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규모 차원 이동.>
다음날 오전 9시.
지현과 장례식장 같은 분위기 속에서 아침 식사를 했다.
“거 표정이 왜 그러냐. 생명 보험 안 들어놔서 그러냐?”
“오빠, 이런 날에는 그냥 닥치고 먹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욕할 기운이 남을 걸 보니, 속으로 정리가 모두 끝난 모양이었다.
“민우 씨도 같이 가지?”
“그래. 왜? 걱정 되냐?”
걱정 되냐는 말에 지현은 작위적인 웃음을 지었다.
“흥, 그런 녀석 누가 걱정이나 할까 보냐. 조루 녀석.”
조루라는 말에 순간 입에 넣었던 국을 뿜을 뻔했지만, 애써 삼키고는 지현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 새끼가 너한테 뭔 짓 했냐?”
“그 성격에 무슨 짓은, 무슨. 내가 덮쳤다, 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 들으니 또 아득했다.
“걔 이제 내 남자친구니까, 죽이지 말고 살려서 데려와.”
미친년아, 오빠는 걱정도 안 하냐고 물으려는 순간, 지현이 뒤에 쑥스럽다는 듯 ‘…오빠도.’ 하고 덧붙였다.
빤히 쳐다보고 있자니, 지현이 욕을 내뱉었다.
“아, 뭘 봐. 밥이나 빨리 먹어. 이제 힘든 일 하러 갈 건데 속이라도 든든히 채워야 할 거 아냐.”
☆ ☆ ☆
다음으로는 시연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아… 어… … … ….”
아니나 다를까, 시연은 지훈을 보자마자 울먹거렸다.
마지막이라 눈물 없이 웃으며 보내줘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머리와 다르게 가슴이 말을 듣지 않는 모양이다.
“울면 화장 지워져. 저번처럼 검은 눈물 펑펑 쏟을 거야?”
“아니… 그래도….”
말없이 꼭 안아줬다.
“죽으러 가는 거 아니니까, 안심해.”
“응… 진짜 안 돌아오면 내가 쫓아갈 거니까!”
“참 쓸 데 없는 걱정도 많이 한다. 나 돌아오면 뭘 먹여야 힘 좀 낼까 잘 생각이나 해둬.”
시연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연은 입술을 다물곤 가져왔던 스포츠 백을 건네줬다.
“이게 뭐야?”
“열어 봐.”
지이이익 -
지퍼를 열자 난생처음 보는 총과 라이딩 슈트 같은 옷 그리고 탄창과 유탄이 몇 개 들어있었다. 제일 먼저 총을 들자, 시연이 결의에 찬 눈으로 말을 이었다.
“아이덴티티랑 합작으로 만든 총이야. 원래는 외마연(외부 마법 연구원) 전용인데, 사용자의 마력에 감응해서 총알의 강도를 높여줘. 총알의 등급을 하나 더 높여준다고 생각하면 편할 거야. 자기도 마법 쓸 줄 아니까 가져왔어.”
마법 공학 소총.
언젠가 각성자 물품 거래소에서 한 번 봤지만, 입이 떡 벌어지는 가격 때문에 꿈도 못 꿨던 총이었다.
비록 지훈이 지금 마력 부여와 주문 주입 이능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어디까지나 ‘주문’에 한정된 능력이었다.
탄환 자체의 등급을 올리진 못했다. 아마 지훈의 능력과 총의 능력이 합쳐진다면, 엄청난 시너지를 불러오리라.
그다음으로는 슈트를 꺼냈다. 자세히 보니 잠수복처럼 생기기도 했지만, 소재는 고무가 아니었다.
“현재 인류가 가진 기술로 만들 수 있는 최고의 방어구야. 같은 부분에 연속해서 맞지 않는다면, 저격 소총으로 쏜 CR탄 까지 막을 수 있어. 게다가 충격 흡수력도 뛰어나서 핀포인트 질량 공격만 아니라면 전부 흡수해. 내가 만든 거야.”
시연은 갑자기 냉장고에서 계란을 하나 꺼내왔다. 이후 계란을 손에 쥔 뒤 테이블 위에 펼쳐져 있는 옷 위로 있는 힘껏 집어 던졌다.
계란이 깨져서 옷에 전부 흩뿌려져야 했지만…
퐁 -
마치 침대에 떨어진 것 마냥 얌전하게 안착했다. 과연 완벽한 충격 흡수가 아닐 수 없었다.
