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권능의 반지-155화 (155/173)

<추락하는 신과 신이 되어가는 인간.>

포탈 안으로 들어가자 진풍경이 펼쳐졌다.

사람의 무의식에 들어가기라도 한 듯 하늘에는 바다가 펼쳐져 있었고, 바닥에는 구름이 떠 있었다.

당장에라도 하늘 속으로 떨어져 내릴 것 같은 아찔한 착각도 잠시. 아쵸프무자가 손가락을 움직였다.

“külalislahkus.(접객.)”

우으으응 -

시야 끝에 블랙홀이 생기는가 싶더니 모든 풍경을 흡수, 머잖아 주변 풍경이 저택 안으로 변했다.

시계 장인의 집 같았다.

벽 대신 거대한 시계들이 늘어서 있었고, 심지어 바닥에도 타일 대신 사각 시계들이 박혀있었다.

째깍, 째깍, 째깍.

“aeg Stopp. (시간 정지.)”

시곗바늘 움직이는 소리가 뇌를 찌르듯이 시끄러운 가운데, 갑자기 소리가 뚝 끊겼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공기가 정체된 것 마냥 답답한 기분이 들었지만, 다행히 공기는 흐르는 듯 호흡에는 지장이 없었다.

아쵸프무자의 권유에 따라 자리에 앉았다.

“인간들은 이럴 때 뭘 마시더라?”

“어쭙잖은 인사치레 집어치워. 그럴 기분 아니다.”

“뭐 그렇다면야.”

아쵸프무자가 가볍게 고개만 까닥였다.

“그래서, 조금 전까지 내가 있던 차원이 어디지?”

“하즈무포카의 주머니 차원(포켓 디멘션)이야.”

주머니 차원.

언젠가 들어봤던 단어 같아 머리를 뒤져보자, 아쵸프무자가 ‘잡동사니 창고’라며 열었던 차원이 생각났다.

소인족이 아쵸프무자를 신으로 추앙하고, 길 잃은 인간이 마왕으로 군림하고 있던 기괴한 세계 말이다.

그 세계야 작고 아담해서 서 있기만 해도 세상의 끝이 보였지만, 이 세계는 어떻던가?

수없이 많은 국가가 개척을 시작했음에도, 아직도 끝없이 넓은 미개척지가 남아 있었다.

어이가 없는 내용에 얼굴만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그저 끝없는 시간을 달래기 위한 작은 놀이로 시작했지. 나와 하즈무포카가 같이 했어. 꼭 모래성을 만드는 것 같아서 즐거웠던 기억이 나네.”

아무것도 없는 주머니 속에 빛을 비추고, 흙을 채워 넣었다. 이후 바다도 만들었고, 산도 만들었으며, 그 안에 하즈무포카 본인의 상상력을 모조리 쏟아부었다.

재미있었다. 즐거웠다. 행복했다.

“정해진 수명 없이, 끝없는 시간 속을 헤매야 한다는 건 정말 끔찍한 일이지. 그런 의미에서 저 취미는 정말 부패 없이 썩어가던 생활 속에서 아주 큰 활력소가 됐어.”

그러던 와중 두 신에게 문득 드는 의문이 하나 있었다.

- 너무 심심하지 않아?

- 그러게. 기껏 다 만들었는데 고요하기만 하네.

아무런 생명체 없이 비바람만 부는 세계.

만들 때는 즐거웠고, 굽어볼 때도 행복했지만 정작 다 만들고 나자 쓸쓸함만 남아있었다. 이에 하즈무포카가 말했다.

- 생명체를 집어넣자.

아쵸프무자와 하즈무포카의 권능은 생명 창조와는 거리가 멀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만들 수 있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영혼 없는 빈 껍데기를 만드는 게 다였다.

결국, 어딘가에서 데려와야 한다는 얘기였다.

이에 하즈무포카가 맨 처음으로 본인의 신도들을 데려왔다. 이들이 바로 FS. 훗날 첫 번째 자손, 개척자로 불리는 이들이었다.

- 신의 뜻에 따르겠나이다!

