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요할 생각은 없다.>
시체 구덩이 다음에는 동료들이었다. 이제 더는 헌팅을 안 할 가능성이 컸기에,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 만남이 될 수도 있었다.
현재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논리는 자본주의였다.
동료라고 한들 보상이 주어지지 않으면 같이할 수 없듯, 현재 하는 일 역시 보상을 약속할 수 없었다.
아쵸프무자가 일이 끝날 때마다 보상을 약속했지만, 그것도 뭘 받을지 장담할 수 없었기에 모호했다.
‘기분이 이상하군.’
꼭 오랫동안 만난 연인에게 타의에 의해 강제적으로 이별 선고를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언더 다크 문제로 시체 구덩이가 아닌 다른 술집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칼콘이 먼저 도착했다.
“왔냐? 한잔해라.”
값비싼 와인을 따라주자, 칼콘이 한숨에 들이켰다.
보통은 음미하며 그 맛과 향을 즐기지만, 먹는다는 행위에 충실한 칼콘에게 있어서는 술이란 그저 마시고 취하는 물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모양이었다.
“포도로 만든 술이네.”
“아아. 어떠냐?”
“너무 달아. 음료수 같네.”
카즈가쉬 클랜 주변은 물에 석회가 섞인 까닭에,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물 대신 맥주를 들이켰다.
칼콘 역시 그 부족 소속이었으니 아무래도 12도 남짓한 와인은 그냥 조금 달달한 음료 정도로 보인 모양이었다.
나름 분위기 낸다고 주문한 술이었으나, 칼콘에게는 맞지 않는 것 같아 버카디를 한 병 주문했다. 도수 70도가 넘는 괴악한 술이었다.
보통은 생으로 잘 마시지 않고 칵테일을 만들어 먹지만, 저 둘에게는 예외였다.
지훈은 각성한 까닭에 알콜 분해 능력이 좋아져서 어지간히 들이 붙지 않으면 술에 취하질 않았고, 칼콘 역시 저 정도는 되어야 기분 내며 마실 수 있었다.
“오늘은 무슨 일인데 또 술을 이렇게 먹자고 하셨대.”
평소에 생각이 없어 보여도, 중요한 때는 눈치가 빠른 칼콘이었다. 물음에 웃음으로만 답하곤 진심은 아껴뒀다.
끼익 -
“습관적으로 시체 구덩이 갔다가, 다시 오느라 시간이 좀 걸렸네요. 죄송해요.”
“죄송은 무슨. 김지훈 저 녀석이 갑자기 장소를 바꾼 게 잘못한 것 아니던가?”
고개를 꾸벅 숙이는 민우와 달리, 가벡은 온갖 투정을 다 부리며 들어왔다. 가볍게 인사하고는 술 한 잔씩 권했다.
“이능은 좀 괜찮냐?”
민우는 머쓱한 듯 헤실 웃으며 제 머리를 긁었다.
“뭐 투시로 좋은 구경 많이 하면서 지내고 있어요. 그 외에는 생각 읽는 것들 연습하고 있구요.”
이 녀석도 많이 변했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자니 머릿속에 문득 민우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 이런 것도 연습하고 있어요. 잘 들리나요?
“어, 잘 들린다. 근데 하지 마라. 머리 아프다.”
저번 정신 감응 후유증 때문에 순간 두통이 왔으나, 민우 역시 모르고 한 것이었기에 짜증을 내진 않았다.
“근데 또 무슨 일인가요? 저번에 가벡이 피 잔뜩 묻혀서 들어오던데, 뭐 임무 같은 거라도 있어요?”
생각을 읽었으면 바로 알아챘겠지만, 아무래도 동료였기에 마음대로 들춰보진 않은 모양이었다.
“… 일단 술이나 한잔하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
마지막이라는 말에 순간 분위기가 확 가라앉았다. 하지만 분위기를 깨고 싶지는 않았는지, 그 누구도 묻지 않고 일단은 술잔을 기울였다.
한 잔, 두 잔, 세 잔…
이윽고 몇 병 정도 비우고 나서야 말을 꺼낼 수 있었다.
“꼭 해야 할 일이 생겼다.”
나는 신을 죽여야 한다.
참 간단한 내용이었으나 입이 쉽게 떨어지질 않았다. 설명할 수도 없었고 말이다. 애초에 뜬금없이 꺼내서 믿을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뭔데?”
칼콘이 물었다.
무슨 말이 나오든 같이 가겠다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일까? 어차피 결과가 정해져 있으니 아주 태평해 보였다.
