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권능의 반지-162화 (162/173)

<과거의 선택들이 도움으로 돌아오다.>

집으로 가는 길, 벤츠에 앉아 있으니 핸드폰이 울었다. 누군가 싶어 보니 시체 구덩이에서 온 전화였다.

문득 비슷한 레퍼토리로 진행되는 거 아닐까 싶어 받지 말까 싶었지만, 언더 다크가 관련됐을지도 몰랐기에 받았다.

“지훈~”

외모와 퍽 거리가 있어 보이는 간드러지는 목소리였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지랄하지 마라.’ 하고 끊었겠지만, 평소에 많이 겪어봤기에 그러려니 했다.

“왜.”

“재밌는 일을 꾸미고 있더라?”

“… 어디서 들었지?”

“반지 간수 잘하고 있으라던, 붉은 여자.”

아쵸프무자였다.

‘빌어먹을 년, 쓸 데 없는 짓을….’

스토커 본인의 능력 역시 굉장히 강력했기에 아군으로 둔다면 굉장히 든든했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그의 뒤에 있던 언더 다크였다.

지훈은 그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는 잘 몰랐으나, 파이로와 그의 은신처까지 알고 있는 걸 보고 대충 높은 위치에 있겠거니 짐작했다.

‘저 녀석이 끼어들면 분명 언더 다크가 간섭해 올 거다.’

귀찮아졌다.

만약 언더 다크 측에서 파이로를 죽인 범인이자, 핵까지 꽂은 장본인이 지훈이라는 걸 안다면?

직접 숙청을 자행함은 물론이오, 개척지 측에 정보를 팔아 수배범으로 만들 수도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페널티 잔뜩 안고 있는 마당에, 저런 것까지 들러붙으면 말 그대로 족쇄를 차는 것과 같았다.

아쵸프무자가 방관자에서 아군으로 돌아섰으니 치명적인 상황은 일어나지 않을 테지만, 그래도 엄청 찜찜했다.

“신을 죽이러 간다면서? 재밌어 보이네.”

도청되고 있을지도 모르는 전화로 저런 무지막지한 얘기를 꺼내자 어이가 없어졌다.

“돌았냐?”

“어차피 누가 들어봐야 미친놈 취급하고 말걸?”

사실이었다. 그냥 흘려 듣거나, 암호겠거니 하고 말겠지. 까닭에 다른 사람한테 설득하기가 어려웠기도 했고 말이다.

“오지 마라. 네 도움 필요 없다.”

사실 도움은 필요했으나, 괜히 이상한 것까지 끌고 들어 올 가능성이 있었기에 미리 거절했다.

“싫은데~ 나도 갈 건데~”

애마냥 칭얼거리는 것 같았기에, 욕 한 바가지 쏟아줬다.

“지훈, 나 진심이야. 그 날 이후로 잘 생각해 봤는데, 내 낭군님이 전쟁 나가는 데 이 정도는 해줘야 할 것 같아.”

“고맙긴 한데, 정중히 사양하지. 나는 결혼을 약속한 여자가 있는 몸이다. 거기다 그쪽 취향도 아니고.”

“어머, 나 고백도 안 했는데 차인 거야? 슬프다~”

과장된 흑흑 소리를 듣고 있자니, 핸드폰을 집어 던져 버릴까 진지하게 고민하게 됐다.

“장난치지 마라. 진지하다.”

무겁게 경고하니, 흑흑 거리던 소리가 뚝 끊기고 무겁고 진중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그럼 거래로 생각하자고. 그 붉은 여자가 말하길, 그 싸움에서 이기면 상상도 못 할 보상을 준다고 했어. 나한테는 돈과 명예가 아주 많이 필요하거든.”

진심인지, 아니면 단순 명분을 위한 위장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쪽도 저런 식으로 나오면 딱 잘라 거절할 명분이 없다는 거였다.

오지 말라고 해서 안 올까?

‘아니. 오히려 아쵸프무자가 직접 데려올 가능성이 크다.’

인간관계나 후처리 같은 것에 발목이 잡혀있는 지훈과 달리, 아쵸프무자는 오로지 ‘승리’ 그 자체만 생각했다.

아마 전력이 되는 녀석들은 모조리 쓸어담을 생각이겠지.

“네 마음대로 해. 하지만 가면 높은 확률로 죽는다.”

마지막 경고였으나, 스토커는 피식 웃고 말았다.

“기억나? 지훈이 항상 하는 말버릇이 있었잖아. 하루하루 목숨 걸고 외줄타기 하며 산다고. 사실 나도 그래.”

“개새끼. 그래. 네 꼴리는 대로 해라.”

“그럼 출발할 때 연락 줘. 맞다, 곽수가 얘기 좀 하자더라. 전화 바꾼다?”

곽수?

기억에 없는 이름에 고개만 갸웃하고 있더니, 언젠가 한 번 들어봤던 목소리가 훽 끼어들었다.

“잘 지내셨습니까?”

“그건 알 거 없고. 내가 당신이 기억에 없어서 그런데, 누구고 뭐 하는 사람이더라?”

