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권능의 반지-149화 (149/173)

<수호자와 증표>

워낙 고생을 많이 한지라 며칠 정도 더 쉬었다.

부상과 정신적인 피로가 다 풀리자 일행은 아티펙트를 감정하기 위해 서구에 있는 감정소로 향했다.

먼저 도착했기에 적당히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니, 저 멀리서 나머지 셋이 걸어왔다.

“뭐 한다고 같이 와?”

민우와 가벡은 같이 산다고 쳐도 칼콘은 아니다. 집이 아예 동구인지라 만나기도 어려운데 어쩌다 같이 왔을까?

“오래간만에 다 같이 운동 좀 했어.”

가벡은 칼콘과 한 판 붙었는지 팔에 멍이 들어있었다. 뭔가 싶어 자세히 보니 쇠사슬 자국이었다.

‘이번에도 쇠사슬로 묶고 조졌군.’

칼콘은 전직 카즈가쉬 클랜의 방패병이었다. 그리고 그 방패병의 무장은 거대한 가시 방패와 모닝스타였다.

방패로 적의 공격을 모조리 막아내며 전진한 뒤 모닝스타를 이용해 적을 타격하거나, 움직임을 묶어 질질 끌어왔다.

그렇게 접근전이 시작되면 일방적인 폭행이 이어진다.

무기는 모닝스타에 묶여 쓸 수 없으며, 질질 끌려가면 가시 방패에 짓눌려 피떡이 됐다.

어쩔 수 없이 힘겨루기를 해야 했는데, 칼콘의 종족은 중형종 중 근력이 둘째가면 서러울 정도로 강한 오크였다.

‘언제 봐도 더러울 정도로 강력한 근접전 능력이다.’

언젠가 한 번 당해봤기에 잘 알 수 있었다.

당시에는 단순 훈련이었기에 방패에 가시가 박혀있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맞을 때마다 뼈마디가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민우는 뭐했냐? 주먹다짐하진 않았을 거 아냐.”

해봐야 일방적으로 맞을 게 뻔하다.

“그냥 트레드밀 좀 뛰고 웨이트 했어요.”

아마 장비 무게를 감당하기 위한 기초 체력 훈련이리라. 기특하다고 칭찬해 주고는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아, 김지훈, 우민우 고객님. 어서 오세요.”

주기적으로 등급 높은 아이템을 감정했기 때문일까?

점원이 일행을 알아보고 버선발로 뛰어와 인사했다.

부담스러웠기에 그런 거 하지 말라고 얘기한 뒤, 바로 매대로 향했다.

“감정 스크롤 4개 주쇼.”

점원은 잠시 갸웃거리다 물었다.

“고등급 아티펙트는 스크롤보다 감정실에서 직접 하시는 쪽이 훨씬 좋습니다. 본사 DB(데이터베이스)와 연결돼서 번역의 질이 훨씬 더 좋거든요.”

맞는 말이었고, 저게 당연한 절차였으나 무시했다.

어차피 고대종의 언어를 아는 지훈에게 있어서는 번역의 질 따위 알 바 아니다. 원문도 원어민처럼 읽는데 그깟 번역이 뭐가 대수란 말인가.

단지 원문이 많이 나오거나 마법 관련 아티펙트가 나오면 아이덴티티 측에서 들러붙었기에 귀찮았을 뿐이었다.

“됐고, 그냥 스크롤로 주쇼.”

환율 적용, 개당 93만 원에 4개 구입했다.

감정을 위해 으슥한 곳을 찾았다. 잠시 둘러보니, 굳이 멀리 갈 것 없이 빌딩 사이에 있는 좁은 공간이 괜찮아 보였다.

안에는 딱 봐도 갓 성년이 되어 봄 직한 양아치 여럿이 모여앉아 까트를 피우고 있었다.

그 와중에 후광을 낀 인영 넷이 나타나자, 영 불편했는지 공격적인 언사를 보였다.

“아… 뭐야, 또. 뒤지기 싫으면 꺼져.”

아마 후광 때문에 실루엣만 보인 모양이었다.

때리거나 욕할 것도 없이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니, 양아치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오, 오빠… 오크랑 버그베어잖아… 그, 그냥 가자.”

까트를 피우던 한 여자가 움찔거렸다.

최근 들어서는 뒷골목에서 이종족이 인간 여자를 대상으로 무참한 짓을 벌이는 포르노가 나돌기도 했다. 실제로도 가끔 인간 거주지 내에서 사고를 치는 이종족이 있었다.

여자를 필두로 하나둘씩 자리를 떴다.

‘확실히 얘네 끼고 다니면 편하네.’

정작 제일 위험한 인물은 지훈이었으나, 아무래도 외적인 임펙트가 약했기에 잦은 시비에 휘말렸다.