이들은 신탁에 거룩한 눈물을 흘리며 기꺼이 이주했다.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모든 게 순조로웠고, 평화로웠다.

FS는 신이 내려준 토지와 하늘을 오염시키지 않고 잘 적응했으며, 하즈무포카와 아쵸프무자는 그런 그들을 너그럽게 굽어봤다.

“개미를 지켜보는 느낌이었어. 난 여태까지 내 신도들을 보살피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자세하게 쳐다본 건 처음이었거든.”

도시를 만들고, 사회를 만들고. 본인이 만들어준 세계와 융합되어 가는 작은 존재들이 너무나도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하즈무포카는 싫증을 내기 시작했어. 단 하나의 종족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던 거지. 나는 반대했지만, 막무가내였어.”

그래서 다른 종족들을 데려오기 시작했다. 본인의 신도도 아닌 거의 반강제적 납치였다. 그렇게 주머니 차원에 리자드맨이 생겨났다.

하즈무포카 입장에서는 즐겁고 재미있을지는 몰랐으나, FS들에게 있어 리자드맨의 출현은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하즈무포카, 아쵸프무자 둘에게 아무런 계시나 신탁을 받지 않은 리자드맨들은 마구잡이로 세계를 더럽혔고, FS들과 전쟁을 벌였다.

결과는 당연히 FS들의 압승이었다.

우월한 과학기술을 등에 업은 FS들은 순식간에 리자드맨을 제압했지만, 이는 하즈무포카가 원하는 결과가 아니었다.

- 싸움은 일방적이면 재미없잖아? 내 힘을 빌려줄게. 네게 신에 준하는 존재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줄게.

그렇게 각성자가 등장했다. 커다란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마땅한 이유가 필요했던 것도 아니었다.

지루함.

겨우 지루함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그깟 지루함 때문에 이 모든 일이 벌어진 거였고, 수없이 많은 존재들이 고향을 잃고 방황했다.

‘뭐 이런 병신같은 경우가 다….’

이에 분노가 솟다 못해 어이가 없어졌다. 하지만 일단은 더 들어봐야 할 정보가 많았기에 입을 다물었다.

각성자를 앞세운 리자드맨들에 의해 FS는 멸망했다.

마지막 남은 하나가 하즈무포카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죽는 순간에도, 하즈무포카는 그저 재밌다는 듯 지켜만 봤다.

결국, 주머니 차원에는 리자드 맨만 남게 됐고 하즈무포카는 금세 또 싫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또다시 새로운 종족을 불러들였다.

이번에는 소규모 납치가 아닌, 대규모 차원 접붙이기를 통해 거대한 포탈을 세계 곳곳에 열어버렸다. 여러 종족을 대상으로 주머니 차원 곳곳에 동시에 말이다.

지옥도가 펼쳐졌다.

하즈무포카가 내려 준 각성을 가지고 있는 리자드맨들이 타 종족을 일방적으로 학살했고, 노예로 삼았다.

하즈무포카는 이번엔 새로운 종족들에게 각성을 부여했다.

- 싸워라, 죽여라. 내가 만든 세상을 아주 역동적이고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변덕의 세계로 만들어라! 이 어찌 즐겁지 아니할 수 있던가!

하즈무포카는 변덕을 부리는 수준이 아닌, 광기를 품기 시작했다. 이에 아쵸프무자는 말리기 시작했으나, 하즈무포카는 이미 선을 너머 있었다.

- 시끄러워! 내 차원이고, 내가 만든 세상이야!

같이 시작했더라도 차원 자체는 하즈무포카의 소유였다. 결국, 하즈무포카는 아쵸프무자가 본인의 차원에 직접적인 개입을 할 수 없게 막아버렸다.

막아서는 존재가 없어지자, 하즈무포카는 브레이크가 고장 난 트럭처럼 파멸을 향해 질주했다.

- 아예 전부 다 동등하게 붙어 봐. 각성도, 마법도 모조리 줄게. 누가 살아남나 보자.

그렇게 수없이 많은 종족이, 세대가 스쳐 지나갔다.

