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 그리고 다짐.>
모든 것이 일그러진 변덕의 공간.
바닥은 찡그린 사람 얼굴로 되어있고, 전구 대신 사람 머리가 달려있으며, 의자 대신 송곳이 놓여있었다.
검은 인영이 그 송곳 위에 앉아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 곧 여섯 번째 장난감이 찾아오겠네.’
슬슬 지루하던 차에 나타난 새로운 유희거리였다.
이번에는 어떤 방법으로 마지막을 장식할까 생각하던 찰나, 바닥에 박힌 얼굴이 움찔거리더니, 거인을 토해냈다.
“위대한 존재를 뵙습니다.”
무릎을 꿇고 눈을 아래로 깔아 예를 갖췄지만, 인영은 관심 없다는 듯 손만 휘적휘적 저었다.
“신격만 있으면 죽일 수 있다며? 나도 죽이겠다? 게다가 넌 우리가 정한 규칙까지 어겼어. 그렇게나 이 게임에 끼고 싶었니? 겨우 너 따위가?”
언젠가 거인이 인섹토이드와 나눴던 대화 내용이었다. 이에 거인이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연속해서 찧었다.
쾅, 쾅, 쾅, 쾅, 쾅!
“죄송합니다!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인영은 아무 말 하지 않고 그 모습을 내려다봤다.
시간이라는 개념이 없는 변덕의 차원 속, 얼마나 긴 순간들이 지났는지도 모르게 됐을 때쯤 인영이 말을 열었다.
“그래, 잘못했으면 벌을 받아야지.”
거인이 뼈가 다 드러날 정도로 흉해진 고개를 들었다. 사형을 기다리는 사형수 같은 표정이었다.
“드디어 여섯 번째 장난감이 나타났어. 근데 이번에는 어떻게 반쪽짜리 같아 보이네? 데려와. 죽여도 다시 살리면 되니까, 방법은 마음대로 해도 좋아.”
거인이 피칠갑을 잔뜩 한 얼굴에 웃음꽃을 피웠다. 이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환희란 말인가!
그렇게나 꿈꾸던 복수를 할 기회가 왔고, 일그러진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능력을 인정받고 신격까지 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당신의 뜻대로 하겠나이다!”
거인의 자기가 나타났던 입속으로 들어가 사라졌다. 인영은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씩 웃고는 제 왼손을 쳐다봤다.
엄지부터 소지까지.
다섯 손가락에 모두 같은 모양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 Võim on peopesaga (권능을 당신의 손안에)
여태까지 왔던 다섯 장난감들에게 얻은 트로피이자, 여태껏 모든 싸움에서 이겨왔다는 자랑스러운 훈장이었다.
‘이번에는 어떤 식으로 끝을 내볼까. 아쵸프무자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정말 궁금해.’
압도, 회유, 절망, 방치.
그 어느 방법이든 전부 매력적이었다. 인영은 즐거움에 몸을 떨며 어떤 방법이 좋을지 깊은 고민에 잠겼다.
☆ ☆ ☆
눈을 뜨자 반쯤 희석된 피가 흐르는 욕조가 보였다. 지훈은 그 안에서 알몸으로 뜨거운 물을 맞고 있었다.
‘시간이 하나도 지나지 않은 건가.’
아쵸프무자의 차원에서 꽤 오랜 시간을 지낸 것 같았음에도, 실제로는 겨우 몇 초 정도 지난 게 다인 모양이었다.
솨아아아아 -
따뜻한 물을 맞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참 내 인생도 빌어먹게 기구하군.’
처음에는 반지의 힘을 이용해 돈을 벌 생각만 했다. 생활이 조금 더 편해지면, 은퇴해서 하고 싶은 일이나 하며 살고 싶었다.
하지만 소중한 사람들이 위협당한 순간 모든 게 달라졌다.
돈을 벌려는 이유, 명예를 가지고 싶은 이유.
둘 다 간단했다.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서였다.
처음에는 그저 지현을 치료할 돈만 있으면 됐지만, 더 나아가 더 좋은 집, 더 윤택한 생활이 필요했다.
‘아픈 건 나 혼자면 충분하다. 그 고통을 내 동생에게, 내 여자한테 겪게 할 수는 없다.’
가장. 지훈은 가장이었다.
빌어먹을 하즈무포카가 포탈을 열어 부모님이 살해당했을 때부터 그랬고, 지현이 삐뚤어지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랬다.
무슨 짓을 해서든 소중한 사람들을 지켜야 했다.
그 길에 흑막이든, 신이든 뭐든 간에 막아서는 건 모조리 처죽이고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눈을 꾹 감고 다짐했다. 힘든 길이라고 한들 반드시 뚫고 나가야 했다. 진실을 들은 순간 이미 도망칠 수 없었다.
