작했다.
칼콘이 보였다.
☆ ☆ ☆
똑같은 장소, 똑같은 음악, 똑같은 여자.
지금과 비교했을 때 딱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바로 지훈 대신 칼콘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너는 지금 네가 뭘 하려는지 알고 있니?”
칼콘은 대답하지 않았다.
“신을 죽이려고 하는 거야. 그게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킬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
칼콘은 대답하지 않았다.
“네가 태어나고, 자란 차원은 내 소유야. 만약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 모두 사라져 버리지 않을까?”
칼콘은 대답하지 않았다.
“모두 사라져 버리면 카크라도, 크락도 죽어.”
칼콘이 움찔거렸으나, 여전히 대답은 하지 않았다.
“네가 사랑하는 여자가, 네가 사랑하는 여자가 낳은 자식이 죽는 거라고. 그래도 괜찮아?”
칼콘이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대답은 하지 않았다.
“잘 생각해. 지금이라면 모두 없던 일로 할 수 있어.”
칼콘이 고개를 숙였다. 눈도 감았다.
하지만 대답은 하지 않았다.
“동료랑 사랑하는 사람. 둘 중 누가 더 소중해?”
역시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이에 하즈무포카는 비릿한 미소를 지은 뒤 모습을 바꿔버렸다.
오크 암컷, 카크라로 말이다.
“아, 아… 카크라?”
“크라카투스 콘투레 보더워커… 정말로 날 죽일 거야?”
하즈무포카, 아니 카크라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난 당신을 그렇게나 사랑하는데… 기다리겠다고 말했는데, 당신은 내가 죽어도 상관없는 거구나?”
“나, 나는… 그런 게….”
카크라는 순간 품에서 칼을 뽑더니, 제 목을 찔렀다. 피 분수를 뿜으며 꺽꺽댔다.
“네가… 네가 날 죽인 거야… 네가… 네가 날….”
“아니야. 나, 나는… 나는 그저 지훈을 위해….”
“네 알량한 전우애가 나를 죽인 거라고! 살인자! 네가 날 죽였어! 네가 내 아들을 죽였어! 그리고 모두를 죽일 거야!”
“아 - 아아아악!”
칼콘이 절규하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면 막을 수 있어. 김지훈을 죽여. 반지 사용자를 죽이라고! 그럼 모두 죽지 않아. 모두 예전처럼 잘 살 수 있어! 내가 약속할게. 죽여. 죽여버리라고!”
칼콘이 눈물 가득한 눈으로 카크라를 쳐다봤다.
“정말…? 정말 약속할 거야?”
“그래. 약속해.”
칼콘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의 눈에 고민이 가득했다.
☆ ☆ ☆
민우는 테이블에 앉아 조용히 음악을 즐겼다. 하즈무포카는 그런 민우가 재밌다는 듯 웃었다.
“뭐하니?”
“음악 들어.”
“나랑 얘기는 안 하고?”
민우는 얘기를 안 하느냐는 말에 하즈무포카를 슬쩍 쳐다보곤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몸으로 하는 얘기면 모를까, 입으로는 딱히 생각이 없네.”
“그래? 왜?”
“정신계 능력자한테 정신 감응. 너무 식상하지 않아?”
“너는 이게 정신 감응이라고 생각하니?”
“어.”
“멋대로 생각해. 하지만 내가 재밌는 얘기를 하나 꺼내볼까 싶거든, 한 번 듣기나 해봐.”
“유쾌한 얘기면. 아니면 하지 마, 음악 듣는 데 방해돼.”
하즈무포카는 마치 모래성을 무너뜨릴 것에 잔뜩 기대한 여자아이 같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몬스터 브레이크 아웃 기억나?”
민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어떤 한 아이가 있었어. 그 아이는 부모님 손을 잡고, 강남에 쇼핑하러 갔지. 부모님이 좋은 패딩을 사준다고 했거든. 근데 이게 웬일이람? 포탈이 열려 버렸네?”
포탈에서 몬스터가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그 날 민우의 부모님이 죽었다.
“있잖아, 그때 네 부모님을 죽인 종족이 뭔지 기억해?”
대답하진 않았지만 단 한 번도 잊은 적 없었다.
오크.
오크였다.
빌어먹을 돼지 새끼들.
“지금이야 기억이 흐릿하겠지만, 난 그게 누군지 알고 있어. 너도 보면 참 흥미로울 거야.”
하즈무포카가 테이블 위로 거울을 올려놓자, 그 위로 민우 생애 제일 끔찍한 날이 투영되기 시작했다.
- 아, 안 돼! 우리 민우는 죽이지 마! 제발!
민우 어머니가 비명을 지르며 막아섰지만, 오크는 그런 그녀를 무참히 낭자했다.
“저게 누굴까, 참 궁금하지 않니?”
민우는 가슴 속에서 듣고 싶지 않은 마음과, 또 한편으로는 꼭 알고 싶다는 마음이 충돌하는 것을 느꼈다.
“내가 보여줄게.”