해당 기술은 세드의 험난한 하늘을 뚫고 우주로 진입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술이었다. 보통은 우주선 내부에 쓰이는 소재였으나, 시연은 지훈을 위해 이를 방어구와 접목했다.
저 정도 충격 흡수라면 탄환을 맞고도 버틸 수 있으리라.
“거기다가 자기한테 방사능, 산성, 화염, 전류도 필요할 것 같아서 넣었어. AED(Automated External Defibrillator, 자동 심장 충격기)도 넣어 놨으니까… 위급상황이 되면 알아서 작동할 거야. 아직 아이덴티티랑 합작이 안 맺어져서 마법 저항은 없지만… 그래도 쓸 만할 거야.”
시연은 절대 울지 않겠다는 듯 이를 꽉 깨물었다. 그 모습이 꼭, 전쟁 나가는 남편을 쳐다보는 부인 같아 보였다.
마지막으로 남은 물건을 꺼내봤다.
탄창과 유탄이었는데, 탄두가 초록색이었다.
색깔을 확인하자마자 동공이 크게 불어났다.
초록색이라면, 현생 인류가 쏠 수 있는 탄환 중 가장 강력한 물건. CR(크릴 나이트)였다.
“일반 탄창에 120발, 유탄은 5개야. 슈트에 꽂을 수 있게 해놨으니까, 잘 넣어놔.”
설명을 다 듣자 시연은 한 번 입어보라고 권했다.
옷을 벗고 슈트를 집어 들자, 사타구니 부분에 관이 하나 달려 있는 게 보였다. 뭔가 싶자니, 시연이 설명해줬다.
“위험한 지형 많이 다닌다면서… 물 부족하거나, 옷을 벗기 난감할 때도 있을 것 같아서. 배뇨랑 여과 시스템이야.”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 써 준 게 너무나도 고마웠다. 발끝부터 머리까지 모조리 뒤집어쓰자, 눈앞에 영상이 나타났다.
“나이트 비전이랑 열 감지도 넣었어. 왼쪽 관자놀이 부분 눌러서 바꿀 수 있어. 방독 필터는 24시간짜리 하나니까 주의해.”
이 작은 옷에 저 기능들이 어떻게 다 들어갔는지 신기했지만, 궁금증보다는 일단 시연의 준비에 감사를 표했다.
아마 지훈이 사지로 간다는 것에, 모든 노력을 다해서 만들어낸 물건일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고마워….”
“고마우면, 꼭 살아 돌아와. 나 그거 만든다고 예금 탈탈 털어서 거리에 나앉게 생겼어. 진짜 결혼할 때 집 안 사오면 멱살이라도 잡을 거라고!”
현재 받은 물건 가격만 따져도, 지구에 아파트 10채는 거뜬히 사고도 남을 물건이었다. 그래도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저렇게 말하는 모습을 보니 고마웠다.
“그래, 꼭 기다려. 오래 걸리더라도 돌아올게.”
꽉 안아준 뒤 일행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시연이 따라오려고 했지만, 데려가면 괜히 마음 약해질 것 같아서 집에 있으라고 말했다.
☆ ☆ ☆
인적이 드문 한국 개척지 남쪽.
꽤 많은 인원이 북적거렸다.
‘뭐 저렇게 많아?’
칼콘, 민우, 가벡, 석중 사람들, 스토커 일행 합쳐 대강 100명 내외라고 생각했거늘, 딱 봐도 300은 되어 보였다. 대충 외곽에 바이크 세우고 내려니, 낯익은 얼굴이 다가왔다.
“오래간만이군, 인간.”
“달갑지 않은 인연이지만, 다시 한 번 보는군.”
그가쉬와 겐피(겐포의 아들, 고블린)이었다. 도대체 부르지도 않은 녀석들이 왜 왔나 싶어 물어보니, 가벡이 가서 얘기했다고 말했다.
아마 거기에 아쵸프무자까지 따라붙었겠지.
‘빌어먹을… 숫자가 많다고 다 좋은 게 아니거늘….’
들어가자마자 누구 목이 먼저 날아갈지 모르는 상황에, 숫자만 잔뜩 불어난다는 건 퍽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이는 곧 쓸 데 없는 사상자만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 있음을 뜻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 존재라고 한들, 지훈이 싫다는 이유 하나로 ‘뒈지든가 말든가’ 할 정도로 미친놈은 아니었다.