도망친다고 한들 어느 순간 갑자기 나타나 모든 평화를 뒤틀어 버리겠지. 파이로가 그랬던 것처럼. 아니 그보다 더 한 일이 일어날지도 몰랐다.
아드득!
제 손으로 죽여버린 상대인데도 아직까지 이가 갈렸다.
애써 분노를 털어내고는 하던 작업을 마저 했다.
‘이능 선택, 위기대비.’
- 반영되었습니다. 위기대비 E(+1) = > D(+1)등급
이후 위기 대비는 집중 이능으로 집어넣었다. 이로써 예상치 못한 위기가 오면 자동적으로 시간이 느려지리라.
‘나중에 마력 부여나 주문 주입과도 연동될지도 모른다. 이에 대해선 더 연구가 필요하다.’
다음은 종족 변이 포인트였지만, 이는 보류했다.
설명을 들어보니 원하는 초기 변이까지 선택할 수 있었지만, 섣불리 선택했다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널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함을 위해 인간임을 포기하는가, 아니면 강함을 포기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남기던가에 대한 선택인가.’
인육까지 먹은 주제에 인간성 운운하는 게 우습긴 했지만, 그래도 정작 선택의 순간에 오니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으로 평생을 살아왔는데, 순간의 선택으로 인간임을 포기한다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문제였다.
‘피곤하다, 이제 그만하고 쉬자.’
애벌빨래 한 옷들을 챙기고는, 침대에 가서 누웠다.
눈을 감자 아쵸프무자가 한 말이 떠올랐다.
- 머지않아 하즈무포카가 손을 쓸 거야. 때가 되면 연락할게. 그동안 경계하고 있어.
그 외에도 최종 목적은 하즈무포카의 제거였다. 총으로 쏴서 죽일 수 있다면 쉬웠지만, 안타깝게도 그건 불가능했다.
- 본디 신은 제 영혼이 묶여있는 차원이 아니면 죽지 않아. 인간의 모습으로 현신한다면 여러 방법으로 제압할 수는 있겠지만, 무슨 짓을 해도 다시 자기 차원으로 돌아가 버려.
완벽하게 마무리를 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하즈무포카의 차원에 가야 한다는 말이었다.
적의 홈플레이스에서 싸운다는 사실은 둘째 치고, 거기까지 어떻게 가냐는 질문에 아쵸프무자는 씩 웃기만 했다.
- 이미 재료는 거의 다 모아놨어.
러시아 하수도에서 얻은 점프 잼. (확보)
이는 차원 여행자들의 성물로 원하는 차원으로 이동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기쉬(차원 여행자)가 아닌 타종족이 사용 시 일회용이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FS 유적에서 건네받은 기록. (확보)
아쵸프무자는 그간 일어났던 일들을 전부 파악하고 있지만, 반지 사용자(지훈)은 아니었다.
이에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과 하즈무포카와 싸웠던 경험이 있는 FS들의 기록이 필요했다.
BOSA의 식육 진화 연구 자료. (확보)
이는 능력이 부족한 지훈에게 필요했던 수단으로, 적 각성자를 잡아먹음으로써 그 능력을 더 올릴 수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아쵸프무자가 직접 개량해서 건네줄 생각이었지만, 일이 꼬여버린 바람에 지훈은 이미 흡입 변이를 획득했다.
하즈무포카에게 가기 위한 점프 잼을 확보했음은 물론, 그 외 부차적인 도구들 역시 모조리 확보했다.
아무래도 아쵸프무자가 지훈의 존재를 숨겼기에, 별다른 방해 없어 가능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아직 못 모은 게 하나 있지.’
- 하즈무포카의 하수인이 필요해.
비록 아쵸프무자가 하즈무포카와 동등한 신격을 가진 신이라고 한들, 다른 신의 고향 차원에까지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주머니 차원이야 어디까지나 하즈무포카의 ‘소유물’이니 이동이 가능했지만, 하즈무포카의 고향 차원은 소유물이 아니라 태반이라도 봐야 옳았다.
신 본인이 원한다면 근원을 제외한 그 어느 방문자라도 거절할 수 있었다.
- 아니 그럼 어떻게 뚫으라고?
이에 아쵸프무자의 대답은 바로 ‘하수인’이었다.
하즈무포카는 제 하수인들을 복속시키기 위해 본인의 권능을 아주 미량일지라 할지라도 나눠줬다. 까닭에 그 하수인을 제압한 뒤, BOSA에서 얻은 연구로 흡입하면 됐다.
- 너는 그 하수인을 흡입함으로써 하즈무포카의 힘을 가질 수 있지. 그럼 진입할 수 있어.
‘당장 필요한 건 하즈무포카의 하수인인가.’
지구에서 만났던 거인 그리고 연구소에서 만났던 곤충.
둘 다 매우 강력하기 그지없는 상대였고 전적 역시 1전 1패였으나, 두렵거나 무섭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때는 졌지만, 지금은 이길 수 있다.’
