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전 포고.>
거인은 숨을 몰아쉬었다.
‘위대하신 그분께서 내게 신탁을 내리셨다.’
여태까지 그가 한 일이라곤 전부 잡일밖에 없었다. 간혹 반지 사용자들을 요격하긴 했지만, 그것도 전부 다른 존재들의 보조 정도였다.
거인은 이에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 어째서 내게는 신탁을 주지 않으시나이까?
억울하고, 원통했다.
페어리(소형 휴머노이드, 요정계통에 속함. 손바닥 크기)로 태어나 일족 중 유일하게 S등급이 됐고, 반신의 자격을 갖췄으나 그에게는 신격이 내려지질 않았다.
사실 하즈무포카가 신격을 주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원한 건 한 존재가 새로운 종족의 알파이자, 반신이 되어 새로운 종을 등장시키는 것이었으나… 거인이 S등급이 됐을 때 남아있던 페어리가 단 한 마리도 없었다.
거인이 모조리 제 손으로 죽여버렸기 때문이었다.
까닭에 타 종족과 피가 섞일 수 없이 오로지 페어리만으로만 번식이 가능한 거인은 베타, 델타 세대를 만들 수 없었고 이에 하즈무포카는 별 관심 없이 방치한 거였다.
저 사실을 알 수 없는 거인은 속만 타들어 갔다.
어서 반신이 되어 본인의 가치를 입증하고 싶었으나, 내려지는 임무는 남을 따라다니며 보조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끝났다.
하즈무포카의 변덕이 거인에게 신탁을 내렸고 갈망하던 그에게 동아줄 같은 기회를 내려줬다.
‘반드시 반지 사용자를 죽이고, 그 반지를 빼앗아 내 능력을 입증하겠다. 그럼 그분께서도 내가 쓸모 있는 존재라는 걸 알아주실 거다!’
거인은 이를 꽉 깨물고는 차원을 이동했다.
눈을 뜨자 넓은 평야와 함께, 드문드문 관목들이 보였다. 한국 개척지에서 북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곳이었다.
과거 칼날 정글이 제 기능을 했을 땐 엘프 밀수와 온갖 강도들이 판을 치는 장소였으나, 지금은 고요하기만 했다.
중국 정부가 만류를 무시하고 핵을 꽂았기 때문이었다.
까닭에 칼날 정글은 만신창이가 됐고, 그 주변 역시 사람의 발길이 끊긴 폐허가 되어버렸다.
이는 걸어서 100km를 이동해야 한다는 뜻이었으나, 거인의 얼굴에는 아무런 불만이 보이질 않았다.
‘변이. 소형화, 날개.’
우드득! 드득, 찍!
살이 찢어지고, 뼈가 뒤틀리는 소리가 나는 듯싶더니 거인의 모습이 순식간에 조그마한 새 한 마리로 변했다.
펄럭, 펄럭, 펄럭!
거인, 아니 거인이었던 새는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반지 사용자, 네 녀석을 반드시 꺾어주마. 하등 종족 따위에게 같잖은 계략 따위는 필요하지도 않다. 정면에서 작살을 내주마! 그분께 나의 강력함을 보여 드리겠다!’
그가 종족 변이로 얻은 최종 능력은 외형 변이.
그 어떠한 모습으로든 변할 수 있었던 만큼, 육체 싸움에서는 절대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인간으로 변신해 뒤를 칠 수도 있었으나 그런 방법은 원치 않았다.
오로지 본인의 힘으로만 반지 사용자를 꺾고 싶었다.
‘최상의 상태로 붙자. 부상당했거나, 준비가 충분하지 않은 녀석을 죽였다는 오명은 사양이다. 무조건 최상의 상태에서 꺾을 거고, 그 증거로 그분께 반지를 바칠 테다!’
거인은 생각만 해도 행복한 상상에 온몸을 떨었다.
☆ ☆ ☆
일행의 동의를 얻은 후부터 지훈은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하즈무포카의 하수인 중 누가 올지 전혀 알 수 없다.’
현재까지 만난 하수인은 딱 둘이었다.
거인과 인섹토이드.
전자의 경우 한 번 붙어봤기에 그 전투 방법을 알았지만, 후자의 경우 도대체 어떤 방식일지 감도 잡히질 않았다.
‘무기를 들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따지면 거인도 똑같았으나, 인섹토이드는 예외였다.
오우거나 트롤 같이 덩치가 큰 녀석이면 모를까, 중-소형 종족인 인섹토이드의 육체로 격투는 무리였다.