“그가쉬 클랜은 이 싸움에 대한 대가로 강력한 아티펙트를 요구했다. 위대한 아쵸프무자는 이에 승낙했고 말이지. 서로 좋은 사이는 아니지만, 잘 싸웠으면 좋겠군.”
털 덥수룩한 손이 악수를 권했기에, 대충 영혼 없이 잡고 흔들어줬다.
“나는 아버지의 원수인 네놈의 멱을 따고 싶지만, 우리 부족의 독립을 위해 협력하겠다.”
겐피는 당장이라도 눈물 대신 살기를 흘릴 정도로 날카로운 표정으로 올려다봤다. 이에 ‘열심히 해라.’ 라고 일축하고는 어깨를 두드려줬다.
그가쉬 클랜은 한국에서 지원받은 흑표 전차와 K2 및 기타 중화기로 무장한 일개 중대를 데려왔다.
현대 화기가 얼마나 힘을 보여줄지는 몰랐으나,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와 달리 겐피 부족은 겐피 포함 6명이 전부였다.
수적으로는 굉장히 적었지만, 겐피 본인이 C등급 각성자임은 물론 친위대 역시 실력이 좋을 게 분명했기에 그가쉬 클랜보다는 믿음이 갔다.
다음으로는 도본옙스코였다.
러시아에 있는 갱으로, 하수도 지도를 팔았던 녀석. 지훈이 녀석의 조카를 장애인으로 만들었기에 서로 으르렁거리는 사이였기에, 도대체 왜 여기 있나 싶었다.
“석중이 요청했다. 장갑차 열 대. 성공하면 그 다섯 배를 돌려준다고 했다. 네놈은 씹어먹어도 시원찮지만, 사업은 사업이지.”
“아아, 그 새끼는 잘 있나? 미안하다고 좀 전해 줘. 사업은 사업이잖아. 그 녀석이 이해해야지. 그렇지 않겠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자, 도본옙스코가 찡그렸다.
녀석은 장갑차만 인계한 뒤 사라졌다. 사업가다운 현명한 선택이었다.
중앙 쪽으로 향하다가 문득 엘프들과 마주쳤다.
빠르게 지나치려니 뒤에서 에르파차 형제가 붙잡았다.
“김지훈님!”
얼굴 보자마자 든 생각은 ‘너희였냐….’ 였다.
“아쵸프무자님과 그 사자님께 도움이 될 수 있어 영광입니다. 거룩한 성전을 이끌어 주십시오.”
갓 성인이 된 것 같은 어린 얼굴로 저런 말을 내뱉으니, 영 어울리지 않았다. 뒈지기 싫으면 집으로 꺼지라고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이미 여기까지 온 이상 들어먹지 않겠지.
그냥 포기하고는 고개만 끄덕여줬다.
‘처음 봤을 때는 어린애였는데, 많이 컸군.’
지금도 꼬맹이라는 사실엔 변함없었지만, 그대로 마법사용 장비를 착용하고 있는 모습이 나름 늠름해 보였다.
중앙에 도착하자 동료들과 석중이 기다리고 있었다.
“왔냐?”
“지훈, 왔어?”
“오셨습니까.”
“왔니, 개 쓰애끼. 누가 주인공 아니랄까봐 늦는 거 보라.”
순서대로 가벡, 칼콘, 민우, 석중이었다. 말 한 마디 한 마디에서부터 숨길 수 없는 존재감이 나타났다.
“거 좀 늦을 수도 있지, 보채기는. 준비는 끝났소?”
석중에게 묻자, 씩 웃으며 뒤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MES 포함, 장갑 스무대와 전차 2대 그리고 전투 헬기와 급유차량이 보였다.
“미친… 저딴 거 있으면 당장 레니게이드 갈아버리고 대장 노릇 하지, 뭐 한다고 꼭꼭 숨기고 있었소?”
“원래 고개 빳빠시 들메, 내 목 쳐달라고 아우성치는 꼴이디, 병시야. 사람은 딱 전차랑 헬기 쓰는 애들만 데려왔으이, 나머지는 알아서 몰으라.”
“고맙소.”
“다 외상이니까, 다녀와서 평생 일해서 갚으라.”