이를 꽉 깨물었다.
☆ ☆ ☆
매일매일 벼르면서 컨디션을 조절했음에도, 딱히 별다른 위협은 보이질 않았다.
거인 역시 정면돌파를 함으로써 본인의 실력을 검증함은 물론 제 자존심을 바로 세우길 원했으므로 파이로 같은 비열한 짓은 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평화롭지만, 물밑으로는 엄청난 하드 트레이닝이 이어지길 이틀.
끼이익 -
지훈은 석중의 가게를 찾았다.
여전히 썩은 곰팡내와, 짙은 화약 냄새가 났다.
“여, 지후이. 거 뭔 일로 왔니? 썩은 고기는 없디.”
매번 그랬던 것처럼 석중이 이죽거렸다. 평소 같았으면 되로 받아쳐줬겠지만, 이번만큼은 웃음이 나왔다.
“미친 쓰애끼, 거 사람 잡아다 픽픽 죽이드마 드디어 맛이 갔디. 웃지 말라 병시야. 정 든디.”
“아버지, 어떻게 잘 계셨소?”
시간을 돌린 까닭에 석중과 지훈이 서로 속마음을 터놨던 건 없었던 일이 됐다. 까닭에 다시 한 번 감사 인사를 할 필요가 있었다.
“비, 빙시 쓰애끼가 지금 뭐래니? 누, 누가 네 애비니!”
석중이 제 마음을 꿰뚫려 당황했지만, 지훈은 당황하지 않고 큰절을 올렸다.
“고맙수다, 아버지. 다 죽어가던 거 거둬줘서 덕분에 이렇게 잘 컸소. 앞으로 볼 일 없을 것 같아서 인사드리러 왔소.”
석중은 조용히 큰절을 받고는 물었다.
“니 뭔 소리니. 혓바닥에 기름칠했니? 뭘 못 봐?”
대답하지 않고 가게 밖으로 나왔다. 피차 설명 따위 하지 않고 살아왔던 관계였다.
더도 덜도 말고 딱 이 정도가 적당했다.
‘더 엮이면 석중 할배도 위험하다. 여기서 끊자.’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이 이상하게 무거웠다.
☆ ☆ ☆
다음으로 시체 구덩이를 찾았다.
시간이 돌려짐에 따라 저번에 고문했던 일 역시 사라졌지만, 그럼에도 처리해야 할 문제가 남았기 때문이었다.
뻑!
물론, 가는 길에 스프리건 먼저 조져놨다.
“까, 까각!? 왜, 왜 그러시냐.”
“닥쳐 나무 새끼야. 너는 열 번 뒤져도 싸다.”
이후 주인에게 다가가 입 모양으로만 보여줬다.
- 파이로, 내가 죽였다.
생맥주를 내오던 주인의 손이 일순간 멈췄다가 움직였다.
“자기, 밖에 나가서 얘기할까? 여기선 좀 그런데.”
언젠가 시비 붙었던 취객들을 몰살시켰던 뒷마당에, 스토커와 지훈 둘이 마주 봤다.
“… 그게 자기였어?”
“아아. 설명을 길게는 못 해주지만, 내가 그랬다.”
“왜 그랬어? 지금 위쪽 난리 났어. 찾아다 죽여 버린다고.”
알고 있었다. 파이로는 언더 다크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만큼, 아마 벌집을 쑤신 꼴이 됐으리라.
“그래서 부탁할 게 있다. 잘 처리 좀 해 줘.”
정보만 있다면 혈혈단신으로 언더 다크 전체를 깨부술 자신이 있었지만, 지금 당장은 처리할 일이 있었다.
“아니, 자기…! 내가 아무리 잘났다지만, 이건….”
스토커의 말을 자르곤, 애정을 담아 어깨를 두드렸다.
“여태까지 챙겨줘서 고맙다. 좋아해 줬던 것도 고맙고. 이제 나 못 볼지도 몰라서, 마지막 인사 겸 부탁 좀 하러 왔다.”
스토커가 침묵했다.
지훈의 언행에서 짙은 다짐을 봤기 때문이었다.
“그래, 낭군 떠나보내는데 이 정도 못하겠니. 한 번 시도는 해보겠지만, 장담은 못 해. 최대한 막아볼게.”
“고맙다.”
악수를 권하자, 스토커가 지훈의 손을 꽉 잡았다.
“거치네, 아주 거칠어. 나는 손이 고운 남자가 좋은데.”
“걱정 마라. 손 거친 남자는 네가 싫댄다.”
피식 웃음이 나오며 분위기가 풀렸다. 이후 마지막 인사를 한 뒤 헤어졌다. 스토커는 멀어져 가는 지훈의 등을 보며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아쉽다, 내 남자로 만들고 싶었는데. 뭐 어쩌겠어, 날개 펼쳐서 떠난다는 데 잘라버릴 수는 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