“아쵸프무자와의 일을 마무리해야 한다. 나는 신을 죽여야 해. 이 모든 일의 원흉이자, 내 소중한 사람들을 죽이려 했던 녀석의 멱을 따러 갈 거다.”
아니나 다를까 긴 침묵이 이어졌다.
칼콘은 ‘이번은 조금 힘들겠네. 죽을지도 모르겠다.’ 싶었는지, 잔에 있던 술을 한숨에 털어 넣었다.
민우는 ‘아니 지금 이 양반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하는 심정이었는지, ‘사실 거짓말이었어, 새끼야.’ 라는 대답을 기다렸다.
가벡은 ‘미친 새끼.’ 하는 심정을 표정에 그대로 드러냈다.
“신이라뇨? 너무 뜬금없이 않아요?”
민우에게 있어서 아쵸프무자는 그냥 조금 강한 마법사 정도로 보였던 모양이었다. 전말을 모르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했기에 입을 다물고 있으니, 가벡이 끼어들었다.
“결국 그 존재는 신이었나. 겉모습부터 심상치 않더군.”
“하긴… 굉장히 형이상학적으로 생기긴 했어요.”
칼콘과 지훈의 얼굴이 동시에 찌푸려졌다.
“화상 입은 여자가 도대체 어디가?”
“굉장히 육감적인 오크 여성이 형이상학적이라고?”
왼쪽 얼굴에 화상을 입은 여자.
굉장히 육감적인 오크 여성.
지훈이 아는 아쵸프무자와, 칼콘이 말하는 아쵸프무자가 동일 인물인가 싶을 정도로 다른 묘사였다.
‘뭐야 이거?’
이에 관해서 얘기를 나눠본 결과, 일행 전부 아쵸프무자의 모습을 각기 다른 모습으로 봤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지훈 - 왼쪽 얼굴에 화상을 입은 인간 여자.
칼콘 - 굉장히 육감적인 오크 암컷.
가벡 - 휴머노이드 현상을 한 거대한 불꽃.
민우 - 불붙은 시계가 여러 개 겹쳐있는 현대미술 작품.
“어… 네? 사람 모습이요? 저는 그냥 마법에 능통한 괴상망측한 종족인 줄 알았는데….”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 들었으나 이젠 놀랍지도 않았다.
하긴 애초에 신이라는 존재가 인간의 형상을 띠고 있다는 생각 자체가 굉장히 인간 중심적인 선입견이긴 했다.
인간, 엘프, 오크, 버그베어 그 외 여러 종족이 정신 나간 신의 주머니 차원에서 하하 호호 뛰노는데, 그깟 신의 외모가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짧게 말하지. 그 녀석은 신이었다. 그리고 난 그 녀석과 함께해, 정신 나간 신을 죽이게 됐다.”
다들 머리로는 어떻게든 이해하려 노력했으나, 잘은 안 되는지 머리만 긁적거렸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 민우가 실없는 농담을 던지길 몇 번. 나아질 기색 없이 민우 혼자 망망대해를 정처 없이 떠다니는 뗏목마냥 애처롭게 보일 찰나…
끼이익 -
문이 열리며 한 존재가 들어왔다.
왼쪽 얼굴에 화상을 입은 인간이자, 육감적인 오크 암컷이며, 살아있는 불꽃 인영이자, 시계가 겹쳐있는 미술 작품.
아쵸프무자였다.
“안녕. 재미있는 얘기를 하고 있어서 와 봤어.”
원래는 하즈무포카와의 룰에 의거, 직접적인 개입은 허락되지 않았으나 이 판은 이미 비틀어진 상태였다.
이제는 아예 직접 설명할 생각인 것 같았다.
“위, 위대한 존재를 뵙나이다.”
신이라는 걸 몰랐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했지만, 지금은 아니었기에 가벡이 바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반면 아쵸프무자는 괜찮다는 듯 손만 휘적였다.
“나 그런 거 별로 안 좋아해. 지금은 신과 필멸자가 아니라, 동업자로서 얘기하고 싶어.”
이에 가벡과 민우가 긴장을 조금이나마 내려놓았다.
“무슨 일이지?”
“직접 설명하러 왔어. 네가 말해봐야 설득력 없잖아?”
사실이었다.
- 사실은 여태까지 의뢰를 줬던 게 신이었어.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적당히 쳐야지, 저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지훈 본인도 갑자기 들으면 ‘개소리 그만 싸라.’ 할 내용인데, 다른 이들은 오죽했을까.