게다가 종족 특성상 단단하긴 하나, 손이 발달하질 않았다.
격투는 본디 때리거나 잡아 던지는 방식으로 싸우는 데, 포미시드의 경우 손으로 ‘찌른다’ 라고 해야 옳을 정도로 손이 발달하여 있지 않았다.
손을 굽혀 뭔가 휘감는 건 가능했지만, 딱 그 정도였다.
‘이능 계통 아니면 마법 쪽으로 봐야 한다. 아니면 개미라는 특성상 군집을 데리고 다닐 수도 있다.’
연구소에서 탈출할 때,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연구 장소는 그 특성상 위생에 굉장히 민감해 벌레가 있을 리가 없음에도, BSS 경비 시체들에 개미가 붙어 있었다.
일반 개미였다면 다행이지만, 만약 그게 포미시드에 총기나 전차까지 보유했을 정도로 과학 기술이 발달한 개체였다면 얘기가 달라졌다.
‘아닐 거다. 아니, 반드시 아니어야만 한다.’
거인 하나로도 머리가 깨질 것 같은데, 둘이 같이 오면 정말 곤란했다. 그렇지 않아도 희박한 승률이, 아예 0에 수렴하게 될지도 몰랐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칼콘이 질 좋은 방패를 얻었다는 것과 민우가 정신 계통 이능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거였다.
둘 다 적으로 돌리면 까다로울 능력이니, 분명 지훈의 적도 성가실 정도는 됐을 터였다.
‘만약 인섹토이드가 군체 제어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민우의 정신 감응 이능으로 어느 정도 상쇄가 가능하다.’
저번 경험으로 봤을 때, 민우는 시야 안에 들어오기만 한다면 숫자가 몇이든 전부 제어할 수 있는 것 같았다.
개미 같은 경우는 모조리 제어할 수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럼 거인 혹은 모르는 존재가 제일 중요하겠군.’
거인의 경우 과거 오우거로 연습을 해 봐서 어느 정도 기본 골자는 잡혀 있었다.
‘고공 점프가 제일 중요하다.’
당시와 지금을 비교하면 능력 차이가 있긴 하나, 사람을 장난감처럼 던졌던 거인이었다.
직접적인 육체 접촉은 절대 피해야 했다.
마무리 혹은 기타 이유로 근접전을 벌인다고 해도, 무조건 회피 중심으로 피하면서 싸워야 했다.
몇 대 맞는다고 죽지는 않겠지만, 날아가거나 내장이 흔들려 그로기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맞붙기 전에 연습해 놔서 다행이다.’
대강 생각을 정리하고, 다음으로 장비를 챙길 찰나 허공에 글자가 나타났다.
- Minions juurdepääsu, hiiglane. (하수인 접근 중, 거인)
아스발을 매만지던 손이 그대로 멈췄다.
‘이제야 온 건가.’
당황스럽거나, 무섭지는 않았다.
단지 저번의 설욕을 갚아 줄 기회가 왔음은 물론, 하즈무포카에게로 가기 위한 마지막 퍼즐 조각이 제 발로 찾아왔음에 미소를 지었다.
- Peate seadmed. Sa tahad asju? (장비가 필요할 거야. 어떤 물건을 줄까? 하나 정도는 줄 수 있어.)
“아니, 필요 없다.”
솔깃한 제안이었지만 거절했다.
어차피 거인은 육중한 몸과 강력한 힘으로 상대방을 짓누르고, 으깨는 녀석이었다. 아무리 좋은 갑옷을 입어봐야 그 힘을 견디지 못하면 순식간에 피떡이 됐다.
“차라리 내 동료에게 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 ☆ ☆
그 시각, 칼콘.
딱 봐도 사람이 들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이는 무게로 벤치 프레스를 하고 있었다. 팔과 가슴 근육이 꿈틀거리며 상하 운동을 반복하길 몇 번.
일어나서 땀을 닦고 있자니 허공에 글자가 나타났다.
- Ma vajan seda. (필요할 거야.)
도대체 뭐가 필요한가 싶어서 고개만 갸웃거리길 잠시.
갑자기 허공이 비틀어지는가 싶더니, 퉤 하고 하얀색 판금 갑옷을 내뱉었다.
- Teiseks apostli armor on kulunud. Tänu. (두 번째 사도가 입었던 갑옷이야. 입어.)
칼콘은 머리를 긁적이더니, 이내 본인이 입던 갑옷을 가져왔다. 이후 있는 힘껏 둘을 부딪쳤다.