질 나쁜 농담에 욕 한마디 내뱉어줬다.
아쵸프무자를 기다리는 동안, 일행과 얘기를 나눴다.
“클랜은 잘 다녀왔냐?”
“어, 잘 있더라. 내 아들도, 그녀도.”
“뭐래.”
“카크라가 이번 전투 끝나면, 같이 인간 땅으로 가자고 그러더라. 오래 기다렸대.”
아마 칼콘이 그녀를 잊지 못했듯, 그녀 역시 칼콘을 잊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클랜 내에 있으면 개개인간의 혼인이 불가능하니까, 인간 세상으로 와서 단둘이서 살고 싶나 봐.”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는데?”
“기다리지 말라고 했어. 죽을지도 모르니까.”
씁쓸한 웃음이 스쳤다.
“걱정하지 마라, 나는 죽어도 너는 살아서 돌아갈 거다.”
“무슨 소리야, 지훈. 난 그 반대로 만들 건데.”
이에 둘이 웃으면서 주먹을 쾅 부딪쳤다.
민우는 보자마자 바로 멱살을 잡으려다 말았다.
“너, 잤다며?”
앞뒤 다 잘라먹은 말이었으나, 화자와 청자 둘 다 그 뜻을 알았기에 민우는 얼굴이 새하얘졌다.
“아, 아니… 거기에는 깊은 사정이 있습니다. 저, 저는 거부했지만 지현 씨가 강제로….”
샷건에 고무탄 넣고 쏴주고 싶었지만, 이미 일 터졌는데 뭘 어쩌겠는가.
“됐어, 새끼야. 잘 해줘라. 내 동생이 아무리 썅년이지만, 알고 보면 좋은 여자다.”
“네, 넵. 맞는 말씀이십니다.”
“너는 절대 뒈지지 마라. 돌아와서 내 손으로 직접 조져야 하니까. 알간?”
분명 챙겨주는 말이었음에도, 민우는 온몸에 피가 마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가벡은 무릎을 꿇은 체 제 신에게 기도하고 있었다.
“열심이군.”
“내 생에 가장 영광스러운 전투가 될 거다. 이기면 무한한 영광을 거머쥐게 될 테고, 죽어서도 발쿠할에서 그분과 영원히 함께할 수 있겠지. 이 어찌 기쁘지 아니할 수 있던가.”
“근데 그가쉬는 왜 불렀지?”
“아쵸프무자께서 내게 신탁을 내리셨다. 병력이 필요하다고 하셨지. 그래서 내가 가서 직접 얘기했다. 겐피도 부족의 독립을 조건으로 협력하고 싶다고 하더군.”
“너 정도 되는 투사라면, 가봐야 90% 이상 죽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텐데?
비꼬듯이 묻자 가벡은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죽어서도 신과 함께하는데,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죽음은 그저 시작일 뿐, 절대 끝이 아니다.”
“또라이 새끼.”
말이 통하지 않았기에 고개를 젓고는, 힘내라고 어깨를 두들겨줬다.
“죽지 마라. 너는 아직 죽기에 아깝다. 이 세상에 너 같은 병신도 살아 있어야 재밌는 세상이 되질 않겠냐.”
“내 죽음은 그분께서 결정하지만, 걱정은 고맙군. 너 역시 좋은 투사다, 김지훈. 함께 싸워 영광이다. 너와 가는 길엔 항상 승리가 묻은 피 냄새가 났다.”
“거 표현 참 비위 상하게 하기는. 간다.”
일방적인 인사를 건네곤 그에게서 멀어졌다.
적당히 기다리고 있자니 아쵸프무자가 나타났다.
“준비는 끝났어?”
“아직. 칼날 정글 주인과 최상위 관리자. 그리고 차원 여행자들은 어디 있지?”
“내가 알아서 챙겨 갈 거야.”
“그렇다면 됐다. 바로 출발하지.”
“어디로 떨어 나도 잘 몰라. 잘하면 들어가자마자 싸워야 할 수도 있어.”
“그 정도는 예상했다. 가지.”
아쵸프무자는 손 위로 점프 잼을 소환했다.
“D pookimise, suur twin platsenta (대규모 차원 이동, 큰 쌍둥이의 태반)”
말이 끝남과 동시에 300명이 넘는 인원들의 몸이 흐려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