실제로도 정작 중요한 얘기는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시작부터 아쵸프무자의 외모에서 덜컥 걸려버렸다.
일이 편해졌기에 팔짱을 끼고 의자에 몸을 뉘었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하려나. 일단 알아듣기 쉽게 내막부터 설명해 줄게.”
이후 아쵸프무자의 입에서 들었던 얘기가 한 번 더 흘러나왔다. 하즈무포카와 아쵸프무자의 관계, 그리고 이 차원의 정체 등.
아무 생각 없이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던 가벡, 칼콘, 민우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신이라 그런가… 노는 스케일이 크네요.”
민우는 입을 쩍 벌리고는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당장 본인이 메고 있던 백팩을 열면, 그 안에 산도 있고 강도 있고 사람도 있다고 생각하며 비교를 해 본 모양이다.
“그렇구나. 그래서 그 하즈무포카를 죽이면 되는 거야?”
칼콘은 별 관심 없는지, 주적을 물었다.
그에게 있어서는 싸움의 목적과 원인 따위는 관심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저 ‘누굴 죽이면 되는가.’ 가 제일 중요했다.
“신을 죽여야 한다니… 그게 가능한 얘기입니까?”
반면 열렬한 광신도였던 가벡은 믿을 수 없다는 태도였다.
신을 죽인다는 건 본인이 믿는 신 역시 누군가에게 살해당할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렸다.
그에게 있어서 신은 ‘절대자’ 그 자체.
당연히 그렇다고 생각해왔고, 어려서도 그렇게 배웠으며, 단 한 번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나타난 아쵸프무자는 ‘신을 죽여라.’ 라고 얘기하고 있었다.
아마 그 자체로도 신성모독이라고 느끼고 있겠지.
“가능해. 나는 절대 불가능한 일을 시키지 않아. 필멸자 입장에서는 굉장히 혼란스러운 얘기야. 이해해. 시간을 줄게, 얘기들 나눠 봐.”
아쵸프무자는 본인의 존재가 방해된다고 생각했는지, 녹아들 듯 사라졌다. 사라지는 도중, 제일 중요한 얘기를 꺼내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와 내 대행자를 따라온다면, 그에 따르는 보상을 약속할게. 아마 너희가 상상할 수 있는 것 그 이상일 거야.”
아쵸프무자가 사라지자 칼콘이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갈 거야. 지훈이 위험한 곳엔 당연히 가야지. 아직 빚을 갚지 못했어.”
그놈의 빚.
이미 예전에 다 갚고도 남았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오히려 이쪽이 갚아줘야 할 정도였음에도 칼콘은 여전히 고집을 부렸다.
설득해 봐야 듣지도 않고 고집을 부릴 게 분명했기에, 짧게 ‘고맙다.’ 하고 말았다.
“내가 간다고 해서 의리네, 뭐네 할 생각은 없어. 민우, 가벡 너희가 지훈을 동료라고 생각한다면 가는 거고 아니면 안 가는 거야.”
칼콘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버카디로 나발을 불었다. 동료라는 단어에 민우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이번 임무… 위험하겠죠?”
말할 것도 없었다.
“아마 죽을 거다. 죽으러 간다고 봐야 옳다.”
파이로 잡으러 갈 때도 10번도 넘게 죽었다. 겨우 인간 하나 잡는데 그 정도였으면, 신을 상대로는 도대체 얼마나 죽어야 할지 감도 오질 않았다.
민우는 가만히 있나 싶더니, 칼콘이 먹던 버카디를 뺏어 그대로 들이부었다.
“야, 야! 미친 새끼야, 너 술도 잘 못 마시면서!”
쾅!
“형님!”
민우가 버카디를 내려놓으며 소리쳤다.
“저희 동료 아닙니까. 까짓 거 뒈지러 한 번 가보죠. 매번 뒈질 뻔했는데 이번이라고 뭐 다를 거 있겠습니까!”
악을 쓰듯 커다란 목소리. 고마웠다. 무서워서 달아나고 싶었을 텐데도 용기를 내준 것 아니던가.
눈동자 여섯 개가 전부 가벡에게 몰렸다.
“좀 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혼란스럽군.”
가벡은 부담스러웠는지, 아예 방 밖으로 나가버렸다. 하지만 욕을 하거나, 붙잡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거절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목숨을 걸어 주는 사람이 고마운 거지, 죽기 싫다는 사람에게 ‘너는 왜 안 죽느냐! 쟤는 죽는다는데!’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남은 일행 셋은 아무 말 없이 술잔을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