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권능의 반지-163화 (163/173)

<피아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3일 후. 지훈의 집.

샤워를 하고 나오니, 아쵸프무자가 벽에 기댄 채 지훈을 기다리고 있었다. 집에 아무도 없었던지라 당연히 알몸으로 나왔는데 갑작스러운 방문이라니. 퍽 당황스러웠다.

“왔어? 오래 씻네.”

“말투가 꼭 하룻밤 불장난 하는 여자 같군.”

머리를 닦던 수건으로 사타구니를 가리며 대답했다.

“나 불장난 좋아하는데, 보여줄까?”

불장난. 같은 단어였으나 서로가 말한 뜻은 굉장히 상반됐기에 사양했다.

“무슨 일로 온 거지?”

“널 보고 싶어 하는 아이가 있어. Kutse(소환).”

동의 따윈 없는 일방통보. 게다가 말이 끝나자마자 허공이 비틀어지는가 싶더니 어린 소녀를 퉤 뱉어냈다.

소녀는 과격한 소환에 바닥에 고꾸라졌으나, 이내 자세를 잡고 지훈을 똑바로 바라봤다.

여자 둘이서 맨몸에 수건만 걸친 몸을 빤히 쳐다보고 있으니 기분이 묘했으나, 이내 떨쳐냈다.

사람이 벗은 개나 고양이 모습을 보고 흥분하지 않듯, 저들 역시 지훈의 알몸을 봐도 별 느낌이 없으리라.

‘나만 신경 쓰는 것 같군.’

몸을 가렸던 수건으로 다시 머리를 닦으며 소환된 어린 소녀를 쳐다봤다. 누군가 싶길 몇 초.

러시아 하수구에서 봤던 차원 여행자였다.

“안녕하세요, 사자님.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저는 … … …입니다. 해당 언어로는 그냥 기토킨 이라고 발음하시면 됩니다.”

“아아. 저번에는 미안했다.”

보자마자 섬광탄 까고 작살부터 박았으니, 아마 기토킨 입장에서는 굉장히 불쾌하다 못해 끔찍한 기억이었으리라.

온 이유가 궁금하긴 했지만, 이제는 알아서 설명해 줄 걸 알았기에 무시하곤 드레스 룸에서 옷을 챙겨 입었다.

“예상은 했겠지만, 기쉬(차원 여행자) 측에서 도움을 주고 싶다고 요청해 왔어.”

“그냥 알겠다고 하면 되지, 뭐가 문제지? 언제는 다 알려줬던 것처럼 얘기하는군.”

“그랬나? 기억이 잘 안 나네.”

어물쩍 넘어가려는 아쵸프무자를 비아냥거리곤 기토킨에게 고개를 돌렸다.

“원래대로라면 저희는 선임 사자님들과 적대적인 관계였으나, 이번 사자님의 행동을 계기로 얘기가 바뀌었습니다.”

적대적인 관계.

이번에는 지훈이 운 좋게 점프 잼을 발견해서 대체할 수 있었지만, 선임자들은 말 그대로 ‘차원 여행자’를 잡아왔다.

기쉬 입장에서는 동료가 납치된 꼴이니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지훈은 그러지 않았다.

- 저게 필요한 이유가 뭐지?

아쵸프무자에게 이유를 물어보며, 여차 싶으면 차원 여행자를 놔주려는 행동까지 보였다.

“이에 저희는 아쵸프무자님과 대화, 이번 일의 경위와 참된 원인이 아쵸프무자님이 아닌 하즈무포카님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비록 얼마 전까지만 해도 둘은 적대관계였지만, 근본적인 원인을 뿌리 뽑기 위해 손을 잡겠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이에 저희 차원 의회는 이번 싸움에서 아쵸프무자님과, 김지훈 사자님을 돕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부디, 저희에게 도움이 될 기회를 주십시오.”

말은 기회를 달라고 말했지만, 지금 상태로는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게 지훈의 입장이었다.

“기꺼이. 함께해서 영광이군. 원래 싸움이라는 게 피아 구분 모호한 거니까, 서로 잘 이해하고 앞으로는 같이 가자고.”

당연히 승낙했다.

차원 여행자들은 전원 전이계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 여기에는 왜곡부터 시작해서, 단-장거리 도약 외에도 기타 강력한 능력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실제로도 지훈 일행이 ‘부상 당한 어린 기쉬’를 굉장히 힘들게 포획하지 않았던가?