곽수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판크라테온 앞에서 만났던 전직 크라토스 선수라고 소개했다. 그제야 지훈은 곽수가 누군가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아… 그 애아빠?’

술 한 잔 얻어먹으며 E급이 됐다고 자랑했었다. 이에 지훈은 선물로 F등급 단도 3개를 선물했다.

“저도 도와드리겠습니다.”

도와주겠다는 말에 얼굴을 찌푸렸다.

“거 씨발, 지금이 조선시댄줄 아나. 은혜 갚겠다고 불구덩이 뛰어들지 마라. 남 신경 쓸 시간 있으면 당신 애새끼나 잘 챙겨. 괜히 멋 부리다 네 애새끼 애비 없는 놈 만들고 싶어?”

초면에 굉장한 폭언이었으나 진심이기도 했다.

지훈이 고아로 컸던 만큼,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고아로 산다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곽수는 말이 없었기에, 다시 스토커가 전화를 받았다.

“뭐라고 했길래, 애 표정이 저래?”

“저 새끼 데려오면 내 손으로 죽일 거니까, 절대 데려오지 마라. 알간? 의리는 무슨 개 좆을 들이밀고 앉아있어.”

스토커는 잘 모르겠다는 듯 ‘으, 응.’ 하고 말았다. 이후 이런저런 인사를 한 뒤 전화를 끊었다.

☆ ☆ ☆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할까 생각하는 사이 이틀이 흘렀다.

집에서 마법 수련을 하거나, 체육관에서 체력을 단련하는 와중에도 생각은 오로지 ‘누구를 데려가지?’ 싶기도 잠시.

체육관 문이 열리며 낯익은 여자 하나가 들어왔다.

시연이었다.

“자기야, 운동 열심히 하고 있어요?”

워커에 쫙 달라붙는 가죽 바지, 그리고 상의는 회색 티셔츠에 가죽 재킷. 날개 주변까지 오는 머리는 흐트러지지 않게 끝만 검은 리본으로 슬쩍 묶어 놨다.

“어? 무슨 일이야?”

“그냥, 놀라게 해주고 싶어서! 쨘~ 여기 도시락!”

하즈무포카의 방해가 있는 상황이었다면 당장 데려다 안전 가옥으로 보냈겠지만, 지금은 그저 하즈무포카도 지켜만 보는 상황. 머리를 들이미는 걱정을 애써 꾹 눌러 담았다.

시연은 평소에는 잘 꾸미지도 않는 여자였다.

아마 이번은 놀래켜 주고 싶다는 이유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힘을 잔뜩 준 뒤 도시락 이벤트를 준비했으리라.

“고마워, 마침 뭐 좀 먹을까 싶었는데.”

싸울 생각으로만 가득했던 머리와 스트레스로 얼룩진 정신에 한 줄기 미풍이 불어오는 것 같았다.

제아무리 싸움이 코앞이라고 할지라도, 사람은 사람이었다. 온종일 신경 세우고 날카롭게 있다간 싸우기도 전에 미쳐서 쓰러질 게 분명했다.

싸울 땐 싸우더라도, 쉴 때는 쉬어야 했다.

그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가까운 공원에서 나란히 앉아 도시락을 까먹고 있자니, 문득 시연이 재미있는 얘기를 꺼냈다.

“나 오면서 용병 길드 지나쳤는데, 거기서 어떤 엘프 형제가 김지훈 각성자님을 찾습니다~ 하고 피켓 들고 있더라?”

“아니 엘프가 도대체 왜 날 찾….”

예전에 밀반입했던 게 걸렸나 싶기도 잠시.

페커리 사냥 갔다가 어린 엘프 둘을 살려줬던 게 떠올랐다.

아마 그들이 알고 있는 주소는 이사 가기 전 동구 주소인지라 지금은 어디에 살고 있는지 몰랐던 모양이다.

‘그냥 좀 잊고 살지. 다들 이기적이고 미쳐가는 세상에, 왜 이렇게 정의놀음 하는 새끼들이 많아? 씨발, 목숨이 열 개고 스무 개야? 또라이 새끼들.’

지훈 기준으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까닭에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야겠다 싶은 찰나…

- 아쵸프무자 님으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 Naljakas midagi välja. Ma lähen ja rääkida. Elf Aitab natuke kraavi. (재미있겠네. 내가 가서 얘기해 볼게. 엘프랑은 조금 친하거든.)

‘빌어먹을! 너는 누가 죽든 상관없는 건가? 그만둬!’

- Ei. Ma lihtsalt olgem lihtsalt anda olukorrale. Nad valides. (아니. 나는 단지 상황을 알려 줄 뿐이야. 선택은 그들이 하는 거지.)

그 말을 마지막으로 교신이 일방적으로 끊어졌다.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고 있자니, 시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기야, 갑자기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먹여 주려는 생각이었는지, 유부초밥을 손에 든 채 걱정스럽게 묻는 시연이었다. 이미 충분할 정도로 마음고생을 한 시연이었기에, 애써 아니라고 둘러댔다.