반면 가벡과 칼콘을 옆에 두면 굳이 말하거나 행동을 할 필요도 없이 다들 꼬리를 말고 도망쳤다.

그도 그럴 것이 전투 종족 자체가 워낙 호전적이고 제압해도 나중에 보복을 해오기에 귀찮은 일이 많았다.

술 먹다가 시비 붙은 거로 살인은 물론, 숫자를 앞세워 제압해도 추후 밤길에 ‘너는 내 명예를 더럽혔다!’라며 암습을 걸어온다.

한 마디로 그냥 피하는 게 제일이었다.

압도적인 무력으로 짓누르면 모를까, 전투종족은 똥이었다. 그것도 아주 푸짐하고 묵직하기까지 한 더러운 똥.

“칼콘 물건 먼저 시작한다. 식별.”

스크롤을 쫙 펴며 칼콘의 방패를 쳐다봤다.

허공에 정보가 떠올랐다.

[수호자]

종류 : 방패

등급 : A

재질 : 칼시콥신의 비늘, 뼈, 순막 그리고 영혼.

나는 계약에 따라 죽어서도 너와 함께하겠다.

우리는 실패했고, 또한 농락당했다. 하즈무포카가 약속했던 낙원은 그 어디에 없었다. 이에 나는 분노하고, 또 분노했다.

그럼에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지고의 세월을 견뎌 마법을 깨닫고,

지고의 세월을 견뎌 현자의 칭호를 얻었으며,

지고의 세월을 견뎌 일족의 수호자가 되었으나…

모두 허사였다.

우리 일족이 하즈무포카에게 실패작이라는 이유로 버려졌듯, 나 역시 똑같은 실패작이었을 뿐이었다.

무슨 짓을 해도 신의 권능을 가진 그를 이길 수는 없었다.

네가 신들의 싸움에 이용되는 장기 말이라도 상관없다.

하즈무포카의 계획에 아주 작은 틈이라도 만들 수 있다면, 아주 조금이라도 상처를 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겠다.

까닭에 나는 너와 계약했고, 나의 목숨을 바치겠다.

이 방패의 고정쇠는 나의 눈을 덮은 순막으로 만들었고,

이 방패의 발동 매개체는 나의 비늘로 만들었으며,

이 방패의 발현체는 나의 뼈를 깎아 만들었다.

나는 오로지 우리 일족의 구원을 위해, 하즈무포카의 몰락을 위해 눈을 뽑는 고통을, 비늘을 뜯는 고통을, 뼈를 깎는 고통을 견뎠다.

그 고통에 걸맞은 성공이 있기를 염원하겠다.

가벡과 민우는 저 내용을 보더니 얼굴을 찌푸렸다.

모든 내용이 고대어로 나왔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저 칼콘과 지훈만이 모든 내용을 알아볼 수 있었다.

“사연이 많은 물건이네.”

“아아.”

이 방패는 업을 짊어지는 자처럼, 몰락한 일족의 순례자의 영혼이 담긴 물건이었다.

칼콘은 양손으로 방패를 꽉 쥠으로써 죽어서도 투사로 남은 존재에게 경의를 표했다.

“마음에 드는 모양이지?”

“한 종족의 존엄이자, 한 시대를 평정한 영웅의 기백이 담긴 유물이잖아. 정말 소중한 물건이라고 생각해.”

그런 존재에게 이런 아이템을 받아 낸 ‘두 번째 반지 사용자’에 대한 궁금증이 잠시 솟았다.

- 선임자들은 내가 직접 선택했어.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지니고 있음은 물론, 그 신념을 굽히지 않을 수 있는 무력까지 가진 존재들. 하지만 넌 그들과 달랐지.

‘아쵸프무자는 나를 보고 독특하다고 말했었다.’

이전 사용자들을 전부 아쵸프무자가 직접 식별, 선택했다면 지훈은 본인이 직접 반지 그리고 아쵸프무자를 선택했다.

선임자이자, 이전 반지 사용자들은 아쵸프무자가 직접 선택한 만큼, 엄청난 무력을 지닌 사람이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모두 실패했고, 죽었다.’

정보를 얻어 갈수록, 아쵸프무자의 계획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임무가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특히 그중에서도 하즈무포카의 방해가 문제였다.

단순 임무만 해결하는 것도 힘든데 엄청나게 강력한 방해꾼까지 낀다? 악몽이었다.

‘하지만 아쵸프무자도 생각이 없지는 않을 거다. 여러 번 되풀이하면서까지 이루려고 했던 업적이다.’

애써 불안감을 떨쳐냈다. 실제로도 의뢰를 해결할 때마다 엄청난 장비들을 제공하지 않았던가?

일단 지금 할 일은 고민하는 게 아닌 힘을 기르는 거였다.