아마 단순 전투력으로 계산하자면, 여태까지 만났던 집단 중 가장 강력한 존재들이리라.

“그럼 당신께서 불러주실 때까지 기다리겠나이다.”

기토킨은 꾸벅 인사를 하곤 차원 도약으로 사라졌다.

“강력한 아군을 얻었어. 여태까지 단 한 번도 도와주지 않았던 녀석들인데, 운이 좋네. 아니, 네가 잘한 거야.”

“딱히. 운이 좋게 대용품을 찾은 것뿐이다.”

“가끔은 본인이 한 일을 인정해 보는 건 어때?”

아쵸프무자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으나, 지훈은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시간이 남아도는 모양이군?”

“아니, 널 위해 조금 할애한 것뿐이야.”

“그럼 빨리 내 집에서 나가줬으면 좋겠군.”

“아쉽게도 그러질 못해. 마지막으로 들러야 하는 두 장소가 있거든.”

마지막으로 들러야 하는 두 장소.

이제 세력 모집에도 끝이 다가왔음은 물론, 머지않아 전투가 시작된다는 얘기였다.

“어디지?”

“FS 유적과, 칼날 정글.”

낯익은 이름에 짙은 불안감이 몰려왔다.

“나도 이번이 처음이야. 그 마음 이해해, 하지만 지금 우리들로는 턱없이 부족해. 너도 죽고 싶진 않잖아?”

“아무리 동료가 필요하지만, 맨몸으로 굶주린 호랑이 앞에서 재롱을 부릴 마음은 없다.”

길고 긴 기다림 끝에 타락해 반지 사용자를 보이는 족족 죽이는 미친 순례자와 핵 꽂힌 정글에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를 끔찍한 생명체.

둘 다 엄청나게 위험했다.

“나도 함께 갈 거야. 전투는 없을 거라고 장담하지.”

“그 말 꼭 지켜야 할 거다.”

☆ ☆ ☆

먼저 찾은 곳은 FS 유적이었다.

지훈이 위치를 보사에 팔아넘긴 까닭에 엄청난 연구 인력이 투입됐으나, 결국 입구를 열지 못하고 대부분 철수했다.

까닭에 별다른 걱정 없이 바로 FS 유적으로 향했다. 전투가 벌어질 것 같지는 않았기에, 동료 없이 홀로 이동했다.

벤츠를 타고 외로이 대만 개척지로 이동한 뒤, 지도를 구입해 FS 유적까지 이틀을 걸었다.

‘오래간만에 오는군.’

뚜벅, 뚜벅.

FS의 기술로 만들어진 이름 모를 금속판 위를 걷고 있자니, 문득 터렛에 몸을 관통당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하필 떠올라도, 쯧.’

대충 100M 쯤 이동하니 보사 연구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다가와 지훈을 제지하려고 했지만…

“La magada. (잠들라.)”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아쵸프무자가 손짓하자 나무토막처럼 픽 쓰러졌다.

“이제 아주 막 나가는군? 처음부터 이렇게 도와줬으면, 내가 그 개고생을 하지 않았어도 됐을 텐데 말이지.”

진심과 짜증을 담아 노려봤지만, 아쵸프무자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했다

“만약 그랬다면 지금 네가 이렇게까지 성장하지 못했겠지. 원래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쓴 법이야.”

그래서 12,000번이나 죽을 때까지 지켜보고 있었냐, 개썅년아 라는 말이 입 바로 아래까지 올라왔다가 내려갔다.

주변에 있는 연구원들을 재워가며 입구에 도착했다.

보사 요청으로 반지를 대봤을 때는 전혀 열리지 않았던 문이, 이번에는 아쵸프무자를 기다렸다는 듯 활짝 열렸다.

“가자.”

위 - 이 - 이 - 잉 -

고속으로 내려가는 승강기 속 무중력에 익숙해질 무렵 승강기 문이 열리며 올텅이 모습을 드러냈다.

“위대하신 존재를 뵙습니다.”

“최상위 관리자는?”

분명 저번에 아쵸프무자가 강제로 발화시켜 녹아버렸다. 그럼에도 묻는다는 건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비상 프로토콜에 따라 재구성이 완료된 상태입니다. 호출할까요?”