말리고 싶었던 아쵸프무자도 그냥 눈을 감고 돌아섰다.

간혹 무한한 시간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미쳐버리는 신이 몇몇 있었기에, 하즈무포카도 그렇게 됐다고 생각했다.

“언젠간 돌아오겠지, 한때의 방황이겠지 생각했어. 그렇게 셀 수 없을 정도로 긴 시간이 흘렀지. 그러다 문득 하즈무포카에게 연락이 왔어.”

- 이거 봐, 아쵸프무자. 내가 신을 만들었어.

주머니 차원을 평정한 존재.

S등급에 도달한 각성자는, 말 그대로 주머니 차원의 신이 되었다. 비록 반쪽짜리라고 한들, 제대로 신격을 얻어 권능을 부릴 수 있는 존재 말이다.

아쵸프무자는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느꼈다.

생명체를 본인이 소유한 차원에 집어넣고 지켜보는 것까지는 괜찮았지만, 신을 만든다는 건 금기였다.

신은 어디까지나 모든 것의 근원에서 태어나는 거였고, 제 수명이 다하면 다시 근원으로 돌아가는 존재였다.

근원이 아니면 잉태할 수 없는 ‘신’이라는 존재를 어찌 감히 직접 만든단 말인가?

심지어는 아예 새로운 종을 창조하기 위해 기존 종이 어느 정도 힘을 얻게 되면 강제로 새로운 종족이 되게끔 만들었다.

“신을 포함한 모든 존재는 근원이 잉태하고, 죽어서 다시 근원으로 돌아가. 새로운 종족의 탄생 역시 같지. 하지만 하즈무포카는 그 수레바퀴를, 인과율을 깨부쉈어.”

새로운 종족과 그 종족의 유일신.

말로는 간단하지만, 굉장히 중대한 문제였다.

새로운 종족과 그 종족의 유일신을 창조.

제아무리 반쪽짜리라고 한들, 이는 근원을 뒤흔드는 일이었고, 신의 근본을 흐리게 만드는 일이었으며, 모두 정해져 있던 인과율을 비트는 일이었다.

다음부터는 어느 정도 짐작했던 내용이 흘러나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주머니 차원의 시간을 비틀어 최대한 참변을 막는 수밖에 없었어.”

하지만 다른 신이 소유한 차원에서는 아쵸프무자 본연의 힘을 낼 수 없었다.

결국, 할 수 있는 거라곤 시간을 돌리고, 돌리고, 또 돌려가며 이 참변을 어떻게 하면 막을 수 있는지 모든 경우의 수를 시도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강력한 과학기술과 투시 그리고 정신 감응 능력을 갖춘 FS들로 참변을 막으려 했으나, 하즈무포카의 광기 앞에선 모두 무용지물이었다.

다음에는 리자드 맨으로, 그다음에는 또 다른 종족으로. 그렇게 억겁의 시간 동안 시간을 뒤틀어가며 싸웠지만, 모두 실패했다.

괴물을 잡기 위해선 본인도 괴물이 돼야 한다고 했던가?

하즈무포카의 광기를 막기 위해서 아쵸프무자는 긴 시간 동안 공방에 들어가 한 물건을 만들어냈다.

하즈무포카가 만든 각성 시스템을 제어할 수 있는 반지이자, 더 나아가 신이 될 수 있는 반지. 바로 권능의 반지였다.

“하즈무포카는 주머니 차원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전부 오락이라고 생각해서. 그래서 내가 제안했지, 한 판 붙자고.”

- 재미있는 물건을 만들었는데, 한 번 실험해 보고 싶어. 네 차원에 있는 신들과 내가 만들어낸 신. 둘 중 누가 더 강력한지 겨뤄보고 싶지 않아?

본디 신들은 본인의 창조물에 대해 무한한 자긍심을 가지고 있기 마련. 까닭에 저 제안은 굉장히 도발적이었고, 하즈무포카는 이에 바로 승낙했다.

- 좋아. 과연 네 장난감이 내 정교한 세상을 박살낼 수 있을 거라고 봐? 아닐걸.