“식별.”

스크롤을 쫙 펴며 목걸이에 집중했다.

세공 없는 얇은 사슬 목걸이에 좌측 상단이 기묘하게 일그러진 불꽃 펜던트가 달려있었다. 그 모습이 꼭 아쵸프무자를 닮은 것 같았다.

[아쵸프무자의 증표]

종류 : 목걸이

등급 : A+ 등급

재질 : 마력으로 구성된 물품 (아쵸프무자에 준하는 신격을 가진 존재 혹은 강력한 마법사가 간섭 시 파괴될 수 있다.)

마력 + 20

주문 변형 사용 가능.

기도 시 신탁이 내려온다.

- 내가 너를 지켜보고 있음을 알라. -

퍽 짧고 간단한 설명이 아닐 수 없었다. 허례를 좋아하지 않는 자유로운 성격이 그대로 설명에 묻어났다.

‘진짜로 신이었나.’

사실 정황상 충분히 알 수 있는 사실이었지만 본인이 신에게 놀아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부정했었다.

하지만 이젠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가 있으니 그럴 수도 없었다. 지금 손에 들고 있는 물품은 분명 아끼는 신도 혹은 사도에게 줬던 물품이리라.

그만큼 아쵸프무자가 지훈을 신뢰하기 시작했다는 증거였으나, 딱히 기쁘다거나 만족감이 있지는 않았다.

첫 만남부터 서로 죽고 죽였던 사이가 아니던가?

지훈에게 있어서 아쵸프무자는 그저 반지 사용 대가로 일을 처리해 주는 존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세입자와 집주인 같은 관계였다.

‘어지간히 엄청난 물건이군.’

마력 +20이면 장착하는 순간 등급이 2개나 올라간다는 얘기였다. 뿐만 아니라 ‘주문 변형’이라는 것도 신경 쓰였다.

아무런 설명이 없어 아직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이 물건에 달려있다면 쓸모없는 능력은 아니었다.

확인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민우의 브로치를 식별했다.

“식별.”

[감정 실패]

감정 실패가 뜨는 경우는 크게 2가지로 볼 수 있다.

권능의 반지처럼 엄청난 물건이거나,

아니면 아예 아티펙트가 아니거나.

기타 스크롤 훼손 등의 문제도 있을 수 있었지만 열에 아홉 반은 분명 아티펙트가 아닌 경우였다.

“이건 아티펙트 아닌데?”

마법 물품일까 싶었다.

‘마력 감지 안경으로 한 번 살펴보면 되겠네.’

어디다가 뒀는지 기억을 핥다가 덜컥 멈췄다.

현재 마력 감지 안경은 연구 1동 창고에 있었다.

칼콘과 지훈은 각각 창고에 가서 장비를 챙겼으니 괜찮았지만, 민우는 살려오는 것도 힘들었기에 아예 장비 찾을 생각을 안 했던 것.

다시 가서 되찾아 올 수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깔끔하게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썅….’

굉장히 쓸 만한 물건이었기에 가슴이 쓰렸다.

그래도 되찾으러 갔다가 괜히 하즈무포카의 하수인을 만나는 것보단 나았을 거라 자위했다.

“음… 그럼 이건 어떤 물건인지 모른다는 말이군요.”

민우는 머리를 긁적이며 끙 소리를 냈다.

본인의 생명을 연장해 줄지도 모르는 물건이 뭔지도 모르는 꼴이니 당연했다.

“어쩔 수 없지 뭐. 힘내 임마.”

식별이 끝났기에 대로로 이동하며 가벼운 잡담을 나눴다. 누구 장비가 좋네 마네하고 있자니 가벡이 입을 열었다.

“그게 전부 이번 보상으로 받은 물건인가.”

“응, 아쵸프무자가 직접 줬어.”

가벡은 아쉽다는 듯 한숨을 내뱉었다.

“분명 보상을 줄 수 없다고 말하지 않았나.”

말했다. 그 이유로 가벡은 이번 임무에 불참했다.

“왜, 보상이 있다면 오려고?”

“당연하다. 그런 물건을 준다면 열 번도 더 가주지!”

야만 부족으로 지냈던 가벡인지라, A등급 아티펙트는 살면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으리라.

도시에 사는 지훈도 TV로만 봤던 물건이니 오죽했을까.

지훈은 가벡의 기회주의자 같은 모습을 보며 이죽거렸다.

돈 안 주는데 왜 목숨 안 거냐고 뭐라고 할 수는 없지만, 기분이 상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 몰라라 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보상 못 받았다고 후회한단 말인가?

“쌤통이네 새끼야, 쌤통.”

가벡도 본인의 선택으로 일어난 일임을 알았기에 부들부들 떨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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