거울 속 시점이 돌더니, 오크의 얼굴이 드러났다. 아는 얼굴이었다.
“카, 칼콘…? 어째서….”
“카즈가쉬 클랜의 방패병. 칼콘. 지금까지 네가 동료로 생각하고, 믿고 의지했던 녀석이지. 근데 이걸 어쩌니? 알고 보니 그 동료가 네 부모님을 죽였네!?”
민우는 정신이 나간 듯 입만 어버버거렸다.
“거, 거짓말… 이건 거짓말이야!”
“아니야. 진짜야. 이걸 봐.”
하즈무포카의 거울이 다시 한 번 일렁거리더니, 지훈과 칼콘이 침공 전날 대화했던 순간을 비췄다.
- 한 가족을 만났어. 애 아빠가 몸을 던져서 막더라? 죽였어. 그리고 나니까 애 엄마가 나타났지. 죽였어.
“꼭 누구 얘기랑 닮지 않았니?”
“이, 이건 조작이야! 조작이라고!”
민우가 거울을 집어 던지자, 쨍 소리가 나며 깨져버렸다.
피부를 찌를 듯 불편한 소리가 뛰어다님에도, 하즈무포카의 입에는 그저 미소만 걸려있을 따름이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 머릿속은 확신하고 있잖아?”
민우가 일순간 멈춰 서서 하즈무포카를 쳐다봤다.
“칼콘을 죽여. 그럼 내가 네 부모님을 되살려줄게. 지구로 돌아가서 부모님과 함께 즐겁게 살아. 더는 세드에 관심 가지지 말고, 너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면 되는 거야.”
“그게… 가능해?”
“나는 하즈무포카. 신이야. 그딴 일도 못 할 것 같아?”
민우의 눈에 복잡한 감정이 휘몰아쳤다.
☆ ☆ ☆
가벡은 테이블 위에 차려진 음식을 허겁지겁 집어 먹었다.
“배가 많이 고팠구나, 불쌍한 아이.”
“신께서 내려주신 음식입니다. 어찌 남길 수 있겠습니까.”
비록 적이라 할지라도, 광신도인 가벡에게 있어서는 ‘신’ 그 자체로 경배해야 할 대상이었다.
“너는 신이 그렇게 좋니?”
“좋다는 말은 옳지 않습니다. 저는 그저 거룩한 존재만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신은 제 전부이며, 제가 죽어서도 저를 거둬주시는 분이십니다.”
하즈무포카는 씩 웃으며 가벡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발쿠할에 가고 싶구나?”
발쿠할. 버그베어가 믿는 신의 전장으로, 그들은 전투 중 죽으면 발쿠할에서 영원히 신과 함께할 수 있다고 믿었다.
“제가 만약 그곳에 갈 수 있다면, 그보다 더한 영광을 없을 것입니다!”
“있잖아, 만약에 내가 너를 반신으로 만들어 준다면?”
반신. 반쪽이라도 신은 신이다.
가벡의 눈동자가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그, 그게 무슨 말씀….”
“내가 너를 새로운 존재로 만들어 줄게. 버그베어가 아닌, 아예 새로운 종족으로. 너는 알파가, 그 일족의 신이 되는 거지. 네 자손, 네 종족 모두가 네 이름을 부르짖을 거야.”
“하, 하하…?”
“네가 발쿠할에 가길 원하듯, 네 종족 모두가 네가 있는 곳으로 가길 염원하겠지. 그럼 이제 더는 영광을 바라지 않아도 돼. 네가 영광을 나눠주는 존재가 되는 거야. 어때, 멋지지 않아?”
하즈무포카가 잠시 말을 멈추자, 가벡이 마치 약을 갈구하는 환자처럼 재촉했다.
“저, 정말입니까…? 그게 가능하단 말입니까?”
“신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 네가 딱 한 가지. 내 부탁을 들어준다면 말이지.”
“그, 그게 무엇입니까! 제가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김지훈. 반지 사용자를 죽여.”
☆ ☆ ☆
그걸 마지막으로 거울 속 영상이 사라져버렸다.
“불쌍한 아이. 이제 네 편은 아무도 없네?”
“이제 자위 끝났으면, 혓바닥질 그만하고 싸우지. 보고 있기에 비위 상하는군.”
“하하, 역시 이번 반지 사용자는 신선해. 네 선임자 대부분이 여기서 무릎을 꿇었는데 말이야.”
지훈은 말없이 탄창을 갈았다.
‘남은 CR은 90발. 마력도 딱 그만큼이다.’
하즈무포카는 흥이 식었는지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괜찮아. 아직 재미있는 건 많이 남았으니까. 여기서 벗어나면 일단 네 동료를 죽여야 할 거야. 기다려 줄 테니까 천천히 해. 좌절 섞인 비명도 지르고, 눈물도 흘리고. 다 끝나면 내가 직접 상대해 줄게.”
“내 손으로 직접 네 멱을 따주마.”
“자, 그럼 이제 본 게임을 시작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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