채 아쵸프무자가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저 멀리서 불안한 효과음이 들려왔다.

- 위잉.

- 그즈즈즈즈즈즈즞!

초록색 레이저를 느낀지 0.5초도 안 돼서 바로 엄청나게 굵은 붉은 레이저가 뿜어져 나왔다.

“빌어먹을!”

양팔로 얼굴을 감싸자, 따가운 기분이 들었을 뿐 별다른 부상은 입지 않았다.

반격을 위해 글록을 뽑고 허공에 몇 번 발포하자, 약 2초 후에 펑 - 펑 - 하고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전투는 없을 거라고 하지 않았던가?”

“기다려 봐. 이제 곧 도착할 거야.”

말 끝나기 무섭게 최상위 관리자가 나타나며 분노 가득한 목소리로 아쵸프무자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어째서, 어째서 날 죽이지 않는 것인가! 제발… 제발 이 끝없는 저주를 풀어 줘….”

최상위 관리자는 허공에 뜬 구체의 모습. 분명 그 어느 행동이나 표정이 없음에도, 슬퍼 보이는 것 같았다.

“거래하고 싶어. 만약 이에 응하고, 또한 성공한다면 네가 염원하던 죽음을 줄게.”

최상위 관리자가 광신도처럼 죽음을 부르짖었고, 이에 아쵸프무자는 현재 상황을 설명했다.

최상위 관리자는 자기가 이렇게까지 고통받은 이유가 겨우 두 신 사이에 있던 ‘유희’였다는 사실에 절망했으나, 그보다 더 죽음을 염원했기에 쉽게 승낙했다.

“나는… 나는 뭘 하면 되지?”

“얼마 후 하즈무포카의 차원에 대규모 침공이 있을 거야. 그때 합류해.”

“알다시피… 나는 이 유적을 벗어날 수 없다.”

“유적을 들고 가면 되지. 올텅, 최상위 관리자가 이동할 수 있게끔 휴대용 케이지를 만들어. 외벽을 뜯어서 만들면 될 거야.”

올텅은 고개를 푹 숙이고는 신탁을 받들었다.

“알겠나이다, 모두 당신의 뜻대로 하겠나이다.”

“이번에는… 이번에는 정말로 진정한 죽음을 줄 것인가?”

최상위 관리자는 과거에 속았던 경험이 있기 때문인지, 재차 확인했다.

“맹세하지. 성공한다면 네게 완벽한 죽음을 줄게.”

최상위 관리자가 부르짖었다.

육체가 없는 몸이었음에도 꼭 눈물을 흘리는 것 같았다.

☆ ☆ ☆

칼날 정글.

과거였다면 중국 개척지를 통해 가야 했지만, 핵이 떨어지고 나서부터 얘기가 달라졌다.

보통 사람은 방사능에 푹 절여지기 싫어했기에 주변에 사람 그림자가 싹 사라진 것이다.

이에 따라 한국 개척지 북쪽에 있던 무장세력과 강도들도 덩달아 사라졌기에, 바로 칼날 정글로 갈 수 있었다.

홀로 벤츠에 앉아 시속 300km 밟아가며 평원을 질주하길 10시간. 칼날 정글에 도착했다.

‘어지간히 변했군.’

과거에 하늘을 전부 덮어버릴 정도로 울창했던 나무들은 이제 없었다. 이제는 그저 구멍 뚫린 천처럼 상처 입은 숲만 눈에 가득 보일 뿐이었다.

마치 엄청난 태풍이 할퀴고 지나가기라고 한 것 같이, 나무들은 제 수족 같은 나뭇가지를 잔뜩 떨어뜨렸다.

저것도 그나마 큰 나무들 얘기였지, 관목이나 풀들은 아예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전부 뭉개져 있었다.

핵이 10발 이상 꽂혔으니 그럴 법도 했다.

아니, 저렇게 돼야 정상이었다.

“인간. 사실 난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어. 아마 우리가 이번에 실패한다면, 머지않아 인간 혹은 인간과 이종족끼리 핵전쟁이 일어날 거야.”

아쵸프무자는 조용히 나타나 작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방사능과 마법 오염으로 뒤덮인 땅은 더는 쓸모없으니까, 하즈무포카가 청소를 시작하겠지. 그럼 모두 죽어….”