- 내기할래?

그렇게 이 모든 일이 시작됐다.

아쵸프무자는 주머니 차원 전체를 얻고 싶다고 말했고, 하즈무포카는 아쵸프무자의 수없이 많은 아티펙트들을 원했다.

이에 따라 룰이 만들어졌고, 둘 중 하나가 포기하기 전까지는 끝이 나지 않는 억겁의 싸움이 개전됐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했지. 강한 무력을 가진 존재는 하즈무포카에게 회유되어 그의 편으로 돌아섰지. 그래서 이블 포인트를 만들었어. 하즈무포카에게 회유되지 않을 강인한 정신과, 깨끗한 마음을 가진 존재가 필요했거든.”

그다음부터는 반복이었다.

반지 사용자를 정하고, 키워서 하즈무포카에게 보냈다.

실패하면 다음 사용자를 정했고, 또 보냈다. 무한히 시간을 돌려가며 시간이 흘렀고, 아쵸프무자도 지치기 시작했다.

무리한 도전이었던 걸까, 그냥 아티펙트를 내어주고 포기할까 싶은 생각이 드는 찰나…

돌려놨던 시간 속에서 예상치 못한 변수가 끼어들었다.

“네가 반지를 찾았어.”

강하지도 않았고, 깨끗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흥미가 가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믿어볼까. 어차피 포기할 거, 마지막으로 무리한 수를 한 번 둬볼까 싶기도 했지.”

긴 얘기가 끝나자 아쵸프무자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우습지?”

“존나.”

하등 종족에게 비웃음을 샀음에도, 아쵸프무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픽 웃어넘겼다. 아마 본인도 본인이 우습다 못해 바보 같은 모양이었다.

“결국, 이 모든 일이 변덕으로 일어난 일이군.”

필연적인 것도 아니고, 꼭 필요한 이유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겨우 그까짓 신의 지루함과 변덕, 그따위 일들로 모든 일이 벌어졌다.

포탈이 열리고,

몬스터가 침공하고,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강제로 개척단에 합류하고,

꿈을 찾았으나 시궁창에 박히고,

동생은 병에 걸려 산 채로 썩어가고,

지훈은 죽지 못해 하루하루 뒷골목을 돌아다녔다.

이 모든 일이 겨우 ‘변덕’ 때문에 일어났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분노와 증오 그리고 온갖 더러운 감정들이 뒤섞인 어두운 감정이 끓어올랐다.

아무리 뱉어내고 싶어도, 토해내고 싶어도 절대로 없앨 수 없는 감정의 제일 밑바닥에서 올라온 순수한 증오.

그 증오가 하즈무포카에게 향했다.

“신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 우리는 신이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너희야말로 벌레만도 못한 새끼들이다.”

인간이 신의 권능을 얻어가고 있을 때, 정작 그 위에 있던 신들은 날개가 썩어 바닥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누가 신이고, 누가 하등 종족인지 알 수 없는 더러운 시궁창 오물을 잔뜩 뒤집어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진실을 알게 된 소감이 어때?”

“나발이고 하즈무포카 멱이나 따러 가지.”

소감? 그런 건 없었다.

좆이나 까라지.

“내 인생 망친 녀석이 아직 저 위에서 내려다보며 실실 쪼개고 있다고 생각하니 오장육부가 뒤틀리는군.”

아쵸프무자가 씩 웃었다.

“가자. 끝을 보러. 아마 지금부터 더 힘들어질 거야. 네가 진실을 안 이상 하즈무포카도 적극적으로 방해해 올 거고.”

진실을 알려주지 않은 이유이자, 아쵸프무자가 지훈의 존재를 계속해서 숨긴 이유이기도 했다.

덜 여문 지훈이 하즈무포카의 하수인들과 만나면 일방적으로 살해당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거친 가시밭길이라는 뜻이었음에도, 지훈은 도리어 자신감에 찬 웃음을 지었다.

“그렇지 않아도 찾아가려고 했는데, 수고를 덜겠군.”

과거의 지훈이라면 속절없이 당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제 공수교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