깡!
D등급 갑옷이 마치 알루미늄 캔마냥 손쉽게 찌그러졌다.
칼콘은 씩 미소를 짓고는 갑옷을 걸쳐봤다.
크기가 작아 고생했으나, 그것도 착용을 끝내자 크기가 줄어 딱 맞게 변했다.
“가볍네?”
칼콘이 씩 미소를 지었다.
☆ ☆ ☆
민우가 샤워를 끝마치고 나오자, 웬 쪽지와 함께 머리띠 그리고 물약이 놓여 있었다.
“이게 뭐야?”
수건으로 대강 머리를 털며 집어 들었다.
- FS들이 사용하던 증폭기야. 끼면 정신 감응을 조금 더 수월하게 할 수 있어. 옆에 있는 물약은 폭주 제어 물약이야. 안 먹으면 언제 터질지 모르니까 마셔 둬. From 미술작품
민우는 미술작품이라는 곳을 읽자,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 들어오는 낌새도 없었고, 샤워를 하면서도 인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도대체 언제 왔다 간 거야?’
놀라움이 앞섰으나, 일단 시험 삼아 머리띠를 껴봤다.
삼장 법사에게 속는 손오공이 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으나, 설마 같은 편을 속일까 싶어 머리에 껴봤다.
끼고 나서 꽤 시간이 지났음에도, 의외로 별일 없었다.
“뭐야 이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으니 가벡이 물었다.
“무슨 일이지?”
“아니, 아쵸프무자가 물건을 놓고 간 것 같아서.”
- 또? 설마 이번에도 나만 못 받은 거란 말인가? 신이 줬다면 분명 성물일 터. 실수한 거란 말인가!
이능을 사용하지도 않았다.
단지 쳐다봤을 뿐인데 속마음이 들려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가벡이 숨을 몰아쉬며 공격적인 모습을 보이자, 살짝 움츠러든 것뿐인데도…
풀썩.
가벡이 주저앉았다.
“어, 어? 내 다리가 왜?”
본인이 원한 게 아닌 것처럼 보였다. 민우는 이상한 기분이 들어 당장 머리띠를 빼 버렸다.
‘이거 도대체 무슨 물건이야…!’
매우 당황한 민우였지만, 가벡 역시 다른 의미로 매우 당황했다. 본인의 다리가 갑자기 풀린 것과 더불어, 갑자기 눈앞에 익숙한 언어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 신은 기회주의자를 싫어하지만, 또한 변덕쟁이기도 하다.
글자가 사라짐과 동시에, 가벡이 깔고 앉아있던 베개가 부풀었다. 가벡이 깜짝 놀라 베개를 들춰보니, 그 아래에 검 두 자루가 놓여있었다.
같은 세공이 들어간 긴 검 한 자루와 짧은 검 한 자루.
이도류를 쓰는 가벡에게 딱 맞는 장비였다.
“신이시여, 드디어 나를 알아보시나이까!”
가벡은 그 검을 든 뒤, 글자가 나타났던 방향으로 큰절을 올렸다. 민우는 그 모습을 보며 ‘이상한 놈’ 하며 중얼거렸다.
☆ ☆ ☆
장비가 다 전해졌을 무렵, 지훈 집 현관문 아래에 쪽지 한 장이 도착했다. TV를 보던 지현이 뭔가 이상함을 느껴 오종종 걸어가 쪽지를 집었다.
- Homme ootan sind kell 16:00 selles kohas. (내일 오후 4시에 개척지 북쪽 150km 부근에 있는 구릉에서 기다리겠다.)
“이건 또 뭔 소리야?”
지현은 슥 훑더니 읽는 걸 포기하곤, 그대로 지훈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어차피 이 집에 있는 사람은 지현과 지훈뿐이니, 둘 중 한 명에게 온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덜컥!
노크 없이 방문이 활짝 열리며 지현이 쪽지를 휙 던졌다.
“뭔데?”
“몰라~ 현관문 아래로 왔더라. 오빠한테 온 거 아냐?”
내용을 확인하자 얼굴이 확 찌그러졌다.
적이 자기 집 주소를 안다는 사실이 퍽 불쾌했기 때문이었다. 따지고 보면 저번 테러도 파이로가 집 주소를 알고 있었기에 일어난 일이 아니던가. 하지만 동시에 약속 장소가 적혀있다는 사실이 우습기도 했다.
‘겁 없는 놈. 죽여주마.’
내용을 확인한 지훈은 바로 전화기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