“이거 먹어~ 내가 직접 만들었다? 아~”

“괜찮아, 내가 먹을 수 있어.”

“싫어. 이거 꼭 해보고 싶었단 말이야, 빨리!”

복잡한 지훈의 마음과는 어울리지 않는 상황이었으나, 그걸 모르는 시연은 어서 입을 벌리라며 흥 소리를 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입을 벌리자 입에 유부가 꽂혔다.

맛있었다.

참 뜬금없었지만, 이 음식을 다시 한 번 같이 먹기 위해서라도 죽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아쵸프무자는 에르파차와 그의 형을 소환했다.

예상치 못한 소환에 어리둥절하기도 잠시.

둘은 아쵸프무자의 모습을 보자마자 들고 있던 피켓을 떨어뜨리곤 바닥에 얼굴을 붙였다.

“위, 위대한 존재를 뵙나이다!”

“마법과 시간의 쌍둥이 신이시여!”

“글세… 쌍둥이라는 말은 빼자. 불편하네.”

아쵸프무자가 불쾌감을 나타내자, 에르파차가 공포에 질려 온몸을 벌벌 떨었다.

“죄송합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신탁을 내린다거나, 너희에게 막중한 임무를 줄 생각은 없어. 단지 얘기를 하고 싶을 뿐이야. 일어나.”

형제가 일어서자, 눈앞에 테이블과 의자가 생겨났다. 아니나 다를까 시계 모양을 하고 있었다.

둘이 어정쩡한 자세로 앉자, 차를 한 잔 권했다.

“김지훈, 알아?”

지훈이라는 말에 형제의 눈이 커다랗게 불어났다.

“예, 알고 있습니다! 지금 그분을 찾고 있습니다!”

애초에 들고 있는 피켓이 ‘김지훈 각성자님을 찾습니다.’ 인데 어찌 모를 리가 있겠는가.

“조금 긴 얘기가 될지도 모르는데, 일단 들어 봐.”

아쵸프무자는 그 말을 시작으로 긴 얘기를 쏟아냈다. 두 형제는 그 얘기를 모두 듣고는 동공을 부풀렸다.

“성전… 입니까?”

“그런 건 아냐. 단지 무한히 반복되는 유희의 탈을 쓴 저주일 뿐이지. 얘기했잖아. 나는 신탁을 내리는 것도 아니고, 임무를 주는 것도 아니야. 내 사도를 도와줄 사람을 찾고 있는 거지. 강요는 안 해.”

형제는 조용히 고개를 숙여 생각했다.

“저희는 돕고 싶습니다. 어차피 그분이 아니었으면 거기서 죽었거나, 그보다 더한 상황에 부닥쳤을 게 분명합니다.”

에르파차에 말에 이어 그의 형이 덧붙였다.

“그에 더해, 티그림에 돌아가 당신의 뜻을 전하겠습니다!”

“신탁이 아냐. 잘 생각해.”

“그 말씀 또한 전하겠습니다. 가슴 깊이 원하는 자만 참가할 수 있게끔 하겠나이다!”

“명심해, 죽을 수도 있어. 아니, 죽을 거야.”

“위대하신 분과, 저희 목숨을 살려주신 분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아쵸프무자는 두 형제를 쳐다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 시각.

하즈무포카는 주머니 안을 들여다보며 폭소했다.

“끄히히힉, 힉. 히히힉! 재미있네, 재미있어.”

여태까지 아쵸프무자가 데려왔던 자들은 전부 종족 대표 혹은 그에 준하는 유명한 영웅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누구보다 강력한 무력은 물론이오, 그 어떤 유혹도 견딜 수 있는 강력한 정신력을 가진 존재들.

‘그래 봐야 모두 나한테 죽었지만 말이지.’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뒷골목 출신에, 나약하기 그지없는 종족이며, 무력으로 제일가는 인물도 아니었고, 선한 인품을 바탕으로 그 어느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자도 아니었다.

‘이번 수는 재미있구나, 아쵸프무자. 너도 어지간히 지루했던 모양이야. 잔재주를 잔뜩 부려 봐라. 어차피 내가 이기겠지만, 이번 수는 너와 나 둘 다 즐겁게 즐기자고.’

하즈무포카에게 있어 지훈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짓밟아 줄 수 있는 나약한 병졸 그 이상도 아니었다.

체스로 치자면 폰(졸병).

그게 현재 아쵸프무자가 본 지훈이었다.

‘자, 필사적으로 발악해 봐라. 동료를 잔뜩 모아도 괜찮고, 등급을 더 올려도 좋으며, 그 어느 금은보화와도 바꿀 수 없는 장비를 구해와도 좋다. 얼마든지 기다려 주마.’

[현재까지 모인 전력]

김지훈 - 980

칼콘 - 320

민우 - 590

가벡 - 290

석중의 지원(장비 및 물자 포함) - 2500

스토커와 언더 다크 한국 개척지부 - 5650 (!)

에르파차 형제와 티그림 마법사들 (일부) - 18400 (!!)

아쵸프무자 - ???

총 전력 합 - 28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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