씁쓸한 목소리였으나, 그에 대해서는 딱히 별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이미 두 번의 전쟁을 겪어오며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전쟁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인간이 있는 한 어느 형태로든 전쟁이 발생할 거고, 인간의 손에 핵과 마법이 쥐어져 있는 한 언젠가는 그 폭탄이 터질 게 분명했다.

“그딴 건 관심 없다. 단지 내 가족과 소중한 사람들만 안전하면 돼. 싸움이 끝나면 바로 지구로 돌아갈 거다.”

“그래. 싸움이 끝나고 나면 네 뜻대로 해.”

칼날초가 전부 쓸려나갔던 까닭에, 이동에 그렇게 큰 시간이 걸리질 않았다. 아쵸프무자가 소환한 이름 모를 탈것을 타고 2시간 정도 이동하니 거대한 굴 앞에 도착했다.

“안에 있네. 가자.”

제 발로 짐승 아가리에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몇 걸음 걷자 지독할 정도로 짙은 슬픔을 담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 어흐어… 걱. 그르르 각….

마치 사람이 우는 소리 같기도 했고, 상처 입은 짐승이 거품을 무는 소리 같기도 했으며, 병에 걸려 죽어가는 늙은 맹수가 내는 소리 같기도 했다.

어느 정도 더 이동하자 소리의 근원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칼날 정글의 주인.

과거 거대하고 웅장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지금은 비쩍 마른 모습으로 작은 인형 비슷한 걸 끌어안은 채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심지어는 제 굴에 들어온 침입자조차 인식하질 못했다.

“너와 얘기를 하고 싶어.”

갑작스레 끼어든 목소리에 주인의 고개가 획 돌아갔다. 그 모습에서 얼핏 광기가 스쳤다.

“인간…! 전부, 전부 죽여 버리겠어!”

대화 따윈 하고 싶지 않았는지, 주인은 바로 발을 들었다. 밟아 죽일 심산 같았다. 이에 아쵸프무자는 전이로, 지훈은 가속을 이용해 피했다.

쿵 하고 꽂힌 발 주변에 먼지 구름이 피어났다.

“인간… 이게 모조리 인간 때문이야! 그워워워!”

주인이 포효하는 사이, 그녀가 안고 있던 인형이 뭔지 볼 수 있었다. 반쯤 썩어버린 새끼였다.

아마 핵폭발을 견디지 못하고 죽어버린 모양이었다…

“내 새끼… 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새끼… 인간이 죽였어! 인간이 죽여 버렸다고!”

미쳐 날뛰는 주인의 모습이 처량해 보였으나, 안타깝게도 지훈으로서는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하지만 아쵸프무자는 달랐다.

“나와 함께 가자. 만약 우리와 함께 싸워준다면, 네 새끼를 살려줄 수 있어.”

날뛰던 주인이 일순간 모든 행동을 멈추고, 커다란 눈에 눈물만 그렁그렁 맺은 채 아쵸프무자를 쳐다봤다.

“어떻…게?”

“시간을 돌려줄게. 네 새끼의 고유 시간을 돌린다면 가능해. 그게 아니면 아예 너를 과거로 보내 줄 수도 있어.”

“내가 너를 어떻게 믿지? 너는… 인간이잖아.”

아쵸프무자는 대답 없이 그저 제힘을 약간 보여줬다. 그걸로 증명됐는지, 주인은 안심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뭘 하면 되지?”

물음에 아쵸프무자가 지훈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마지막 말은 이쪽이 하라는 의미였다.

“신을 죽일 거다. 네 힘이 필요하다.”

“내 새끼를 되살릴 수만 있다면… 그 어떤 짓이든 하겠다.”

주인의 눈빛에서 짙은 살기가 배어 나왔다.

적으로 만났을 땐 그 어느 것보다 섬뜩했지만, 아군이 되니 그 어느 방패보다 든든해 보였다.

‘이제 준비는 끝났다.’

[현재까지 모인 전력]

김지훈 - 980

칼콘 - 320

민우 - 590

가벡 - 290

석중의 지원(장비 및 물자 포함) - 2500

스토커와 언더 다크 한국 개척지부 - 5650

에르파차 형제와 티그림 마법사들 (일부) - 18400

기토킨과 차원 여행자들 - 33020 (!)

올텅과 최상위 관리자 - 35490 (!!)

칼날 정글의 주인과 짐승들 - 21540 (!!!)

총 전력 합 - 1187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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